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용신(蔡龍臣)의 작품세계 Ⅴ-'삼국지연의도',병풍,화조 등
(1850~1941)
1.삼국지연의도 三國志演義圖
‘삼국지연의도’ 중 <삼고초려> 일부.
제갈량이 지도를 가리키며 ‘천하삼분책’을 설명하고 있다. 시계 방향으로 유비, 관우, 장비이다. [조선민화박물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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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 어진(御眞·임금의 초상)을 그린 초상화가로 이름을 떨친 채용신(1850~1941)의 ‘삼국지연의도’ 실물이 확인됐다. 조선민화박물관(관장 오석환)은 채용신의 ‘삼국지연의도’ 연작을 11일 본지에 공개했다. 세로·가로가 각각 169㎝, 183㎝ 달하는 그림 총 8폭으로 이뤄진 대작이다.
도원결의를 담은 ‘재우마소고천지(宰牛馬昭告天地)’, ‘삼고초려(三顧草廬)’, 조자룡의 활약상을 그린 ‘자룡단기구주(子龍單騎救主)’, 제갈량이 동남풍을 일으키는 장면 ‘공명행동남풍(孔明行東南風)’, ‘적벽대전(赤璧大戰)’, 관운장이 조조를 놓아주는 내용을 담은 ‘의석조조(義釋曹操)’, 제갈량의 활약상을 그린 ‘서성탄금(西城彈琴)’, 관운장이 칼 한 자루에 의지해 노숙의 잔치에 찾아가는 ‘단도부숙(單刀赴肅)’ 등이다.
연작 중 ‘단도부숙’ 편에 ‘임자맹춘상한종이품전정산군수 신채용신사상(壬子孟春上澣從二品前定山郡守 臣蔡龍臣寫上)’이란 관지가 적혀있다. “1912년 초봄상순 전직 종2품 정산군수였던 신하 채용신이 그려 올립니다”로 풀이된다.
그림 안의 편액에 제목을 써놓는 등 궁중회화 형식을 띄고 있다. 경주대 문화재학부 정병모 교수는 “나라를 뺏긴 뒤인 1912년에 ‘신하’라는 표현을 쓴 걸로 보아 구국 활동을 벌이던 고종황제가 채용신에게 ‘삼국지연의도’의 제작을 의뢰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삼국지연의도’는 관우신앙을 상징하는 종교화다. 관우신앙은 명나라 장수들에 의해 조선에 전파됐다. 왜적을 물리친 것이 ‘관왕의 위령’ 덕이라 믿었던 명 장수들은 조선 곳곳에 관왕묘를 짓게 했다. 조선 왕들도 관우신앙을 장려했다.
왜적을 크게 격파한 지역인 강진 고금도(古今島)의 관왕묘에는 정조가 1791년 ‘탄보묘’란 사액을 내리고 “적토마 타고 푸른 칼자루 장식으로(…)일본 섬 오랑캐의 간담을 서늘케 하여 이에 땅을 편안케 하였으니”라는 치제문(致祭文)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순조2년(1908년) 일제의 지시에 따라 관왕묘 제사는 폐지됐다.
채용신은 1905년 최익현(1833~1906)의 초상화를 그리는 등 위정척사를 주장하던 유림, 의병장과 독립운동가, 원불교 지도자와 교류했다. 적벽대전에서 주유가 소수의 군사로 조조의 대군을 물리쳤던 것처럼 우리나라가 일본을 물리치길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 그림에 담았으리라 추정된다.
그림의 주인공은 중국풍이지만, 자연과 건축 등의 배경은 조선의 것이다. 정 교수는 이 역시 “민족의식의 발현으로서 독자적인 한국적 화풍을 개척한 결과”라 해석한다. 정 교수는 “초상화가로 이름 높은 채용신이 이렇게 역동적인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랄 일이고, 작품의 규모나 수준도 대단하다”며 “특히 혼비백산해 도망가는 조조의 군대를 표현한 ‘적벽대전’은 지금껏 알려진 삼국지연의도 중 최고”라고 말했다. 오석환 관장은 “내년 7월 29일 개관10주년 즈음 특별전을 열고 일반에 공개하겠다”고 말했다.
[출처] : 영월=이경희 기자 / 중앙일보
적벽대전
‘공명행동남풍(孔明行東南風)’,
‘자룡단기구주(子龍單騎救主)’
‘의석조조(義釋曹操)’
‘재우마소고천지(宰牛馬昭告天地)’
‘재우마소고천지(宰牛馬昭告天地)’
삼국지연의도’ 중 ‘삼고초려’ 일부. 제갈량이 지도를 가리키며 ‘천하삼분책’을 설명하고 있다.
시계 방향으로 유비, 관우, 장비이다
채용신(蔡龍臣)의 <삼국지연의도 三國志演義圖>에 대하여
이번 전시회에서는 채용신이 그린 명나라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의 내용을 그린 <삼국지연의도>를 소개한다. 모두 8폭으로, 각 폭의 크기가 세로 169, 가로 183cm로 매우 장대한 작품이다. 이 그림은 감상용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 관우를 모시는 관왕묘(關王廟)에 봉안되었던 예배화이다.
특히 벌 때처럼 공격하는 주유 군사와 혼비백산하여 도망가는 조조 군사들의 표정을 극적으로 표현한 <적벽대전 赤璧大戰)은 지금까지 알려진 삼국지연의도 가운데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작품은 황개(黃蓋)를 앞세운 주유(周瑜)군사의 배가 제갈량의 기도 덕분에 부는 동남풍으로 화공하여 쇠사슬로 묶여있는 조조 군사의 선단을 불바다로 만든 장면을 그린 것이다.
채용신은 원래 정3품의 경상도 칠곡군수와 종2품의 전라도 정산군수를 역임한 무관 출신으로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한 지방화가이다. 워낙 초상화의 솜씨가 뛰어나서, 지방화가임에도 불구하고 고종어진 등과 같은 임금의 영정을 제작하는 일에 특채되었다. 그는 최익현초상, 전우초상 등 구한말에 활동한 의병이나 일제강점기 때의 애국지사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로도 유명하다.
채용신의 삼국지연의도를 처음 조사, 연구한 경주대학교 정병모 교수는 “이 <삼국지연의도>는 단순한 종교화라기보다는 관우신앙에 힘입어 일제에 의해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간절한 염원 속에서 고종이 채용신에게 특별히 제작케 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고, “한국 전통 인물화의 끄트머리를 화려하게 장식한 작품”으로 보았다.
또한 정교수는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된 동묘의 <삼국지연의도>와 더불어 우리나라 삼국지연의도를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조선민화박물관 석지 채용신의 삼국지연의도 특별전 초대장 중에서)
[출처] 채용신의 삼국지연의도 특별전|작성자 윤홍규
채용신의 삼국지연의도는 본래 관우사당에 걸려있던 예배화로 관우신앙을 배경으로 그려진 작품이다. 관우를 신격화한 관우신앙은 임진왜란 당시 출병한 명나라 군사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이후, 삼국지연의의 인기를 발판으로 빠른 속도로 전국에 확산됐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동묘(東廟, 보물 142호)가 대표적인 관우사당이며, 전라도 지역에도 전주, 남원 등에 현존하고 있다.
채용신은 본래 무관이었으나 고종에 의해 어진(御眞, 임금의 초상) 화가로 발탁된 후, 태조를 비롯한 7대 임금의 초상화를 모사해 인물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또 최익현과 황현을 비롯한 우국지사와 의병들의 초상화 제작에도 힘써 시대와 조국의 아 픈 현실에 대한 의지를 그림을 통해 나타내려 노력한 인물이다. 이번에 전시되는 ㎝의 장대한 스케일의 보기 드문 대작으로, 이러한 맥락에서 제작된 것이다.
제작 당시인 1912년은 일제강점기 상황이었지만 채용신은 작품에 자신의 마지막 관직을 적어 넣어 조선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민화 병풍으로 꾸며진 삼국지연의도도 만날 수 있다. 웅장하고 강렬한 채용신의 작품과는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로, 해학적이고 친근한 모습의 유비, 관우, 장비
활짝 핀 진달래 사이로 나비 정겹게 날고, 사립 안 나무 아래 어미개가 새끼들 젖먹이고, 매화에 제비 깃드는데 개구리가 올챙이 노니는 양 바라보고, 누각에서 담소하는 선비로부터, 수령의 부인이 가마로 군졸을 대령하고 강을 건너려는 풍경까지…산수에서 기명절지나 영모 등등으로 여러 장의 소품을 하나의 병풍에 안배한 것을 백납병百衲屛이라 한다.
황후의 몸으로 무엇이 부러웠으며 무엇을 더 가질게 있었겠느냐마는 피난길에서도 다른 진보珍寶를 마다하고 이 병풍을 함께 가지고 부산으로 왔다. 겸재며 단원 등 도화서의 일품一品이 있었을 것인데 가장 깨끗하고 채색이 맑고 선명한 이 새 병풍을 더 아끼셨나 보다.
순종황제의 비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1894~1966)께서는 이렇게 간수하신 물건을 부산의 한 집안에 흔쾌히 내려 주시었다. 황후는 윤택영尹澤榮(1876~1935)의 딸로 영의정을 지낸 윤용선尹容善(1829~?)의 증손녀이다. 황후께서 사저에 계실 때 집안의 가장 큰 어른으로 살아 계셨던 분이 바로 그녀의 증조부이셨다.
구한말 면암 최익현의 유해가 부산포로 들어오고 부산이 일본과의 교두보 역할을 맞게 되자 부산은 풍수적으로도 각광을 받게 된다. 윤용선의 묘소가 해운대 장산 자락의 배산임수한 곳을 택한 것이나 철종의 사위인 박영효의 묘소가 부산 다대포의 아미산 자락인 남림南林에 자리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다.
한국전쟁에 해운대의 장지?旨마을로 피난 오게 된 황후는 증조부의 묘소가 전쟁 중에도 정성껏 유지된 데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할 방법으로 이 병풍을 묘소를 관리하던 집안에 주었다. 이 병풍은 초상화로 유명한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1850~1941)이 그린 것으로 원래는 열두 폭에 60점이었다고 전해진다.
채용신과 해평 윤씨 집안과의 인연은 19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태조어진모사의 주관화사로 발탁된 채용신은 모사할 어진을 함경도 영흥의 준원전濬源殿에서 직접 이안해 온 도제조 윤용선을 뵙게 된다.
채용신의 작업을 가까이서 지켜본 윤정승은 부친상으로 관직을 그만 두고 향리로 돌아간 그를 천거하여, 충남 정산군수定山郡守의 보임補任을 맡기게 하였다. 채용신에게는 정산군의 군수직이 그의 마지막 실직이어서인지 이후의 그림에 '정산군수'라는 직함과 '정산定山'이라 호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
아마도 이 백납병은 황실의 명에 의해 제작되었을 수도 있으나 이 같은 배려에 대한 보답으로 더욱 정성들여 그려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림 1) 채용신, <미법산수도>, 견본담채, 33.8×15.0cm, 부산박물관
그림 2) 채용신, <소과도>, 견본채색, 26.5×17.6cm, 부산박물관
지금은 60점의 그림이 뿔뿔이 흩어져 9점의 그림만으로 이 병풍의 전모를 추정할 수 밖에 없지만 흥미로운 화목들이 눈에 띈다. 미불米?(1075~1151)를 배웠던 고극공高克恭(1248~1310)의 화의畵意로 그린 <미법산수도>, 청대 상해화풍의 산뜻하고 화려한 감각의 <소과도蔬果圖>, 은일풍취를 그린 <춘강선유도春江船遊圖>나 <누각산수도>, 그리고 평안과 장수長壽, 집안번창 등의 기복적 바램을 담은 <화조도>, <묘두응도猫頭鷹圖>, <수하유견도樹下乳犬圖> 등이 그것이다.
백납병은 원형圓形, 方形방형, 선형扇形 등등 갖가지 모양의 화면에 화훼, 괴석, 화조, 어해, 영모, 산수, 인물, 기명절지 등의 다양한 소재를 그려 붙여 병풍으로 만든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이는 대작이 아니므로 편하게 자신의 장기를 드러낼 수 있으며 설사 잘못 그렸더라도 대체代替가 가능하고 잘된 것만 골라서 구성이 가능하였다. 또 화면과 소재가 다양했기에 아기자기한 병풍으로 꾸밀 수가 있어 여성취향적인 것이었다.
그림 3) 채용신, <누각산수도>,견본담채, 15.7×23.5cm, 부산박물관
그림 4) 채용신, <여인도강도>, 견본담채, 31.9×29.0cm, 부산박물관
이 같은 정황으로 보아 초상화의 대가로 알려진 채용신이 그 한 장르에만 매달린 것이 아니라 회화의 여러 분야를 섭렵하였고, 그 다재다능한 능력을 이 백납병 제작을 통해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극세필과 음영법으로 핍진逼眞함을 추구했던 초상화뿐 아니라 현전하는 그의 화조영모화와 산수인물도 역시 구륵진채법鉤勒眞彩法, 극세극채법極細極彩法으로 화려하고 섬세하게 작업한다는 것이 그에 대한 대체적 평가였는데 이 9점의 낱장 그림은 이러한 일반적 평가에 수정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 그림에 나타나 있는 남종화의 미법산수화풍, 소재와 색채에 있어서의 청대 해상화파 화풍과의 친연성, 풍속화적 제재와의 결합 등이 그것이다. 채용신은 여전히 극세필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나 조선말기 유행하던 여러 화목과 당시 화단에 풍미하던 새로운 화풍을 인식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지금까지 민화계열로 분류되던 채용신의 화조영모화 병풍 가운데 궁중회화로 재평가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한 셈이다.
그림 5) 채용신, <묘두응도>, 견본채색, 22.5×24.2cm, 부산박물관
그림 6) 채용신 <수하유견도>, 견본채색, 31.2×25.9cm, 부산박물관
그리고 백납병 수요층에 관한 재고再考 또한 필요할 것이다. 백납병은 조선말기에 특히 많이 제작되어 유행한 양식으로 알려져 있다. 19세기 저변화된 수요층의 양상과 그들의 고조된 서화애호취향을 여실히 보여주는 현존 백납병들은 유숙劉淑(1827~1873), 안건영安健榮(1841~1876) 등의 것으로 전하는 조선말기 문인적 취향을 보여주는 작품들 외엔 작자미상의 민화적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순정효황후가 애장했던 이 병풍을 통해 향유층이 궁중까지 확대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앞으로의 백납병 연구에도 중요한 사료가 될 것으로 여겨진다.
60여장이 넘는 낱낱의 그림이 인연 따라 병풍으로 만들어졌다가 또 인연을 따라서 한 장 한 장 흩어짐에 애틋함을 가진다. 아직 우리나라의 이 곳 저 곳에 흩어져 있을 다른 그림들이 다시 인연을 따라서 한 곳에 모여지기를 마음으로부터 기다려 본다.
▲ 문화재청 부산국제여객터미널 문화재감정관실 이현주 감정위원
3.병풍
화조6폭평풍 세로82.6cm 가로 29.1cm 전체 174.6cm 순천대학교 소장
화조6폭평풍 세로90cm 가로 38cm 전체 228cm 순천대학교 소장
제 6폭에 무신유하랑객석지사라는 관서가 있는 것으로 보아 1908년에 제작되었음을 알수 있다. 전체적으로 각 폭마다 되석과 화조를 함게 그리는 전형적 민화양식을 취하고 있다. 마본에 그려졋인지 채색화임에도 색채가 화려하기보다 차분하게 붇혀있다.
각폭의 꽃잎과 새의 묘사는 구륵법으로섬세하게 윤곽을 잡았고 나무 줄기와 잎은 몰골법을 사용한 그의 묘사력을 보여주며, 새들의 가는필선묘사는 그의 초사화의 극세필 묘사를 연상케한다. 주로 초상화가로 많이 아려진탓에 그가 그린 화조화에 대한연구가 미진한 상태에서 이런작품을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흐뭇한 일이다
제5폭 <국순도> 이그림의 구도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김홍ㄷ도 의 국추비순도와 매우 유사한 구도와 소재로 그려졌다. 강 언저리에 나와 가을 의 한정을 즐기고 있는 메추라기 한쌍을 그리고있다. 특히 강물이 담채묘사와 괴량감을 살린 괴석은 서양화법의 영향을 였볼수 있다.
그러나 제1.4.5폭에서 도식적인 시냇물은 조선 중기 절파화풍에서 보여지던 흑백의 대조가 심한 물의묘사에 대하 ㄴ변형으로 그림전체의사실적 묘사력을 반감시키고 있다.
화조영모도 10곡병
미인도 8곡병八道 美人圖
채용신이 그렸다는 팔도미인도(八道美人圖)는 실제 인물을 모델로 삼아 그렸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작품이다. 조선시대 팔도(八道) 미인(美人)의 구체적인 얼굴형과 특징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8폭(幅)짜리 병풍으로 그렸다.
이 병풍 속 미인(美人)들은 서울, 평양(平讓), 경남 진주(晉州), 전남 장성(長城), 강원 강릉(江陵), 충북 청주(淸州), 전북 고창(高敞) 등 8개 지역(한 곳은 미상)의 미인(美人)과 기생(妓生) 등 8명의 전신상(全身像)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평양 기생 계월향(桂月香), 장성 관기(官妓) 지선(芝仙), 진주 관기(官妓) 산홍(山紅), 강릉 미인 일선(一善) 처럼 각각의 화폭에는 주인공의 실명(實名)이 적혀 있다. 한 예로 그림 속의 진주 미인은 이마가 낮고 가로로 넓으며 눈썹이 높게 붙어 눈두덩이 넓고, 눈 사이도 넓은 편이다. 이 진주 미인은 중안(눈썹에서 코 끝 사이)이 길어 기품이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또 턱 부분이 작고 인중(人中 .. 코아 윗입술 사이에 오목하게 골이 진 부분)이 짧아서 젊은인상을 주는 등 현대적인 시각으로 보아도 아름다운 여인이 아닐 수 없다.
조선시대 미인의 기준은 무엇일까 ?
1번, 강릉 미인 일선(一善)은 이마가 높고 넓어 서글서글한 인상이고,
2번의 평양 미인 계월향(桂月香)은 턱이 뾰족하고 광대뼈가 도드라지지만 이록구비가 적어 전형적인
미인의 모습이다.
3번, 함경도 미인 취련(翠蓮)은 입술과 눈이 작으면서도 맵시 있고,
4번의 청주 미인 매창(梅窓)은 다소곳한 모습이 기품 있다.
5번, 장성 미인 취선(翠仙)은 눈이 크고 눈썹이 길어 아담한 느낌이고,
6번 화성 미인 명옥(明玉)은 기다란 눈가 코가 매력적이다.
7번, 진주 미인 산홍(山紅)은 둥그스럼한 얼굴에 이마가 편평해 우아한 멋을 자아내고
8번 서울 미인 홍랑(紅朗)은 볼이 통통하고 콧방울이 커 애교 넘치는 모습이다.
팔도미인도의 인물들은 모두 역사상 실존 인물들로 조선 초기부터 구한말 시대에 이르기까지 500년 역사 속에서 각 시대를 풍미하던 유명한 기생(妓生)들이다. 이들은 모두 시서화(詩書花)에 능하여 선비들과 풍류를 논함에 부족함이 없었고, 그들이 남긴 시(詩)들은 시대를 초월하여 현대 교과서에 실려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들이 진정한 미인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그녀들의 아름다운 행실과 마음 때문이다. 평양 미인 계월향은 임진왜란 당시 평양성에 침입한 왜장(倭將)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며, 진주 기생 산홍(山紅)은 을사오적(乙巳五賊) 중 한 명이 천금을 주며 첩(妾)으로 삼으려 하자 단호히 거절한 의기 높은 인물이다. 또한 청주 미인 매창(梅窓)은 의병장 유히경을 사모하며 평생동안 수절하는 높은 절개를 보였다.
십장생도 1920년경 / 80x310 /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3. 채용신이 그린 조선 26대 왕 고종의 초상화
채용신이 그린 조선 26대 왕 고종의 초상화이다. 어진은 나라의 존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국권을 빼앗긴 조선인들에게 그 의미는 더욱 절실하게 여겨졌다. 채용신이 그렸다고 전하는 고종어진은 여러 점이 전해지는데 채용신은 1901년 궁중에서 고종 어진을 그린 후 자신이 가지고 있던 밑그림을 본으로 하여 여러 번 고종어진을 그린 것으로 짐작된다.
본래 어진은 개인이 소유할 수 없다는 오랜 전통이 있었으나 근대 옛 왕조를 못잊는 일부 계층들이 어진을 소장해 왔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 작품은 고종임금이 정면을 보며 용상에 앉아있는 모습으로, 특이한 점은 배경에 오봉병이 둘러져있다는 점이다.
해와달 그리고 다섯개의 봉우리가 그려진 오봉병은 왕조의 무궁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왕의 공간임을 암시하는 오봉병을 그려넣어 쇠락해가는 왕실의 권위를 강조하려는 의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채용신의 어진은 전통초상화에 바탕을 두면서도 서양화법과 근대 사진술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4. 기타
관세음보살도 32.4 X 67.6 cm
본명은 동근(東根), 자는 대유(大有), 호는 석지(石芝)·석강(石江)·정산(定山)이다. 1850년 서울 삼청동에서 대대로 무관을 지낸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돌산진수군첨절제사(突山鎭水軍僉節制使)를 역임한 채권영(蔡權永)이고 어머니는 밀양 박씨(密陽 朴氏)이다. 1886년 무과에 급제하여 20년 넘게 관직에 종사하였다. 어려서부터 그림 재주가 뛰어났으며 흥선대원군의 초상을 그리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전통양식을 따른 마지막 인물화가로, 전통 초상화 기법을 계승하면서도 서양화법과 근대 사진술의 영향을 받아 '채석지 필법'이라는 독특한 화풍을 개척하였다. 화법의 특징은 극세필을 사용하여 얼굴의 세부 묘사에 주력하고, 많은 필선을 사용하여 요철·원근·명암 등을 표현한 점 등이다.
1905년 관직을 마치고 전라북도 전주로 내려와 익산·변산·고부·나주·남원 등지를 다니면서 우국지사와 유학자들의 초상을 그리는 데 몰두하였다. 1941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 일본인 관리의 주선으로 6월 4일부터 10일까지 서울의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유작전이 열렸다.
고종의 어진(御眞)을 비롯하여 이하응(李昰應)·최익현(崔益鉉)·김영상(金永相)·전우(田愚)·황현(黃玹)·최치원(崔致遠) 등의 초상과 《고종대한제국동가도(高宗大韓帝國動駕圖)》 등을 그렸으며, 《운낭자 27세상(雲娘子二十七歲像)》 《황장길부인상(黃長吉夫人像)》 등 여인상도 그렸다. 이 중 《운낭자 27세상》 《최익현 초상》 등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출처] 채용신 [蔡龍臣 ] | 네이버 백과사전
침략국의 은사금 받을 수 없다 - 그림 속의 지사, 춘우정 김영상
채용신이 그린 춘우정 투수 순절도
일본 순사들에 의해 배에 끌려 가다가 강물로 뛰어 들어 죽으려하는 지사 춘우정
일왕의 은사금 증서를 삼켜버린 춘우정 김영상
김영상은 정읍군 정우면 수금리에서 1836년에 태어났다. 학문에 정진하여 당대의 저명한 유학자들과 교류하였으나 1895년 명성왕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자 일체의 활동을 중단하고 학문을 닦는 일에만 정진하였다.
조선의 국권을 빼앗아간 일본은 분노한 민심을 달래기 위해 조선의 이름 있는 유학자 100여명에게 천황 이름으로 ‘노인 은사금’이라는 것을 내린다. 정읍 칠보에 살고 있던 춘우정은 국권을 강탈한 일왕의 더러운 돈을 받을 수 없다며 일왕 도장이 찍힌 은사금 증서를 찢어 입에 넣어 씹어서 삼켜 버린다.
이 일로 김영상은 천황모독죄로 군산 감옥으로 끌려가게 된다. 군산으로 압송되는 도중 사창진이란 포구 근처에서 입고 있던 옷의 의대에 절명사를 남기고 강물에 뛰어 들었으나 실패하고 군산 감방에 구금되었다. 옥중에서도 음식을 거부하여 단식투쟁을 하다가 절명하였다.
그의 마을 사람들은 그의 절개를 기리기 위해 무궁화를 사모한다는 의미로 정우면 수금리에 모근정(慕槿亭)이란 정자를 세웠다.
모근정 - 무궁화를 사모하는 정자라는 의미
시골 마을에 건립된 모정 같은 정자이다
춘우정과 어진화가 채용신
일제의 국권침탈에 저항하여 순절한 김영상의 정신도 훌륭하거니와 일제가 억압을 하는 줄 뻔히 알면서도 이를 그림으로 표현하여 후세에 알리고자 한 채용신의 정신 또한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그림의 원본은 칠보 태산선비문화자료관에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