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경계초소, 참전용사들의 군번줄로 만든 벤치, 이산가족의 편지를 담은 유리병, 그리고 철책이 갈라놓은 물줄기. ‘DMZ 가든’으로 영국 첼시 플라워쇼에서 금상을 수상한 황지해씨는 60년간 방치돼 원시림의 모습을 찾은 비무장지대의 자연을 통해 전쟁으로 받은 우리들의 상처를 치유하고자 했다. [사진 황지해씨]
황지해
영국 첼시 플라워쇼에서 금상을 수상한 황지해(36·환경미술가 그룹 뮴 대표) 씨는 23일 런던에서 상기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첼시 플라워쇼는 1827년 시작된 세계 최대의 정원 및 원예박람회다. 올해에는 22∼26일 열린다.
황씨는 이 박람회 쇼가든(200㎡ 대형 정원) 부문에 ‘침묵의 시간: 비무장지대 금지된 정원(Quiet Time: DMZ Forbidden Garden)’을 출품해 22일 금상을 수상했다. 쇼가든 부문에 한국인이 출품한 것은 처음이다. <본지 23일자 18·19면>
황씨는 지난해 아티즌 가든(20㎡ 규모 소형 정원) 부문에 ‘해우소: 마음을 비우다-한국의 전통 화장실’을 출품해 금상을 받기도 했다. 최고 경쟁 부문인 쇼가든 부문엔 토머스 호블린·조 톰슨 등 세계적 디자이너들의 16개 작품이 출품됐다.
황씨는 “그간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 정원이 인정받은 점이 가장 기쁘다. 우리가 가진 최고의 것들, 보이지 않는 가치를 끄집어내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DMZ 가든’은 지난 60년간 사람 손이 닿지 않은 비무장지대만의 원시적 감성을 전쟁의 상처와 그 치유라는 주제로 표현한 정원이다. 전쟁 당시 군인들의 피를 지혈했던 쑥, 배 아플 때 짜 마셨던 질경이, 대체 식량이 되어 준 머루·다래·냉이 등 우리 식물을 공수해 심었다.
또 한국 이산가족 500여 명으로부터 직접 받은 편지를 병에 담은 설치, 군복 단추 수 천 개로 만든 단추길, 영국 참전용사들의 이름을 점자로 새긴 군인식표 8000개로 만든 벤치 등이 정원 곳곳에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전쟁으로 정신·육체적 상처를 입은 사람들, 그리고 무명 혹은 잊혀져 가는 이름들을 기억하자는 의미를 담았다. 정원 복판에는 물줄기가 관통하고 있다.
“우리는 남북으로 나뉘어 있고, 이산가족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통해 하고 있지만 자연은 그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위대함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어요. 분단의 상징인 DMZ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라 생각합니다. 60년 전 불타버린 DMZ는 더 이상 폐허가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 지켜야 할,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공간이죠.”
영국 현지 반응도 뜨겁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남편 필립공은 전시장을 찾아 “작품이 담고 있는 메시지의 힘이 장엄하다”고 극찬했다. 일간지 더 타임스는 “철책과 초소로 꾸며진 생경한 모습의 이 작품이 한국의 분단 현실을 보여준다. 올해 여왕이 만나게 될 가장 독창적인 정원”이라고 소개했다.
황씨는 전남 곡성 출신이다. 지방대 서양화과를 나와 환경미술 현장에서 10여 년째 일하고 있다. 1년의 절반은 네덜란드·일본 등에서 활동한다. 이번 전시는 예산 부족으로 무산 위기에 놓였다가 광주광역시와 호반건설 등 지자체와 지역 기업의 후원으로 성사됐다.
◆첼시 플라워 쇼(Chelsea Flower Show)= 영국왕립원예학회(The Royal Horticultural Society)가 주관하는 꽃 축제. 1827년 시작, 매년 17만 명이 찾아온다. 정원 예술가들의 꿈의 무대로 통한다. 올해 500여 점이 출품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