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의 뜨락/문화재 탐방

韓時覺의 北塞宣恩圖

채현병 2013. 1. 12. 10:11

 

한시각 - 북새선은도오늘의 미술

2012/06/06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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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각 [북새선은도] 1644
비단에 색ㅣ국립중앙박물관

화사한 청록물감으로 연출된 장대한 기록화이다. 가로 길이 6m가 넘는 화폭에는 험준하면서도 부드러운 산세가 병풍처럼 장막을 쳤고, 길고 튼실한 성곽이 그 아래에 위치하며 마을전체를 둥글게 에워쌌다. 화면 중앙에는 이 지역의 관아가 굳건히 자리 잡아 권위와 위엄을 드러냈고, 그 주변은 여러 행사가 한창인 듯 울긋불긋한 옷차림의 등장인물이 분주히 움직인다.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척박한 땅이었던 함경도에서 치러진 과거시험의 현장. 북쪽에 있는 변방(북새)까지 베풀어진 임금님의 은혜(선은)를 의미하는 17세기의 기록화. 한시각(韓時覺, 1602-?)이 그린 것으로 알려진 [북새선은도(北塞宣恩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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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새선은도]와 함경도

1664년 한반도의 척박한 외지였던 함경도에서 그 지역 최초로 문무 양과의 과거시험이 시행된다. 당시 함경도는 중앙의 손길이 닿을 수 없어 가장 소외되고 낙후된 지역이다. 중국과 대치한 국경지대였기 때문에 외세의 침략에 늘 시달려야 했고, 계속된 이상기후와 자연재해로 백성들의 민생고가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함경도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청나라를 견제해야 하는 조선왕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북방 영토에 대한 여론이 새삼 뜨거워졌다. 조선 왕실은 국경지역을 굳건히 사수하고 이 지역의 지배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뜨거운 감자’로 급부상한 함경도를 키울 수 있는 프로젝트는 무엇일까? 그 해답은 바로 인재를 새롭게 발굴하고 등용하는 ‘과거시험’이었다.

이렇듯 함경도에서 시행된 과거시험은 변방의 민심을 다스리면서 국가 위기를 극복하려는 의도였다. 특히 비정기적으로 치러지는 별시는 국가나 왕실에 경사가 있거나, 그 반대로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임금과 백성이 단결하여 이를 극복하기 위해 거행된 자국지책이었다. 함경도의 민심을 회유하고 백성의 기를 살려줄 계기가 절실했던 것이다. 왕실은 중앙관료인 김수항(1629-1689)을 비롯하여, 이미 그 지역에 파견된, 민정중(1628-1692), 민유중(1630-1687), 이단하(1625-1689), 어진익(1625-1684), 조성보, 홍석구, 김극화 등을 문관시험관으로 선발했다. 이들은 높은 학식과 예학을 신조로 여겼던 송시열 계열의 문사관료였다. ‘함경도 프로젝트’를 위해 사당을 세워 유교의 본분과 질서를 바로잡았고, 지도를 제작하면서 지리학적 탐구에 힘썼다. 미처 임금의 손이 닿지 않은 변방도 왕실의 통치 하에 있다는 중앙 지배력의 건재를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북새선은도]의 구성

앞서 언급했듯이 ‘북새선은’은 북쪽 함경도 지역까지 이른 임금님의 은혜를 뜻한다. 전체 6m가 넘는 긴 두루마리로 장첩된 [북새선은도]는 ‘북새선은’이라는 전서체의 제목, [길주과시도(吉州科試圖)], [함흥방방도(咸興放榜圖)], 시관명단, 합격자명단으로 구성되었다.

한시각 [길주과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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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주과시도]는 문무과 시험이 한창인 길주성과 그 주위경관을 그린 회화식 지도이다. 현재 함경북도 북서부에 위치한 길주는 함경산맥과 마천령 산맥 사이에 있기 때문에 대부분 산지로 구성된 읍성이다. 한양에서는 북동으로 1천4백64리 떨어져 있고, 남쪽으로 바다를 향하고 있다. [길주과시도]에서 길주성은 위에서 내려다 본 시점으로 읍성의 내부를 중앙에 배치했고, 그 주변을 실경의 산세로 처리했다. 길주성의 성곽은 좌우로 긴 타원형인데, 외부는 석벽으로, 내부는 토성으로 축조된 이중구조이다. 성곽 뒤에는 뾰족한 산세와 부드러운 산등성이가 이어진다. 음력 8월에 열린 시험절기를 암시하듯 군데군데 붉게 물든 무성한 수목이 연출되었다.

[길주과시도] 세부 – 문과, 무과 시험 장면

길주 객사 안팎에서는 문과와 무과 시험이 한창이다. 문과시험은 길주 관아의 마루와 마당에서 치러진다. 문과의 시제는 ‘龍興江賦(용흥강에 관한 문장)’이고, 시험관은 김수항, 민정중, 어진익이다. 용흥강은 함경남도를 흘러 동해로 진입하는 강이니, 이 지역의 지리를 고려한 시험문제가 출제된 셈이다. 관아 내부에는 북벽에는 의자 세 개가 배치되었고, 두 명의 감독이 앉아 있다. 아마 빈자리는 무과시험장을 둘러보고 있는 김수항의 좌석일 것이다.

또한 길주 객사 밖 오른편에는 무과시험이 한창이다. 짚으로 된 인형모양의 표적을 맞추는 시험이다. 무과장에는 열 개의 표적이 좌우 다섯 개씩 배치되었고, 응시자는 말을 달리며 이 표적을 향해 번갈아 활을 쏜다. 명중하면 붉은 기를 올리며 북을 쳤고, 실패하면 흰 기를 올리며 징을 쳤다. 그림의 시험관은 붉은 기를 올려 명중을 표시한다. 그 옆에는 시험관들과 순서를 기다리는 응시자들이 서 있는데, 무과시험의 감독은 김수항, 한여윤, 남숙이다.

한시각 [함흥방방도]

[함흥방방도]는 음력 10월 6일 함흥에서 시행된 방방행사, 즉 과거급제자의 발표의식 장면이다. 현재 함흥은 함경남도 남서쪽에 위치한 도소재지이다. 성천강이 흐르고 동해와 접해 있어 함경도에서 비교적 따듯한 지역이다. [북새선은도]의 함흥성은 탄탄한 성곽으로 표현되었다. 화면 가장 높은 곳에 ‘북산루(北山樓)’라는 누각이 배치되었고, 성곽을 따라 누각과 성문이 등장한다. 그림 속의 함흥성은 선조임금 때 축조되었다. 북산루 오른편에 소나무 숲을 병풍처럼 둘렀고 그 내부에는 백성들의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초가로 표현되어 번화한 함흥의 읍성을 보여준다.

함흥의 북문 <출처: 자유이용사이트>

방방의는 함흥의 객사인 함산관(咸山館)에서 진행되었다. 정전을 중심으로 문무, 갑, 을, 병과의 합격자들이 줄지어 서있고, 건물 내부에는 합격자에게 하사하는 어사화와 홍패가 있다. 당시 과거시험의 합격자는 문과에 세 명, 무과에 300명이다. 이들은 홍색, 청색, 녹색의 삼색 의복에 오사모 흑각대 등을 착용했다. 함산관 담장 밖에는 경사스러운 행사를 구경하기 위한 구경꾼도 엿보인다.

[길주과시도]와 [함흥방방도]는 지도의 형식을 차용한 회화이다. 지도식 회화는 특정 지역의 지리적 조건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면서 중요 건물을 부각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객관성과 주관성이 공존하는 작화법의 모순인 셈이다. [북새선은도]에서도 길주, 함흥 두 읍성의 중요건물과 행사장면은 크고 자세하게 묘사된 반면, 중요하지 않은 요소는 과감히 생략되었다. 한반도의 북동쪽 요새인 길주와 함흥에 축조된 성곽과 관사를 강조함으로써 함경도가 중앙의 통치 영역임을 새삼 드러낸 것이다.

[북새선은도]의 작가, 한시각

그렇다면 누가 [북새선은도]를 그렸을까. [함흥방방도] 하단에 ‘한시각’이라는 화가의 도장이 희미하게 찍혀 있어, [북새선은도]의 작가를 한시각으로 여기고 있다. 한시각은 기술직 중인가문으로 알려진 청주 한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한선국(1602-?)과 동생 한시진, 종형제인 한제국과 한신국이 모두 화원출신이었다. 특히 한선국은 궁중행사에 여러 번 차출된 이력이 있는 화원이었다. 1637년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세조의 영정을 다시 그릴 때 선발되었고, 1645년 소현세자의 빈궁도감에서 모란병풍을, 1649년 인조의 빈전도감에서 김명국과 함께 오봉산 병풍을 제작했다.

이 밖에도 한시각의 친인척에는 화원이 적지 않았다. 16세기 소경인물화를 잘 그렸던 윤인걸의 아들인 윤효선과, 숙종의 총애를 받은 이명욱은 한시각과 혼인으로 맺어진 식구였다. 청주 한씨 집안은 화원뿐만 아니라 의관, 역관을 배출한 17세기의 전형적인 기술직 중인가문이었다. 큰아버지인 한상국은 대마도주를 위로하기 위해 일본에 갔었고, 의관인 한형국은 한시각과 함께 통신사행에 가담했다. 집안 전체가 외국과의 업무를 담당했던 외교관인 셈이다.

한시각은 스무 살을 전후하여 도화서에 들어갔고 스물다섯 살 무렵부터 중요한 궁중행사에 참여했다. 그는 인물화, 산수화, 기록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군의 실력을 드러냈다. 총 22회나 의궤제작에 참여했는데, 이는 김명국의 15회, 이기룡의 10회보다 월등이 많은 수치였다. 또한 초상화를 잘 그려 1688년 진재해와 함께 태조의 어진모사를 했고, 송시열의 77세 초상화를 그렸다.

17세기를 대표하는 도화서 화원이었던 그는 중국과 일본사행에 수행화원으로 선발되기도 했다. 아마 집안 대대로 역관을 배출했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1682년 중국사행을 다녀온 뒤 공로자 시상을 받았고, 1655년 통신사 수행화원으로 발탁되어 일본을 방문했다. 1655년 통신사는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쇼군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된 사절단이다. 당시 한시각은 일본에서 대나무그림, 화조화, 도석인물화를 남겼는데, 특히 일본의 실경산수화를 그렸다고 전해진다.

한시각 [사립인물도]
종이에 먹,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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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국 [노엽달마도]
종이에 먹,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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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사립인물도]는 빠른 필치로 삿갓을 쓴 도사의 옆모습을 포착한 작품이다. 마치 고무줄이 풀어진 것과 같은 탄력 있고 변화무쌍한 선으로 잔뜩 웅크린 채 공중부양하는 신선의 옆태를 재현했다. 반면 몸매의 오른쪽은 완전히 생략해서 무한한 공간감과 신비스러움을 연출했다.

1636년과 1643년 두 차례 통신사행으로 일본에 갔던 김명국은 과도한 그림부탁을 감당하기 위해 왜인이 선호했던 간단한 필선의 도석인물화를 많이 그렸다. 따라서 한시각의 이러한 표현법은 그보다 먼저 통신사행에 참여했던 김명국의 영향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한시각은 다소 힘차고 거친 김명국의 필치보다 더욱 감각적이고 감성이 풍부한 선을 구사했다.

이렇듯 한시각은 다양한 분야의 그림을 고루 섭렵하면서 왕실에서 요구한 공적 회화작업에 몸담았던 화원이다. 아마 국가에서 추진한 함경도 프로젝트를 기록할 인물로서 가장 적임자였을 것이다.

함경도에서 치른 과거시험은 국방의 위기를 극복하고 소외된 지방을 부흥하기 위한 의도적인 정책이었다. 또한, 비록 소외되고 낙후된 변방이라도 엄연히 왕도의 질서가 적용된 왕국의 일부임을 확인하는 지방통치의 방법이었다. 행사기록화이자 궁중회화라는 다층적 의미를 함유한 [북새선은도]가 17세기의 걸작으로 기억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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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희경 / 문학박사(한국미술사)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에서 한국미술사를 공부했고, 조선후기 회화사를 전공하여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는 [조선후기 아회도]와 [미술의 이해와 감상]이며,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