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의 뜨락/주변 이야기

우덕순과 안중근

채현병 2014. 8. 5. 21:23

"안중근은 전보를 받고 8일 저녁에 돌아왔다.

이토 히로부미의 만주 방문 기사가 실린 신문을 내주니,

 기사를 읽고서는 일어나서 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우덕순 : "어떻게 하겠는가?"

 

안중근 : "가야지"

  

 우덕순 : "어디로?"

  

안중근 : "하얼빈으로 가야지"

 

(정경시의 신문에 대한 안응칠의 공술 1회, 1909년)

 

 

  

이렇게 해서 우덕순은

 안중근과 함께 이토히로부미를 죽이러 하얼빈으로 간다.

 

 

우덕순

 

충북 제천 출신

을사늑약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와

1908년 안중근과 함께 의병전쟁에 참전했고,

단지동맹을 결성했다.

 

당시에는 <대동공보>의 회계책임을 맡으면서

담배 가게로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이토가 만주에 온다는 사실을 확인한 안중근은

가장 먼저 우덕순을 떠올렸고,

함께 거사할 의향을 묻자

 

우덕순은 두말없이 동의했다. 

(안중근 평전)

 

 

 

멀고 험한 여행이 끝나고,

하얼빈에 도착한 두 남자는

이발을 하고 조력자 유동하와 함께

생의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사진을 찍었다.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이토를 기다리기로 했고

우덕순은 채가구에서 이토를 기다리기로 했다.

  

혼자 차가운 침상에 누워있던 안중근은

어떤 마음의 느낌이 생겨서

시를 하나 짓는다.

 

이날 우덕순도 시 하나를 지었다

 

 

<보구가>

 

만났도다 만났도다 너를 한번 만나고자

일평생에 원했지만 하상견지만야런고

너를 한 번 만나려고 수륙으로 기만 리를

혹은 윤선 혹은 화차 천신만고 거듭하여

 

중략

 

우리 민족 2000만을 멸망까지 시켜놓고

금수강산 삼천리를 소리 없이 뺏느라고

 

중략

 

네뿐인 줄 알지마라 너의 동포 5000만을

오늘부터 시작하여 하나둘씩 보는 대로

내 손으로 죽이리라

 

 

 

이토가 하얼빈으로 왔다.

 

절정의 사격술을 지닌 안중근이

권총 여섯 발을 쏘았는데 모두 명중했다.

상처를 극대화 시키는 치명적인 튜닝을 가해 총알에 십자가 모양이 박혀있다.

 

 

안중근과 우덕순은 체포되었다.

 

안중근은 동지들을 살리기 위해

모든 일을 자신이 구상하고 결행한 것이라고 답변했다.

 

  

일본 재판장 : 최후진술을 하라

 

 

 

우덕순 : "이토는 일본과 한국 사이에 장벽을 만든 사람이다.

내가 이 장벽을 없애버리려고 한 것은 전부터 갖고 있던 생각이었기 때문에

본 사건에 가담했던 것이다. 그 밖에 별 할말은 없다."

 

 

안중근 사형.

우덕순 징역 3년.

조도선 유동하 징역 1년 6개월.

 

 

우덕순은 출옥후 다시 하얼빈·치치하르·만주리 등 지역에서

교육·종교사업에 종사하면서 독립운동에 힘을 기울였으며,

해방후에는 흑룡강성(黑龍江省)의 한인민단위원장으로

 아들 대영과 함께 동포 피난민의 본국 귀국 수송을 돕는 일에 진력하였다.

(위키백과)

귀국후 1948년에는 대한국민당 최고위원으로 정치활동을 하면서

건국사업에 이바지하였고,  안중근의 추모사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생하자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9월 26일 전쟁 중 북한 인민군에 의해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만 74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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