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결한 詩語...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원로시인 3인 ‘극서정 시집’ 동시 출간
문화일보 | 김영번기자 | 입력 2011.06.20 14:51
세 시인의 시집을 펴낸 서정시학 측은 "최근 국내 시단에 유행하고 있는 난해하고 실험적인 시의 유행을 반성하며 쉽고 간결한 시를 지향하고자 극서정시 시리즈를 출간하고 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이에 걸맞게, 세 시인의 시집은 한결같이 담백하고 간결한 시편들로 가득하다.
예컨대 오 시인은 수록 시 '구름'에서 이렇게 읊었다.
구름은
하늘 유리창을 닦는 걸레,
쥐어짜면 주르르
물이 흐른다.
입김으로 훅 불어
지우고 보고, 지우고
다시 들여다보는 늙은 신의
호기심어린 눈빛.
마치 동시를 연상케 하는 시적 상상력이 돋보인다. 에둘러 말하지 않고, 자유롭게 펼쳐지는 시인의 상상력이 읽는 이로 하여금 슬며시 웃음 짓게 한다.
오 시인은 시집에 첫 번째로 실은 수록 시 '눈 발자국'을 통해 자신의 시관(詩觀)을 밝혔다.
누가 시킨 운필(運筆)인가.
나 한 개 꿈꾸는 볼펜이 되어 눈밭에
또박또박
서정시 한 행을 써 내려간다.
미루나무 가지 끝에 앉아 졸고 있다가
문득
설해목(雪害木) 부러지는 소리에 눈을 뜬 한 마리, 까치
까악까악
낭랑한 목소리로 읊고 있다.
그 시 한 구절.
유 시인 역시 담백함과 간결함에서 전혀 뒤지지 않는다.
수록 시 '자랑거리'는 단 세 줄이다.
아기 안은 엄마를 구경하던 원숭이가
쪼르르 달려가더니
제 새끼를 안고 와 보여준다.
동물원 원숭이 우리에서 벌어지는 한 장면이 손에 잡힐 듯 그려져 있다. 시인은 오히려 인간을 구경하는 원숭이의 시각에서 시상을 떠올렸다. 새끼를 안고 와 보여주는 어미 원숭이의 자랑스런 눈망울이 선연하다.
유 시인은 시집에서 한 줄짜리 시도 선보였다.
"서울 천리를 와서 가랑잎 하나 줍다"(시 '서울살이' 전문).
시인은 "이 외줄 시는 고 박목월 시인의 일행(一行)시집에 들어 있다"면서 "선생님께 시공부하던 대학 3~4학년 때 한 줄짜리 내 시가 무척 당돌하다고 여기실까봐 조마조마 가슴 조이던 내게 오히려 선생님의 일행시집에 넣고 싶다고 하셔서 무척 황송했다"고 털어놨다.
시집 '해거름 이삭줍기' 이후 3년 만에 신작 시집을 펴낸 김 시인은 "수록된 작품들은 세 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2008년 봄 이후의 것들"이라며 "이것이 내가 생전에 내는 마지막 시집이 아닐까 생각되지만 어디 두고 볼 일이다"고 담담하게 심사를 밝혔다.
시인은 수록 시 '외등'에서 자신의 시관 및 어느덧 팔순을 넘긴 소회까지 털어놨다.
어두운 골목길을 밝히는
외등 불빛의 노오란 동그라미,
호젓하다 못해 외롭게까지 보인다.
그러나 어둠 속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겐,
그 불빛이 얼마나 따스해 보일 것인가.
두려움을 내몰고 아늑함을 안겨주는 것이니,
시(詩)도 외등 불빛 같은 것이나 아닐런지.
그 자체는 외롭고 슬프고 쓸쓸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다사롭게 감싸주니.
김영번기자 zeroki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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