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최초의 여류국창(女流國唱) 진채선(陳彩仙)
판소리의 대부 신재효로부터 판소리를 사사받은 수제자로서 우리 판소리의 여광대 효시인 진채선은 경복궁 낙성연 때 대원군에게 인정을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국창이 된 여성예술가의 큰 별이었다. 그는 1847(헌종 13)년 고창군 심원면 검당포에서 태어났다. 갸름한 얼굴이 퍽 고운데다 나긋나긋한 몸매로 춤 솜씨 또한 일품이며 목소리의 성량이 풍부하여 가창에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 났었다.
검당포에서 예순 아홉 때까지 살다 간 진채선의 이질녀인 김막례(1949년 당시 63세)의 실담과 고로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진채선의 집안은 무장고을에서 대대로 이름을 이어온 아전집안이었는데 그의 조부가 어려운 생활을 극복하기 위해 그 당시 천일염의 고장으로 이름난 검당포에 머물면서 날품을 팔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검당포에 살고 있던 과수댁 김당골과 살림을 차리게 되면서 이곳에 눌러 앉게 되었다 한다.
이와 같이 검당포의 세습무당인 김당골의 손녀로 태어나게 된 진채선은 그의 어머니까지도 성격적으로 노래에 취미가 더 있어 당골생활은 어설프게 이어오는 데 그쳤다고 한다.채선은 유년시절에 당골학습을 배우는 어머니를 따라 다니면서 등너머로 익힌 가창솜씨가 학습 선생에게 알려지게 되어 별도로 소리지도를 받게 된 것이 판소리 공부의 첫 인연이 된 셈이었는데 그의 노래솜씨는 근동에까지 자자하게 소문이 나서 처녀꼴이 날 때까지 어머니를 따라 큰 잔칫집의 소리판에 으레 얼굴을 내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무렵 고창읍내 신재효 부잣집에서 광대들을 길러내기 위해 널리 소리꾼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알려와 채선은 학습 선생을 다리 놓아 그 문하생으로 입적하게 되었다. 동리 신재효의 문하에는 원근으로부터 광대들을 비롯하여 남사당패거리와 기생 당골녀들 까지 수 십 명이나 모여 들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신 부잣집에는 그 당시 내 노라 하는 방짜광대들이 운집해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였고 당시 기생이나 당골들은 판소리와 가무시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능통해야만 대중을 이끄는 매력이 될 수 있었기에 이 같은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다.
그러나 여자로서 판소리를 부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동안 채선이 고향에서 학습 받은 것은 쉬운 민요나 창법이 다른 가곡의 겨우 어설픈 대목들을 부르는 정도였는데 이곳에 와보니 창법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처음부터 새로이 본격적인 판소리 학습을 공부해야 했다. 소리의 폭과 깊이가 짧고 단조로우며 서정적인 가곡을 부르는 데는 비단결 같이 곱고 맑은 창법이 필요하지만 극적인 효과를 수반하고 있는 판소리는 희노애락의 감정을 폭과 깊이가 긴 서슬있는 거센 창법으로 폭포수나 뇌성벽력들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었다.무쇠를 불과 물에 여러 차례 들어내고 무수히 두드려야 제대로 다져지듯이 판소리 창법의 목소리도 웨장목을 몇고비 넘기고서야 다듬어 지는 법.
진채선은 처녀와 뛰어난 미모의 잇점이 있어 다른 광대들 보다는 좋은 조건속에서 학습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날마다 동리선생의 연당집에서 당대의 판소리 대가인 김세종에게 바탕소리를 익혔으며 오랫동안 소리 방에 쳐 박혀 죽비를 두드리며 목에 피가 넘치도록 복습을 해냈다. 어느 때엔 목이 쉬고 부어 숨쉬기도 거북하여 지쳐버리기도 했으나 신재효선생의 최초의 여광대를 길러 내고자 하는 따뜻하고 넓은 인품과 첫 여광대가 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겠다는 그녀의 끈질긴 집념 속에서 그 어려운 고비들은 용케도 넘길 수 있었다. 바탕소리를 끝낸 진채선은 신재효에게 사설과 아니리, 너름새와 득음으로 짜여진 판소리의 이론적이고 음악적인 가르침을 받았다.
광대 차례로서 첫째는 인물이요, 둘째는 사설이요, 셋째는 득음이요, 넷째는 너름새라 하는 판소리 이론을 [광대가]라는 단가로 익혀냈다.그의 소리하는 법례는 시냇물이 얼음 밑에 흐르는 듯한 은은한 목소리, 순풍에 돛단배 놀 듯 이리저리 굴러가는 목소리, 만길 산봉으로 오르듯이 치솟는 목소리, 목포수가 천길 낭떠러지에 내리듯이 떨어지는 목소리들을 고루 갖추어 낼 수가 있게 되었다. 그녀는 본래 재질이 뛰어난지라 일취월장 큰 광대로 성장하였다. 이에 신재효는 채선을 첫 여자광대로 대성을 시키기로 작심하기에 이르렀다. 때마침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하고 그 낙성연에 전국의 이름난 광대들을 불러 큰 잔치를 베푼다는 소문이 있자 신재효는 빈틈없이 이에 대비하는 계획을 짜냈다.
잔칫날에 맞춰 김세종과 함께 곱게 남장을 한 (당시엔 여자광대가 없었으므로)진채선을 한양에 당도하게 하였다. 먼저 운현궁에서 있은 시연회에서부터 채선은 단연 두각을 내어 인기를 독차지 하게 되었다. 통 갓을 단정히 눌러 쓰고 어깨에 걸친 창의의 부드러운 선, 곱다란 선, 곱다란 미모에 티 없이 맑은 고운 소리, 거기에다 금상첨화로 경복궁 중수낙성에 걸맞는 [성조가]와 [방아타령]은 단연 안성맞춤의 절묘한 품위 그것이었다. 경회루 잔치마당에서도 다른 남창들의 판에 박은 판소리에 비해 낙성축원의 깊은 뜻과 그 소리의 흐름 속에서 절찬을 받은 추임새는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하객들의 혼을 빼기에 충분하였다.
팔만 장안 억만 가구 복덕방을 골라내어 이 터를 잡았으니 북악은 억만봉이요 남산은 천년산이라 청룡은 왕십리요 백호는 동구재라 한강수는 만년수니 천세 만세 억만세지 우리 성군 만만세라
진채선이 부른 [성조가]에 탄성이 만발하게 되어 대원군은 마침내 채선의 팔을 끌어 안고 누가 지은 노래냐고 그 스승을 묻기에 이르렀다. 이에 채선은
고창읍내 흥문거리 두춘나무 무지개 안 성씨는 평산신씨 이실재 효도효는 장적의 함자이오 일백백 근원원은 친구간의 자호로다 리오는 동리오니 너도 공부 하랴가면 가끔 가끔 찾아오소 . [동리자서가]를 불러 신재효 스승을 소개하였고 그녀의 바른 팔에는 금토시를 얻어차게 되었다고 한다. 스승 신재효가 경복궁 중수에 원납전 5백냥 헌금한 것을 비롯해 흉년에 주린 백성을 긍휼하였으며 광대들을 학습시켜 명창을 길러 낸 논공 등 그의 사람 됨됨을 간청한 보람이 있어 나라에서는 1877(고종 14)년 통정대부 정충장군(정3품)의 직첩을 내린데 이어 같은 해 동짓달에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중추부사 (종2품)로 승품시켰다.
중인 신분에서 파격적으로 직급 높은 벼슬을 받게 되었으니 신재효로서는 더없는 영광이 되어 평소 그의 소망과 맺힌 한이 풀린 셈이되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제자 진채선을 기다리는 간절한 그의 연정은 끝내 그를 몸저 눕게하고야 말았다. 자별나게 판소리를 좋아 했던 흥선대원군이 급변하는 정치정세에 속을 썩힐 때마다 생기 있고 맑은 채선의 노래와 젊고 싱싱한 그녀의 체취로 심신를 달래곤 하는 판에 진채선을 놓아 줄리 만무하였다.
스물네번 바람불어 만화방창 봄이드니 구경가세 구경가세 도리화가 구경가세
도리화는 진채선을 뜻하며 스물네번 바람불어는 채선의 나이 방년 스물네살을 나타내니 채선을 그리워하는 신재효의 간절한 마음을 이렇게 읊어 갔다.
꽃가운데 꽃이 피니 그 꽃이 무슨 꽃인고 웃음웃고 말을 하니 수렴궁의 해어환가 해어화 거동보소 아리땁고 고을시고
채선의 고운 모습을 꽃에 비유해 읊은 노래이다.
나와드니 빈 방 안에 햇빛 가고 밤이 온다 일점 잔등 밝았는데 고암으로 벗을 삼아 잠 못들어 근심이요 꿈못이뤄 전전하다. ..... 언제나 다시 만나 소동파를 울어 볼까
채선에 대한 연정의 표현이 이렇듯 극진하였으니 신재효의 상사병도 짐작이 간다. 이 노래는 [도리화가]로서 몸져누운 신재효가 진채선에게 띄어 보내 이른바 연가였다.이 소식을 전해 들은 진채선이 [추풍감별곡]을 계속 불러 스승에 대한 그의 간곡한 마음을 노래로서 읊어내니 대원군이 또한 그 뜻을 헤아려 마침내 채선의 하향을 허락해 주었다.이렇게 되니 고창의 동리정사에는 또 다시 봄이 오게 되고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신재효는 채선을 옆에 두고 질박하고 생기 넘치는 판소리의 깊은 경지 속에서 열락의 만년을 장식하였다고 한다.노년의 스승을 보살피며 명창으로 활약하던 진채선은 스승이 타계하자 조용히 자취를 감추어 무상한 인생을 되뇌이며 이름 모를 암자에 묻혀 세상을 마쳤다고 하는 그의 이질녀 김막례의 증언으로 진채선의 행적은 막을 내린다.
고창이 낳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소리꾼 陳彩仙
고창은 여자 소리꾼의 고장이라고 할 만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소리꾼이었던 진채선, 경상도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고창에서 활동했던 허금파, 국가지정문화재여던 김여란과 김소희가 고창 출신의 여자 소리꾼이다. 이만하면 가히 여자 소리꾼의 고장이라고 이를 만하다. 김소희의 고향인 흥덕면 사포리는 예전에는 매우 큰 어항이었다. 특히 조기처에는 조기 파시가 열려 흥청거리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국악 공연단체들은 이곳을 빼놓지 않았다. 지금은 퇴락한 이곳에는 김토산이라는 소리꾼이 살았다. 김토산은 이날치의 소리를 배워 김성수에게 가르쳤다. 김성수는 다리를 저는 소리꾼으로 정읍과 김제를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널리 이름을 날리지는 못했지만, 판소리 애호가들 중에는 그의 소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다. 사포는 또 편재준의 고향이기도 하다. 편재준은 퉁애(단소보다 크고 퉁소보다 작은 악기)의 최고 명인으로 장님이었는데, 협률사 공연장에서 단소의 최고 명인 전추산을 만나 통애의 최고 명인이 되었다.
흥덕을 지나면 곧 선운사에 이른다. 선운사가 있는 선운리는 시인 서정주의 고향이기도 하다. 선운사 입구를 지나 4㎞즘 더 가다보면 이르는 곳이 심원이다. 심원면 소재지에 이르기 직전 바닷가 쪽으로 있는 동네가 월산리인데, 이곳 사등마을이 바로 진채선 출생지이다. 진채선은 이곳 무당의 딸로 태어났으며, 신재효에게 판소리를 배운 뒤 경회루 낙성연때 서울로 올라가 대원군 앞에서 소리를 하였다. 진채선의 소리를 들은 대원군은 진채선을 곁에 두고 사랑하였다고 한다. 서울에 올라간 진채선이 내려오지 않자 신재효는 진채선을 그리워하며 ‘도리화가’라는 노래를 짓기도 했다.
이곳 진채선의 생가 터에는 진채선의 생가 터라는 작은 표지만이 서 있을 뿐이다.
진채선과 동리 신재효 사이의 감정교류나 남녀 간의 애정문제를 지금 언급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진채선이 당시의 권력자요 고종의 부친이었던 흥선 대원군 이하응의 총애를 받았던 것만은 역사적 사실이고 진채선을 대원군에게 빼앗긴 동리 선생의 상심은 도리화가를 보더라도 미루어 짐작할 만한 일이다.
도리화가 스물네 번 바람 불어 만화방창 돌아오니 귀경가세 귀경가세 도리화 구경가세 도화는 곱게 붉고 흼도흴사 오얏꽃이 꽃가운데 꽃이 피니 그 꽃이 무슨 꽃고 웃음웃고 말을하니 수렴궁의 해어환가 해어화 거동보소 아리땁고 고을시고 현란하고 황홀하니 채색채자 분명하다 도세장연 기이한일 신선선자 그 아닌가… 강호의 호걸들이 왕래하며 하난말이 선낭의 고운얼굴 노래또한 명창이라… 이말 듣고 일어안자 어서밧비 보고지고 주야로 옹망하니 하로날이 삼추로다.
이렇게 진채선을 애절하게 그리는 동리선생의 마음이 대원군에게 전해져 뒷날 진채선은 고창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국부의 부친을 모시던 몸으로 중인의 모수발을 차마 들 수 없었던 진채선은 산중으로 들어가 여승이 되어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리고 진채선은 거처하던 승방은 벽과 친정을 온통 검은 종이로 도배를 함으로서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살아가기로 결심한 그녀의 마음을 나타냈다는 얘기가 구전되고 있다.
이후로, 진채선을 필두로 우리 판소리계에는 여류명창들이 족족 나타나 그 계보를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다 그리하여 진채선을 효시로 허금파, 강소춘 그리고 박녹주, 김초향, 이화중선, 김여란, 박초월, 김소희 등의 연맥을 통해 오늘날 판소리 명창은 남자보다 오히려 여자 명창으로 진을 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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