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의 뜨락/서예(한글, 한문)

신품4현 유신의 신필 / 송광사 보조국사비명 해석

채현병 2012. 1. 9. 00:15

 

                   신품4현 柳伸의 신필

                    -송광사 보조국사비-

 

 

 

                 <보조국사비명 해석문>

 

 

승평부(昇平府) 조계산(曹溪山) 송광사(松廣寺)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 비명(碑銘)과 아울러 서문(序文)


지공주사(知公州事)부사(副使)권농사(勸農使)관구(管句) 학사(學士)장시랑(將仕郞) 겸예부상서(兼禮部尙書)이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김군수(金君綏)가 왕명(王命)을 받들어 비문(碑文)을 짓고  문림랑(文林郞)이며 신호위장(神號衛長)인 신(臣) 유신(柳伸)은 교지(敎旨)를 받들어 비문을 쓰다

 
선나학(禪那學)의 근원은 가섭존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인도의 제28조인 달마대사가 이어받아 와서 진단(震旦)을 교화하였다. 이를 전해 받은 자들은 부전(不傳)으로써 전하였으며, 이를 닦는 사람들은 무수(無修)로써 닦아 엽엽(葉葉)이 상승(相承)하며 등등(燈燈)이 함께 비추었으니, 참으로 어찌 그리 기이한 것인가! 부처님께서 열반하신지 더욱 오래되어 불법(佛法)도 따라서 해이하여져서 학자(學者)들이 진언(陳言)만을 고수하여 밀지(密旨)를 망각할 뿐 아니라, 근본은 버리고 지말(枝末)을 따라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로 말미암아 관찰(觀察)하여 오입(悟入)하는 길이 막히고 문자(文字)로 희론(戱論)하는 발단(發端)이 봉기(鋒起)함으로써 정법안장(正法眼藏)은 거의 땅에 떨어졌다.

 
이러한 때에 한 스님이 있어 홀로 부위(浮僞)한 세속을 등지고 바르고 참된 종(宗)을 흠모하여, 언전(言詮)을 연마하여 진리에로 나아가는 데에서 시작하여 선종(禪定)을 닦아 지혜를 발명(發明)하는 것으로 마치고, 이러한 경지를 체득한 다음 이타(利他)인 법시(法施)에 전력하는 한편, 침체된 선풍(禪風)을 다시 진작(振作)하여 어두워진 조월(祖月)을 거듭 밝게 하였다면 참으로 가섭(迦葉)의 적손(嫡孫)이며 또한 달마(達磨)의 종자(宗子)로서 잘 이어받고 훌륭하게 조술(祖述)한 사람이라 할 만하다. 우리 스님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 하겠다.

 
스님의 휘(諱)는 지눌(知訥)이니 경서(京西)의 동주(洞州 : 황해도 서흥) 출신이다. 자호(自號)는 목우자(牧牛子)이며, 속성은 정씨(鄭氏)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광우(光遇)이니 국학(國學) 학정(學正)을 역임하였으며, 어머니는 조씨(趙氏)이니 개흥군부인(開興郡夫人)이다. 스님은 날 때부터 병이 많아 백약이 무효였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부처님께 기도하면서 만약 병을 낫게 하여 주시면 출가시켜 부처님을 섬기도록 하겠다고 서원을 세우자마자 병이 곧 완쾌되었다. 8살 때에 조계종(曹溪宗)의 운손(雲孫)종휘선사(宗暉禪師)를 은사로 하여 삭발하고 스님이 되었다. 이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다음, 불교를 수학(受學)하되 일정한 스승을 두지 않고, 오직 도덕이 높은 스님이면 곧 찾아가서 배웠다. 지조가 고매(高邁)하여 무리 중에서 뛰어났다.

 
25살 때인 대정(大定) 22년 임인(壬寅)에 대선고시(大選考試)에 합격하였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남방(南方)으로 유행(遊行)하다가 창평(昌平) 청원사(淸源寺)에 이르러 주석(住錫)하였다. 우연히 어느 날 학료(學寮)에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보다가 정혜일체(定慧一體) 제3과에 이르러 “진여자성(眞如自性)이 기념하여 육근(六根)이 비록 견문각지(見聞覺知)하나 삼라만상에 오염되지 아니하고, 진여(眞如)의 성(性)은 항상 자재(自在)하다”는 구절에 이르러 깜짝 놀라면서 크게 기꺼워하여 미증유(未曾有)의 경지를 얻었다. 곧 일어나 불전(佛殿)을 돌아다니면서 외우고 생각하니 스스로 체험한 바가 컸다. 이 때부터 마음은 명리(名利)를 싫어하고 항상 깊은 산중에 숨어 각고정진(刻苦精進)하면서 도를 닦되 조차(造次)의 위급한 경우에도 구도(求道)의 정신을 버리지 아니하였다.

 
대정 25년 을사년(乙巳年)에 이르러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로 옮겨 주석하던 중, 대장경을 열람하다가 이장자(李長者)가 지은 「화엄경합론(華嚴經合論)」을 보다가 거듭 신심(信心)을 일으켜 화엄경의 오묘한 이치를 찾아내고 깊이 숨어 있는 난해한 뜻을 드러내어 제가(諸家)의 설(說)과 비교하여 더욱 정통하였다. 이에 따라 전해(前解)가 점점 밝아져 항상 마음을 원돈관문(圓頓觀門)에 두었으며, 또한 말학(末學)들의 미몽(迷蒙)을 인도하여 못과 쐐기를 뽑아주고자 노력하였다. 그 때 마침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득재(得才)라는 선로(禪老)가 팔공산(八公山) 거조사(居祖寺)에 주석하고 있으면서 함께 정진하자고 간절히 초청하므로, 드디어 그곳으로 가서 머물렀다. 널리 여러 종파의 세상 명리(名利)를 포기한 고사(高士)들을 맞아들여 힘써 습정균혜(習定均慧)를 닦도록 간청하여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음이 여러 해였다.

 

 승안(承安) 2년 무오년(戊午年) 봄에 몇 사람의 선려(禪侶)와 함께 삼의(三衣) 일발(一鉢)만 갖고 지리산(智異山)을 찾아가 상무주암(上無住庵)에 은거하였으니, 경치가 그윽하고 고요하여 천하에 제일이며 참으로 선객(禪客)이 거주할 만한 곳이었다. 스님은 여기서 모든 외연(外緣)을 물리치고 오로지 내관(內觀)에?? 전념하였다. 갈고 닦아 예리한 지혜를 발하며, 깊이 깊이 잠심(潛心)하여 궁극의 근원까지 궁구하였다. 그 동안 득법(得法)할 때마다 나타났던 몇가지의 서상(瑞相)에 대하여는, 말이 너무 번다(繁多)하여 비(碑)에는 싣지 않는다. 스님께서 일찍이 말씀하되 “내가 보문사(普門寺)에서 지낸 이후 10여년이 경과하였다. 비록 뜻을 얻고 부지런히 수행하여 허송한 적이 없으나 아직 정견(情見)이 사라지지 아니하여, 마치 어떤 물건이 가슴에 걸려 있어 원수와 함께 있는 것과 같아서 항상 꺼림직 하였다.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 주석하면서 정진하는 여가에 대혜보각선사(大慧普覺禪師)의 어록(語錄)을 보다가 ‘…… 선불재정처(禪不在靜處)하며 역부재요처(亦不在閙處)하고 부재일용응연처(不在日用應緣處)하며 부재사량분별처(不在思量分別處)니라. 연(然)이나 제일(第一)에 부득사각정처(不得捨却靜處)와 요처(閙處)와 일용응연처(日用應緣處)와 사량분별처(思量分別處)하고 참(參)하여야만 홀연히 눈이 열려서 바야흐로 이것이 바로 옥리사(屋裏事)임을 알 수 있느니라’라는 구절에 이르러 뜻이 딱 들어맞아 마음에 깨달으니, 자연히 가슴이 후련하며, 원수와 멀리한 것 같아서 곧 마음이 편안하였다”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혜해(慧解)가 점차로 높아져서 대중들의 종앙(宗仰)하는 바가 되었다. 5년 경신(庚申)에 송광산(松廣山) 길상사(吉祥寺)로 옮겨서 11년간 대중을 지도하되, 혹은 담도(談道), 혹은 수선(修禪), 안거(安居), 두타(頭陀) 등을 함에 있어 한결같이 율장(律藏)에 의거하였다. 사방으로부터 스님과 신도들이 스님의 고매한 명성을 듣고 찾아와 수많은 대중이 운집하였다. 심지어 명예와 벼슬과 처자를 버리고,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 함께 오기도 하고 입사(入社) 수도(修道)하겠다는 왕공(王公)·사서(士庶)들도 수백명에 이르렀다. 스님은 수도에만 자임(自任)할 뿐, 사람들이 칭찬하거나 비방하는 것에는 전혀 그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또한 자비와 인욕으로 후배(後輩)를 제접(提接)하였다. 비록 대중 중에 무례하게 뜻을 거역하는 자라도 오히려 능히 자비로 섭호(攝護)하고 항상 정(情)으로 통솔하되,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귀여워하는 것과 같이 하였다. 그리고 대중에게 송지(誦持)하기를 권함에는 항상 『r금강경(金剛經)』으로써 법을 삼도록 하고, 교의(敎義)를 연설함에는 『육조단경』을 강설하며, 통현장자(通玄長者)의 『화엄론(華嚴論)』으로써 주장을 펴고, 『대혜어록(大慧語錄)』으로써 함께 우익(羽翼)을 삼았다. 삼종문(三種門)을 열었는데,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경절문(徑截門)이니, 이 3문에 따라 수행하며 신입(信入)하는 자가 많았다.

 

그리하여 선학(禪學)의 왕성함은 근고(近古)에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 스님은 또한 위의(威儀)가 엄숙하여 소의 걸음에 범의 눈길이었으며, 연거(燕居)할 때에도 태도가 근엄하여 몸가짐이 해이함이 없었고, 대중이 운력할 때에도 빠지는 적이 없을 뿐아니라 항상 솔선수범하였다. 억보산(億寶山)의 백운정사(白雲精舍), 적취암(積翠庵), 서석산(瑞石山)규봉난야(圭峯蘭若), 조월암(祖月庵) 등은 모두 스님께서 창건하고 왕래하면서 정진하던 곳이다. 희종 임금께서 동궁에 있을 때부터 스님의 명성을 듣고 흠모해 오다가, 보위(寶位)에 오른 후 왕명(王命)으로 송광산 길상사를 조계산(曹溪山) 수선사(修禪社)로 고치고 어필(御筆)로 편액을 써서 보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 만수가사(滿繡袈裟) 한 벌을 하사하여 존경을 표하였으니, 스님을 광호(光護)하는 돈독한 정성은 다른 어떤 왕과도 견줄 데 없었다.

 

처음으로 스님이 남류(南遊)하면서 수행의 길에 오르고자 할 때, 동학도반(同學道伴)과 함께 약속하되, “나는 지금부터 깊은 곳에 숨어 향사(香社)를 맺고 전적으로 정혜(定慧)를 닦고자 하니, 스님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라 하니, 대중이 말하기를 “지금은 말법(末法)이므로 그렇게 할 시기가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의문을 표시했다. 이 말을 들은 스님은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이르기를 “시기는 변천하지만 심성(心性)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교법(敎法)이 흥왕하거나 쇠퇴한다고 보는 것은 삼승(三乘)인 권학(權學)의 견해일 뿐이어늘, 지자(智者)가 어찌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대중들은 모두 복종하면서 “옳은 말씀입니다. 뒷날 함께 결사(結社)를 맺으면 반드시 정혜결사(定慧結社)라 이름합시다”라고 하였다. 거조사(居祖寺)에 있을 때 과연 정혜사(定慧社)를 세우고 곧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지었으니, 이는 초지(初志)를 이룬 것이다. 그 후 송광사(松廣寺)로 옮겨 결사를 맺고도 역시 정혜결사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얼마를 지난 후 멀지 않은 곳에 같은 이름(吉祥寺)이 있으므로 혼돈을 피하기 위하여 왕명을 받아 조계산 수선사라 개칭하였으니, 이름은 비록 다르나 뜻은 다르지 않다. 스님이 한결 같이 정혜에 뜻을 두었던 것이 이와 같았다.

 

대안(大安) 2년 봄 2월에 국사께서 어머니를 천도하기 위하여 수순(數旬) 동안 법회(法會)를 열었는데, 이때 결사 대중에게 이르기를 “나는 이제 세상에 있으면서 설법(說法)할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대중은 각각 정진에 노력하라”고 당부하였다. 얼마 후 3월 20일에 발병하여 8일만에 입적하였으니, 스님은 가실 때를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밤 목욕하고 옷을 갈아 입었다. 시자(侍者)가 스님이 임종할 것을 알아차리고 임종게(臨終偈)를 청하는 한편 여러 가지 질문을 했더니 스님은 종용(從容)히 대답하였다. 야애(夜艾)에 이르러 방장실(方丈室)로 들어갔는데 문답이 처음과 같이 계속되었다. 새벽에 이르러 물으시기를 “오늘이 며칠인가?” 하므로 대답하되 “3월 27일입니다”라 하였다. 스님께서 법복(法服)을 입고 세수와 양치질을 한 다음, “이 눈은 조사(祖師)의 눈이 아니고, 이 코도 조사의 코가 아니며, 이 입은 어머니가 낳아주신 입이 아니고, 이 혀도 어머니가 낳아준 혀가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법고(法鼓)를 쳐서 대중을 모이게 하고 육환장(六環杖)을 짚고 선법당(善法堂)으로 걸어 올라가서 축향(祝香)하고 법상에 올라 앉아 설법하는 것이 평상시와 같았다. 육환장을 떨치고 전날 밤 방장실중(方丈室中)에서 문답한 어구(語句)를 그대로 들고 이르되, “선법(禪法)의 영험(靈驗)이 불가사의함을 오늘 이 자리에서 대중에게 설파(說破)코자 한다. 대중들은 매(昧)하지 아니한 일착자(一着子)를 질문하라. 노한(老漢)도 또한 매하지 아니한 일착자로 대답하리라” 하고, 좌우를 돌아보고 손으로 육환장을 만지면서 이르기를 “산승(山僧)의 명근(命根)이 모든 사람들의 손에 있으니, 모든 사람들에게 일임한다”라 하고, 육환장을 횡(橫)으로 잡고 거꾸로 끌었다.

 

 “근골(筋骨)이 있는 자는 앞에 나오라” 하고 문득 발을 뻗어 법상(法床)에 걸터앉아 묻는대로 대답하되, 말소리가 또렷또렷하고 그 뜻도 자상하며 언변(言辯)이 조금도 걸림이 없었으니, 구족(具足)한 사실은 임종기(臨終記)의 내용과 같다. 마지막으로 어떤 스님이 묻기를 “옛날 유마거사가 비야리성(毘耶離城)에서 시질(示疾)한 것과, 오늘 조계산에서 목우자(牧牛子)가 작병(作病)한 것이 같은가? 다른가?” 하니, 스님께서 이르되 “너희들은 같은지 다른지를 배워라” 하고, 주장자(柱杖子)를 잡고 몇 번 내리치고 말하되 “천가지 만가지가 모두 이 속에 있느니라” 하고, 주장자를 잡고 법상에 걸터앉아 부동자세로 고요히 입적하였다. 문도(門徒)들이 향등(香燈)을 베풀고 7일간 공양을 올렸다. 얼굴 빛은 생시와 같았으며, 수발(鬚髮)은 계속 자랐다. 다비(茶毘) 후 유골을 수습하니 오색이 찬란하였다. 사리(舍利)가 출현하였는데 큰 것이 30과(顆)이고, 적은 것은 무수하였으므로 수선사의 북쪽 기슭에 사리부도(舍利浮屠)를 세웠다. 임금께서 부음(訃音)을 들으시고 크게 진도(震悼)하면서 시호를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 탑호를 감로(甘露)라 하였다. 세수는 53세요, 법랍은 36이었다. 저술로는 「정혜결사문」·「상당록(上堂錄)」·「법어(法語)」·「가송(歌頌)」 각 1권이니, 종지(宗旨)를 밝게 발양(發揚)한 내용들이므로 모두 가히 읽을 만한 책들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스님께서 돌아가시니, 더욱 크게 돋보인다”라고 하였다.

 

 스님은 능히 생명을 버리고 열반에 드시어 적멸세계(寂滅世界)에 우유(優遊)하고 자재(自在)하시니, 이는 반드시 몰량대인(沒量大人)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지도(至道)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다지 위대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왜 그런고 하니 노자(老子)는 학식보다 나를 아는 사람이 드문 것을 귀하게 여겼으며, 장자(莊子)는 살아감에 있어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하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옛날 도를 닦은 사람들은 모두 일반 사람과 같이 평범함을 보였다. 그들이 어찌 스스로 궤이(詭異)하며 기위(奇偉)한 자취를 자랑하여 남들이 알아주기를 희망하였겠는가? 세존(世尊)을 법중왕(法中王)이라 존칭하며, 신통작용(神通作用)으로 유희자재(遊戱自在)하지만 마지막으로 구시나가라 쌍림(雙林)에서 입적하실 무렵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제 등이 매우 아프니 곧 열반에 들 것이다”라 하시고, 드디어 오른쪽 갈비를 땅에 붙이고 발을 포갠 다음 입적하였다. 또 당(唐)나라 등은봉선사(鄧隱峯禪師)는 거꾸로 물구나무를 서서 죽었는데, 비구니(比丘尼)가 된 누이동생이 와서 원망하기를 “노형(老兄 : 오빠)은 평생 동안 법률(法律)을 따르지 않더니, 죽어서도 사람들을 현혹한다”라면서 혀를 찼다. 이제 스님께서는 생전에 개당(開堂)하여 많은 법문(法門)을 보여주었거늘, 죽는 날에까지 다시 법고를 쳐서 대중을 운집하고 법상에 올라 설법한 다음, 법상에 걸터앉아 입적하였으니 이것이 도(道)에서 본다면 군더더기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대저 도의 작용은 방소(方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행함이 같지 않으므로 천하에 일리(一理)뿐이지만 백려(百慮)의 차별이 있고, 지방에서 출발하는 길은 다르지만 서울에 도착함은 같은 것이다. 만약 그렇게 말한다면 그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또 역대(歷代)로 선문(禪門)의 많은 조사(祖師)들이 임종할 때 법을 부촉(付囑)함에 있어 반드시 신이(神異)를 나타내었으니, 승사(僧史)에 자세히 실려 있다. 과거 많은 스님들 중에 법상에 올라 앉아 설법하고 입적한 스님으로 흥선사(興善寺)유관(惟寬)은 상당(上堂)하여 임종게를 설하고 편안히 앉아 입멸(入滅)하였고, 수산성념선사(首山省念禪師)는 임종게를 남긴 다음 온종일 상당하여 설법하고 편안히 앉아 장왕(長往)하였으며, 서봉(瑞峯)지단선사(志端禪師)는 삭발 목욕하고 법상에 올라 앉아 대중들에게 하직하고 편안히 앉아 천화(遷化)하였고, 대령(大寧)은미선사(隱微禪師)는 상당하여 임종게를 설한 다음 탈화(脫化)한 사실들을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비방할 수 있겠는가?

 

슬프다! 상계(像季)의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의심은 많고 신심(信心)은 적어서 선각자(先覺者)들의 자비로 선교방편(善巧方便)으로써 개시(開示)하거나 지도하여 개시하는 마음을 일으키도록 하지 않으면 비록 성도(聖道)로 나아가고자 하더라도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스님의 마음을 짐작해 보건대 이것 역시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일단(一端)임을 알 수 있다. 스님께서 입적하신 이듬해에 사법제자(嗣法弟子)인 혜심(惠諶) 등이 스님의 행장(行狀)을 갖추어 임금께 올리고, “원하옵건대 스님의 행적(行跡)을 후세에 길이 전시(傳示)할 수 있도록 입비(立碑)를 윤허해 주소서”라고 간청하였다. 임금께서 이 주청을 받아들여 윤허하시고, 소신(小臣) 군수(君綏)에게 비문을 지으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신(臣)이 유교(儒敎)를 수학(受學)하였으나 유학에도 변변치 못한데 하물며 불심(佛心)과 조인(祖印)방외(方外)의 논리에랴? 그러나 강박한 명명(明命)을 사양할 도리가 없었다. 이에 유문(諛聞)한 천식(淺識)을 모두 동원하여 감히 스님의 성미(盛美)를 비면(碑面)에 나타내려고 한다. 명(銘)하여 이르기를

 

 

손을 들어 아이에게 달을 가리키지만,
달은 본시 손가락 끝에 있지 않는 것을
언어(言語)로써 고구정녕(苦口叮嚀) 알려주려 하여도
오묘(奧妙)한 그 진리는 언어(言語) 속에 없는 것을 ①
사십구년(四十九年) 설법(說法)하신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여!
중생들의 근기(根機) 따라 팔만문(八萬門)이 열렸네!
맹팔랑(孟八郞)이 망치 들고 조관(祖關)을 분쇄하고
오직 하나뿐인 최후관문(最後關門) 통과하였다. ②
영산회상(靈山會上) 설법(說法) 때 천파화(天波花)를 거시(擧示)하니
백만대중(百萬大衆) 운집 중에 가섭(迦葉)만 미소(微笑)하다.
달마대사(達磨大師) 소림굴(少林窟)에 앉아 면벽(面壁)할 적에
영특한 혜가대사(慧可大師) 팔을 베어 바쳤도다.
열반(涅槃) 묘심(妙心) 나의 법등(法燈) 너에게 전(傳)하노니
유(有)도 무(無)도 일(一)도 이(二)도 아닌 그 마음이여!
일법(一法)과 다법(多法) 세간법(世間法)과 출세간법(出世間法)들이
천차(千差)요 만별(萬別)이나 그 모양은 둘 아닐세. ④
청풍불(淸風拂) 명월조(明月照)에 무한한 그 풍경(風景)을
모든 중생 수용(受用)해도 무진(無盡)한 보고(寶庫)일세.
과거 현재 미래 세상(世上) 위인(偉人)이 나타나서
위법망구(爲法忘軀) 고해정진 혜명(慧命)을 이었도다. ⑤
생사(生死)를 초월하여 열반세계 우유(優游)하니
마치 농중(籠中)에 갇힌 새가 벗어남과 같네!
거울같이 맑고 밝은 스님의 정신세계
청정무구(淸淨無垢) 티가 없이 법계(法界)에 두루하네! ⑥
경상북도 예천군의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에서
통현장자(通玄長者) 화엄론(華嚴論)을 자세히 열람하다.
전라남도 순천군의 조계산(曹溪山) 수선사(修禪社)에서
법문을 마치시고 법상(法床)에서 입적(入寂)하다.
일생(一生)동안 갈고 닦아 맑고 깊은 선종수(禪定水)
모든 번뇌 사라지고 담적(湛寂)한 해인삼매(海印三昧)
혁혁(赫赫)한 지혜 광명 그 횃불을 높이 드니
그 광명(光明) 십방세계(十方世界) 골고루 비추시도다.
달마(達磨)가 동토(東土)를 찾아온 뜻을 물음 대해
조주(趙州)는 그 물음에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 했네.
연꽃처럼 맑고 밝아 향기로운 그 법력(法力)
걸림없는 사변재(四辯才)로 진종(眞宗)을 연설하다. ⑨
사방(四方)에서 구름처럼 모여든 치백(緇白) 중(中)에는
수백명(數百名) 왕공사서(王公士庶) 수선사(修禪社)에 입사(入社)했네!
현하(懸河)같은 변재(辯才)로써 종지(宗旨)를 천양하니
일음(一音)으로 용용(舂容)한 그 모습 부루방(富樓邦) 같네! ⑩
나고 죽는 인생살이 자세히 살펴보니
유여몽환포영(猶如夢幻泡影)이며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일세.
진(眞)과 망(妄)이 어찌 다르랴! 망(妄)이 곧 진(眞)이니,
손등과 손바닥이 둘이 아닌 것과 같네! ⑪
슬프도다! 법상(法床)에서 석장(錫杖)을 떨치시니
이 세상(世上)의 삼라만상 모두가 하나로다.
훈훈한 봄바람은 버들가지 위에 불고
쏟아지는 소낙비는 배꽃을 강타(强打)하다. ⑫
대금(大金) 대안(大安) 3년 신미(辛未) 12월 일에 전전(殿前) 보창(寶昌)은 비문을 새기고, 대금(大金) 숭경(崇慶) 2년 계유(癸酉) 4월 일에 내시(內侍) 창락궁(昌樂宮) 녹사(錄事) 신(臣) 김진(金振)은 왕명(王命)을 받들어 비석을 세우다.

〔출전:『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4】(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