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의 뜨락/문화재 탐방

영의정 번암 채제공의 시문과 인왕산 육각현 필운시회

채현병 2014. 11. 18. 12:18

      영의정 樊巖 蔡濟恭의 詩文과 인왕산 六角峴 弼雲詩會

                                                                                  편집 채현병

                             1. 樊巖 蔡濟恭의 家系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이황-정구-허목-이익을 잇는 남인 청류의 영수로 영·정조시대의 명신이다. 그는 충청도 홍주(지금의 홍성과 청양 일대)에서 지중추부사 채응일(蔡膺一, 1686~1756)과 이광정(李光庭)의 5대손 연안이씨(延安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평강(平康)이고 자는 백규(伯規)이며 호는 번암(樊巖)이다. 15세 때 향시에서 급제한 뒤1743년(영조 19) 23세에 문과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라 여러 요직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채제공 집안은 일찍이 5대 백조(伯祖)인 호주(湖洲) 채유후(蔡裕後, 1599~1660)와 조부대의 채명윤, 채성윤, 채팽윤 형제가 문명(文名)을 크게 떨친 바 있다. 특히 희암(希菴) 채팽윤(蔡彭胤, 1669~1731)은 채제공에게 학문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채팽윤은 숙종이 그의 시문을 좋아해 내시를 시켜 뒤따라 다니면서 그가 지은 시를 몰래 베껴 바치게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시문에 능했다고 한다.

이러한 가풍 속에서 채팽윤의 문하 오광운(吳光運)과 강박(姜樸)에게 수학하였고 경기도 관찰사 시절에는 이익(李瀷)에게 가르침을 청하기도 하였다. 채제공은 시회를 자주 열어 남인계 인사들과 폭넓게 교유하며 결속력을 강화하였다. 당대의 문장가인 신광수, 정범조, 목만중, 이현경과 교유하였으며 안정복, 이가환, 정약용과도 가까운 사이였다. 그가 남긴 글과 글씨가 전시되어 있는데 특히 그의 정치가로서, 문학가로서의 역량이 훌륭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채유후(蔡裕後, 1599-1660)는 인조․효종 때의 문신이다. 실록에 의하면, 자는 백창(伯昌)이고 호는 호주(湖洲)이며 본관은 평강으로 강학년(姜鶴年)의 문인이다. 17살에 생원이 되고, 25살(1623, 인조1)에 문과에 장원하여 사가 독서했다.

이조판서를 거쳐 다음해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대제학을 전후 8년간 역임했으며, 우리나라 최초로 의성어를 사용한 時調를 남겼다.

 

 

   다나 쓰나 이 탁주(濁酒) 좋고 대테 맨 질병들이 더욱 좋아

   어론자 박구기를 둥지둥둥 띄워 두고

   아이야 절이 김칠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

 

달거나 쓰거나 입쌀로 만든 술이 좋고,

참대로 테를 두른 질병들이 (탁주를 담기에는) 더욱 좋도다!

얼씨구, 표주박으로 만든 술구기를 술통에 등등 띄워놓고 마시는데,

아이야. 절이김치라도 좋으니, 안주 없다 말고 내어 오너라.

                                                                                  [출처] 김세영(수원화성박물관 학예연구사)

 

 

                       2. 번암 채제공의 탕평정치와 문학

채제공(1720~1799)은 정조 임금의 최측근 참모이자 남인당의 지도자였다. 그의 정치적 목표 중 하나는, 남인당을 결집함으로써 노론당의 독주를 견제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정조의 정치적 이상인 탕평 정치를 돕고자 했다.

남인당은 정조의 증조부인 숙종 때 장희빈의 몰락과 함께 재야로 밀려났다. 이를 계기로 남인당의 주요 거점인 경상도는, 채제공의 문집인 <번암집>에 언급된 것처럼 18세기 내내 찬밥 신세를 겪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채제공은 정조가 왕이 되기 전인 영조 때부터 남인당을 복구하는 일에 주력했다. 이 일은 채제공과 남인당을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탕평 정치를 위해서도 긴요했다. 노론당을 견제할 만한 세력을 구축하는 것은 탕평 정치의 안정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었다.

채제공이 남인당 결집을 위해 구사한 방식은 상당히 독특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그것은 '출판기념회 정치'와 비슷했다. 그는 재야세력이 된 남인당 인사들을 모아 시회(詩會)를 자주 열었다. 자작시 발표회를 통해 남인당을 결집하고, 탕평 정권의 우군 세력을 확충하고자 했던 것이다.

때에 따라 채제공은 꽃놀이와 병행해서 시회를 열었다. <번암집>에 따르면 1784년 봄에는 한양 인왕산 육각봉에 있는 어느 집에서, 정동과 서대문 사이에 있는 남인당 인사의 집에서, 한강 변에 있는 이씨라는 사람의 집에서, 또 지금의 성북동의 한 장소에서 봄 놀이와 꽃 구경을 겸한 시회를 개최했다.

시회를 통해 채제공이 외친 구호가 있다. 그것은 '우리는 하나'였다. 이는 남인당 내부의 분파 활동을 해소하고 북인당과 함께 시회의 친목활동을 통해 모두가 한 뿌리에서 니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정조임금의 탕평정치를 통하여 국력을 키워 태평성대를 누려 이상국가 건설의 큰 뜻을 실현하기 위한 구호였다고 할 수 있다.

채제공은 정치가인 동시에 학자였다. 흔히 학자들은 자신과 상대방의 차별성을 강조한다. 많은 학자는 '나는 남들이 하지 않는 분야를 연구한다'는 점을 내세운다. 하지만 채제공은 정치 운동에서만큼은 학자적 기질을 억제했다. '나와 너의 차별성'이 아니라 '우리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정치가적 기질을 더 많이 발휘한 것이다.

채제공 이전부터 송시열 같은 서인당 사람들도 시회를 이용해 세력 확장을 도모했지만, 채제공처럼 광범위하고 체계적으로 시회를 이용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런 면에서, 채제공은 조선 정치 문화의 수준을 높인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 같은 채제공의 특성은 주군인 정조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났다. 정조 역시 학문적인 합리성을 통해 자기 세력을 확충하고 상대편을 끌어들이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 점은 정조가 보수파 핵심인 심환지를 대한 태도에서도 잘 나타난다.

정조(당시 46세)가 죽기 3년 전에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그가 자신보다 스물두 살이나 많은 보수파 거물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정조는 심환지가 답장을 하든 않든 줄기차게 편지를 보냈다. 신하가 답장을 보내지 않는데도 군주가 계속해서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정조 21년 6월 24일(양력 1797년 7월 18일)은 양력 7월의 여름날이었다. 봄날도 아닌 여름날에 정조는 꼭 연애편지 같은 서신을 심환지에게 보냈다.

"소식이 갑자기 끊어졌군. 경은 그동안 잠자고 있었는가? 술에 취해 있었는가? 어디에 갔기에 나를 까맣게 잊어버렸는가? 혹시 소식을 전하기 싫어서 그랬던 것인가?"

정적이나 다름없는 심환지가 좋아서 이런 편지를 보냈을 리는 없다. 어떻게든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 정적까지도 포용하겠다는 생각으로 이런 편지를 썼을 것이다. 참모인 채제공처럼 주군인 정조도 글을 통한 정치 활동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채제공과 정조의 정치 스타일은 유사했다고 볼 수 있다.

채제공은 서울에서 관직생활을 하면서 숭례문 인근에 있는 스승 오광운의 옛집과 명덕산(지금의 번동) 별장에 살면서 인왕산 자락에서 시회(詩會)를 열어 남인 및 중인출신 인사들과도 폭넓게 교유했다. 그는 시회(詩會)를 통해 당대의 문장가인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 여와(餘窩) 목만중(睦萬中), 간옹(艮翁) 이헌경(李獻慶)과 교유했으며,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금대(錦帶) 이가환(李家煥),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과도 가까운 사이였다. 특히 후계자로서 이가환과 정약용을 아꼈다.

채제공은 미수 허목(許穆)을 배향하는 미천서원의 원장으로 재임하며 그의 후학으로 자칭했고, 경기도관찰사에 부임하면서 성호(星湖) 이익(李瀷)을 찾아가 학문을 묻는 등 기호남인의 결속을 위해 노력했다. 또한 영남남인들도 독려해 사도세자의 원한을 풀어달라는 만인소를 이끌어내고 그들의 정계진출에 기여하며 명실상부한 남인의 영수가 되었다. 훗날 그의 사후 영남남인들을 중심으로 그의 문집인 ‘번암집’이 간행되었고, 그의 고향 청양에도 그의 영정을 모시는 영각이 건립되었다.

 

 

                         3. 번암 채제공과 필운풍월

                      1) 필운대 풍월

유본예는 '한경지략(漢京識略)' 명승조에서 이렇게 소개하였다.

"필운대 옆에 꽃나무를 많이 심어서, 성안 사람들이 봄날 꽃구경하는 곳으로는 먼저 여기를 꼽는다. 시중 사람들이 술병을 차고 와서 시를 짓느라고 날마다 모여든다. 흔히 여기서 짓는 시를 '필운대 풍월'이라고 한다."

유득공이 어느 봄날 필운대에 올라 살구꽃 구경을 하다 시를 지었다.

살구꽃이 피어 한껏 바빠졌으니

육각봉 어구에서 또 한차례 술잔을 잡네.

날이 맑아 아지랑이 산등성이에 아른대고

새벽바람 불자 버들꽃이 궁궐 담에 자욱하구나.

새해 들어 시 짓는 일을 필운대에서 시작하니

이곳의 번화함이 장안에서 으뜸이라.

아스라한 봄날 도성 사람바다 속에서

희끗한 흰머리로 반악을 흉내내네.

유득공은 역시 검서였던 친구 박제가와 늦은 봄이면 필운대에 올라 꽃구경을 했는데, 흐드러지게 핀 살구꽃이 일품이었다. 육각현에서 술 한잔 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한세대 앞선 시인 신광수는 도화동에서 복사꽃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필운대에 올라 살구꽃을 구경했다.

"필운대 꽃구경이 장안의 으뜸이라.(雲臺花事壓城中)" 하고는,"삼십년 전 봄 구경하던 곳을/다시 찾은 오늘은 백발 노인일세.(三十年前春望處,再來今是白頭翁)"라고 끝을 맺었다.

 

 

                    2) 정조도 필운풍류에 취하다

이 당시에 필운대 꽃구경이 서울 장안에서 가장 이름난 유흥지였음이 확인된다. 정조가 필운대 꽃구경 시를 지었다는 사실은 특이하다.

 

 

   백단령 차려 입은 사람은 모두 시 짓는 친구들이고

   푸른 깃발 비스듬히 걸린 집은 바로 술집일세.

   혼자 주렴 내리고 글 읽는 이는 누구 아들인가

   동궁에서 내일 아침에 또 조서를 내려야겠네.

 

 

'필운화류(弼雲花柳)'라는 제목의 시 앞부분은 다른 시들과 같이 필운대의 번화한 꽃구경 인파를 노래했다.

 

 

                    3) 영의정 채제공의 화원 구경기

이 시대에 필운대 풍월뿐만 아니라, 꽃구경을 하고 산문으로 기록하는 유행도 있었다.

영의정까지 지낸 채제공(蔡濟恭·1720∼1799)이 도성 안팎의 화원에 노닐며 지은 글이 여러편 있다. 필운대 부근의 조씨 화원을 감상하고 '조원기(曹園記)'를 지었다. 주인 조씨의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심경호 교수는 "조하망(曹夏望)의 후손이었던 듯하다."고 추측하였다.

계묘년(1783) 3월10일, 목유선과 필운대에서 꽃구경하기로 약속하였다. 저녁밥을 다 먹고 나서 가마를 타고 갔더니 목유선이 아직 오지 않았기에, 필운대 앞 바위에 자리를 깔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얼마 있다가 목유선이 이정운과 심규를 이끌고, 종자에게 술병을 들게 하여 사직단 뒤쪽으로 솔숲을 뚫고 왔다.

처음에는 필운대 꽃구경을 하기로 약속하고 모였다. 그러나 인파가 몰려 산속이 마치 큰 길거리 같이 번잡해지자, 채제공은 곧 싫증이 났다. 동쪽을 내려다보자 서너곳 활터에 소나무가 나란히 늘어서 있고, 동산 안의 꽃나무 가지끝이 은은히 담장 밖으로 나와 있어서 호기심이 일어났다. 목유선에게 "저기는 반드시 무언가 있을 거야. 가보지 않겠나?"고 물었다.

작은 골목을 따라 들어가자 널빤지 문이 열려 있었다. 점잖은 손님들이 꽃구경을 하겠다고 들어서자 주인이 집 뒷동산으로 인도하였다. 화원에는 돌층계가 여덟개쯤 깔려 있었는데, 붉은 꽃·자주 꽃·노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서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유항주·윤상동 같은 관원들도 꽃구경하러 왔다가 채제공이 조씨네 화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따라와서 술잔을 돌리고 꽃을 평품하며 시를 지어 즐기느라고 달이 동쪽에 뜬 것도 몰랐다.

이듬해 윤3월13일에도 채제공은 친지들과 함께 가마를 타고 육각현 아래 조씨네 화원에 찾아가 꽃구경을 했다. 석은당에 앉아 거문고를 무릎 위에 눕히고 채발을 뽑아 서너 줄을 튕겨 보았다. 곡조는 이루지 못했지만 그윽한 소리가 나서 정신이 상쾌해졌다.

얼마 뒤에 조카 채홍리가 퉁소 부는 악사를 데리고 와서 한두곡을 부르게 하자, 술맛이 절로 났다. 채제공은 소나무에 기대어 앉아, 퉁소 소리에 맞춰 노래하였다.

"아양 떠는 자는 사랑받고, 정직한 자는 미움을 사는구나. 수레와 말이 달리는 것은 꽃 때문이지. 소나무야 소나무야. 누가 너를 돌아보랴?"

모두들 맘껏 흥겹게 놀다가 흩어졌다. 채제공은 북저동 명승에 노닐고 '유북저동기(遊北渚洞記)'를 지었다.

"도성의 인사들이 달관(達官·높은 벼슬아치)에서 위항인에 이르기까지 노닐며 꽃구경을 했다.(줄임)국가의 백년 승평(昇平)의 기상이 모두 여기에 있다."고 하였다.

위항인들의 경제력이 사대부 같이 되자, 유흥문화도 함께 즐겼다는 뜻이다.(화원 이야기는 심경호 교수가 쓴 논문 '화원에서 얻은 단상-조선후기의 화원기'를 많이 참조했다.)

 

                                                                                              [출처]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번암 채제공이 육각현 석은당에서 퉁소소리에 맞춰 노래한 것을 時調 의 틀로 바꾸어 썼다.

                                                                                                                        (해월 채현병)

                                    석은당 노래

 

 

         아양 떤 자 사랑받고 정직한 자 미움 사네

         수레도 저 말들도 꽃 때문에 달리는데

         소나무 저 소나무야 누가 너를 돌보리

 

 

                              4. 번암 이후의 西村 詩會

 

 

                          1) 정조와 중인

중인의 재능에 대한 신뢰는 양반뿐 아니라 왕이나 왕족에게서도 엿볼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정조이다. 정조는 당시 서얼금고법으로 인해 중인이 벼슬에 오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규장각에서 서적을 검토하고 필사하는 일을 하는 검서관직을 신설하여 서얼 출신 지식인을 등용하였다. 1779년에 임명된 초대 검서관이 바로 유득공·이덕무·박제가·서이수 네 사람이다. 당대에 가장 명망 있는 중인 출신인 이 네 명의 학자를 ‘4검서’라 불렀는데, 정조는 이들과 함께 신학문을 연구하면서 문예부흥의 초석을 쌓았다. _36쪽 참조

중인과 친분이 두터웠던 왕족 가운데는 뜻밖에도 흥선대원군이 있다. 대원군은 안동 김씨를 비롯한 권력층을 견제하기 위해 아전들에게 많은 권한을 주면서 수많은 중인 서리를 사조직으로 흡수하는, 이른바 ‘아전정치’를 폈다. 대원군은 중인을 정치적 야욕에 이용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만큼 중인 출신 관리들의 탁월한 행정 능력을 인정했던 것이다.

대원군은 중인 출신 서리 말고도 박효관, 안민영 등의 음악인과도 가깝게 지냈는데, 인왕산 필운대에 ‘운애산방’이라는 공간을 마련해주며 가객들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했다. 박효관은 대원군의 지원에 힘입어 <가곡원류>를 편찬하여 후세에 국악을 전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_34쪽, 165쪽 참조

이 밖에도 영조, 다산 정약용, 번암 채제공, 구암 허준, 겸재 정선 등 당대 최고의 인물 곁에는 항상 중인이 있었다. “인재는 인재를 알아본다.”는 말이 있듯이, 결국 시대를 이끈 주인공의 눈에는 또 다른 주인공이 들어왔던 것이다.

중인은 비록 신분의 벽에 막혀 세속적인 영예를 누리지는 못했지만, 시대를 이끈 메이저 사이에서는 중인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진정한 메이저였다.

 

 

                      2)위항시인

중인은 인왕산 기슭에 그들만의 서재를 꾸미고 그곳에서 문학동인이자 문화공동체인 시사(詩社)를 결성하여, 시를 지으며 한평생 풍류를 즐기며 살았다. 시사 가운데 특히 돋보였던 모임은 서당 훈장 천수경과 출판편집인 장혼, 명필가 마성린을 주축으로 결성된 ‘송석원시사’였다.

당시 문인들이 송석원시사에 초청받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정도로 장안의 화제가 되자, 그 뒤로 직하시사, 벽오시사 등 많은 시사가 생겨나면서 조선 후기 서민문학을 주도해 나갔다.

시사에 속한 중인을 ‘위항시인’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들은 무기를 지니지 않고 흰 종이 위에 문장력을 겨룬다는 뜻인 ‘백전(白戰)’이라는 백일장을 열어 문학적 교류를 이어 갔다. 장혼이 송석원시사의 시선집 <옥계사>에 쓴 발문은 당시 중인의 끈끈한 문학적 연대를 가늠하게 한다.

장기나 바둑으로 (벗을) 사귀는 것은 하루를 가지 못하고

술과 여색으로 사귀는 것은 한 달을 가지 못하며

권세와 이익으로 사귀는 것도 한 해를 넘지 못한다.

오로지 문학으로 사귀는 것만이 영원하다

 

 

                      3) 서원시사 [西園詩社]

                                   조선 후기의 여항시사(閭巷詩社).

칠송정시사(七松亭詩社)라고도 한다.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가 해체된 뒤 결성되었다. 김희령(金羲齡)의 일섭원(日涉園)과 지석관(池錫觀)의 칠송정(七松亭) 등에서 시회(詩會)를 가졌던 여항시사이다. 일섭원은 송석원시사의 핵심인물인 김낙서(金洛瑞)의 전포(田圃)로 이곳에서 그의 아들 김희령이 시사를 열었다. 칠송정은 인왕산 육각현(六角峴) 위에 있는 경승으로 지석관의 소유였다.

서원시사의 동인으로는 지석관·김희령·박기열(朴基悅)·유기성(柳基成)·조경식(曺景軾)·박기연(朴基淵)·김영면(金永冕)·유정주(劉定柱)·홍덕조(洪德祚)·신이중(申彛仲) 등이 있다. 송석원시사에 비하면 그 활동이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송석원시사의 막내였던 박윤묵(朴允默)의 시에 서원시사에 대해 쓴 것이 있다. 그중에 1843년(헌종 9) 일섭원에서 시연을 열고 그 정경을 그린 것이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볼 때 서원시사가 헌종 때 활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로 시문집을 남긴 사람은 없다.

 

 

 

                      4) 김수장의 시조 / 六角峴 素懷

                           꽃도 피려하고 (老家齋 金壽長)| 時節歌調

 

 

   꽃도 피려하고 버들도 푸르려한다

   비즌술 다 익었네 벗님네 가세그려

   육각에 두려시 앉아 봄맞이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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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각六角: 서울 인왕산 아래 육각현

두려시: 두렷이, 둥글게

[출처] 조선의 르네상스인 중인(中人) - 작성자 김수정

 

 

                        <덧붙임 자료 ; 海月 채현병 시조>

 

 

      번암樊巖 할아버지

   올곧아 푸르른 님 선비의 표상이라

   삼정승 오르셔도 청류淸流로 흐르시니

   만백성 거울이 되어 길이길이 빛나네

 

 

      번암樊巖 영정影幀

   어진御眞을 그린 솜씨 부채로 북돋우니

   학덕學德이 피어나고 경륜經綸이 살아난다

   성은聖恩이 망극罔極하여라 자찬문自讚文도 쓰셨네

* 樊巖 影幀 : 樊巖 蔡濟恭 할아버지가 73세에 때, 어명을 받들어서

궁중화원 이명기 주관하에 김홍도 동참으로 그린 영정.

보물 제1477-1호 일괄지정.

 

 

      번암樊巖할아버지 영정影幀 속 부채

한중록閑中錄 쓰시면서 틈틈이 만든 부채

껄껄껄 웃으시며 어찰御札로 내리시니

그 은혜 하해河海와 같아 꼭꼭 잡아 두옵네

* 樊巖 影幀 속 부채 : 정조가 御札과 함께 좌의정 번암할아버지에게 하사한

혜경궁 홍씨께옵서 손수 마련하신 부채.

扇錘 / 影幀과 함께 보물 제1477-1호 일괄지정.

 

 

      번암영정樊巖影幀 자찬문自讚文

   내 모습 내 정신은 부모님 은혜이며

   온몸을 꾸며낸 것 임금님 은혜로다

   그 은혜 갚을 길 없어 글로 남겨 두노라

* 2014 수원화성박물관 개관5주년기념 <기증유물특별전>에서

 

 

* 樊巖 할아버지

조선조(영 정조) 文臣 蔡濟恭(1720~1799) 할아버지. 정치가, 문학가

본관 平康. 자는 伯規. .

1735년(영조11년) 향시 급제,

1743년 문과정시 급제로 승문원권지 임명이후 익릉별검, 예문관 검열.

1753년 호서암행어사,

1758년 승정원도승지(사도세자 폐위비망기 철회)를 거쳐 대사헌,

1762년 모친상 낙향(사도세자 폐위),

1764년 한성부좌윤, 대사간, 1769년 한성부판윤,

1770년 병조판서, 호조판서,

1771년 세손우빈객(교육 보호), 홍문관제학, 이조판서,

1774년 평안도관찰사, 병조판서, 호조판서, 좌참찬,

1776년 영조국장도감 챗임자, 형조판서, 수궁대장,

1778년 진주정사로 중국에 다녀옴(박제가, 이덕무가 수행),

1779년 낙향, 예조판서,

1781년 낙향,

1786년 평안도병마절도사, 지중추부사,

1788년 우의정, 1790년 좌의정,

1793년 영의정, 화성축성 총괄(1794년 1월 축성~1796년 9월 완공),

헌릉원 청봉, 사도세자 추승, 탕평책 실시 등 명재상으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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