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의 뜨락/문화재 탐방

번암의 문학활동

채현병 2014. 11. 14. 15:24

                            <번암의 문학활동>

                                                                       오마이뉴스 / 김종성의 참모열전 중에서 복사

 

채제공(1720~1799)은 정조 임금의 최측근 참모이자 남인당의 지도자였다. 그의 정치적 목표 중 하나는, 남인당을 결집함으로써 노론당의 독주를 견제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정조의 정치적 이상인 탕평 정치를 돕고자 했다. 

18세기 조선, 경상도 차별 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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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제공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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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당은 정조의 증조부인 숙종 때 장희빈의 몰락과 함께 재야로 밀려났다. 이를 계기로 남인당의 주요 거점인 경상도는, 채제공의 문집인 <번암집>에 언급된 것처럼 18세기 내내 찬밥 신세를 겪었다. 참고로, 채제공은 경상도 출신이 아니라 충청도 출신이다.

경상도 출신이자 정조 때 무관이었던 노상추가 일기장에 적었듯이, 조정의 인사 조처가 발표될 때마다 경상도 사람들은 "이번에는 혹시 우리 지역 사람이 들어갔을까?"라며 관심을 표하곤 했다. 그 정도로 18세기의 남인당과 경상도는 심한 차별을 받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채제공은 정조가 왕이 되기 전인 영조 때부터 남인당을 복구하는 일에 주력했다. 이 일은 채제공과 남인당을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탕평 정치를 위해서도 긴요했다. 노론당을 견제할 만한 세력을 구축하는 것은 탕평 정치의 안정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었다.

채제공이 남인당 결집을 위해 구사한 방식은 상당히 독특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그것은 '출판기념회 정치'와 비슷했다. 그는 재야세력이 된 남인당 인사들을 모아 시회(詩會)를 자주 열었다. 자작시 발표회를 통해 남인당을 결집하고, 탕평 정권의 우군 세력을 확충하고자 했던 것이다.

때에 따라 채제공은 꽃놀이와 병행해서 시회를 열었다. <번암집>에 따르면 1784년 봄에는 한양 인왕산 육각봉에 있는 어느 집에서, 정동과 서대문 사이에 있는 남인당 인사의 집에서, 한강 변에 있는 이씨라는 사람의 집에서, 또 지금의 성북동의 한 장소에서 봄 놀이와 꽃 구경을 겸한 시회를 개최했다.

채제공의 시화 모임... 겉은 봄놀이, 속은 정치 단결

이런 행사는 겉으로 봐서는 꽃구경이나 시회에 불과했지만, 실상은 정치적 단결을 위한 모임이었다. 이런 남인당의 행보는 보수파인 노론당의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정조가 즉위하기 전 채체공이 시회 개최 때문에 사헌부 관료의 탄핵을 받은 것은, 그만큼 이런 행사가 정치적으로 민감했기 때문이다.

물론 시회를 연 행위 자체가 탄핵의 명분이 되지는 않았다. 선비들의 나라에서 이런 문학 모임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었다. 시회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는 트집을 잡을 만한 뭔가가 필요했다. 영조 44년 1월 5일 자(양력 1768년 2월 22일 자) <영조실록>에 따르면, 채제공이 시회를 연 시점이 부친의 삼년상이 끝나지 않은 때였다는 것이 탄핵의 명분이었다.

이런 사례는 채제공이 삼년상 중에도 세력 확장을 위해 시회를 열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에 따라서는 그의 정치적 열정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이 정도로 탕평 정치의 기반 조성을 위한 열정을 보였다.

물론 시회에 참여한 사람들이 곧바로 관직을 받거나 정치적으로 출세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임금의 최측근인 채제공이 주관하는 시회가 열리는 것만으로도 남인당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힘이 되었을 것이다.

시회를 통해 채제공이 외친 선전 구호가 있다. 그것은 '우리는 하나'였다. 이는 남인당 내부의 분파 활동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남인당 내부에는 청남당과 탁남당이라는 분파들이 있었다. 시회의 친목 활동을 통해 채제공은 두 당이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는 하나... 북인당까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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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의 서명. 충북 청주시 문의면의 청남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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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라는 구호는 남인당의 형제 정당인 북인당 출신들에게도 적용됐다. 남인당과 북인당은 동인당에서 갈라져 나왔다. 북인당은 광해군 정권의 붕괴와 함께 중앙 정계에서 축출됐다. 채제공은 북인당의 후예들을 대할 때 그들이 조금이라도 남인당과 인연이 있는지를 조사했다. 조금이라도 있으면, 채제공은 그들 역시 같은 동인당의 후예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런 식으로 채제공은 남인당 내부를 통합하는 한편, 북인당을 남인당에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채제공은 정치가인 동시에 학자였다. 흔히 학자들은 자신과 상대방의 차별성을 강조한다. 많은 학자는 '나는 남들이 하지 않는 분야를 연구한다'는 점을 내세운다. 하지만 채제공은 정치 운동에서만큼은 학자적 기질을 억제했다. '나와 너의 차별성'이 아니라 '우리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정치가적 기질을 더 많이 발휘한 것이다. 

채제공 이전부터 송시열 같은 서인당 사람들도 시회를 이용해 세력 확장을 도모했지만, 채제공처럼 광범위하고 체계적으로 시회를 이용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런 면에서, 채제공은 조선 정치 문화의 수준을 높인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 같은 채제공의 특성은 주군인 정조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났다. 정조 역시 학문적인 합리성을 통해 자기 세력을 확충하고 상대편을 끌어들이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 점은 정조가 보수파 핵심인 심환지를 대한 태도에서도 잘 나타난다.

정조(당시 46세)가 죽기 3년 전에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그가 자신보다 스물두 살이나 많은 보수파 거물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정조는 심환지가 답장을 하든 않든 줄기차게 편지를 보냈다. 신하가 답장을 보내지 않는데도 군주가 계속해서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정조 21년 6월 24일(양력 1797년 7월 18일)은 양력 7월의 여름날이었다. 봄날도 아닌 여름날에 정조는 꼭 연애편지 같은 서신을 심환지에게 보냈다.

"소식이 갑자기 끊어졌군. 경은 그동안 잠자고 있었는가? 술에 취해 있었는가? 어디에 갔기에 나를 까맣게 잊어버렸는가? 혹시 소식을 전하기 싫어서 그랬던 것인가?"

정적이나 다름없는 심환지가 좋아서 이런 편지를 보냈을 리는 없다. 어떻게든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 정적까지도 포용하겠다는 생각으로 이런 편지를 썼을 것이다. 참모인 채제공처럼 주군인 정조도 글을 통한 정치 활동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채제공과 정조의 정치 스타일은 유사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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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포 앞의 정자에서 모임을 갖는 선비들. 김기창의 작품인 <수성동>의 일부다. 이 사진은 서울시 성동구 성수동의 서울숲에서 찍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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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신사 정치'... 그래서 한계였다

문학을 매개로 한 채제공의 정치 운동이 정치 문화 발전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지 못한 측면도 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창과 칼 대신 붓과 먹을 드는 채제공의 정치 운동은 남인당의 세력을 확충하는 데는 도움이 됐겠지만, 보수파 노론당에게는 개혁을 방해할 시간을 제공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개혁을 표방한 정조 정권이 24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보수파를 끝내 제압하지 못하고 정조의 죽음과 함께 붕괴한 것은, 정조 정권이 다소 지나칠 정도로 학문적이고 신사적인 정치를 했기 때문인 측면도 있었다. 정조 정권이 그런 한계를 보인 것은 이 정권의 핵심 인물인 채제공이 '출판기념회 정치'에 주력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한계는 정조에게서도 나타났다. 정조는 붓과 먹으로 보수파를 제압하고 포용하려 했지만, 그런 노력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정조가 죽자마자 정조의 개혁을 파괴한 주역 중 하나가 바로 심환지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조가 그토록 열심히 편지를 쓴 게 무슨 소용인가 하는 느낌을 감출 수 없다. 주군과 참모가 비슷한 한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참모인 채제공이 주군인 정조와 정반대의 정치 스타일을 갖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정조가 채제공을 내쳤을까, 아니면 정조의 스타일이 좀 더 과감해졌을까?

이에 대해 명쾌한 결론을 내리기는 힘들지만 문학을 이용한 채제공의 정치 활동이 조선의 정치 문화를 한층 더 세련되게 만든 동시에 개혁의 칼날을 조금은 무디게 만들었다는 점만큼은 비교적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다음에는 고종의 참모인 김옥균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