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의 시조마루/시조평론

우리 선조들이 노래한 <이 가을의 시조>

채현병 2019. 7. 23. 10:21

                           우리 선조들이 노래한

                           이 가을의 시조

                                                                                                  海月 채현병

 

  예나 지금이나 문학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사람을 알기 위해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은 인간의 내재적 본성과 외형적 형상을 가장 잘 알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우리 곁에는 항상 누군가 있듯이 우리들 곁에는 문학이 있다.

  그러나 요즘 들어 우리 사회가 자연과학과 문명 위주의 사회로 변화되다보니, 문학 및 인문과학 분야가 많이 침체되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고전이라는 것, 특히 우리의 고전문학은 읽히지 않게 된지가 이미 오래전이다. 여기에는 우리 선조들이 즐겨 부르던 시조도 예외일 수 없다. 우리 선조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를 고시조라는 틀 속에 묶어 놓고, 어휘가 낯설고 어투가 고풍스럽다는 딱딱한 껍데기를 씌워서 그 내용의 올곧음 속에서의 유연함과 그 속에 담겨있는 절제미를 가려놓고 있다. 매우 안타까운 현실이다.

 

    1. 여말선초(麗末鮮初) 시대적 부름


  시조는 고려 후기에 비롯되었는데, 그 때의 시조작가들을 흔히 신흥사대부라고 부른다. 이들에게는 큰 고민이 있었다. 타락하고 부패한 고려왕조에 충성해야 하는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이방원과 정몽주변안렬의 유명한 대립도 그것을 반영하고 있다. 그 당시의 성실한 성리학자 목은(牧隱) 이색(李穡)도 고려왕조의 신하로써 최영과 함께 고려조에 충성을 바쳐야 한다는 명분과, 부패하고 무능한 고려왕조를 뒤엎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정도전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험하구나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 있어 갈 곳 몰라 하노라

 

  이 시조는 목은 이색(1326~1396)의 작품이다. 순수하게 자연을 소재로 한 노래로 생각할 수 있다. 눈이 하얗게 내린 골짜기에 하늘은 구름이 가득한데, 아직 겨울이 가지는 않았지만 어느 곳엔가는 향기를 머금은 매화가 이미 피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는다. 그러나 그곳이 어디인지를 몰라 홀로 서 있을 뿐, 갈 곳을 모른다는 것이다. 목은은 여말선초(麗末鮮初)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는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한 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조를 통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른다고 했다. 이후 목은은 이성계의 출사 종용을 끝내 거부하였다.


    2. 우리 선조들의 자연관


  한 때는 만주 땅까지도 영토로 삼아왔던 우리 선조들은 한반도를 터전으로 하여 이 지역의 땅과 하늘, 그리고 삼면의 바다를 자연환경으로 하여 맑은 물을 마시고 깨긋한 공기를 들이 쉬며 의식주에 필요란 물자를 이 땅에서 얻거나 생산하면서 자연과 일체가 되어 살아왔다. 이러는 가운데 천인의 삼재사상(三才思想)과 음양사상(陰陽思想), 빛과 물과 바람의 풍수사상(風水思想), 자연에 순응하면서 하늘을 섬기는 신선사상(神仙思想), 유교사상을 성리, 의리, 이기 등의 형이상학 체계로 해석하는 성리학(性理學) 등을 바탕으로 하여 생활하였다.

 

  조선 중기의 문인이며, 면양정가단 창설자이고 강호가도의 선구자인 송순(1493~ 1583)의 시조 한 수를 살펴보자.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 삼 간 지어내니

      나 한 간 달 한 간에 청풍 한 간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십년을 경영하여 삼 간 크기의 초가집 한 채를 마련했다. 그나마 두 간은 명월과 청풍에게 맡겨두고 나머지 한 간에 앉아있는 화자를 떠올려 보자. 어찌 보면 참으로 한심할 수 있으나 이 시조에서는 그런 가난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청풍과 명월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지만 아무나 갖지는 못한다. 부귀와 명예에 묻혀 욕심이 많은 사람, 일에 묻혀 너무 바쁜 사람, 현대문명에 찌들은 사람들은 청풍명월을 갖지 못한다. 화자는 대자연에 둘러싸여 청풍명월과 함께 오롯이 만족하고 있다.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매라

 

  이 시조는 성종임금의 형인 월산대군(1454~1488)의 작품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낚시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닐 수 있다. 낚싯대 바늘도 곧은 바늘이거나 혹은 아예 비늘이 없을 수 있다. 단지 화자는 가을 강과 수면과 달빛이 좋아서 배 위에 올랐을 뿐이다. 그리고 강상에서 낚시만 드리우다가 무심한 달빛을 한 배 가득히 싣고 돌아온다고 했다. 그의 가슴은 아무것도 욕심내는 것이 없었기에 이미 충만해져 있는 것이 아닐까?

 

      물은 거울이 되어 창 앞에 비꼈거늘

      산은 병풍이 되어 하늘 밖에 어리었네

      이중에 벗 삼은 것은 백구 외에 없어라


  이 시조는 조선 중기의 문인 곽기수(1549~1616)한벽당문집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한벽당이 90여세의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부안현감 관직을 버리고 고향 해미로 낙향하여 강호의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게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다. ‘江湖閑情 物我一體란 말을 떠올리게 하는 시조이다.

 

 

    3. 시조를 통해 본 우리 선조들의 가을 노래


      대추 볼 붉은 골에 밤은 어이 뜻드르며

      벼 벤 그루에 게는 어이 내리는가

      술 익자 체 장수 돌아가니 아니 먹고 어이리

 

  조선 초기의 명재상 황희(1363~1452)의 시조이다. 가을이 되어 대추가 뺨이 붉어지도록 익고, 알밤도 여물어 저절로 뚝 떨어지며, 추수를 마친 벼 그루터기에는 논게가 돌아다닌다. 이것들을 주워 담으면 좋은 안주거리가 되는데, 마침 술까지 익었다. 그래서 술을 거르려 하니 체가 없다. 이러할 때 체 장수가 왔다가니 금상첨화 아닌가. 이렇게 술을 먹기 위해 모든 것이 갖추어지니 아니 먹고 어쩌겠는가.

  술은 사람이 담그기에 술이 되지만, 발효되어 익는 것은 자연의 일이다. 술은 자연과 사람의 중간 매체 역할을 한다. 자연과 술과 사람을 매끄럽게 이어서 일정한 질서를 가질 때, 우리네 삶은 비로소 여유와 풍성함을 향유하는 것이 아닐까?

 

      수국(水國)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쪄있다

      넓은 바다 맑은 파도에 싫도록 놀아보자

      인간사 돌아다보니 멀수록 더욱 좋다

 

  이 시조는 조선 중기 문인 윤선도(1587~1671)어부사시사중 한 수이다. 윤선도는 정치적으로 열세였던 남인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런 그가 벼슬길에 올라 사류(당시 득세한 서인)의 타도를 주장한 것은 당연한 것일 수 있다. 그로 인해 귀양길에 올라 해남 보길도에 도착하여 넓디넓은 바다를 보았을 때 얼마나 시원했을까? 말조심 할 필요도 없었고 몸조심 할 필요도 없었다. 보길도는 참으로 물의 나라 수국이었다. 가슴을 부풀려 숨 한번 크게 몰아쉬고서 맑은 물속을 한없이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곳에서 인간 세상을 바라다보니 멀고 먼 나라 같아 더욱 좋았을 것이다.

 

      금잔에 가득한 술을 싫도록 기우리고

      취한 후 긴 노래에 즐거움이 끝이 없다

      아희야 석양이 진다 마라 달이 돋아 오노매라

 

   조선 중기 현종 때의 문인 정두경(1597~1673)의 시조이다. 풍년이 들어 온갖 시름을 덜어 낼 때, 그리운 벗을 만나 술잔을 기우리며 회포를 푸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곧 달이 돋아 오르니 석양이 진다한들 걱정하지 마라.

  이 시조는 풍류의 진수를 보는 것 같다. 풍류는 조건을 수반한다. 먼저 생활고에서 벗어나야 하고, 그 다음에는 속되지 않아야 한다. ‘장조금준(長照金樽)’이란 말이 있다. ‘금 술잔에 달빛이 길게 비춰 준다라는 뜻이다. 달은 수만 년, 수십만 년을 자리를 지키면서 차면 기울고, 기울면 또 차면서 인간사, 자연사를 다 비추어 주고 있다. 지금도 계속해서 하늘높이 둥둥 떠서 우리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 이유가 어둠 속에 있는 내 술잔을 환히 비추어주기 위한 것이라면 너무나 아전인수(我田引水)격일까.

 

      월정명(月正明) 월정명커늘 배를 저어 추강(秋江)에 드니

      물 아래 하늘이요 하늘 위에 달이로다

      선동(仙童)아 잠긴 달 건져라 완월장취(玩月長醉) 하리라

 

  이 시조는 청구영언 및 가곡원류에 수록되어 있는 작자 미상의 시조이다. 보름달이 정말로 밝고 또 밝으므로 배를 타고 저어가 가을 강 한가운데로 들어가니, 하늘 아래 물이요 물 아래 또 하늘이요, 물 속 그 하늘 위에 달이로다. 선동(사공), 물속에 잠긴 저 달을 건지려무나. 오래오래 달을 보며 즐기리라. 이 시조는 군더더기 말이 필요 없다. 읽는 순간 바로 아름다운 풍광이 선연히 떠오른다. 참으로 아름다운 시조이다. 그래서 예부터 우시조(羽時調)로 널리 사랑받아 왔는가 보다.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동풍(三月東風) 다 보내고

      낙목(落木) 한천(寒天)에 네 홀로 피엇는다

      아마도 오상고절(傲霜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

 

  이는 조선 후기 문신으로 시조의 주축을 평민층으로 옮기는 교량 역할을 한 이정보(1693~1766)의 시조로, 선비가 지켜야 할 지조와 절개를 사군자의 하나인 국화에 빗대어, 국화에 인격을 부여함으로써 친밀감을 드러냈다. 시조를 통하여 화자의 의지를 다진 작품이다.

 

      가을하늘 비 갠 빛을 드는 칼로 발라내어

      천은침(天銀針) 오색실로 수놓아 옷을 지어

      임 계신 구중궁궐에 드려볼까 하노라

 

  가곡원류에 수록된 작자 미상의 시조이다. 이 시조는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잘 나타내고 있다. 초장에서 비 갠 가을 하늘의 푸른빛을 잘 드는 칼로 잘라낸다 하여,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심정적으로 간절한 소망을 잘 드러냈다. 중장에선 천은침 오색실로 수를 놓아 임의 옷을 지어 화자의 간절한 마음을 드러내고, 종장에서 그 옷을 구중궁궐에 계신 임금님에게 드리겠노라고 다짐하여, 옷 짓는 정성에 충성심을 투영시켰다.

 

      이려도 태평성대(太平聖代) 저려도 성대(聖代)로다

      요지일월(堯之日月)이요 순지건곤(舜之乾坤)이라

      우리도 태평성대니 놀고 놀려 하노라

 

  이 시조는 조선 전기의 문신 성수침(1493~1564)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우리나라 전통성악의 하나인 가곡 41(남창 26, 여창 16)의 맨 마지막 노래이다. 노랫말의 시작을 태평성대(太平聖代)’로 하기 때문에 태평가(太平歌)’라 불리는 이 노래는 가곡 한바탕 중에 유일하게 남녀병창(男女竝唱)으로 노래하는 곡()이다.

  이리 해도 태평성대 저리 해도 태평성대, 여기도 태평성대 저기도 태평성대, 요임금 시대의 해와 달이요 순임금 시대의 하늘과 땅이라, 우리도 태평성대이니 마음껏 누려 즐기고 즐기리라.


  조선 후기 정조 때의 문인 이학규(1770~1835)는 자신의 시 感事’ 24장에서 누가 꽃 피고 달 밝은 밤을 아낀다고 하였는고. 시조 소리는 처량도 하구나.’ 라고 읊고, 그 주석에 시조는 또한 시절가(時節歌)라고 하는데, 모두 거리의 일상의 말로 되어 있고 느리게 부른다.’라고 했다.

  흥선 대원군(1820~1898)의 후원으로 가객 박효관(1800~1880)이 그의 제자 안민영과 함께 펴낸 歌曲源流에서 말하길 노래(가곡, 시조창)는 태평성세(太平聖世) 기상의 원류다. 뜻이 높고 속되지 않은 사람들이 짓고 불렀다.’라고 했다.

  시조는 성리학이라는 사상이 들어 있기도 하고, 자연에 대한 애착이 들어 있기도 하며, 삶에 대한 본질을 포착하여 그 애환을 담기도 함으로서 인생 전반을 소재로 한 생활시(生活詩)이다. 그러므로 시조를 통하여 우리 조상들의 생각을 새롭게 평가하고, 그것에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는 계기가 되어, 시조문화유산에 관심을 갖는 풍토가 조성되었으면 참으로 기쁘겠다. 앞으로 더 많은 신진 시조작가들에 의해 훌륭한 시조작품들이 쏟아져 나와 지구촌 구석구석에 보급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기대해 본다.


  

<참고문헌>

 • 장사운. 시조음악론. 서울대학교 출판부. 1973

 • 민경현. 한국정원문화/의장 및 기법론. 예경산업사. 1991

 • 김정배 외 46. 한국의 자연과 인간. 우리교육. 1997

 • 신연우. 자연 속의 시조/시조 속의 생활. 도서출판 이치. 2006

 • 김경배. 가곡보. 은하출판사. 2010

 • 김흥규 외 6. 고시조대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2


                                                                                                                        (2019. 7.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