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가 열전](4) 고려중기 - 탄연 | ||
-달의 기품·연꽃의 자태 ‘절정의 귀족미’-
우리 서예사 궤적을 추적하다보면 고비마다 만나는 사람이 왕희지다. 그는 김생(711~791 이후)이 이미 뛰어넘었다고 했는데 탄연(1069~1158) 앞에 또 나타난다. 이후에도 조맹부를 앞세우고 고려말 조선초에 안평대군(1418~1453) 앞에, 또 조선중기 석봉 한호(1543~1605) 앞에 등장한다.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정면대결을 펼칠 때까지 그를 만나지 않고는 누구도 글씨를 쓸 수 없었고, 왕희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왜 우리 선조들은 자존심도 없이 내 조상도 아닌 왕희지를 붙들고 늘어졌을까. 탄연 이전에 왕희지를 알아야겠다. 왕희지(307?~365?)는 한마디로 글씨의 전형(典型)을 만든 사람이다. 당 태종이 왕희지를 복고시킨 이래 중국은 물론 한국·일본 서예사의 기준이 되면서 크고 작은 모든 작가들을 통해 재해석되어 온 것이다. 왕희지는 서예사에서 더 이상 중국 사람이 아닌 보편이자 기준이고 토대인 것이다. 왕희지에게 반기를 든 사람조차 알고 보면 시작은 왕희지다. 그래서 그가 ‘법(法)’이 된 것이다. -왜 먼저 왕희지인가- 여기서 제기되는 의문 또 한가지. 우리 서예사에서 김생 탄연 안평대군 한석봉의 토대는 모두 왕법(王法)이었는데 점획만 보더라도 제각각 다르다. 김생은 태세의 음양대비가 극심하고, 탄연은 침착통쾌하고, 석봉은 균일(均一)하다. 왜 그런가. 그것은 역시 시대와 사람의 문제로 압축된다. 김생의 승적(僧籍)은 모른다. 하지만 보덕사(報德寺)에 기거하며 두타행을 일삼고 김생사(金生寺)까지 세워진 것은 그가 불교와 무관하지 않음을 증명하는데, 8세기 화엄불국토의 장엄미를 글씨로 담아냈다. 탄연 또한 선승으로 12세기 고려 절정의 귀족적 세련미를 붓끝에 녹여낸 사람이다. 반면 한석봉은 사자관으로서 목릉성세(穆陵盛世) 16세기 조선의 유교이념을 엄정단아한 글씨로 구현해낸 사람이다. 모두 왕법을 공통분모로 하고 있지만 사람, 시대, 이념과 결부되어 나타나는 이러한 서예미는 동시대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해도 다르다. 요컨대 양식이 시대정신이나 지역성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지는 미술에만 국한되어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한자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서예’인 것이다. -달이 더냐 연꽃이 더냐- 그러면 탄연의 글씨가 정말 그런지 ‘진락공중수 청평산문수원중수기비’(1130)를 찾아가보자. 그런데 순진하게 춘천 청평사로 가면 헛걸음친다. 문수원에는 정작 문수원기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이 비석의 주인공 진락공 이자현(1061~1125)이 은거한 고려시대 최고의 정원 또한 흔적도 없다. 비석은 이미 조선시대에 금이 갔고 6·25를 만나 산산조각났다. 동국대박물관에는 아직 온기가 느껴지는 몇 조각 파편(그림 1)만이 수습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 전모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확인된다. 일제시대 조선총독부가 떠놓은 탁본(그림 2)이 그것인데 총 다섯 조각이다. 돌돌 말린 탁본을 펴드는 순간 100년 전에 이미 그놈들이 얼마나 지독하고 치밀하게 우리 유적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녔는지가 재차 확인된다. 그러나 탄연 글씨의 기운은 고탁본이 아니면 제대로 느낄 수가 없다. 하지만 ‘문수원기비’의 고탁본(그림 3)을 만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다. 고탁본 한 장이 그만한 금판 값과 맞먹는다는 말이 실감난다. ‘문수원기비’는 일견 왕희지 글씨로 당나라 회인 스님이 집자한 ‘성교서’ 느낌이 완연하다. 이와 관련하여 탄연이 왕법을 얼마나 골수로 익혔는가는 ‘직지사대장각기’(1186)가 증명한다. 두 사람의 글씨를 한 비석에 집자한 유례가 없다. 그러니 이 기문은 탄연과 왕희지 글자를 섞어 집자한 유일한 비인 셈인데 어느 것이 탄연이고 왕희지인지를 분간할 수가 없다. 그러나 탄연은 분명 왕희지와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안진경 집자비로 오인할 정도로 방불하게 구사한 ‘승가굴중수기’(1106)나 문수원기비의 음인 ‘제진락공문’을 보자. 요컨대 탄연체는 왕법에 안진경을 혼융시켜낸 데에서 완성된 것이다. 이에 대해 이규보는 ‘신품사현(神品四賢)’ 각찬에서 탄연을 김생에 이어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환하기가 달 구름 속 나오는 듯(皎如明月之撥雲) /빛나기는 연 꽃 못에서 피는 듯(粲若芙蓉之出池) /아리따운 여인마냥 약하다 하지마라(非謂脆弱兮如美婦人) /겉은 연미한 듯 속은 단단한 힘줄 있네.(外若姸媚兮中以筋持) /한 점 한 획 제자리 박혔으니(一點一劃妥帖得宜) /사람 솜씨 아니라 신이 베푼 것이라네.(非意所造神者乃施)’ 이규보는 탄연체의 귀족적인 기품과 자태를 달과 연꽃에, 유려하고 단단한 필획의 성질을 아리따운 여인에, 점획과 글자의 짜임새를 신의 솜씨를 빌려 말하고 있다. -고려 귀족문화와 선풍(禪風)의 결정인 탄연체- 그런데 이런 아름다운 글씨를 탄연 혼자 구사하고 말았을 리 만무하다. 탄연 서풍은 12세기 들어서면서 통일신라부터 근 400년 동안 해석되어온 구양순 계통의 글씨를 대체하면서 고려문화의 황금기를 주도하였다. 오언후, 영근, 혜소가 쓴 ‘영통사대각국사비’(1125), 승린의 ‘선봉사대각국사비’(1132), 인종과 문공유가 쓴 ‘묘향산보현사지기’(1141), 탄연의 글씨로 보이는 ‘운문사원응국비’(1148), 기준의 ‘단속사대감국사탑비’(1172) 등이 이를 증명한다. 더구나 이런 미감의 글씨를 탄연 혼자 만들었을 리도 만무하다. 그 배후에는 당시의 시대정신인 불교가 작용하고 있다. 탄연체는 고려불교가 초기 남종선이나 법상종의 일변도에서 벗어나 천태종이나 조계종으로 바뀐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말이다. 즉 문종의 제4왕자인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 나서 교선 양종을 통합하면서 전개시킨 교관겸수(敎觀兼修)의 신사상운동이나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이 남종선 입장에서 북종선과 교종을 아우르면서 편 정혜결사운동이 그것이다. 지극히 귀족적이고 화려한 천태종이나 최씨 무신정권기(1196~1258)의 자가통치(自家統治) 이념이자 고려 고유사상으로 토착화된 조계종의 정신과 미감이 녹아나온 것이 탄연체인 것이다. 그것은 탄연 자신 또한 열아홉에 법상종 혜소국사 정현의 문인으로 출가하여 뒤에는 천태종에 입문하고, 다시 상박(商舶)을 타고 송나라에 가 아육왕산의 광리사 개심선사의 인가를 얻어 조계선(曹溪禪), 즉 남종선맥을 자처하면서 예종의 왕사(1145)로 활약한 인물임이 지금은 망실된 단속사 대감국사(大鑑國師碑) 탄연의 비가 전하는 데에서 확인된다. 탄연을 두고 그래도 남는 의문 한 가지. 흔히 요즈음의 스님 글씨, 즉 선필(禪筆)이라 하면 법도 없이 내려갈긴 것이 연상되지만 탄연의 글씨는 이와 무관하다. 오히려 김생 탄연은 시대기준이고 법인데 비록 파격을 기대하는 선필조차도 이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알고 보면 교선 양종을 합한 한국불교 성격상 교학이나 염불 또한 선을 위한 것임을 감안한다면 애초 깰 틀도 만들지 못한 사람이 틀을 깨겠다고 ‘불립문자’라 마구 휘두르는 무법의 일필휘지가 선필이 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것 아닌가. 〈이동국|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학예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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