해월의 뜨락/문학계 소식

간결한 시어 /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채현병 2011. 6. 20. 19:29

 

간결한 詩語...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원로시인 3인  ‘극서정 시집’ 동시 출간

문화일보 | 김영번기자 | 입력 2011.06.20 14:51

 

 한국문단의 원로 김종길(85) 시인을 비롯, 유안진(70)·오세영(69)씨가 '극서정(極抒情) 시집'을 동시에 출간했다. 김 시인의 '그것들', 유 시인의 '둥근 세모꼴', 오 시인의 '밤 하늘의 바둑판'이다.

 세 시인의 시집을 펴낸 서정시학 측은 "최근 국내 시단에 유행하고 있는 난해하고 실험적인 시의 유행을 반성하며 쉽고 간결한 를 지향하고자 극서정시 시리즈를 출간하고 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이에 걸맞게, 세 시인의 시집은 한결같이 담백하고 간결한 시편들로 가득하다.

예컨대 오 시인은 수록 시 '구름'에서 이렇게 읊었다.

 

 구름은  

 하늘 유리창을 닦는 걸레,

 쥐어짜면 주르르

 물이 흐른다.

 

 입김으로 훅 불어

 지우고 보고, 지우고

 다시 들여다보는 늙은 신의

 호기심어린 눈빛.

 

 마치 동시를 연상케 하는 시적 상상력이 돋보인다. 에둘러 말하지 않고, 자유롭게 펼쳐지는 시인의 상상력이 읽는 이로 하여금 슬며시 웃음 짓게 한다.

오 시인은 시집에 첫 번째로 실은 수록 시 ' 발자국'을 통해 자신의 시관(詩觀)을 밝혔다.

 

누가 시킨 운필(運筆)인가.

나 한 개 꿈꾸는 볼펜이 되어 눈밭에

또박또박

서정시 한 행을 써 내려간다.

 

미루나무 가지 끝에 앉아 졸고 있다가

문득

설해목(雪害木) 부러지는 소리에 눈을 뜬 한 마리,  까치

까악까악

낭랑한 목소리로 읊고 있다.

그 시 한 구절.

유 시인 역시 담백함과 간결함에서 전혀 뒤지지 않는다.

수록 시 '자랑거리'는 단 세 줄이다.

 

아기 안은 엄마를 구경하던 원숭이가

쪼르르 달려가더니

제 새끼를 안고 와 보여준다.

 

동물원 원숭이 우리에서 벌어지는 한 장면이 손에 잡힐 듯 그려져 있다. 시인은 오히려 인간을 구경하는 원숭이의 시각에서 시상을 떠올렸다. 새끼를 안고 와 보여주는 어미 원숭이의 자랑스런 눈망울이 선연하다.

유 시인은 시집에서 한 줄짜리 도 선보였다.

 

"서울 천리를 와서 가랑잎 하나 줍다"(시 '서울살이' 전문).

 

시인은 "이 외줄 시는 고 박목월 시인의 일행(一行)시집에 들어 있다"면서 "선생님께 시공부하던 대학 3~4학년 때 한 줄짜리 내 시가 무척 당돌하다고 여기실까봐 조마조마 가슴 조이던 내게 오히려 선생님의 일행시집에 넣고 싶다고 하셔서 무척 황송했다"고 털어놨다.

시집 '해거름 이삭줍기' 이후 3년 만에 신작 시집을 펴낸 김 시인은 "수록된 작품들은 세 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2008년 봄 이후의 것들"이라며 "이것이 내가 생전에 내는 마지막 시집이 아닐까 생각되지만 어디 두고 볼 일이다"고 담담하게 심사를 밝혔다.

 시인은 수록 시 '외등'에서 자신의 시관 및 어느덧 팔순을 넘긴 소회까지 털어놨다.

어두운 골목길을 밝히는

외등 불빛의 노오란 동그라미,

호젓하다 못해 외롭게까지 보인다.

 

그러나 어둠 속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겐,

그 불빛이 얼마나 따스해 보일 것인가.

두려움을 내몰고 아늑함을 안겨주는 것이니,

 

시(詩)도 외등 불빛 같은 것이나 아닐런지.

그 자체는 외롭고 슬프고 쓸쓸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다사롭게 감싸주니.

김영번기자 zero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