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2(명종 7) 경남 의령~1617(광해군 9).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개요
의령·창녕·영산 등지에서 크게 활약하면서, 왜적의 호남 진출을 저지하는 데 공을 세웠다.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 홍의장군(紅衣將軍)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 월(越)이며, 조식(趙植)의 외손녀 사위이자 문인이다. 대제학을 지낸 김우옹(金宇顒)과는 동문이자 동서지간이다.
1585년(선조 18) 정시문과에 뽑혔으나, 글의 내용이 왕의 미움을 사서 합격이 취소되었다. 그뒤 향촌에 거주하고 있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신의 재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켰다. '천강홍의대장군'(天降紅衣大將軍)의 깃발을 내걸고 혼자서 말을 타고 적진에 돌진하여 적에게 두려움을 주기도 했으며, 함성으로 군사가 많은 것처럼 꾸미기도 하여 적을 물리쳤다. 1592년 5월 솥바위나루[鼎巖津]를 건너려는 일본군을 크게 무찔러 의령·삼가·합천 등의 고을을 지켜냈고, 일본군이 호남으로 침략해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또한 거름강[岐江]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일본군의 보급로를 가로막았으며, 현풍·창녕·영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물리쳤다. 10월 김시민(金時敏)의 1차 진주성 싸움에 자신이 거느린 의병을 보내 응원하기도 했다. 의병활동의 공으로 7월에 유곡찰방(幽谷察訪)에 올랐고, 10월에는 절충장군 겸 조방장(折衝將軍兼助防將)이 되었다. 1593년 성주목사로 임명되어 삼가(三嘉)의 악견(岳堅)산성을 쌓았다. 1595년 진주목사가 되었으나 그만두고 현풍으로 돌아왔다. 1597년 경상좌도방어사로 나가 현풍에 석문(石門)산성을 쌓는 도중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창녕 화왕(火旺)산성으로 옮겨 밀양 등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적을 막았다. 그해 8월 계모 허씨가 죽자 장례를 지내고 울진으로 돌아갔다.
1599년 경상우도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상중(喪中)임을 구실로 나가지 않았다. 그해 10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올라 경주·울산의 전투경험이 많은 군사 2,000명을 수성군(守城軍)으로 삼고, 내륙에 있는 잡병 6,000명은 고향으로 돌려보내 농사에 충실하게 해달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 때문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영암으로 귀양갔다가 1년만에 풀려났다. 그뒤에는 현풍 비슬산(琵瑟山)에 살면서 영산의 창암진(滄巖津)에 망우정(忘憂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의병을 일으키기 이전의 생활로 되돌아갔다. 1604년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찰리사(察理使)·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가선대부용양위상호군 등에 임명되고, 광해군 즉위 뒤에도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삼도수군통제사, 호분위부호군, 대호군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한성부좌윤, 전라도병마절도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거의 사양하거나 곧 사퇴했다. 1613년(광해군 5)에는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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