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방의는 함흥의 객사인 함산관(咸山館)에서 진행되었다. 정전을 중심으로 문무, 갑, 을, 병과의 합격자들이 줄지어 서있고, 건물 내부에는 합격자에게 하사하는 어사화와 홍패가 있다. 당시 과거시험의 합격자는 문과에 세 명, 무과에 300명이다. 이들은 홍색, 청색, 녹색의 삼색 의복에 오사모 흑각대 등을 착용했다. 함산관 담장 밖에는 경사스러운 행사를 구경하기 위한 구경꾼도 엿보인다. [길주과시도]와 [함흥방방도]는 지도의 형식을 차용한 회화이다. 지도식 회화는 특정 지역의 지리적 조건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면서 중요 건물을 부각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객관성과 주관성이 공존하는 작화법의 모순인 셈이다. [북새선은도]에서도 길주, 함흥 두 읍성의 중요건물과 행사장면은 크고 자세하게 묘사된 반면, 중요하지 않은 요소는 과감히 생략되었다. 한반도의 북동쪽 요새인 길주와 함흥에 축조된 성곽과 관사를 강조함으로써 함경도가 중앙의 통치 영역임을 새삼 드러낸 것이다. [북새선은도]의 작가, 한시각 그렇다면 누가 [북새선은도]를 그렸을까. [함흥방방도] 하단에 ‘한시각’이라는 화가의 도장이 희미하게 찍혀 있어, [북새선은도]의 작가를 한시각으로 여기고 있다. 한시각은 기술직 중인가문으로 알려진 청주 한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한선국(1602-?)과 동생 한시진, 종형제인 한제국과 한신국이 모두 화원출신이었다. 특히 한선국은 궁중행사에 여러 번 차출된 이력이 있는 화원이었다. 1637년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세조의 영정을 다시 그릴 때 선발되었고, 1645년 소현세자의 빈궁도감에서 모란병풍을, 1649년 인조의 빈전도감에서 김명국과 함께 오봉산 병풍을 제작했다. 이 밖에도 한시각의 친인척에는 화원이 적지 않았다. 16세기 소경인물화를 잘 그렸던 윤인걸의 아들인 윤효선과, 숙종의 총애를 받은 이명욱은 한시각과 혼인으로 맺어진 식구였다. 청주 한씨 집안은 화원뿐만 아니라 의관, 역관을 배출한 17세기의 전형적인 기술직 중인가문이었다. 큰아버지인 한상국은 대마도주를 위로하기 위해 일본에 갔었고, 의관인 한형국은 한시각과 함께 통신사행에 가담했다. 집안 전체가 외국과의 업무를 담당했던 외교관인 셈이다. 한시각은 스무 살을 전후하여 도화서에 들어갔고 스물다섯 살 무렵부터 중요한 궁중행사에 참여했다. 그는 인물화, 산수화, 기록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군의 실력을 드러냈다. 총 22회나 의궤제작에 참여했는데, 이는 김명국의 15회, 이기룡의 10회보다 월등이 많은 수치였다. 또한 초상화를 잘 그려 1688년 진재해와 함께 태조의 어진모사를 했고, 송시열의 77세 초상화를 그렸다. 17세기를 대표하는 도화서 화원이었던 그는 중국과 일본사행에 수행화원으로 선발되기도 했다. 아마 집안 대대로 역관을 배출했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1682년 중국사행을 다녀온 뒤 공로자 시상을 받았고, 1655년 통신사 수행화원으로 발탁되어 일본을 방문했다. 1655년 통신사는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쇼군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된 사절단이다. 당시 한시각은 일본에서 대나무그림, 화조화, 도석인물화를 남겼는데, 특히 일본의 실경산수화를 그렸다고 전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