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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의 작품세계 Ⅲ (1850~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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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지 채용신의 작품세계』Ⅰ[초상화] http://blog.naver.com/ohyh45/20130331752 어진화가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 11회 ~ 21회 -전북도민일보,전북도립박물관,익산문화재단공동기획
11.한성 경치 도화지 삼아 畵心 키우다
활쏘고, 그림 그리고----삼청동 탯자리
조선시대 마지막 초상화의 꽃을 피운 어진화사. 민족정기와 충의정신을 목숨처럼 아꼈던 작가. 상업미술 효시인 공방을 최초로 운영한 프로 화가. 이는 전북출신 어진화가 석강 채용신(1850-1941)에 따라붙는 수식어다.
숭고한 정신을 되찾고 예술혼을 계승 발전시켜야 할 때다. 채용신이 추구하고 이룩한 가치가 너무나 크고 고귀하다.
봉우리가 북악산이고 왼쪽은 인왕산이다. 인왕산 밑에 청와대와 총리공관이 약간 보인 ▲ 어진화가 채용신의 탯자리인 삼청동은 옛부터 한성 최고의 경치로 유명했다. 뒷편에 북악산이, 앞에는 경복궁과 창덕궁이 펼쳐져 있다. 도교의 삼청전에서 유래된 지명이지만 맑은 물과 푸른 숲에 인심까지 좋은 곳이다. 오른쪽 다
채용신 평생도의 혼례도
여름의 끄트머리 9월 초순. 서울 삼청동 매미들은 마지막 목청을 올리고 있었다. 미지근한 에어컨 바람이 일렁이는 삼청동주민자치센터. 조그만 원탁에 5명이 머리를 맞대고 앉았다. 취재진과 학자,석강 후손,지역 원로들이다. 조선시대 보통 양반들은 회갑이 되면 살면서 겪는 굵은 일들을 죽 이어서 그린 그림, 평생도를 남겼다. 1914년에 채용신도 자전(自傳)인 평생도 10폭병풍(平生圖 十幅屛風)을 그렸다. 어린 석강은 집에서 9리 떨어진 남산으로 지게지고 나무하려 오갔다. 경복궁 담장을 지나 수표교을 건너 해찰하면서 가도 한 시간이 채 안 걸리는 거리다. 당시 안국동과 수표교 일대는 문방사우가 넘치지 않았던가. 지금의 인사동 일대를 뺨칠 정도로 북적인 예술의 터전였다. 새로 들어 온 붓과 물감, 갓 그려낸 멋진 그림을 구경할 수 있는 곳이였다. 석강은 이 길을 오가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표정을 머리에 담고, 가슴에 새겼을까. 청명한 가을날 남산에 올라 작대기를 붓삼고 땅를 종이삼아 머릿속의 그림을 종종 토해냈다. …
운용천(운룡천) : 정조의 수라상에 진상하던 우물(샘물)
청렴하고 강직한 부친 밑에서 문인(文人)정신과 무관(武官)기개를 배웠던 채용신. 삼청공원 일대에서 말타기,활쏘기를 익혔고 검술도 배웠다. 선천적으로 무신의 피가 흐르고 있었은 터, 실력은 날로 승승장구했다. 입학도에 그려진 형제정이라는 우물과 큰 대문집이라 부른 대가집 일대는 언제나 놀이터였다. 석강 집안과 대원군은 이처럼 긴밀했다. 이런 연유로 익산 살던 권영이 한양으로 입경(入京)할 수 있었고 궁궐에 참빗을 납품하게 된 것이다. 세필(細筆)이 특기인 그는 여러 모양의 그림을 빗에 직접 그렸다. 이것이 세상에 처음으로 선보인 석강의 그림, 화각이였다. 그림을 그린다는 기쁨에 쇠뿔의 매케한 냄새도 달콤했다. 아이 손바닥 많은 빗이 채용신의 도화지였다. 나중에 성인이 되면서 세필채화(細筆彩畵)에 뛰어난 재주는 이때 닦은 기량이 아니던가. 석지는 젖니 갈기 전에 붓을 잡았고 연마에 연마했다. 혼자 독학으로 그림을 터득했다.
▲ 채용신은 대원군의 초상화를 운현궁 노안당에서 그렸 다.
서울역사박물관이 소장한 대원군 초상. 이 작품은 석강이 그린 것은 아니다.
채용신은 대원군의 초상화를 운현궁 노안당에서 그렸 다
“이보게 채첨사, 자네 아들이 그림을 잘 그린다지. 장안에 소문이 자자하던데... 내 조만간 연통을 넣을터니 아들을 데리고 운현궁으로 한번 내왕하게.” 운현궁의 주련이 석파란의 향기를 노래하고 영원한 조선을 꿈꾸듯 방문객들을 맞이했다. 석강은 이후 의정부 찬정 민병석, 판서 김성근, 판서 김규홍, 판서 홍순형의 초상을 그려 명성을 떨쳤다.
12 . 채용신,붓을 잡을까...검을 들을까
"가문을 이어라" 무과 출사 병술년(丙戌,1886년) 봄날은 유난히 화창했다. 성문이 닫힐 저녁 무렵, 무과 시험장이었던 융무당에 합격 방(榜)이 붙었다. 저자거리에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몰렸다. 무과 응시자 채용신도 그 무리중 하나였다. “붙었을까, 떨어졌을까?” 떨리는 가슴을 붙들고 석강은 명단을 훑어 내렸다. 중간쯤 읽어가자 ‘蔡東根(채동근)’이란 이름이 눈에 확 들어왔다. 순간 주먹 쥔 두 손은 하늘로 향했다. 환호성 했다. “급제다, 급제” 주위 사람들이 격려하며 부러움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토록 바라던 가문을 잇는 무과급제 아니었던가. 석강은 한달음에 집에 당도했다. “아버님, 어머님 급제했습니다.” 기쁨에 넘친 채용신은 부모님께 큰절을 올렸다. 젖먹이를 업고 있는 부인에게도 그간의 고생을 위로했다. 병조로 넘겨진 급제명단이 교지로 만들어지고 날인되기까지에는 시간이 걸렸다. 교지를 받는 그 몇 날은 채용신에겐 참으로 길고 길었다. 사당 조상께 예를 갖추고 축하연도 준비해야 했다. 사실 채용신의 한성생활 히스토리는 몇 줄에 불과하다. 무과급제에서 의금부도사를 지낸 7년은 공백에 가깝다. ‘빈약한’ 히스토리에 스토리를 입혀 그의 삶의 간극에 디딤돌을 놓아 본다
조선의 머리인 경복궁. 그곳의 핵심은 근정전이다. 채용신은 삼청동에 살면서 왕궁의 분위기를 느끼며 생활했었다. 돌계단위에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 있다.
채용신 평생도의 도임도
채 첨사댁 경사났네
채용신이 그린 자전병풍 평생도의 <到門圖도문도>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재미난다. 멀리서 자진 절로 소리가 들린다. 향피리, 젖대, 해금, 장구, 북이 모인 삼현육각의 화음이다. 악곡은 흥겨운 취타(吹打), 길군악(路軍樂). 동네 어귀로 사람들이 뛰어가며 소리친다. “채첨사댁 경사났네, 경사났어. 과거급제한 채씨 양반댁 맏이가 어사화에 홍패를 들고 말타고 온다.” 글공부하던 서당 아이들도 사립문밖에 모두 나와 동그란 눈으로 구경한다. 들녘에서는 지게, 쟁기질하던 농부들도 일손을 잠시 놓고 축하한다. 집 마당에는 큰 채알을 치고, 그 주변으로 12폭 산수병풍을 둘렀다. 잔치준비는 끝났다. 주인공이 당도하기 전, 축하객들의 눈요기로 마당에선 검무가 펼쳐지고 있다. 고샅에도 어른이며 아이들이 자리를 잡고 잔칫상을 기다린다. 채용신이 저 멀리 북악산 숙정문을 배경으로 경복궁을 에돌아 동구밖에 이른다. 말구종도 신이 났는지 쫄삭인다. 채용신 뒤로 친척들과 지인들도 줄지어 마을로 들어온다. 흥겨운 덕담을 나누며 시끌작하게. 도문(到門)은 과거급제하여 이조(문과)나 병조(무과)에서 홍패를 받아 집으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홍패(紅牌)는 붉은 바탕 종이에 급제자의 성적,등급,서명을 먹으로 적은 합격증서. 한마디로 도문도는 과거급제를 축하하는 잔치그림인 셈이다. 조선 말 1814년에 그려진 이 그림은 당시 현실과는 좀 맞는 않는 상황이 연출됐다. 어사화는 장원급제자 한사람에게만 임금이 수여하는 것인데, 1등 하지 않은 채용신이 자신의 그림에 등장하고 삼현육각 취타대 등은 전통적인 도문도 형식을 빌려 그려진 것이다.
▲ 옛 안국동과 수표교 일대 예술의 거리를 연상케하는 인사동 거리는 언제나 인파로 붐빈다
▲ 삼청공원은 다른 곳보다 평평하다.무예연습에 좋은 장소이다. #맘껏 세상을 그리고 싶었는데… 채용신이 무과시(武科試) 합격한 나이는 37세였다. 다섯 살 난 경묵(1882년생)과 갓 태어난 선묵(1886년생, 후배생), 두 아들을 둔 아버지였던 채용신. 결혼도 출사도 늦었다. 늦었으면 그럴만한 연유가 있었을 터. 왜 늑깍이가 됐을까. 진로 선택문제로 많은 고민의 시간 때문인가, 여러 번 응시했으나 변변히 낙방한 결과였을까. 여러 추측은 가능하나 분명한 건, 태어날 때부터 천부적인 그림재주를 보였던 그의 몸엔 무신가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붓을 잡을까, 검을 들을까?” 가문을 생각하면 무과요, 하고 싶은 일은 도화인데……. 하지만 한 몸으로 두 길을 갈 수 없는 법. 결과적으로 선무후화(先武後畵)가 됐다. 그는 붓으로, 먹으로, 맘껏 세상을 그리고 싶었다. 무신 가문이 아니었으면, 비록 양반일지라도 화원으로 출사하고 픈 심정이 가득했다. 땔나무 하려 남산골에 오가며 수표교,안국동 화방에서 봤던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등의 그림이 채용신의 눈에 밟혔다. 화원, 그들이 부러웠다. 공무를 마치고 집에 오면 한지에 그린 그림을 집앞 개천물에 씻어 먹물을 빼내고 말렸다. 그리고 채용신은 그 종이에 다시 먹물을 적셨다. 가슴팎에 새겼던 풍광을, 머릿속에 심은 사람표정을 꺼내 밤새 종이에 옮겨보기도 했다.
▲ 북악산 허리, 삼청동에 있는 기천석은 도교의 흔적이다. ▲ 한성 5대 사정(射亭)중의 하나였던 삼청동 운용대(雲龍臺)가 지금도 남아있다.
#무신의 피 이어받은 채시라
▲ 600년 묵은 화강암 돌계단은 삼청에서 성균관으로 가는 지름길였다.
취재팀이 답사해 보니 북악산 자락 삼청동 일대는 대체로 가파른 편이다. 말바위에서 기천석,형제정,칠보사로 통하는 길은 지금도 좁은 깔끄막이었다. 이에 반해 삼청공원은 지세가 평평했다. 채용신은 이곳에서 말타기 등 무과시험을 준비했을 터이다. 용이 구름을 뚫고 승천하듯, 살이 과녁을 향해 날아간다는 운용정(雲龍亭)도 삼청동에 있었다는 기록이다. 이곳은 한성 5대 사정(射亭)중 하나다. 삼청동 초입 집에서 한 달음이면 가는 거리, 채용신도 틈만 나면 발길을 향했다. 과녁을 향해, 무과급제를 향해, 세상을 향해 시위를 당겼을 것이다. 당시 흔적이 혹시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까. 취재팀은 고샅을 뒤졌고 사정을 물었다. 그리고 찾아냈다. 삼청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우물집 음식점을 지나 칠보사에서 10여 미터 가다 우측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면 세 갈래 길이 나온다. 이 코너 집 담장 밑에 ‘雲龍臺(운용대)’이라 쓰인 바위가 장구한 세월의 이끼를 덮고 잠자고 있었다. 반가움에 안아보고 쓰다듬어 봤다. 혹시라도 채용신의 체취를 느낄 수 있을까해서……. 과녁은 어디에 있었을까?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지세로 봐 현 약사암(藥師庵) 위쪽이 아닌가 생각된다. “제가 할아버지의 재능, 무신의 피를 이어 받은 거 같아요. 활을 쉽게 배웠거든요. 2008년 ‘천추태후(KBS 사극 78부작)’ 촬영 때 활쏘기를 처음 해봤는데, 몇 번 쏴보니 감이 잡히더군요” 석강의 5대손인 국민배우 채시라씨의 말이다. 검술도 생각보다 빠르고 쉽게 익혔다고 한다.
#충성표현 ‘龍臣(용신)’으로 개명
▲ 서울 공평동 제일은행 본점 화단에 있는 의금부터.채용신이 이곳에서 근무했다
채용신의 무과 급제는 그의 삶의 많은 부분을 변화시키는 전환점이 됐다. 무과에 급제한 직후 본명인 ‘동근(東根)’ 대신 ‘용신(龍臣)’이란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가 남긴 모든 그림에는 ‘龍臣(용신)’이라는 도장을 찍고 서명했다. 예로부터 龍(용)은 임금을 상징하는 것이었던 만큼 늦은 나이게 무과에 급제하여 나라의 祿(녹)을 받게 된 것에 따른 충성의 표현으로 ‘용신’이라고 고쳐 사용한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이후 채용신은 39세(1888년)에 정6품인 사과에 제수되고 2년 뒤에 의금부도사로 발령받는다. 왕명에 의해서만 죄인을 추국하는 기관으로 규정하고 있는 의금부. 국왕 직속의 법사로서 지위의 고하, 신분의 귀천을 불문하고 다스린 곳이다. 대궐문 가까이에 당직청을 두어 의금부 관원이 궐내 순찰 일을 맡기도 했다. 그들은 일반 백성들뿐 아니라 양반 관료들에게까지도 진정 무서운 존재였다. 의금부 터는 서울시 종로구 공평동 100번지, 현 SC제일은행 앞 화단에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제일은행 본관이 있는 동네 이름이 공평동인 까닭도 법집행을 공평히 하라는 의미 아닌가. 지명의 뜻은 깊다. 역사만큼이나. 글·사진=하대성 기자,
"채용신 현 청와대 자리에서 무과시험 봤을 것" 전우용 서울대병원 연구교수 1886년 무과시험은 중시(重試)와 대거별시(大擧別試)를 함께 치렀다. 중시는 이미 관리가 된 사람을 대상으로 치렀고, 대거별시는 그를 기념하여 동시에 치른 것이다. 채용신은 관리가 아니었으므로 대거별시를 치렀을 것이다. 시험장은 경복궁 뒤, 지금의 청와대였을 것이다. ‘경무대(景武臺)’라는 이름은 본래 ‘무예를 구경하는 대’라는 뜻이다. 청와대가 있는 언덕에 융문당과 융무당이 있어 각각 문과와 무과 시험 장소로 이용됐다. 시험과목은 무경(武經)과 기사(騎射), 즉 병서시험과 말타고 활쏘기였는데, 조선 말기에는 아예 병서와 말타기는 폐지하고 활쏘기만 시험했다.그러나 그것도 본인이 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잘 쏘는 사람을 사서 시켰다고도 한다. 어사화를 받은 장원 급제자와 나머지 급제자들이 함께 축하행렬을 벌이는데, 얼굴에 먹칠을 하고 옷을 찢는 등, 거지꼴을 한다. 오늘날 고교졸업생이 행하는 교복 찢기,밀가루 뒤집어 씌우기 등이 연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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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용신 탯자리로 밝혀진 총리공관 입구는 언제나 경계가 삼엄하다.
▲ 채용신 평생도의 입학도
▲ 큰 대문집 초석
▲ 돌다리 있는 곳.복개돼 지금은 안보인다.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 106-11번지 국무총리 공관 정문 일대가 조선시대 후기 최고의 초상화가인 석강 채용신의 탄생지로 확인됐다.
전북도민일보 <어진화가 채용신> 기획특집팀은 석강의 자전병풍화<평생도>를 바탕으로 최근 세 차례 걸쳐 6일 동안 서울 삼청동 일대를 면밀하게 조사한 결과, 현재의 총리공관 정문 일대가 채용신이 1850년 2월4일(음력)에 태어 난 곳으로 밝혀냈다.
이번 현지 확인작업은 채용신의 4대 후손인 영석(74)씨, 채용신 전문가인 변종필(44·경희대)미술평론가의 조사와 삼청동에서 오래 산 이건선(74·삼청새마을금고 부이사장), 이재복(77·단골사부동산 대표)씨의 증언으로 이뤄졌다.
석강이 1914년에 그린 <평생도>의 제1폭 <입학도>를 보면 북악산 자락 아래에 자신의 탯자리를 잘 묘사해 놓았다. 취재진은 실제로 성곽 밑에 그려진 ‘삼청단’과 ‘형제정’,‘성제정’이라는 우물을 확인했다. 형제정은 지금도 시원하고 맑은 물이 항상 가득해 주민들과 등산객들이 애용하고 있었다. 이 곳에서 50여m 떨어진 성제정 우물도 계곡 옆에 위치한 관계로 수량이 풍부했고, 사각 석곽에 사각 돌기둥이 덮개를 지탱하고 있는 모습이 특이했다.
그림 중간에 있는 대갓집은 대상 창업주인 고 김연수 회장의 집으로, 삼청동에서는 ‘큰 대문집’으로 불리우고 있다. 지금도 솟을대문 자리에는 주촛돌(30*50cm) 2개가 10여m 떨어져 땅에 박혀 있어 당시 기와집 규모를 짐작케 했다.
현재 총리공관 정문 일대에 해당되는 삼거리에 크게 그려진 채용신의 집은 ㄱ자 초가집으로, 마루에서 석강이 부친 권영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모습이 묘사돼 있다. 그림에서 석강의 집 옆으로 흐르는 개천에 놓여 있는 돌다리가 지금의 삼청파출소가 있는 곳이다. 석교는 1970년대 하천복개공사로 없어졌다고 주민들은 말했다.
동행 취재한 채영석씨는 “할아버지의 탄생지를 이렇게 눈으로 확인하다니 정말 꿈만 같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변종필 평론가도 “그림 속의 지형이나 구조물들이 실재한 사실에 놀랍다”며 “이번 조사결과는 석강에 대한 좀 더 세밀한 연구작업의 토대가 될 것 같다” 밝혔다.
이에 대해 총리실 관계자는 “이 곳은 예전에 왕세자가 살았던 곳으로 알고 있는데, 어진화사인 채용신이 태어난 곳이라니 총리공관 자리는 명당중의 명당인 것 같다”며 “채용신 표지석이라도 세워야 겠다”고 말했다.
글·사진=하대성 기자,
"할아버지 탯자리 찾을 줄 꿈도 못 꿨다" 동행현장인터뷰 3인
■채영석 석강 4대손 -"여름엔 잠자리 잡고 겨울이면 토끼몰이”
“북악산 아래 삼청공원은 할아버님의 유년기 놀이터였을 것이다. 여름이면 잠자리 잡고 겨울이면 토끼몰이를 했을 테이고…….”
채용신 4대손인 영석씨는 국민배우 채시라의 아버지이다. 할아버지 일이라면 만사를 제쳐놓고 나선다. 오늘도 할아버지 탯자리인 삼청동 일대 취재에 동행했다.
“사실 할아버지의 탯자리를 찾을 줄은 꿈도 못 꿨다. 감히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벌어지니 감개가 무량할 따름이다.” 그는 총리공관 정문 일대가 할아버님의 탯자리로 확인되자 감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공부하는 서책 사이 공간에 많은 그림을 그렸다. 어디를 가던지 지필묵만 있으면 떠오르는 대로 화조도, 인물화,산수화 등을 생동감 있게 그렸다. 특히 어떤 인물화를 보던지 눈동자가 아주 살아있다.” 후손은 기록된 내용이나 들었던 할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최익현 선생의 모간본을 보면 날카로운 눈빛과 꽉 다문 입술에서 뭔가 결의한 의지가 풍긴다”며 “이것이 석지필법이다”고 말했다.
■하정효 운현궁 해설사 - "합격자는 우측으로, 낙방자는 좌측으로"
“채용신의 평생도는 실경에 가깝다. 그림 위쪽을 보면 북악산 자락에 성곽이 펼쳐져 있다. 그 아래로 기단과 우물이 있고 조금 내려오면 대갓집이 자리하고 있다. 개천 옆 길 따라 쭉 내려오면 삼거리에 초가집이 나온다. 이 집이 채용신의 탯자리인 현재의 총리공관 입구이다.”
채용신 전문가인 변종필 미술평론가는 지역 원로들과 삼청동 일대를 답사하고 그림에 나타난 채용신 집을 총리공관 입구로 낙점했다. ㄱ자집 툇마루에서 채용신이 부친(권영)에게서 글을 배우고 있는 모습과 화폭의 포인트로 집을 아주 크게 그린 점을 그는 주목했다.
집 옆엔 제법 넓은 돌다리가 개천에 놓여있다. 그림에는 바로 집 옆에 있는 것 같은데, 실지로는 이곳에서 20여 미터 떨어진 아래에 돌다리가 있었고 지금은 하천 복개공사로 볼 수 없다고 한다.
이상한 것은 그림 속의 우물지붕에 세 개의 점이 글자처럼 보였다. 돋보기로 봐도 알 수 없었다. 현미경까지 동원해 드려다 봤니 ‘兄弟井(형제정)’이라는 문구가 제법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석강의 극세필 진면목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을 어른들은 형제정을 쌍정이라 불렀다. 형제정 안내판에는 임금이 마셨다는 글이 남아 있었다. 지금도 물맛이 좋고 수량이 넘쳐 오가는 등산객들이 목을 축이는 곳이다.
■변종필 미술평론가 - 형제정서 등산객들 아직도 목축어
“채용신의 평생도는 실경에 가깝다. 그림 위쪽을 보면 북악산 자락에 성곽이 펼쳐져 있다. 그 아래로 기단과 우물이 있고 조금 내려오면 대갓집이 자리하고 있다. 개천 옆 길 따라 쭉 내려오면 삼거리에 초가집이 나온다. 이 집이 채용신의 탯자리인 현재의 총리공관 입구이다.”
채용신 전문가인 변종필 미술평론가는 지역 원로들과 삼청동 일대를 답사하고 그림에 나타난 채용신 집을 총리공관 입구로 낙점했다. ㄱ자집 툇마루에서 채용신이 부친(권영)에게서 글을 배우고 있는 모습과 화폭의 포인트로 집을 아주 크게 그린 점을 그는 주목했다.
집 옆엔 제법 넓은 돌다리가 개천에 놓여있다. 그림에는 바로 집 옆에 있는 것 같은데, 실지로는 이곳에서 20여 미터 떨어진 아래에 돌다리가 있었고 지금은 하천 복개공사로 볼 수 없다고 한다.
이상한 것은 그림 속의 우물지붕에 세 개의 점이 글자처럼 보였다. 돋보기로 봐도 알 수 없었다. 현미경까지 동원해 드려다 봤니 ‘兄弟井(형제정)’이라는 문구가 제법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석강의 극세필 진면목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을 어른들은 형제정을 쌍정이라 불렀다. 형제정 안내판에는 임금이 마셨다는 글이 남아 있었다. 지금도 물맛이 좋고 수량이 넘쳐 오가는 등산객들이 목을 축이는 곳이다.
하대성 기자
13.목숨, 초개와 같이 버리리라돌산진수군 맹조련
‘경인년(庚寅) 봄 돌산진은 파도가 잔잔하고 바람이 고요했다. 수군첨절제사(종3품)로 어명을 받은 채용신, 그는 송사를 간편하게 처리했고 정치 또한 깨끗했다. 군졸은 훈련돼 있었고 군함도 잘 정비돼 있었다. 암행어사도 채용신의 깔끔한 공무를 조정에 아뢰 4년을 더 머무르게 했다.
그가 임기를 마치고 떠나던 날, 지역 원로들이 모두 나와 작별의 눈물을 흘렸다.’ 이는 채용신 평생도의 <水軍訓練圖수군훈련도>에 나타난 화제(畵題)의 내용이다. 1890년 종3품으로 돌산진수군첨절제사에 임명된 후 1893년 부산진으로 떠날 때까지 남은 채용신의 유일한 기록이다.
첫 지방근무 행적은 짧지만 그의 공무능력과 업무 스타일이 잘 드러나 있다. 한성에서 금부도사직을 마치고 진(鎭)근무에 나선 채용신의 자취를 따라간다
▲ 돌산에 정박중인 유람선 '거북선' |
바람도 파도도 잔잔한 쇠머리 나루
지난 9월27일 정오경 돌산대교는 한산했다. 오가는 차량이며 바람도 파도도 잔잔했다. 돌산대교 아래 우두리 선착장에는 거북선 한척이 정박해 있었다. 정확히 명칭은 거북선형 유람선.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만든 배를 여수시에서 44억원을 들여 관광용으로 복원한 것이다.
이 거북유람선을 먼발치에서 보기만 해도 왠지 가슴이 든든하고 뿌듯했다. 채용신도 이곳에서 옛 거북선을 일견했고 ‘그 무엇이’ 밀려옴을 느꼈을 것이다. 그 무엇은 조선의 혼이자 구국정신의 표상이 아니겠는가.
300년 후 이순신 장군의 바통을 받은 채용신, 그가 돌산에 첫 발 디딘 감회는 어떠했을까. 왜구 방어에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릴 각오를 다지며 발령지인 방답진을 향해 말고삐를 당겼을 것이다.
▲ 채용신 돌산진수군첨절제사가 집무했던 동헌이 돌산읍사무소 옆에 보존돼 있다. |
파란 햇살 아래 밭에는 갓들이 무성하고 억새들은 가을바람에 너울너울 춤을 춘다. 자동차로 20여분 달려 도착한 방답진 마을의 겉모습은 여는 어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1523년(중종18년)에 설치된 방답진은 돌산 최남단 왜구 방어의 최일선 수군진이었다. 수군진의 흔적인 ‘굴강’으로 갔다.
굴강이란 조선시대 선박의 수리와 보수, 군사 물자의 하역 등의 정박을 목적으로 세운 군사 시설로 방파제와 선착장의 역할을 함께 수행했다. 굴강이라는 명칭은 작은 만처럼 굽어 있는 데서 유래한 것. 군내리 굴강은 이른바 순천부 선소로 불리는 여수 시전동에 있는 굴강과 함께 여수의 대표적인 선소이다. 방파제 길이 80미터, 폭은 30미터 상당된다.
성문 주춧돌 370년간 가부좌
일부 남아있는 방답진성의 모습.
▲ 유일하게 남아있는 방답진성 남문 주춧돌.
방답진성의 남문 주춧돌이 남아있다. 가로 1m 세로 1.2m쯤으로 바로 옆 가게 이름이 '남문상회'이다.
방답진 초대 첨사는 이순신 장군이다. 굴강 인근에는 그 역사의 나이테를 가슴에 새긴 수백년 된 보호수 10여 그루가 굴강을 감싸고 있다. 건너편에 보이는 동산에 과녁을 세우고, 화살쏘기 연습을 해 '쏠동'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그랬듯이, 채용신 첨사도 이 곳 굴강에 전선(戰船)을 정박시키고 ‘쏠동’을 왜구 머리통 삼아 종종 살을 날렸다.
고샅을 따라 마을 가운데 들어서자 석성 원형 일부가 밭에 남아 있었다. 원래 설영 당시는 돌로 쌓은 석성으로 주위 2182척(661m), 높이 13척(3.9m)의 사다리꼴형 성이었다는 기록이다. 성의 몸체 위에 설치하는 구조물인 여장(女墻 또는 女堞)이 205개소, 창고가 20칸, 연못 1곳이 있었다.
또한 체성과 여첩 사이에 납작한 돌로 튀어 나오게 쌓은 미석(眉石)을 설치하였고, 아래쪽에 큰 돌을 놓고 위로 갈수록 작은 돌로 쌓 았다. 돌과 돌 사이의 틈에는 아주 작은 돌을 끼워 넣 어 쓰러지지 않도록 했다. 조선시대 중․후반기에 쌓은 성의 특징이라 한다.
성문은 동서남의 3곳. 동문은 현 돌산초등학교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 길목에 있다. 서문터는 군내리교회 뒷산 중턱을 따라 비스듬하게 내려오는 길목에 남아 있었다. 서문터에서 도금터를 넘어 바닷가로 가면 남문터가 나온다.
현재 도로변에는 가로 세로 1미터 정도 되는 남문 주춧돌이 ‘그 때 그 자리’를 370년 동안 지키고 있다. 바로 옆 가게 이름은 남문상회, 건너편 가게는 남문식당, 남문수퍼이다. 남문이라는 지명이 아직도 많이 살아 있었다.
수군훈련날은 동네 잔치날
▲ 채용신 자전병풍 평생도의 <수군연습도>
채용신 평생도의 <수군연습도水軍練習圖>를 보면 당시 성곽과 마을, 시장 등 지형이 잘 나타나 있다. 수군훈련일은 장날이자 마을 잔칫날이다. 도금터 아래 남문 앞에서 상인들이 좌판을 펴놓고 떡도 팔고 식혜도 팔고 있다. 마을 주민들도 바닷가에 나가 구경한다.
훈련을 시작하는 포가 울리자, 가상의 왜적선 한 척이 방답진을 향해 재빠르게 들어온다. 이에 대열을 갖춘 채용신 수군이 총을 겨누고 집중 사격을 가하고 있다. 뒤편에서 날린 포탄이 왜적선을 집어 삼킬듯 빗발치고 있다.
날아가는 포탄의 모습까지 보인다. 일진,이진,삼진으로 나눠 실시한 이날 훈련은 훌륭하게 마쳤다. 채 첨사는 수군들에게 막걸리 잔을 돌리며 그날의 노고를 풀어 주었다. 주민들도 이날은 마을 잔칫날로 여겨 함께 어울렸다.
그림 상단 우측 섬은 송도이다. 원래 지명은 솔도(작은 섬)인데, 일제가 송도로 바꿨다. 솔밭은 작은 밭이고 오솔길은 작은 길이라 순우리말로 ‘솔’은 작다는 의미다. 지금 송도에는 80여 가구가 밭농사와 어업으로 다 부자로 살고 있다고 한다. 돌산 일대 어장은 말그대로 황금밭이었다.
그림속의 훈련장인 방답진 그 개구석(조그만한 만)에는 어선 30여 척이 저녁놀에 쉬고 있다. 성곽으로 연결된 남문 아래 마을은 현재 수협위판장이다. 채용신이 근무했던 관아는 돌산읍사무소 바로 옆에 잘 보존돼 있다.
맞은 편엔 돌산군관청이 있고 그 옆에 비석들이 모여 있으나 주민들이 세웠다는 기록의 채용신 송덕비는 보이질 않았다. 돌산진은 채용신이 부산진으로 떠나고 2년후인 1895년에 폐진됐다.
글·사진=하대성기자
14.조선城 어디가고 왜성만 남았나
조선시대 마지막 초상화의 꽃을 피운 어진화사. 민족정기와 충의정신을 목숨처럼 아꼈던 작가. 상업미술 효시인 공방을 최초로 운영한 프로 화가. 이는 전북출신 어진화가 석강 채용신(1850-1941)에 따라붙는 수식어다.
채용신 탄생 160주년, 서거 70주년을 맞은 2011년. 우리는 왜 이 시대에 채용신을 주목해야 하는가. 조선정신에 오롯이 마지막 정점을 찍었던 화가로서의 면모, 사진속에 함몰된 고유의 미학적 전범들, 그가 도달한 전통 초상화의 지평이 사라져 버렸다.
진정한 조선의 혼과 정신을 지독하게 고집한 채용신. 일제,미군정,현대라는 시대 흐름속에서 우리는 그 전통성을 잃어버렸다. 숭고한 정신을 되찾고 예술혼을 계승 발전시켜야 할 때다. 채용신이 추구하고 이룩한 가치가 너무나 크고 고귀하다.
그가 일군 화력(畵力)과 시대정신을 좇아 90평생의 여정을 겸허히 따라가 본다. 루트는 탯자리인 서울 삼청동에서 유택(幽宅)인 익산 왕궁 장암리까지. 채용신의 후손과 전문가, 향토사학자, 지역원로들이 함께 했다.
▲ 빌딩 숲에 까까머리처럼 보이는것이 부산진성이다.
부산진성최고의 요충지
‘1893년 어느 여름날 오시(午時), 동헌에 말발굽소리가 요란했다. 한 병사가 첨사에게 알현을 청했다. 그의 손에는 돌산진첨사 채용신에게 보낸 고종의 인사명령서, 곧 훈령이 들려 있었다. ‘돌산진수군첨절제사 채용신을 철도진수군첨절제사(鐵島鎭水軍僉節制使)에 임명한다.
계사년(癸巳年) 7월.’ 철도진은 서관(西關)의 먼 변방으로 황해도에 있지 않은가. 부모가 늙고 길이 먼 곳이어서 채용신은 한 동안 고민했다. 때마침 그 실정을 임금께 아뢰는 이가 있었다. 그 분 덕분에 근무지가 영남 부산진(釜山鎭)으로 변경됐다.
3년간 부산진 수군첨절제사로 근무한 채용신. 온화한 성품으로 민심을 크게 얻은 그가 부산진을 떠나게 되었을 때,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워 그의 업적을 칭송했다.’ 이것은 기록에 나타난 채용신의 부산진 근무 내용의 전부이다.
#피비린내 나는 상육의 현장
▲ 부산진성에 남아 있는 왜성 흔적
부산 진성의 자성 자리에 왜장 모리테루모투가 쌓은 왜성의 흔적.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비스듬히 쌓은 게 특징이다.
한반도 최동남단, 부산은 일본과 맞닿는 국경지대이다. 실제 부산에서 대마도까지는 약 50km 정도밖에 안 된다. 가까운 거리다. 이러한 지형적 영향으로 부산진은 임진왜란(1592~1599) 최초의 전투지역이였다.
임란 300년 후에도 채용신이 근무한 부산진은 여전히 요충지였다. 지난 9월말 부산진성을 답사한 취재진은 좌천동의 증산에 있었던 본성(母城)과 동남쪽 바닷가에 위치한 지성(子城)일대에서 채용신의 숨결을 느껴봤다.
‘자성대공원’으로 알려진 부산진 지성에는 왜성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산책길을 따라 도열한 듯 왜성이 있다가 숲사이에서 불쑥 불쑥 나타났다. 채용신도 이곳에 근무하면서, 이 길을 따라 걸으면서, 왜성을 보면서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300년 전 700여척 병선에 20여만 명의 왜군이 조선을 침범, 피비린내 나는 살육했던 그 현장. 성을 허물고 수백호 마을을 불태웠던 잔학한 그 모습. 성안은 불에 타 검은 연기가 가득하고, 칼날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만 낭자했을 터. 이런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산책하는 중년들, 물통 들고 가는 노인이 가끔씩 눈에 띠였다.
#자성대 바다매립으로 사라져
▲ 복원된 부산진성의 동문
이곳 자성은 모성인 부산진성만큼이나 험한 세월을 보냈다. 임란때 성이 허물어지고 왜성의 자성이 되었다가, 왜군을 몰아낸 뒤에 명나라의 만세덕 군대가 일시 주둔했다. 그 뒤 조선에서 자성대를 중심으로 성을 쌓고 4대문을 만들어 부산진첨사영으로 사용했다.
그러다가 일제 침략기에 성은 마침내 철거되었으며 자성대 일대의 바다는 매립돼 옛 모습은 사라졌다. 조선성은 사라져 볼 수 없고 왜성만 남아 그 당시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 18세기 부산지역 화가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동래부사접왜사도>에는 부산진성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동래부사접왜사도>를 보면 부산진성의 옛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동래부에 도착한 일본 사신을 맞이하는 행사를 그린 그림이다. 병풍에 넓게 펼쳐진 화면은 산수와 인물, 건물이 어우러진 파노라마식으로 구성됐다. 화면 오른쪽 성이 부산진 자성이다.
4대문과 영가대가 선명하다. 바닷가에는 병선 3척이 정박해 있다. 성안에는 공진관(객사),검소루,진남대(장대)가 잘 묘사돼 있다. 해안가엔 가옥들이 즐비하다. 지금의 범일동,좌천동에 해당된다. 서문 앞은 시장터. 지금의 부산진시장과 남문시장이다.
#왜군을 크게 경계하라
한편 임란 이후 조선 조정은 부산진 지성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고 서문에다 ‘남요인후(南?咽喉)’ ‘서문쇄약(西門鎖?)’이라는 기둥 돌(부산진 지성 서문성곽 우주석·부산시 지정 기념물 제19호)을 세운다. ‘남쪽 국경은 나라의 목과 같이 중요하고, 서문은 나라의 자물쇠와 같이 굳건해야 한다는 뜻이다.
‘왜군을 크게 경계하라’라며 새긴 것이다. 자성대 위의 장대는 ‘진남대’라 하고 편액을 달았다. 진남대는 지금 보수공사중이다.
본성인 부산진 성터는 자성에서 직선거리로 1키로 남짓이다. 1890년에 세워진 부산진교회, 1895년에 설립된 일신여학교, 한국전쟁 중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 한국선교회에서 세운 일신기독병원 등 부산의 유서 깊은 근현대 건축물이 자리한 곳 사이에 옛 성곽 형태의 사당 하나가 생뚱맞게 자리해 있다.
이곳이 임란때 정발 장군을 비롯한 주민들이 장렬히 싸웠던 ‘부산진 성터’이다. 정발장군 비석과 사당이 모셔진 정공단이라는 현판이 붙여있다. 입구 좌우엔 깃발이 펄럭였다.
#10개 비석 도열…蔡龍臣명문 안보여
▲ 첨사비
담장 곁에는 부산진첨사비 10개가 도열해 있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비문을 훑어봤으나 ‘蔡龍臣’이란 명문은 보이지 않았다. 세웠다는 기록은 있는데, 세워진 비석은 없고……. 어찌 된 것인가? 어디 쳐박혀 못 찾은 것인가. 훼손돼 멸실된 것인가. 아니면 기록이 잘못 된 것인가. 알 길이 막막했다. 부산동구청을 찾아가 금석문 자료까지 뒤져봤으나 허사였다. 1895년에 첨절제사제도가 폐지됐다고 하니 채용신 흔적 찾기는 더 어려울 것 같았다.
글·사진=하대성 기자, 동영상=이형기 프리랜서
15. "채용신 그림이 좋다" 고종도 감탄- 어용화가로 뽑히다
을미년(1895) 벼가 누렇게 익는 청명한 가을날. 채용신은 부산진첨사 임기를 마치고 전주 우북면(현 익산 왕궁)장암리에 돌아왔다. 왕궁은 삼례찰방을 역임한 10대조 인필(仁弼)이 입향조로 살던 지역 인근이자 맏아들 경묵이 한때 거주했던 곳이기도 했다.
#관성묘에 있었던 삼국지연의도
당시 나라 상황은 위기의 극한이었다. 밖으로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이 극심했고 내부적으로는 부정부패로 인한 사회혼란 속에 청일전쟁까지 터져 위기의 연속이었다. 고종은 국난 극복 돌파구를 찾고자 골몰했다.
외세 침략 극복의 일환으로 무신(武神)으로 추앙받았던 관우신상을 모신 관성묘가 1895년 전주 남고산성에 건립됐다. 당시 전라도 관찰사였던 김성근과 남고진 별장 이신문이 발기로 세운 것이다. 이곳 관성묘 동무와 서무에는 1914년에 채용신이 그린 보물급<삼국지연의도>가 걸려 있었으나 1975년 한차례 도난과 회수된(1980년)이후 어떤 사정에 의해 현재 강원도에 있어 지역문화인사들이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고종은 선조에 대한 추모의 도(道)를 다하기 위하여 선원전(璿源殿)을 중수한다. 1897년 당시 친러세력에 의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고 있었던 고종은 내외여론에 의해 경운궁으로 환궁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친다. 연호도 광무(光武), 왕을 황제라 칭하며 자주독립국임을 내외에 선포했다.
고종은 조종(祖宗)의 운(運)이 발하기를 기원하며 1899년 전주 건지산에 조경단(肇慶壇)을 신축했다. 건지산은 천자(天子)의 발상지라 하여 옛날부터 태조(太祖)이상의 의총(疑塚)이 있다는 설이 있어 경계를 정해 출입을 금하던 곳이다.
#채용신이 그림이 능합니다
▲ 채용신 평생도의 <어사용도>
이후 고종은 선원전에 봉안할 태조 영정을 모사 하도록 결정했다. 모사에 참여할 화사(畵師)의 선택과 모사청(模寫聽)을 설치했다. 이때 의정부 찬정 민병석(議政府 贊政 閔丙奭)이 채용신을 고종에게 추천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채용신이 저술한 ‘봉명사기(奉命寫記)’에 잘 나타나 있다.
“경성 내외를 막론하고 그림에 능한 사람이 있는가”
고종은 물였다.
“네, 있습니다. 전 첨절제사 채용신이 그 사람입니다. 일찍이 서울 북쪽 삼청동에 살았는데, 지금은 전라도 완산군에 있습니다.” 의정부 찬정 민병석이 대답했다.
고종이 “성 안에 그의 그림이 있느냐?”
하니 민병석이 “제천상을 그렸고 또 판서 김성근, 판서 김규홍, 판서 홍순형의 상을 그렸는데 보는 사람이 감탄하여 대단히 닮았다고 합니다.”
고종은 이들의 초상을 직접 본 후 채용신을 어용화사(御容畵師)로 결정하고 그날로 전라관찰사에게 급한 칙서를 내려 소환하게 했다. 경자년(1900년) 정월 초이틀에 윤용선, 민영환이 어지를 받들어 재빨리 전라도 관찰사에게 조칙을 내렸다.
“본 군에 사는 채용신을 불러서 곧바로 어명을 받들어 길에 오르게 하고 노잣돈과 종과 말을 갖추어 보내도록 하라.” 초칠일에 해당 관청으로 달려가니, 다음날 조회에서 도제조가 채용신이 명을 받고 달려왔다는 소식을 아뢰었다.
#궁내부 화가 8명과 재주 시험
기로소에 소장되어 있는 초상화를 가져오게 한 고종은 채용신과 궁내부 화가 8명의 재주를 시험하고자 고(故)재상 정원용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그리고 친히 각자가 그린 것을 살펴보고 “이 그림이 가장 좋다”라며 채용신의 그림을 칭찬했다.
“이 사람이 경향 각지에 이름을 떨친 것은 진실로 논할 것이 없다”며 나머지 여덟 명도 별도로 그 우열을 정하였다.
임금이 다시 화가를 구하도록 명을 내려서 화가 여섯 명이 다시 달려오니 여러 날에 거쳐 열여섯 사람을 모아놓고 시험하여 2월 17일에 끝났다. 다음날에 도제조 윤용선이 태조 고 황제의 어진을 함경도 영흥군 선원전으로부터 받들어 와서 흥덕전에 옮겨 봉안을 하니 임금이 당일로 행차하여 어진에 네 번 절을 했다
▲ 채용신이 고종어진을 그렸던 덕수궁 중화전.
#칠곡도호부사 제수받아
또한, 군신들에게 말하기를 “모든 화가의 거처에 제공하는 음식은 반드시 착실하게 정해진 액수대로 하라.” 또한, 채용신를 불러 말하기를 “내일부터 일을 시작하라”고 하고 궁으로 돌아갔다.
다음날에 왕이 황태자를 이끌고 와서 다시 네 번 절을 하고 말하기를 “여러 절차와 준비는 어떠한가?”라고 하여, 여러 신하들이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어진 옆에 앉아 채용신에게 물었다. “네 나이는 얼마인가? 시력은 어떠한가?”라며 “반드시 좋은 눈을 잘 보호해야 한다”고 했다.
2월19일부터 모사를 시작된 태조진영(太祖眞影)은 4월6일에 완성되었고, 그 공으로 채용신은 칠곡도호부사(漆谷都護府事)를 제수받았다.
글·사진=하대성 기자
<현장 인터뷰>이원복 중앙박물관 학예실장 - "석강 그림실력은 신기할 정도다"
▲ 이원복 중앙박물관 학예실장
“조선시대 초상화는 대륙적 스케일의 중국 초상화보다 겸손하고, 섬세한 분위기의 일본 초상화보다 절제됐다. 터럭 한 올의 오차를 허용하지 않게 형상화하면서 궁극적으로 내면의 혼과 인격을 드러내고자 했다. 시각적 사실주의를 추구한 일반 서구의 초상화를 뛰어넘는 한국 미술의 위대한 성취이다.” 국립중앙박물관 기획특별전 ‘초상화의 비밀’을 주도한 이원복 학예실장의 얘기다.
“채용신의 그림실력은 참으로 신기하다. 기록으로 나타난 것처럼 20대 초에 대원군 초상을 그렸고, 고종이 화원출신이 아닌데도 어용화사로 뽑을 정도로 재주가 감탄스럽다.” 채용신에 대한 남다른 사랑이 있는 이원복 실장은 지난 2001년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 채용신 전시회 때 논문을 싣기도 했다.
“조선시대 회화사를 이야기할 때, 보통 1850년에서 1910년을 말기로 잡는다. 조선적인 것이 쇠퇴하고, 새로운 것이 들어 온 시기였다. 이 시기에 활동한 채용신의 경우 1870, 80년대 공백기가 있는데, 당시 장승업은 근대화단의 뿌리였다.”
이원복 실장은 안중식, 조석진이 활약했던 때와 견주어 채용신을 설명했다. “채용신이 공식적인 그림(대원군 초상화)을 20대 초에 그렸다면, 당시 조선말 화단과 교류가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장승업, 이한철 이런 사람들이 채용신에게 적지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고 이 실장은 추측했다.
당시 수표교, 안국동은 물산의 집산지였기에 많은 교류할 수 있는 장소였고 지금의 인사동 거리보다 더 활발한 종합예술타운였다고 한다.
“필법이나 기량, 화풍, 됨됨이 면에서 조선 초상화가 중국보다 앞섬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곳 예술의 거리에서 채용신도 많은, 좋은 작품을 많이 봤을 것이다. 일부에서 말하는 궁궐을 출입하면서 진전에 있는 왕의 초상을 보고 공부했을 거라는 주장은 당시의 상황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감히 왕의 초상을 함부로 볼 수 있게 한단 말인가.” 이원복 실장은 현실성 없는 이야기에 쐐기를 박았다.
이번 국립중앙박물관의 기획특별전 ‘초상화의 비밀’은 11월6일까지 열린다. 국내 초상화 전으로서는 최대 규모로 평가받고 있는 이번 특별전에는 조선시대 초상화를 비롯한 중국과 일본 그리고 유럽의 초상화 200여 점을 전시되고 있다. ‘태조 어진’, ‘윤두서 자화상’, ‘이재 초상’ 등은 물론 이명기, 김홍도, 김희겸, 채용신 등 당대 손꼽히던 화가들의 국보급 초상화들을 볼 수 있다.
하대성 기자
[현장 인터뷰]오삼석 부산진시장 상인
“부산진시장은 조선시대부터 시장이 형성돼 있었고 2013년이 되면 상설시장으로 개장된 지 100년 된다. 지금은 견직업체 몰락으로 상권이 많이 위축되긴 했지만 아직도 부산을 대표하는 98년 전통을 간직한 전국 3대 재래시장에 꼽힌다.”
부산진시장에서 30년 동안 ‘삼영직물’이라는 간판을 걸고 포목점을 하고 있는 오삼석(62)씨의 말이다. 그는 70년까지만 해도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등에서도 의류, 포목, 혼수용품을 구입해가는 도매시장이었다고 했다.
“작년부터 경기가 안 좋아 체감경기가 말이 아니다. 재고도 싸게 팔면 잘 나갔는데 지금은 안 팔린다.”며 오 대표는 경제난을 하소연했다. 1913년 당시 60평 규모의 함석점포로 상설시장을 개장한 부산진시장은 경영 및 시설현대화 사업을 추진해 오늘에 이르렀다.
한때 부산의 부자는 모두 부산진시장에서 장사한다고들 했다. 그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몰렸고 돈을 많이 벌었다. 곁에 있는 부산남문시장 또한 오래된 시장이다.
“채용신 첨사도 이곳 부산진성에 근무하면서 가끔 시장구경도 하고 좋은 포목을 사서 집으로 보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곳 제품은 그만큼 값이 싸고 질이 좋았다.” 오 대표는 부산진시장의 역사와 물목의 품질을 자랑했다.
하대성 기자
[현장 인터뷰]이성훈 부산박물관 학예사
이성훈 부산박물관 학예사
“채용신이 부산에 근무한 것 외에도 부산박물관과 인연은 깊다. 그가 그린 조선시대 문신 이종림 초상과 백납병을 소장하고 있다.”
부산박물관 학예사로 근무하는 이성훈씨. 그는 익산 금마 출신인 이종림 초상을 지난 2009년에 경매를 통해 구했다고 했다. 국민배우 안성기를 닮았고 초상 상단 양편에 우국 심정을 표현한 본인의 찬이 이색적임을 강조했다.
백납병은 원래 10폭의 대형 병풍에 대략 60여 점의 그림이 표장된 작품인데 그 중 2폭 9점이 기증됐다. 기증자 김남숙씨 집안이 순정효황후에게서 직접 받은 작품이다고 했다. 근대기 최고의 초상화가로 평가받는 채용신 작품의 또 다른 진면목이다. 산수도,화조도,영모도 등에도 그 현란한 솜씨를 발휘했다.
“채용신이 부산진첨사로 재임할 당시 이전에 동래 지역에는 왜관의 일본인들에게 판매할 목적으로 그림을 제작했던 화가들이 적지 않게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상황을 좀 펼쳐보면 채첨사도 이곳 지방 화가들과 교류를 했지 않았나 싶다.”
이 학예사는 나름대로 채용신의 부산진에서 미술생활을 추정했다. “이번 조사에서 채용신에 대한 금석문이 나왔으면 좋았는데 좀 아쉽다. 아무튼, 비석을 포함해 남아 있는 작품이 이 지역에 있는지 면밀히 찾아 볼 예정이다.”고 그는 밝혔다.
하대성 기자
"채용신은 칠곡의 자랑거리,연구할 것" - "칠곡도호부사 지낸 채용신은 자랑거리"
▲ 원도스님(혜원정사)
“팔공산과 유학산을 연결한 가산산성은 영남제일관이다. 임진왜란 때나 한국 전쟁 때 많은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많은 피를 흘렸다.” 가산산성내에 있는 사찰 ‘혜원정사’ 원도스님의 얘기다. 원도스님은 이곳에 정착한지 30년 됐다.
20여 년 전 큰 태풍으로 온 마을 쑥대밭이 돼 위쪽에 있던 마을이 혜원정사 아래쪽으로 옮겨 갔을 정도로 피해가 켰다. 가산산성에서 근무한 채용신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한다는 원도스님은 심한 무릎 관절염으로 고생하고 있다.
“옛 칠곡도후부는 가산산성 중문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됐다. 지금은 숲이 우거져 볼 수 없지만 초겨울이나 봄이면 그 흔적을 볼 수 있다.”며 원도스님은 취재진을 그 곳으로 안내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고종초상화 등을 그린 어진화가가 이곳 도호부사로 근무했다는 사실이 문헌으로 나왔있다면 이 또한 칠곡의 자랑거리로 생각된다.”고 그는 덧붙였다.
"채용신 관심갖고 앞으로 연구할것"
▲ 여환숙 이사(칠곡문화원)
“칠곡은 호국의 고장이자 문학의 산실이다. 한국 전쟁때 유학산 전투는 세계2차대전후 가장 치열한 전투로 꼽을 정도였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두 번이나 올랐던 구상시인이 태어난 곳이 칠곡이다.” 칠곡문화원 이사이자 문화해설사로 봉사하는 여환숙씨의 칠곡사랑은 남달랐다.
전쟁과 문학이 공존하는 칠곡을 찾은 관광객을 위해 일주일에 사흘은 해설한다. 37년간 근무한 공직의 경험을 살린 여환숙 이사는 지역문화와 역사알림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칠곡을 찾은 많은 관광객들로부터 친절하고 멋진 해설로 감사의 전화를 종종 받고 있다고 한다.
“칠곡부사로 근무한 채용신은 잘 몰랐지만, 200여점의 초상화를 남겼다면 대단한 어진화가임에 틀림없다. 이곳에서 역사적 자료나 그림이 나오면 곧 바로 알려주겠다. 또한 칠곡문화원에서도 채용신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 할 것이다.” 여환숙 이사는 채용신에 대해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
하대성기자
돌산진 근무 당시 모습 그린 '44세 자화상'
▲ 채용신의 44세 자화상
무관복을 입고 부채와 안경을 들었다. 병풍를 쳐놓고 그 앞에 검과 활을 배치했다. 발밑에는 인장함이 놓여있다.
그림에는 '水軍僉節制使蔡龍臣四十四歲像(수군첨절제사채용신44세상)'이라는 제목이 써있다. '癸巳秋七月上澣慕寫(계사추칠월상한모사)'라는 관지도 있다. '44세상'이라 적혀 있다하여 작화(作畵)년대를 1893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조선미 성균관대 교수는 말한다.
조교수는 돗자리 문양의 앞뒤에 대소가 있으며 정면향이어서 1920년대 이전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병풍이나 안경,부채 등 지물은 1920년대 후반에 등장하는 양식이다고 한다.
"석강실기에는 권철수가 1924년에 지은 石江蔡公畵像贊(석강채공화상찬)이 실려 있는데 이 시기가 제작연도가 아닌가 싶다. 이런 추측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자료는 관지에 '圖寫'나 '寫'라고 하지않고 '慕寫'라고 한점이다. 44세 당시 그려둔 본을 기초로 모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조교수는 우리나라는 화가의 자화상이 드문데, 석강이 자화사을 그렸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고 했다.
하대성 기자
16. 칠곡부사와 부친별세- 喪中에도 어진모사 神筆 불태워
▲ 칠곡도호부사가 있었던 가산산성.
채용신이 어진을 그리고 그 공훈으로 제수받은 칠곡도호부사. 도호부사는 지금으로 말하면 군수이다. 칠곡에 온 채용신은 도호부,향교 등을 초도순시했다. 취재진은 칠곡도호부가 있는 가산산성(架山山城)으로 향했다. 가산산성은 우리나라 산성으로 유일하게 삼중성으로 돼 있다.
산 정상에 내성,중턱엔 중성,하단에 외성으로 쌓아졌다.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에 “도내에는 가히 지킬만한 성이 없는데, 오직 칠곡부의 성곽만은 만길 높은 산위에 남북대로를 깍은듯 서 있어, 거대한 방어 요새이다”라고 기술했다.
그야말로 영남제일관방(嶺南第一關防)이다. 칠곡도호부사가 있었던 자리으로 추정되는 중문부근은 녹음이 우거지고 지형이 바뀌어서 분간 할 수가 없었다. 문지와 성벽 유구는 남아 있으며 내성의 서쪽벽은 온전한 편이였다.
▲ 공차기는 하는 칠곡초등학생들
취재진은 다시 대구 북구 읍내동(邑內洞)으로 갔다. 칠곡도호부 관아가 있던 읍내는 예전에 칠곡이었으나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구 편입됐다. 관아 터는 현재 칠곡초등학교 테니스장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칠곡군청은 1014년 왜관으로 옮기기 전까지 이곳에 있었다고 칠곡초등학교 백년탑에 기록돼 있었다. 읍내동에는 칠곡향교도 있다. 채용신은 이곳 관아에서 군정을 봤다.
▲ 칠곡도호부 관아가 있었던 기록된 칠곡초등학교 백년탑.
#뜻밖의 비보에 정신이 혼미
칠곡관아에 있던 채용신에게 어느 날 급보가 날아들었다. ‘부친 권영 위독.’ 부임한지 석 달이 못돼 접한 비보였다. 칠곡부사로 발령받던 날 그렇게 좋아하셨던 아버님이, 칠순을 넘겼지만 보기보다 정정했었는데……. 전갈을 받은 채용신은 순간 정신이 혼미했다.
내 그림을 그토록 자상하게 봐주고 관심을 보였던 아버님이, 호롱불 아래서 그림 그릴 때 옆에서 안료를 섞어주고 먹을 갈아 주었던 아버님이, 마당 한켠에 솥단지를 걸고 아교도 끓여주었던 아버님이……. 채용신은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리곤 남이 볼세라 뒤돌아 옷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다음날 아침 일찍 채용신은 행장을 챙겼다. 익산 왕궁으로 말을 달렸다. 추풍령을 넘고 영동,금산,논산을 거치면 여산,왕궁이다. 칠곡을 출발해 달린지 사흘 후 먼동이 틀 무렵 왕궁에 도착했다. 아버님의 병은 생각보다 깊었다. 기력이 쇠진해 물 한 모금 넘기기도 힘든 표정이었다.
채용신은 밤낮없이 회복을 고대했다. 아니 좀 더 사시길 바랐다. 그동안 못 다한 얘기를 하고 싶었던 채용신의 허나 극진한 간병도 허사였다. 아버님은 73세 일기로 생명줄을 놓았다.
이때 사정은 평생도 제6폭 신연도(新延圖)의 제기(題記)에 잘 나타나 있다.
#선원전 칠실에 원인모를 화재
1900년 8월 20일. 선원전(璿源殿) 칠실(七室)이 원인 모를 불이 났다. 이 불로 태조 어진을 비롯한 칠조(七祖) 영정 모두를 태워버렸다. 어진이 봉안된 지 불과 몇 달 안 되는데 끔직한 화마가 덮쳤다.
채용신은 상중(喪中)임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어진모사의 명을 받았다. 그는 온갖 정성을 다하여 모사 제작에 임해 9월 26일 태조어진 2본을 완성했다. 숙종, 영조, 정조, 순조, 익종, 헌종의 어진도 이 해 12월 7일에 끝마쳤다.
▲ 채용신 평생도의 제6폭 <신연도>
어진(御眞) 모사 과정을 지켜봤던 고종은 채용신의 탁월한 화재(畵才)를 인정했다. 내년에 다시 입궐 자신의 어진을 모사하도록 고종은 명하였다. 채용신은 잠시 낙향하였다가 1901년 정월 재차 도성(都城)에 올라와 고종어진 도사했다.
1901년 3월 21일 조정 궁내부 내장원으로부터 훈령(訓令) 제1호가 내려왔다. “칠곡군 매원시(梅院市) 포사주인 박극이의 고소에 의하면, ‘포사를 수년 간 영업하면서 세금도 장정에 따라 납부하였는데, 전관(前官)의 체귀(遞歸 벼슬을 내놓고 돌아옴)전에 군리(郡吏) 이남극이 뇌물을 써 관련(官力)을 빙자하여 박극이를 가두고 포사를 탈취했다’고 하니, 즉시 이남극의 죄를 다스리고, 박극이를 포사주인으로 복구시키라”는 내용이었다.
채용신은 첫 훈령를 말끔하게 처리하고 그 결과를 내장원경임사서리도지부협판 이용익에게 보고했다.
#기막힌 실수 예술혼 더 빚나 일화 한토막.
고종은 왼쪽 수염 옆에 작은 사마귀가 있었다. 이를 민망하게 여긴 각료들은 채용신에게 그것을 그리지 말라고 일렀다. 고종의 초상화가 마무리될 때였다. 각료들이 둘러보고 있는데 채용신이 마지막으로 수염을 손질한 뒤 너무 긴장한 탓으로 그만 붓을 놓치고 말았다. 그런데 붓끝이 사마귀가 있는 제 자리에 정확히 찍혔다. 명을 어겨 채용신은 황공하여 엎드려 떨고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분위기가 싸늘하지 않았다. 수염 옆에 사마귀가 찍힘으로서 비로소 용안의 미소가 살아나 그림이 훨씬 돋보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채용신은 신필로 알려지게 되었다. 천재의 기막힌 실수가 예술혼을 더 빚냈던 것이다.
고종은 이어 기로소(耆老所) 당상(堂上) 삼승상(三丞相) 13정경(正卿)의 영정을 모사하도록 명했다. 모두 핍진(逼眞)한 경지에 이르러 고종은 16본의 주인공을 모두 알아 맞췄다.
채용신은 그 공로로 특별히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에 임명되었는데 그가 상중(喪中)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 오래 머물렀던 것 같지는 않다.
1904년 가을 부친 거상(父親 居常)이 끝남과 동시에 채용신은 총리대신 윤용선(尹容善)의 천거로 충남 정산군수(定山郡守)에 임명된다.
글 사진=하대성기자
"내년 면암 기념관 건립, 초상화 보존처리 추진"
복진서 전 증산면장
“어진화가이자, 정산군수를 지낸 채용신은 대단한 인물이다. 조선 후기 혼란한 시국에도 선정을 펼쳐 주민들이 나서서 군수직을 더 해달라고 했을 정도였다.” 복진서씨는 채용신이 군수로 근무했던 정산군청(현 정산면사무소)에서 면장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서예에 일가견이 있고 산수화에도 남다른 안목이 있다.
“아마 채용신이 정산군수로 부임했때도 청사 옆에 있었던 백연지(白蓮池)의 연향을 좋아했을 것이다. 못 가운데에 있는 만향정에 올라 여러 고을을 관망했을 것이다. 때때로 지역 유지들과 이곳에서 연잎차를 마시며 군정을 논했을 터이다.” 복진서씨는 면장 경험을 살려 당시를 추상했다.
이석만 모덕사 관리 공무원
“1914년에 건립된 청양 모덕사는 채용신이 그린 면암 최익현 초상화가 모셔진 사당이다. 매년 봄, 가을 두 차례 제향을 드린다. 5월이면 철쭉이 만발하면 장관이다.” 모덕사 전담 관리 공무원 이석만씨(54)는 연간 1만2천 명의 관광객이 면암을 찾고,모덕사를 방문한다고 설명했다.
전북 태인 의병봉기일 양력 4월13일은 청양군수, 도지사 등이 참여하고, 음력 9월16일은 지역 유림의 모덕회가 중심이 돼 제향을 지낸다.
이씨는 “채용신이 1905년에 그린 최익현 초상은 보존처리가 필요하다”며 “장황이 낡아서 문중과 상의해 보수할 예정이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내년에 면암 기념관을 영당 뒤편 2천 평 부지에 100평 규모로 지어 유물전시,교육,체험시설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운영할 예정이다고 덧붙였다.
하대성 기자
17. 정산군수와 최익현 조우 - 애국충신,친일파에 파면 당하다
▲ 면암 최익현 사당인 모덕사 전경
1904년 가을, 채용신은 부친 3년 상을 마쳤다. 고종은 총리대신 윤용선(尹容善)에게 천거하도록해 채용신을 충남 정산군수(현 청양군수)로 임명했다. 시묘살이 중에도 몇차례 출사를 요청받았으나 채용신은 거절했다. 어찌 부친 상중에 관직에 나갈 수 있겠는가. 아무리 세상이 하수상해도 자식된 도리가 아니라 여겼다.
뭇서리가 내린 초겨울 새벽, 채용신은 화첩이며 지필묵,옷가지 등 가볍게 꾸린 행장을 말잔등에 얹혔다. 그리고 부임지 정산으로 출발했다. 왕궁에서 여산,강경를 지나 부여를 거쳐 정산까지는 말타고 꼬박 하룻길이였다.
#만향정과 백련지 연향 그윽
산악이 중첩된 고장 정산은 동에서 서로 칠갑산이 뻗쳐있다. 구름의 기복 또한 심한 편이었다. 금강 지류인 치성천과 잉하 달천이 흐르고 있었다.
▲ 옛 정산군청 자리인 정산면사무소
채용신이 본 정산군청은 아담했다. 청사 주변으로 아름드리 나무가 즐비하고 옆엔 백련지(白蓮池)가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 선조 20년(1587년) 송담 송남수 정산현감이 만든 연못에 역시 정산현감으로 있던 사계 김장생이 심었다는 백련이 꽃을 피우면 만향정(晩香亭)과 어우러져 운치를 그만이다는 얘기도 들었다.
“달빛아래 희디 흰 백련 거울같이 피어/ 그윽한 향기 못 위로 떠서 그림자 따라 배회하네”
“울타리 아래 노란 국화가 좋아/ 꽃 중의 숨어 사는 군자로다/ 차가워져도 살아 있는 것은 드물고/
엄한 서리 내리는 밤도 두렵지 않도다.”
230여년전 조발 정산현감과 조선 후기 실학자인 김육이 지은 시가 걸려 있는 만향정에 오른 채용신은 고을을 관망했다.
이 백련은 다른 곳으로 옮기면 죽는다는 전설을 갖고 있어 신비감마저 들었다. 봄이면 하얀꽃에 향기가 서정리 일대에 그윽했을터. 동네에 정산향교가 있어 아이들의 글읽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으리랴. 지금도 이 일대에는 옥이 있었다는 ‘옥거리’,백정이 살던 마을로 돌다리에 소가죽을 널어 말렸다는 ‘피촌말’이라는 조선시대 지명이 남아 있었다.
#꿋꿋한 기개·애국정신에 감화
▲ 채용신이 그린 최익현 초상화
부임한 다음날 업무보고를 받은 채용신은 인사차 정산향교에 들렀다. 그리고 면암 최익현이 사는 목면 송암리로 말머리를 돌렸다. 정산 사정리에서 송암리(현 모덕사)까진 30리, 말타고 한시간 남짓한 거리다.
▲ 채용신과 최익현이 만났던 면암 고택.
채용신은 면암을 처음 뵙고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다. 문인의 몸으로 무관이 무색할 만큼 꿋꿋한 기개에 놀랐다. 조선의 장래을 생각하는 애국정신에 크게 감화됐다. 채용신은 그를 스승으로 받드리라 결심했다. 이 때부터 틈나는 대로 애국지사(愛國志士)와 거유(巨儒)의 초상을 그려 후세의 귀감으로 삼길 원했다.
공사(公事)로 여념이 없는 와중에도 붓을 자주 들었다. 스승 최익현상(崔益鉉像)은 물론 그의 제자 항일의병장이었던 임병찬(1851-1916), 윤항식(尹恒植1855-?)의 초상화을 만들었다. 송사를 물 흐르듯 집행한 채용신은 백성들을 덕으로 다스렸다. 이 때 상황은 채용신의 평생도 제7폭인 도임도(到荏圖)에 잘 나타나 있다.
이듬해인 1905년 채용신은 최익현 73세 전신좌상을 그렸고 종2품(從二品)으로 승차했다. 그 기쁨도 잠시였다. 국운은 기울기 시작하여 사실상 외교권 박탈이라 할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됐다.
이 조약에 서명한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이른바 ‘을사오적’을 처단하라는 요구가 들불처럼 번졌다. 민중식 의병장을 비롯한 창의가 곳곳에서 일었다.
#관군-의병 충돌은 막아야 한다
1906년 정산주민들은 4월16일자 황성신문에 채용신 관련 광고를 냈다. ‘채용신 정산군수가 부임한지 한해가 됐다. 떠날때가 됐는데 치적이 많아 정산군수직을 더 수행하길 원한다. 군민들이 원해서 광고를 했다.’는 내용이다.
정산군민들이 채용신 군수를 유임시킬 것을 고종황제에게 탄원한 것이다. 이 광고를 주민들이 왜 냈을까. 사학자들은 송덕비 건립과 함께 이런 광고를 내는 경우가 있다고 하며, 이는 채용신의 선정으로 인한 주민들의 애정어린 표시였던 것이다.
▲ 정산주민들이 채용신군수의 유임을 요청하는 황성신문의 광고
조선을 그토록 사랑했던 채용신, 고종의 충실한 신하였던 채용신, 주민을 덕으로 다스렸던 채용신, 그는 친일파에겐 눈엣가시였다. 이 나라 백성인 의병들에게 창검을 겨눠라 말인가. 채용신은 관군과 의병의 충돌을 막고자 고민했다.
의병들이 군청으로 온다는 소식을 접한 채용신은 인장을 가지고 자리를 피했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그 즈음 여기 저기에서 채용신의 탄핵작업이 감지돼기 시작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근대정부기록을 보면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사료가 나온다. 1906년 3월27일 충청도 관찰사 서리 직산군수 곽찬이 내부대신 이지용과 외부대신 박제순 앞으로 “채용신이 보고도 없이 인장을 지참하고 지역을 이탈했으니 면직해야 한다”며 청원서를 낸다.
이지용,박제순은 누구인가. 을사오적이다. 이들은 4월2일 상정된 채용신 면직안을 전격 가결처리했다. 채용신은 결국 친일파에 의해 파면당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친일파에 동조하지 않은 죄였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1906년 관직에 물러난 채용신은 향리인 익산 왕궁 장암리에 내려가 칩거한다. 그가 관직에 나간 지 20년 만의 일이요, 그의 나이 57세였다.
글·사진=하대성기자,동영상=이형기 프리랜서
최초의 상업공방, 채용신 ‘금마산방’ 찾았다 - 금마 원촌마을서 발견...문헌,작품속 근거 첫 확인
조선말 익산출신 <어진화가 채용신>이 작품 활동했던 100년 된 ‘금마산방’이 발견됐다. 이 금마산방은 정읍 신태인 육리에 있는 ‘석강도화소(石江圖畵所)’보다 20여 년 앞 선 대한민국 최초의 상업공방으로 평가돼 학계와 예술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전북도민일보 <채용신 기획팀>이 지난 11일 제보로 찾은 금마산방은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원촌마을 61-8번지 위치한 대지면적 509㎡(154평)에 건축면적 100㎡(30평) 규모의 기와집으로, 원형이 절반 정도 보존돼 있었다.
건축물대장에는 1910년에 등재된 것으로 기록돼 있어, 최소한 100년 전에 건축이 된 것으로 보인다. 서까래와 대들보, 주춧돌과 기둥 등 가옥의 옛 모습은 절반 정도가 보존돼 있어 앞으로 채용신의 생애 및 작품연구에 소중한 사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가옥은 부엌, 큰 방, 작은 방 등 3칸 겹집이며 큰 방은 다시 3개로 나눠 이 중 한 칸을 화실로 쓰인 것으로 보이고 있다. 벽장과 방문, 창문 또한 옛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 대한민국 최초의 상업공방인 채용신의 금마산방이 전북도민일보 <채용신팀>에 의해 발견됐다. 김복현 익산문화원장 등이 금마산방의 가옥구조를 살펴보고 있다
▲ 금마산방이라는 관지가 있는 채용신의 <화조도>
마을에 사는 이양원(80·전 금마초등학교 교장)씨는 “그 집에 채정산이라는 유명한 화가가 살았다. 원래 원촌마을은 전은 이씨 집성촌으로 아무도 이주할 수 없으나 채용신은 화가로 유명해 특별히 거주할 수 있도록 문중에서 배려했다는 이야기를 할머니한테 들었다”고 밝혔다. 채정산은 정산군수를 역임한 채용신의 별칭 중의 하나이다. 이씨는 지금도 증산(정산)선생이라는 호칭으로 채용신을 불렸다.
현재 금마산방에 살고 있는 조구봉(70)씨는 “20여 년 전에 이 집을 매입해 외벽과 내부 일부를 고쳐서 살고 있지만 상당히 잘 지어진 집이다”고 밝혔다. 이 집의 건축물대장을 보면 사용승인일자가 1911년으로 돼 있어 최소한 100년 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동고도리에 거주하던 채용신이 이곳에 금마산방을 짓고 본격적인 프로화가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채용신의 4대 직계 손인 은석(75·익산 남중동)씨는 “할아버지가 작품 활동한 금마산방은 항상 물이 넘쳐 흐르는 우물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시어머니한테서 들었다”고 말했고 실제로 이 집 화단자리에 우물이 있었으나 몇 년 전 집을 정비하면서 이 우물을 메웠다고 조씨 부인은 말했다.
김복현 익산문화원장은 “채용신이 살았던 금마산방은 문헌과 작품의 관지에 나타나 있었지만, 이렇게 보존상태가 상당히 우수한 상태로 가옥이 남아 있을 줄은 몰랐다”며 “조만간 전문가들과 함께 금마산방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와 연구활동을 벌이겠다”고 말했다.
1910년대 본격적인 전업화가의 길에 들어선 채용신은 금마산방에서 ‘석강실기’‘복명사기’ 저술과 삼국지연의도,우국지사와 의병장 초상화 등 굵직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하대성기자
18. 채용신 금마산방과 전업화가 - 붓날 세워 '조선의 정신'을 담다
조선시대 마지막 초상화의 꽃을 피운 어진화사. 민족정기와 충의정신을 목숨처럼 아꼈던 작가. 상업미술 효시인 공방을 최초로 운영한 프로 화가. 이는 전북출신 어진화가 석강 채용신(1850-1941)에 따라붙는 수식어다.
채용신 탄생 160주년, 서거 70주년을 맞은 2011년. 우리는 왜 이 시대에 채용신을 주목해야 하는가. 조선정신에 오롯이 마지막 정점을 찍었던 화가로서의 면모, 사진속에 함몰된 고유의 미학적 전범들, 그가 도달한 전통 초상화의 지평이 사라져 버렸다.
진정한 조선의 혼과 정신을 지독하게 고집한 채용신. 일제,미군정,현대라는 시대 흐름속에서 우리는 그 전통성을 잃어버렸다. 숭고한 정신을 되찾고 예술혼을 계승 발전시켜야 할 때다. 채용신이 추구하고 이룩한 가치가 너무나 크고 고귀하다.
그가 일군 화력(畵力)과 시대정신을 좇아 90평생의 여정을 겸허히 따라가 본다. 루트는 탯자리인 서울 삼청동에서 유택(幽宅)인 익산 왕궁 장암리까지. 채용신의 후손과 전문가, 향토사학자, 지역원로들이 함께 했다
채용신이 거처했던 왕궁 집터에서 본 탑리마을과 미륵산의 모습.
정산군수 관직을 벗고 익산 왕궁으로 돌아온 채용신은 가슴이 후련했다. 10대 선대가 살았던 고향, 왕궁이 아니던가. 때는 가을걷이가 한창이었다. 농촌의 정겨움이 채용신을 포근하게 만들었다. 길가엔 콩대와 깻대가 하늘을 향해 등허리를 말리고 있었고 밭둑에선 흐드러진 억새가 머리숙여 인사하는 듯했다. 논에선 새참에 막걸리를 기울이는 농부들이 잔을 권했다. 정겨웠다. 맏아들 경묵과 일가 친척들이 살고 있는 터라 채용신은 이곳이 든든했다.
얼마 전에 살았던 정산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막힌 자연’ 이였다면, 왕궁은 너른 들판에 정원 같은 동산이 군데군데 있는 ‘트인 풍광’ 이였다. 화원이 되고 싶었던 채용신의 무과출사는 가문을 위해 선택이었다면, 이제는 그림만을 맘껏 그릴 수 있는 ‘나의 시간’이 되었다. 이날이 오기만을 채용신은 그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던가. 선무후화(先武後畵)-武를 마쳤으니 이젠 畵에 전념할 수 있었다.
#산천은 그대론데 집은 사라지고
▲ 채용신이 장남 경묵과 거주했던 왕궁집터 자리.
1906년 석강이 장남 경묵과 함께 살았던 왕궁리 503번지는 왕궁유적전시관이 있는 궁평뜰 탑리마을 뒤편이다. 사방이 확 트여, 멀리 미륵산과 용화산,천호산 자락이 한눈에 들어왔다. 올망졸망한 동산들이 여기저기 똬리를 틀고 있다.
채용신이 묻힌 장암리 채씨 선산도 곁에 자리하고 있다. 산천은 옛 모습을 품고 있으나 채용신이 살던 집은 사라진지 오래다. 혹시라도 집터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해서 주변을 살펴봤다.
▲ 텃밭으로 변한 채용신의 금마집터 자리.
2003년에 경지정리된 논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추수를 마친 볏단만이 쌓여 있을 뿐이였다.
채용신은 이곳 왕궁에서 왕성한 작품활동에 나섰다. 좋아하는 그림을 온 종일 그렸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 줄도 몰랐다.
이때부터 채용신은 귀향 후 1924년에 이르기까지 1908년을 제외하고는 한해도 거르지 않고 화폭에 붓을 적셨다. 남아 있는 작품의 제작 연도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 채용신 넷째 아들 관묵의 금마 집자리.
#토비에 시달려 금마로 이주
1909년은 한일 합방의 전 해로써 일제 침략의 야욕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전국 곳곳에서 우국지사들이 의병을 모아 일제 침략의 야욕을 규탄했다. 채용신이 거주하던 왕궁도 예외가 아니었다. 창의 바람이 거세지자 의병을 가장한 폭도, 토비들이 기승을 부렸다. 떼지어 마을에 들어와 난동을 부리며 쌀, 음식을 요구했다.
신변의 위협의 느낀 채용신은 금마로 거처를 옮겼다. 경묵과 함께 치안이 조금은 유지되는 면청과 가까운 금마초등학교 앞(동고도리 777번지)에 터전을 잡았다. 현재 집은 사라지고 붉은 고추밭으로 변해 있었다. 담넘어 어린이집에서 그네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한움꿈씩 옛 채용신 집터에 내려 앉았다.
당시 금마 동고도리에 넷째 아들 관묵이 거처하고 있었다. 채용신은 다시 옆 동네인 서고도리 원촌마을로 이사했다. 원촌 토박이로 금마초등학교장을 역임한 이양원씨는 “예전에는 저전(楮田)이라 부른 이곳에서 채증산(채용신의 별칭)이라는 화가가 옥룡천 옆에 살았다는 이야기를 할머니한테 들었고, 현재 부산박물관이 소장한 할아버지(이종림)초상화도 채용신이 그 당시에 그린 것이다”고 말했다. 원촌은 원래 전은이씨 집성촌인데, 채용신은 유명한 화가이므로 문중에서 거주를 허락해 주었다고 한다.
여름 어느날, 미륵산 자락에서 내려오는 맑고 시원한 옥룡천 물에 몸을 씻은 채용신은 어금니를 깨물며 다짐했다. “그동안 검을 들고 고종에 충성했고 일제에 맞섰으나, 이제부턴 붓 날을 세워 일제에 대항하는 우국지사들의 불굴의 투지를 화폭에 담으리라. 선조들이 어떻게 이 나라를 지켰고, 그 정신과 혼은 무엇인지를 후대에 전하리라.”
채용신은 익산,변산,칠보,고창,나주 등을 전전하면서 우국지사와 의병장들의 초상을 그렸다. 역사기록 화가로서의, 고종의 영원한 신하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항일,우국지사 정신 화폭에 담아
1910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상실되자, 채용신은 화구(畵具)를 챙겼다. 그리고 정읍 칠보로 향했다. 당시 항일지사였던 김직술(金直述)의 집에 머물면서 화개헌 김직술, 춘우정 김영상(金永相)과 교우하며 그들의 정신과 사상을 담아 초상을 그렸다. 송정십현도와 칠광도도 그려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임병찬(林秉瓚) 윤항식(尹恒植)의 초상을 이때 그렸다.
1911년에는 전우(田愚) 황현( 黃玹) 그리고 조한범(趙漢範) 등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런 내용은 석지의 평생도 10폭 회갑연도(回甲燕圖)제기(題記)에 나타나 있다.
글·사진=하대성기자,동영상=이형기 프리랜서
김복현 익산문화원장 "금마산방 면밀 조사할 것"
“1906년 정산군수를 끝으로 20여 년간의 공직생활을 마친 채용신은 선대부터 살아온 왕궁,금마에 정착하면서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채용신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는 김복현 익산문화원장은 그의 작품제작 연도를 살펴보면 바로 알 수 있다고 했다.
채용신은 면암 최익현을 만나고부터 그의 회화에 중대한 변화를 갖게 된다. 면암의 제자인 의병장 임병찬과 윤항식, 간재 전우 등 애국지사를, 김직술,김영상 등 우국지사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는 익산 금마산방에서부터 전업화가로 나서 붓으로 독립운동을 하게 된다.
“채용신이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시작한 금마산방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통해 사료적 가치가 큰 발굴물에 대해서는 왕궁묘역과 연계해 문화재 지정작업을 추진할 예정이다”고 김복현 원장은 말했다.
하대성 기자
19.봉명사기 저술과 호남학회 활동 - 나라를 근심하는 눈물 금할길 없도다
▲ 은행잎이 노랗게 물든 정읍 칠보 무성서원. 이곳 태산사에는 채용신이 그린 최치원 영정이 모셔져 있다.
“오호라! 지금 국가 전역에서 타인들이 코를 골며 자는 땅이 되어버렸는데도 임금이 욕을 당함에 신하가 죽는 의리를 실천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눈에 가득 보이는 것은 왜침으로 인하여 나라가 망한 광경뿐이다.
진실로 나라를 근심하는 눈물을 금할 수 없다. 생각해 볼 때, 옛날에 용안을 가까이 대하고 우러러 일월의 모습과 용봉의 자태를 그림에 군신이 친밀하고 묻고 대답함이 정성스럽고 흡족하였다. 마음속으로 생각할 때, 이나 서캐처럼 보잘 것 없는 내가 일월의 말광에 의지하여 거의 물방울이나 티끌 같은 충성을 궁궐 아래에서 바칠 수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한수는 동쪽으로 흐르고 있지만 우리 왕실의 사직을 회복하지 못하여 왕실의 천한 신하가 폐하를 보지 못한 지가 9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장안에서 왕을 보지 못하는 근심이 지극히 간절하여서 한갓 “옥루 높은 곳에서 추위를 이기지 못한다.”는 시구만을 읊조릴 따름이다.
삼가 당시의 대략적인 일을 써서 감상에 만의 하나를 부칠 따름이다. 갑인년 4월 모일 전 정산군수 신 채용신이 머리를 조아리며 삼가 쓰다.”
일본서 영친왕 만나 망국의 한 나눠
▲ 태산사에 모셔진 최치원 영정.
<봉명사기奉命寫記〉말미 내용이다. 채용신이 63세(1914년)된 해, 어진 제작에 참여한 시말을 기록한 것으로, 곳곳에서 나라가 망해버린 비통함을 토로했다. 또한 채용신은 그동안 자신에게 온 편지나 시문 등을 모아〈전정산군수채공이력실기前定山郡守蔡公履歷實記〉즉 <석강실기>를 썼다. 이때 채용신의 생애를 추정할 수 있는 자전10폭 병풍 <평생도>그렸으나 지금은 사진자료만 남아있다.
이순(耳順)을 넘긴 채용신은 수염을 가슴까지 내려오도록 길렀으며 나들이를 할 때면 꼭 가마를 타고 다녔다. 전답이 많아 생활은 넉넉했다.
채용신은 1917년에 뜻하지 않은 일본여행길에 오른다. 일본에 가게 된 동기는 당시 일본에 고종어진이 한 폭 있었는데 이 초상의 작가가 채용신임을 알고 그를 초대한 것으로 전해 지고 있다.
당시 화가 조석진과 안중식은 청국과 일본 등으로 수차례 여행을 통해 회화 기량을 다양하게 심화시키고 있었다. 채용신은 국내에서 의금부도사, 수군첨절제사,부사,군수 등을 역임하면서 꾸준하게 그림을 그렸다. 1899년에 채용신은 역대 임금의 어진을 그려 실력을 다지고 있었으나 마음 한 구석에는 외국에 나가 견문을 넓히고 싶었다.
당시 총독부 관리 이토오시로(伊東四郞)과 함께 일본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인 노기마레스케(乃木希典)대장, 오오쿠마 시계노부(大?重信)백작과 고토오신폐이(後藤新平) 등의 초상화 45점을 그렸다 한다. 이 때 동경에서 영친왕 이은(李?)도 만나 망국의 한을 나누고 고종 어진을 전하기도 했다.
▲ 칠보 송정 뒷편 사당에 걸려있는 송정십현도.
▲ 칠보 송정 뒷편 사당에 걸려있는 송정십현도 세부.
▲ 칠보 송정 뒷편 사당에 걸려있는 송정십현도 세부.
▲ 칠보 송정 뒷편 사당에 걸려있는 칠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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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보 송정 뒷편 사당에 걸려있는 칠광도 세부
▲ 칠보 송정 뒷편 사당에 걸려있는 칠광도 세부
계층,신분 초월 초상화 그려
채용신 후손은 아마도 당시 석강의 화명(畵名)을 알고 있던 일본인 귀족들이 68세의 노 화가에게 압력을 가해 어쩔 수 없이 동행한 것 같다고 한다. 석강은 일본여행 후에도 춘우정 김영상 투수도(金永相 投水圖)같은 우국열사의 그림을 대가 없이 계속 그렸다.
채용신이 일본에 갈 때 그의 제자인 우운 서정민(又雲 徐廷珉)과 같이 가게 되었고 통역은 우운의 동생인 서정현(徐廷鉉)이 맡았다. 서정민은 서홍순(서예가로 창암 이삼만의 제자)의 증손으로 4대(서홍순→서상용→서병우→서정민)서화가로 일본에서도 서정민을 잘 알고 있어, 그 곳에서 많은 그림을 그렸다.
일본에 다녀온 채용신은 우운 서정민의 부친 호운 서병우(湖雲 徐丙于)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현재 원광대 박물관에 있다. 1918년에는 김제의 갑부 곽동원상을 그렸다. 이 때부터는 우국지사 뿐만 아니라 여러 신분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다.
호남학회 가입 계몽운동
한편 채용신은 1907년 호남출신 민족주의자·상공인들이 호남지방의 교육발전과 국권회복을 위해 서울에서 조직한 계몽운동단체인 ‘호남학회’에 참여 활동했다.
▲ 호남학회에서 발행된 호남학보
주요 발기인은 이기(李沂)·김경중(金璟中)·박영철(朴榮喆)·백인기(白寅基)·윤경중(尹敬重)·이시우(李時雨) 등이었다. 그해 7월 6일 서울 대동문우회관에서 112명이 참석해 창립총회를 갖고 서울에 중앙회를 두고 전북에 29개, 전남에 23개의 지회를 두었다. 회원 자격은 20세 이상의 전라도 출신인 사람이다.
주요활동은 사립학교 설립, 계몽강연회 개최, 유학생 재정후원 등이었다. 기관지 <호남학보〉를 1908년 6월부터 간행했으나 재정난으로 1909년 9호를 끝으로 폐간했다. 이후 계속된 일제의 탄압과 학회분열책동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다가, 1910년 한일합병 후 해체됐다.
학보 제7호 회원명부를 보면 총 32명중 21번째에 ‘蔡龍臣 益山’이라 기록이 나온다. 호남학회 가입은 채용신의 유일한 단체활동이다.
1910년 채용신이 정읍 태인 김직술의 집에 머물면서 초상화 외에 칠광도와 송정십현도를 남겼다. 이 그림은 광해군 시절 어지러운 시국을 개탄하며 낙향한 선비들이 송정에 모인 모습을 그린 것이다. 지도 처럼 자세하게 실경을 그린 칠광도에는 후송정, 무성서원 등이 현재에도 잘 남아 있다.
글·사진=하대성기자
"채용신 작품 부감법에 세필의 극치"안성열 태산선비사료관장 인터뷰
▲ 안성열 관장'
“1910년 채용신이 그린 칠광도는 조선조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위에 반발했던 태인의 일곱 선비들을 그린 것이다. 정자의 이름은 처음에 칠광정(七狂亭)이라 불렸으며 십현(十賢)이 구성되면서 송정(松亭)으로 바꿨다. 송정아래 있는 후송정은 구한말 선비 42명이 선현의 뜻을 모아 지은 것이다.”
안성열 정읍 칠보 태산선비사료관장의 말이다. 채용신은 태산군수 최치원이 유상곡수연을 펼치던 유상대,무성서원 등 당시 경물을 부감법에 세필로 그렸다. 송정십현도도 마찬가지로 시국을 개탄하며 낙향한 선비 10명이 송정에 모인 모습을 그린 일종의 계회도(契會圖)다.
안성열 관장은 정극인이 지은 가사문학의 효시인 상춘곡의 배경인 이 곳 성황산 자락을 스토리텔링해 선비의 길, 상춘곡길,송간세로길,대나무길 등 걷기코스로 개발하려 한다고 말했다.
하대성 기자
인터뷰-채용신 4대손 은석씨
“채용신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은 비가 주룩주룩 왔다. 나는 채알 밑에서 많은 문상객은 본 기억이 난다. 집안이 북적북적했다.”
채용신의 4대손인 은석씨(75·익산)는 석강을 직접 대면한 사람중에 생존한 마지막 후손이다. “신태인 육리에서 6살 때까지 같이 산 할아버지는 매우 무서운 분으로 기억된다. 그림 그리는 화실 근처에 언씬도 못하게 했다. 특히 그림 그릴 땐 더욱 그랬다.” 채씨는 “대여섯살 적 기억이다”며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미안하다”고 연신 말했다.
채용신의 도화소가 있었던 정읍 신태인 육리는 여느 농촌마을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바로 오른편에 푸른 스래트 지붕의 집이 채석강도화소자리다. 지금은 가옥 자체가 리모델링돼 도화소 옛 모습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허나 집안 구조는 크게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할아버지는 일본을 싫어하셨다. 무슨 날이 되면 학교에서 꼭 일장기를 집에 달라고 했는데, 할아버지가 싫어하셔서 달지를 못했다. 일본어 배우는 학교에 다니지 말고 당신한테서 배우라고 하셨다. 본채 옆으로 사랑채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네……” 채씨는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과 밭으로 변한 집터를 얘기하며 “옛 채석강도화소를 복원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덧붙였다.
하대성 기자
20. 지는 석양따라 석강도 잠들다 -신태인 도화소에서 붓을놓다
채용신이 92세 일기로 붓을 놓았다. 이를 애통하게 여기듯, 정읍 신태인 육리 채석강도화소 넘어로 지는 석양이 붉기만 하다.
1923년 채용신은 프로화가의 시발점이였던 금마산방에서 정읍 태인 6리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태인에는 큰아들 경묵이 살고 있었다. 직업화가로서 계급이나 출신성분을 가리지 않고 요구에 따라 작품을 만들었던 채용신. 그는 채산사에 모셔진 최익현상과 구례 유제양상(柳齊陽像)을 그 해 그렸다.
유제양상의 주문과정을 보면 채용신이 직업화가로서의 면모와 초상화 제작패턴을 알 수 있다. 집안 대대로 써 온 유제양가의 일기와 편지를 토대로 살펴보면, 구례 유영업(柳榮業)이 조부의 영정을 석강에게 그려 받기 위해 사방으로 수소문한다.
때마침 인근에 사는 매천 황현의 동생인 황석진이 채용신과 가깝게 지낸다는 사실을 알고 그에게 부탁하여 채용신과 연결된다. 1923년 1월23일 석강의 막내아들 관묵이 구례로 찾아와 전신상 수수료 100원 중 선금 20원과 사진1장을 받아간다. 한 달 후인 2월30일 유영업은 구례를 떠나 석강의 집에 3월7일 도착한다. 채용신은 이때 주문받은 영정을 모사 중이었다.
유영업은 근처 친척집에서 유숙하다가 3월16일 완성된 조부 영정을 보게 되고 털끝이라도 틀린 곳이 있는가를 점검하여 수정케 한다. 3월18일 유영업은 영정제작의 잔금을 치르고 저녁에 석강 부자와 환담 후 다음날 경묵의 배웅을 받고 광주를 거쳐 23일 구례 운조루로 돌아온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봐서 채용신은 사진을 바탕으로 초상화를 제작했고, 주문자의 기억을 통해 수정 보완하는 작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석강의 아들 경묵과 관묵이 부친의 작업을 도와 준 것을 알 수 있다.
#프랑스로 간 수작 ‘김준길상’
채용신 생전 모습.
75세 때인 1924년 역시 채용신은 바쁜 해였다. 여름에 전남 광산군 용진정사에서 3개월 동안 머물렀다. 이때 용진정사도를 남겼다. 또한, 수작중의 수작인 김준길상(金濬吉상)을 그렸다. 허영환 전 성신여대교수(동양미술사)는 “김준길 초상화를 처음 보았을 때 그 앞에서 완전히 압도되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실물 크기로 그린 이 초상화야말로 한국 초상화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으며, 채용신을 연구해 보려는 의욕을 갖게 됐다”고 했다.
그는 또 “초상화 안에서 망건 띠 아래, 즉 이마 부분부터 턱까지의 안면만 종이에 그리고 다른 부분은 다 명주에 그린 초상화는 이 김준길상뿐이라고 생각된다. 완전히 극세부까지 볼 수 있게 고급 사진기로 찍은 천연색 사진 같은 느낌이 든다”고 했다.
그는 “이 그림은 전주 한 집안에서 나온 후 1980년 가을 서울 한 화랑을 거쳐 프랑스로 7천 달러에 팔려 갔다”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1929년에는 50년간 같이 산 부인 전주이씨가 세상을 떠났다. 부인 이씨 나이는 67세였고 신태인 장군리 묘지에 화장했다. 상심한 석강은 방랑 생활도 했으나 주문을 받는 대로 초상화는 꾸준히 그렸다. 대부분 사진을 이용해 그렸다. 사진을 20*25cm 정도로 인화한 후 사진을 보면서 하도(下圖)없이 얼굴 모습대로 호분에 아교를 섞어서 채색했다.
얼굴을 먼저 극세필로 그렸고 머리와 몸체는 나중에 넣었다. 물감은 구하기가 어려웠기에 직접 만들어 쓰는 것이 많았다. 소금물에 놋쇠 그릇을 오랫동안 담가 두었다가 녹을 긁어 내 물과 함께 약한 숯불에 약 하루 동안 끓여내면 소량의 파란 액이 남는다. 이 액체는 의복의 초록 채색으로 썼고, 썩은 볏짚을 끓여서 만든 누런 액은 얼굴 등의 피부색으로 사용했다.
#채석강도화소 ‘서화주문’ 광고
채용신의 마지막 붓질은 87세 때인 1936년으로 끝난다. 같은 동네 사는 황장길 부부 초상을 손자 규영(奎榮,당시 27세)과 합작했다.
1940년경에 신태인 육리에서 배포된 채석강도화소(蔡石江圖畵所)의 광고지 ‘서화주문(書畵注文)’을 보면 석강이 말년에 어떻게 그림을 주문 제작했는지 살필 수 있다.
광고문은 먼저 채용신이 거친 관직과 어진 작가라는 점, 심순택상을 비롯하여 35인의 유명 대신상을 그렸다는 것. 그리고 일본에 건너가 고종어진을 왕세자 전하에게 바쳤으며 45명의 일본 명사들의 그림을 그렸다는 점 등을 열거하고 요금 내역을 조목조목 기술했다.
입상은 100원이고 반신상은 80원으로 적혀 있다. 산수대병 12폭 100원, 화초대병 12폭 45원을 받았다
채석강도화소 자리.
채석강도화소에서 발행한 초상주문 광고지.
변종필 (경희대)미술평론가는 “석강의 초상화 작품에서 사진을 사용하여 작품 제작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근대적인 특징이랄 수 있지만 공방을 마련하고 제작가격을 정해놓은 점, 선수금을 받고 제작에 들어간 점, 광고를 통해 주문을 유도하는 점 등은 상당히 상업적이고 전문적인이며 근대화단의 일면을 보여준 것이다”고 했다.
#오늘따라 석양이 왜 저리 붉던고
해거름 /
동산에 올라 /
석양을 바라보며 /
산하를 내려보니 //
어제인 듯한 /
봄이건만 /
그 벌써 /
진초록에 물들었고 //
능선에 걸터앉아 /
뜬구름 바라보며 /
살아온 /
내 세월 돌아보니 //
그제가 청춘인데 /
그 벌써 백발이라 /
어느덧 /
황혼에 물들었네 //
생각 건데 /
초목의 잎이야 /
늙어서 떨어지면 /
춘삼월 훈풍에 /
그는 다시 피련만 //
어이 타 우리 인생 /
늙어서 죽어지면 /
그 봄이 온다 한들 /
어느 한 사람 /
돌아올 줄 모르니 /
이 아니 서러운가
무정한 세월아 /
얄미운 세월아 /
앗아간 내 청춘 /
말없이 돌려다오 //
설움에 북받쳐 /
눈시울 붉히며 /
마음도 울적한데 /
오늘따라 지는 해는 /
왜 저리 붉던고?
이 깊은 씨름/
나 혼자 만일까? /
모르긴 해도 /
더러는 /
황혼 연설 아니하려나.
최찬원 시인의 <석양을 바라보며>이다.
11월 중순 저녁 무렵 정읍 신태인 육리 채석강도화소. 바람은 차가웠다. 햇살도 지쳐 보였다. 고목들이 몸서리쳤다. 남새밭 마른 풀잎들이 까칠하게 뒤척였다. 푸른 지붕 위로 차츰 저녁노을이 적셨다. 하늘에 붉은 붓질이다. 휑한 고샅엔 무심한 바람만 앞장섰다. 1941년 6월4일, 채용신은 92세로 세상을 떠났다.
글·사진=하대성 기자,동영상=이형기 기자
21. 유작전·학술대회·기념사업회-압제 일본인들이 먼저 평가하다 [완]
2001년 서울 화신화랑에서 열린 채용신 유작전에서 일본인 요다쇼오고가 강연하고 있다.
채용신이 92세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2년 후인 1943년, 그의 유작전시회가 서울화신화랑에서 열렸다. 유작전을 주관한 사람은 일본인 오다쇼오고(小田省吾). 그는 경성제대 교수이며 고적조사위원이자 숙명여자전문학교장로 알려져 있다.
운낭자상
전시 관련자료 운낭자상
이 전시는 채용신의 <자화상>을 비롯하여 총 50여 점의 작품이 출품되었으며 오다 쇼오고의 강연도 있었다. 이 전시를 둘러 본 구마다니 노부오(熊谷宣夫)가 이 전시에 출품된 작품의 목록과 채용신의 화력을 상세히 기록한 <석지 채용신>이란 논문을 1951년에 발표했다.
그는 논문에서 “광무제의 어용과 같이 당시 공신 16원의 초상을 그린 사실에 대하여 이조실록에 의하면 이에 종사한 화가에 대해 상세히 알 수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하였다.
화신화랑 입구 안내문.
“이 전시가 열리게 된 동기는 일제시대에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가 발간되었는데 이 책에 실린 ‘운랑자 27세상(雲娘子二十七歲象)’을 일본인 요다쇼오고(小田省吾)가 운랑자상의 기년갑인(甲寅)을 도광병오(道光丙午)의 9년 후 철종 5년(1854)에 비정하고 이 화가를 이 지방 안주(安州)의 배용신(輩龍臣)으로 기록하였으나 이 추정은 문헌사료에 의한 것이 아니며 찍은 인문(印文)이 불명함에서였다”
고 구마다나 노부오는 논문에서 밝혔다. 즉, 잘못 기재된 부분을 그의 친지들이 작품을 모아서 고증차 전시하였다고 한다. 채용신의 유작전과 논문은 일본인들에 의해 처음으로 이뤄진 것이다.
#현대미술관·전주박물관 전시
그러나 황영희씨는 그의 논문에서 전시를 주관한 사람은 일본인이 아니라 채용신의 3남인 상묵의 장남인 규대(奎大:당시 서대문 경찰서 근무)가 추진했다고 주장했다.
상묵은 당시 종로에서 ‘우미관’이란 사진관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런 관계로 다시 전시회사진을 직접 찍을 수 있었고 사진관을 그만둔 후에는 정읍 신태인 ‘채석강도화소’에서 주문에 의해 초상화를 그렸다.
국립전주박물관의 채용신 작품전
이후 90년대 중반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전라한국화제전 일환으로 열린 전북근현대작가전에 채용신의 초상화작품인 이덕응상이 출품됐고 이어 2001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에서 석강 서거 60주년을 맞아 그의 대표적인 초상화 작품 60여 점을 모아 대대적인 전시회를 개최했다. 이때부터 채용신이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2011년 2월 국립전주박물관은 채용신 서거 70주년을 맞아 40여 작품을 모아 특별전 ‘붓으로 사람을 만나다’를 개최했다. 전주박물관은 도내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특별전에 대한 관심이 집중됨에 따라 관람객들의 감상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당초 전시기간(2월15~3월27일)에서 1주일을 연장하기도 했다.
#탄생160주년 첫 학술대회
또한, 올해 6월에는 전북도민일보 주최로 채용신 탄생 160주년 및 서거 7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대회를 사상 처음으로 개최했다. 이 자리에 참여한 석강의 전문가는 채용신의 생애와 미술사적 의의, 채용신 회화의 조형적 특성,근대미술과 채용신 초상화의 특성 등의 주제발표가 이뤄졌다.
2011년 6월 전북도민일보가 주최로 열린 첫 채용신 학술대회 모습.
채용신기념사업회 추진위원 간담회
이 날 4명의 발제자를 비롯한 참여자들은 기념사업회 구성하여 채용신 미술관 건립, 채용신 미술제 개최 등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또한, 왕궁묘역과 금마산방,정읍 도화소를 연계한 관광루트화와 가치가 큰 작품에 대해서는 문화재 등록을 과제로 제시했다.
10명으로 구성된 채용신 기념사업회 추진위원은 지난 10월10일 익산문화재단에서 제1회 추진위원 간담회를 하고 기념사업 정관 마련, 참여 인사 선임 등을 폭넓게 논의했고 연내에 채용신기념사업회를 출범시키기로 했다. [하대성 기자]
■ 도움말 주신 분 조선미 성균관대 교수, 김호석 초상인물화가, 전우용 서울대병원 역사문화센터 교수,이원복 중앙박물관 학예실장, 이흥재 전북도립미술관장, 이용엽 국편사료조사위원, 변종필 미술평론가, 이철규 예원예술대 교수,
■ 공동기획 전북도민일보사 - 전북도립미술관 - 익산문화재단
전문가 인터뷰-변종필 미술평론가
“어진화가 채용신이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작품의 예술성과 정신성에 있다. 그의 예술적 가치를 재정립하는 연구작업이 미흡해 현재 영조 어진,황현 초상만이 보물로 지정돼 있을 정도이다.”
미술평론가 변종필씨의 말이다. 지난 24일 본보와 전화 인터뷰에서 그는 석지에 대한 재평가와 연구작업을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채용신이 왜 부각되나
▲유년기부터 두각을 나타낸 그림실력, 무관출신의 어진화사, 관직을 버리고 선택한 전업작가, 도화소를 열어 3대를 이어온 화업 등 타고난 능력과 당시 복합적인 사회역사적 상황과 밀접하게 맞물려 형성됐다는 점이 그 이유다. 하지만, 주목받는 진정한 요인은 예술성과 작품에 내재한 정신성이다.
고종황제를 그린 어진화사로서 보여준 충의정신, 최익현, 황현, 김영상 등 많은 우국지사의 초상을 통해 표출한 항일의식은 동시대작가는 물론 한국미술사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동안 묻혀 있던 그의 새로운 작품들이 속속 발굴되고 있는 것도 최근 관심의 증폭이유이다.
-채용신 작품의 예술적 가치는
▲전신사조(傳神寫照)라는 초상화의 명제를 실현한 극사실적 표현, 인물 표현대상의 확대, 종합적 화면구성, 대중성에 초점을 둔 미감, 다양한 표현기법(채색법, 서양화법, 사진기법) 활용 등 한국초상화의 전통성과 근대성을 통합시킨 개별성 있는 패턴의 힘을 꼽을 수 있다.
작품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진실성이 개인적 관계성을 넘어 우리 역사 속 인물로서 새로운 정신적 관계를 맺어 주는 역할을 하며, 역사의 거울이자 우리의 또 다른 자화상으로 그 존재가치가 있다. 이러한 예술적 가치와 비교하면 1900년 작품 영조 어진과 황현 초상이 보물로 지정돼 있고, 황희 초상은 지방문화재로 등록돼 있을 정도로 온전한 가치평가가 미흡하다.
-기념사업 어떻게 해야 하나
▲채용신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재조명하고 그에 따른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성과를 지속적으로 연구실천하는 사업 중심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예컨대 학술대회를 통해 한국초상화의 예술적 가치와 미술사적 의미를 연구하고, ‘한국초상화대전’ 같은 대회를 개최하여 역량 있는 작가를 발굴·지원하는 사업을 들 수 있다.
초상화대전은 전국규모로 개최하되 전통성과 시대정신에 초점을 맞추어 이 시대의 초상화를 새로운 형식으로 기록해나갔으면 한다. 이는 석지기념사업의 설립취지와 요건을 갖추는 것은 물론 궁극적으로 한국초상화의 정체성을 세우고, 현대미술에서 초상화의 예술적 가치를 새롭게 재정립해나갈 수 있는 하나의 방안이다.
-앞으로 연구과제는
▲채용신 생애 및 시대적 배경에 대한 연구가 뒤따라야 한다. 대원군과의 인연, 고종과의 관계와 특히 1917년 일본여행에 대한 연구는 그의 예술혼에 대한 해석과 평가의 기준이 될 수 있다. 여기에는 역사의 긍정적 교훈을 높이기 위해 지나치게 역사성에 의존하여 예술적 가치에 대한 객관적 평가에 소홀하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사료적 뒷받침이 부족한 현실에 비해서 아직 미공개된 작품들이 현존하는 가능성이 큰 만큼 지속적인 작품발굴을 통해 그의 예술적 특징을 통합적 시각에서 재평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하대성기자
전문가 인터뷰- 윤범모 경원대 교수
미술평론가이자 시인인 윤범모 교수(경원대 미술대)를 만난 건 뜻밖이었다. 지난 7일 서울 사는 윤교수와 전화통화하다 전북도립미술관에 왔다는 걸 알게 돼 단박에 달려가 만났다. 그는 호암갤러리,예술의 전당 미술관,이응노 미술관의 개관 주역이다.
현재 인물미술사학회 회장, 동양미술사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미술에 관한 그의 여러 저서 중 ‘미술본색(2002)‘을 통해 우리 미술계의 오랜 관행과 문제점에 직격탄을 날려 눈길을 끌었다. “미술에서 무슨 역사가 필요한가.(…)미술은 분위기나 돋우는 포도주일 따름이다” “비평가여! 대한민국 비평가여! 계속하여 잠들어 있거라, 우리의 스타탄생을 위하여”라며 그는 위악적으로 우리 미술계의 상황을 조롱해 유명세를 탔었다.
-채용신은 보기 드문 양반출신 화가다.
“석지 채용신은 근대기 초상화가로서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한 인물이다.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중인 출신 화원들의 전문분야였다. 하지만, 채용신은 양반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초상화가로서 신분제 사회의 관습을 혁파하는데 앞장섰다. 그의 초상화는 전통성을 담보하면서 독자적인 화법을 이룩하여 20세기 전반부의 대표적 초상화가라고 평가할 수 있다.”
-석지의 시대정신이 왜 주목받고 있나.
“채용신 예술세계의 특성은 시대정신을 토대로 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신분제 유교문화에 대한 도전, 그러니까 친히 초상화가가 되어 (양)반상(민)의 격차를 부수는데 앞장섰고, 초상화의 주인공이 굳이 남성으로 국한하지 않았다. 남녀유별의 전통사회에서 채용신은 여성을 모델로 하여 초상화 작업을 하기도 했다. 이는 혁명적(?) 도전이기도 하다.
채용신은 전업작가의 모범을 보인 화가였다. 작품 규격에 따라 작품가격을 고시하고, 광고전단을 제작하여 공개적으로 홍보하는 등 ‘석지 프로덕션’을 꾸려 체계적으로 작업실을 운영했다. 이 같은 행동은 전업화가의 모델로 귀감이 될만하다. 더불어 석지는 우국지사 혹은 항일인사들의 초상화를 즐겨 제작하면서 시대정신을 화면에 담고자 했다.”
-초상화의 전통 계승은 어떻게.
“국제 미술사에서 조선시대 초상화의 전통을 재확인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초상화 전통의 계승문제, 이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전통 채색화가 날로 위축당하고 있는 현실에서 채색화의 계승 및 발전방안에 대해 환기가 필요하다. 한국은 초상화미술관이 부재한 나라이다. 인물을 존중하고 집대성하여 연구 교육하는 기관이 절실하다.
런던, 워싱턴 등에 초상화미술관이 대규모로 개관되어 세계적인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초상화 전통의 최고인 한국에서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채용신이 활동했던 전북지방, 초상화미술관 건립에 앞장서서 우리 역사와 전통을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킬 요람으로 삼아야 한다.”
하대성기자
전문가 인터뷰- 조선미 성균관대 교수 "현전하는 작품 양식 규명, 석지 새로운 조명작업 필요"
조선미 성균관대 교수는 한국 최고의 초상화 전문가이다. 채용신의 초상화를 비롯한 여러 편의 논문을 썼다. 채용신의 기록물인 석강실기(石江實記)와 봉명사기(奉命寫記)를 2001년 장서각에서 찾아낸 주인공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초상화연구-초상화와 초상화론>, <한국의 초상화-形과 影의 예술>등이 있다. 미술사학연구회 회장, 성균관대학 박물관장을 역임한 조 교수는 현재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일문일답.
-석강실기와 봉명사기는 어떻게 발견하게 됐나.
2001년 채용신 서거 60주년을 석강실기는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데, 총 42면 83엽으로 구성돼 있다. 이 책은 석지의 출생부터 교우관계, 제작된 초상화와 연관된 기록, 각종 찬문들, 채용신이 쓴 시, 채용신에게 보낸 시나 편지 등이 수록돼 있다.
봉명사기 역시 현재 한국학 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돼 있다. 총 15엽이며, 내용은 봉명사기서, 맞아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에 게재 논문을 준비하던 중에 장서각 소장 자료들을 뒤지다가 발견했다. 그 동안 책명이나 간단한 윤곽은 알려졌지만, 책의 소재와 그 내용 전모를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이 두 책을 찾음으로써, 채용신의 생애를 정리하는데 아주 든든한 자료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주요 내용은.
봉명사기 원문으로 구성돼 있다. 글의 말미에 붙은 봉명사기 원문은 1914년 석지가 쓴 것이고, 서(序)는 그로부터 10년 후인 1924년 권윤수(權潤洙)에 의해 쓰여졌다.
-사료적 가치는.
우리나라는 화가에 관한 전기적 사료가 별로 전해오지 않는 상황에서 채용신의 생애를 추적, 정리해 볼 수 있는 자료가 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두 책을 기본으로 하고, 그 위에 평생채씨세보(平康蔡氏世譜) 및 채용신의 자전적 병풍인 ‘평강후인채석지당칠십옹평생도(平康后人蔡石芝堂七十翁平生圖)’의 제문 등을 참고로 하면서, 아울러 현전하는 작품들의 양식적 규명을 해나간다면, 채용신에 관한 깊이 있는 연구가 가능하다고 본다.
-석지에 관한 연구가 부족한데…….
한 예술가의 삶과 예술에 대한 조명은 흥미로운 일이며, 또 의미깊은 작업이기는 하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채용신은 서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자료가 비교적 많이 전존하는 이점이 있지만, 우리가 석지에게 다가갈 때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아직도 구전(口傳)의 자료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기 때문에 너무 휩쓸려서는 안 되며, 어느 정도 심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어디까지나 작품이 말해주는 양식적 특성에 기본을 두어야 한다. 또한, 좀 더 숨어 있는 석지 작품 발굴과 새로운 조명작업이 필요하고 이에 따른 규명할 과제들은 많이 남아 있다.
-지금 어떤 연구를 하고 있나.
현재 <王像, 皇帝像, 天皇像- 한국, 중국, 일본의 군주초상화(가제)>에 대해 책을 낼 준비를 하고 있다. 한 나라의 통치자에 관한 내용들이라 공부할 것이 너무 많다. 또한, 우리나라 어진은 이미 작품들을 다 직접 보았지만, 중국황제상들은 宋·元· 明代 작품들은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에, 淸代 작품들은 베이징 고궁박물원에 있기 때문에, 허락을 받아 작품들을 실제로 열람하는 작업이 절차도 복잡하고 상당히 고되다. 하지만, 한, 중, 일 세 나라 군주상의 비교를 통해 우리나라 어진이 지닌 의미와 사회적 기능 등이 더욱 부각되는 점은 상당히 흥미롭고 보람된 일이다.
하대성기자
<학술대회>
“채용신초상화, 전통-근대 잇는 백미"본사 주최, 어진화가 채용신 재조명 첫 학술대회
전북이 낳은 조선시대 최고의 어진화가로, 한국 근대 미술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화가로 평가받고 있는 석지(石芝) 채용신(1850~1941)은 “전통 초상화를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작가이고 미술사적으로 전통과 근대를 잇는 징검다리적 인물”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채용신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재조명하는 국내 첫 학술대회가 16일 오후 2시부터 원광대학교 숭산기념관 3층에서 100여명이 참석해 열린 가운데 석지 작품의 미술사적 가치와 그의 생애가 갖는 의미 등이 집중 조명됐다.
특히 익산시는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채용신이라는 문화원형을 선점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고, 기념사업회가 발족되면 채용신 초상화대전 개최, 국립초상화 미술관 유치 등 다양한 파급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익산시 왕궁면 장암리 묘역과 금마 생가,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 공방인 정읍 육리의 석강도화서, 태인 등지를 연결하는 관광코스 개발, 채용신 초상화의 극세필 기법을 활용한 관광상품 등 다양한 문화 콘테츠 발굴 및 개발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날 학술대회는 채용신 탄생 160주년과 서거 70주년을 맞아 전북도민일보가 주최하고, 익산교원향토문화연구회와 익산문화재단이 주관하며, 원광대학교와 전북도립미술관 및 익산예총이 후원했다.
임병찬 전북도민일보 사장은 개회사를 통해 “우리는 글로는 이삼만, 그림으로는 채용신이라는 훌륭한 문화원형을 보유하고 있다”며 “귀한 보물도 땅에 묻히면 그 가치를 알 수 없듯이 이번 학술대회가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선생의 가치를 밝히는 자리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택회 익산교원향토문화연구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선생은 지금 왕궁면 제석사지 뒤편 선산에 묻혀있지만 이정표가 없어 찾아갈 수조차 없다”며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익산의 문화유산을 체계화하는 익산학이 정립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기상 익산시 부시장은 축사를 통해 “가치 있는 것은 사랑하지 않으면 다 사라지듯이 서거한지 70년 밖에 되지 않은 선생을 우리는 너무 빨리 잊은 건 아닌지 반성한다”며 “오늘 이 자리가 익산이 문화예술도시로 확실히 갈 수 있다는 신호탄이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김대곤 원광대 부총장은 축사를 통해 “좋은 학술대회이니 좋은 결과 나왔으면 한다”며 “앞으로도 원광대가 할 수 있는 부분이라면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제안했다.
김상기 기자
채용신 학술대회 발제요지
석지 채용신의 초상화는 전통의 초상화를 계승하면서 근대기 사진의 기법을 도입해 전통과 근대 기법을 동시에 구사했다.
또한 그는 한국 전통 초상화와 대중 초상화를 동시에 그렸고, 한국회화사상 초상화를 가장 많이 제작한 작가임에도 그의 업적이 과소평가돼 그 이유를 규명하는 연구가 요구된다.
그는 조선말 열성조의 어진을 그린 화가로 공경 석유나 과거의 현인과 성인에서부터 일반 사대부, 의병장, 의부, 열녀, 촌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초상을 그린 전무후무한 작가다.
채용신은 한국초상화의 정체성을 세우고, 현대미술에서 초상화의 예술적 가치를 새롭게 재정립해나갈 수 있는 자신만의 미의식을 구축했다.
16일 열린 어진 화가 채용신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재조명하는 학술대회에서 발제자들은 석지 선생은 어진에서부터 일반 서민까지 다양한 계층의 초상화를 그렸을 뿐만 아니라 시대를 관통한 대가라며 그의 작품세계와 생애에 대한 연구와 조명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조은정 한남대 교수 -근대미술과 채용신 초상화의 특성
석지 채용신의 초상화는 전통의 초상화를 계승하고 근대기 사진의 기법을 도입해 전통과 근대를 동시에 구사했다. 근대기 전통의 초상화가 구현한 이념과 유학을 통해 혹은 새로운 재료와 기법으로 나타내고자 한 초상화의 목적은 당대 미술의 양상을 반영하고, 채용신의 초상화가 갖는 미술사적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최익현을 만나 감명을 받고 유림의 초상을 그리던 채용신은 당시 세력을 떨치던 새로운 종교 지도자인 강증산의 상도 그렸고, 후에는 원불교의 인물도 그렸다. 사망하기 한 해 전에는 원불교에 입교했다고 한다. 그의 기나긴 인생과 화가로의 영광 속에서, 초상의 주인공과 화가의 관계는 고유한 인물뿐만 아니라 화가의 환경이 반영된 결과다.
유림을 중심으로 벌어진 위정척사와 2차 의병봉기의 주역들이 전라도에 밀집해 있던 시대적 배경, 한일합방 이후 동학을 이어받은 종교를 비롯한 증산교 등 여러 종교가 민족주의와 전라도 자본의 힘으로 확장되던 지역의 특이성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채용신이라는 한 작가의 초상화를 통해 그 시대의 인물을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화가의 이데아로서 구국의 이념도 동시에 확인할 수 있다. 닮음의 구현방식은 결국 전신이나 리얼리티의 문제라기보다는 작가의 눈과 인식에 의한 것임을 채용신과 근대 초상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용엽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어진 화가 석지 채용신의 생애
채용신(1850~1941)의 본관은 평강으로 조상은 본디 완산(전주) 난전방에 살았는데, 그의 조부 가선대부 홍순이 한양 북부 삼청동으로 이사했고, 채용신은 이곳에서 출생했다. 아명은 동근이며, 자는 대유, 호는 석지와 석강 및 용신.
그의 선대 묘가 전주군 난전면 석불리(현 삼천동 우전초등학교 인근)에 있었으나, 전주시의 도시개발에 의해 현재는 익산군 왕궁면 동촌리 포전마을 평강 채씨 선산에 있다.
채용신은 조선말 열성조의 어진을 그린 화가로 공경 석유나 과거의 현인과 성인에서부터 일반 사대부, 의병장, 의부, 열녀, 촌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초상을 그렸다. 또 송정10현도, 칠광도, 삼국연의도 등의 기록화와 영모산수화 등 다양한 그림을 그리면서도 무과에 급제해 첨절제사, 도호부사, 군수에 임명되면서 가선대부(종2품)에 승진된다.
부녀상이나 중인계급의 인물을 그리고 차츰 성장해 어진을 그리는 경우는 있을 수 있으나, 먼저 어진을 그린 후 가선대부(종2품)에 올라 참봉이나 부녀상을 그린 예는 전무후무하다 할 것이다.
이러한 채용신의 생애와 그의 예술세계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그의 족보인 ‘평강채씨대동보’와 가승 묘비문 등의 기초자료와 함께 구마다니 노부오의 논문과 석강실기, 봉명사기 등의 자료를 통해 재조명하고자 한다.
◇변종필 경희대·미술평론가 -채용신 초상화의 유형과 조형적 특징(복식 및 자세를 중심으로)
채용신의 초상화를 ‘복식과 자세’에 따른 유형별 특징을 살펴보면 10개의 전신상과 2개의 반신상으로 분류된다.
전신상은 관복전신교의좌상, 관복전신부좌상, 평상복전신부좌상, 평상복전신궤좌상, 평상복전신교의좌상, 평상복전신입상, 평상복전신반가부좌상, 금관조복전신교의좌상, 금관조복전신입상, 구군복전신교의좌상 등 10개, 반신상은 관복반신상, 평상복반신상 등 2개로 구분된다.
조형적으로는 사실적 비례, 넓게 표현된 어깨선, 사진의 적극적 활용, 손과 다양한 지물의 표현, 패턴화된 양식, 다양한 배경처리 등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오늘날 채용신의 작품이 새롭게 재조명되는 진정한 요인은 예술성과 작품에 내재한 정신성에 있을 것이다. 고종황제를 그린 어진화가로서 보여준 충의정신, 최익현, 황현, 김영상 등 많은 우국지사의 초상을 통해 표출한 항일의식은 동시대작가는 물론 한국미술사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초상화의 정체성을 세우고, 현대미술에서 초상화의 예술적 가치를 새롭게 재정립해나갈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을 일찍이 자신만의 미의식을 구축한 채용신으로부터 재발견할 수 있다.
◇이철규 예원예술대 교수 -석지 채용신 작품의 기법과 특성
채용신의 초상화작품에서 나타나는 기법과 특징은 첫째, 얼굴부분의 뛰어난 관찰력과 이를 바탕으로 극세필로 안면을 융기부분인 비양골 중악, 액골은 남악, 하악골은 북악, 광대뼈 부분은 동악과 서악으로 분리해 오악처염의 원리에 따라 육리문을 묘사하는 표현기법을 완성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둘째, 채용신은 배채시 안면 전 부분에 토황을 칠한 후 호분을 칠해 얼굴 하이라이트 부분을 세필로 음영 처리해 실제 살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또한 후기에 이르러 관복 등을 채색할 때 돌출부분은 호분에 청록색을 합한 백록색을 의습선이 없어질 정도로 칠하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이는 서양화법 영향에 따른 채용신 만의 독특한 기법이라 볼 수 있다.
셋째, 직접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정면상을 주로 그렸고 넷째, 바닥에 화문석 돗자리를 주로 그렸으며 제작년도에 따라 그 기울기가 다르다는 점과 다섯째, 대부분 의복에 감춰져 있던 손과 신발의 묘사를 적극적으로 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900년대 초에는 구한말 최익현 등 우국지사들을 주로 제작해 조선의 독립을 독려했다는 점이 채용신 작품의 특징으로 꼽힌다. 채용신은 격동과 변혁의 시대를 살았던 화가다. 그는 한국 전통 초상화와 대중초상화를 동시에 그렸고, 한국회화사상 초상화를 가장 많이 제작한 작가다.
이러한 그의 업적이 과소평가돼 온 것이 사실이다. 채용신이 과소평가된 이유들을 명쾌히 밝힐 수 있는 방향으로 연구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상기 기자
<학술대회> 종합토론서 쏟아진 10인10색 다양한 목소리
이원복 국립광주박물관장
종합토론은 채용신에 관한 첫 번째 학술대회였던 만큼 10인 10색의 다양한 목소리가 나왔다.
먼저, 좌장을 맡은 이원복 국립광주박물관장은 “채용신의 작품은 국내외 흩어져 있어 앞으로도 새로운 작품이 나올 가능성 많다”며 “전통 초상화를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고 전통에 다가가는 징검다리가 될 인물”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토론자들은 그림에 대한 체계적 교육과정을 거치지 않은 화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그의 작품이 과연 근대적인지, 서울에서 전주로 낙향한 건 단지 자본의 흐름을 따른 것인지, 후기 작품에서 보이는 패턴화된 표현방식의 문제점, 그림 간 화격의 차이가 큰 이유, 1917년 일본에 갔을 때 그곳 관리들의 초상화를 그려준 것이 친일행위는 아닌지 등의 다양한 질문을 쏟아냈다.
특히 친일행위 부분에 대해서는 친일인명사전 편찬 작업에도 참여했던 조은정 교수가 “당시 채용신 선생은 거론조차도 되지 않았었다”며 “이 부분에서는 자유로운 분”이라고 명확한 선을 그었다.
방청석에서도 “관직에서 물러난 후 내려온 곳을 익산이라 특정하지 않고 전라도라고 표현했는데, 조상 대대로 익산에서 살다 할아버지 때 올라갔고 다시 아버지 때 내려왔으니 그냥 익산이라 해도 되지 않느냐”는 의견과 “돈 때문에 익산으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선조들이 있었기 때문에 내려온 것으로 봐야한다”는 다양한 의견이 개진됐다.
또한 “채용신이 22살 때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대원군의 초상화를 그렸을 정도면 초기 작품의 수준도 굉장했을 텐데, 너무 후기 작품에 대해서만 이야기가 나와 아쉽다”는 시민도 있었다.
이원복 관장은 “이번 학술대회가 선생을 존경하는 신호탄이 될 것으로 보인다”며 “앞으로 채용신을 연구할 때 어디에 주안점 둬야 하는지를 묻는 좋은 기회가 됐다”고 정리했다.
김상기기자
<학술대회> 후손 4인도 참여하다
▲ 채용신 화가 학술대회에 참여한 후손들
채용신 관련 국내 최초의 학술대회가 열린 이날 4대손인 채준석, 채영석, 채은석, 김명숙 등 4명의 후손들도 참여해 자리를 빛냈다. 이중 채은석씨의 경우 생전에 선생을 직접 대면한 산증인이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6살까지 같이살다 돌아가셨는데, 그림 그리던 방 옆에는 아무도 근접하지 못했던 걸로 기억해요. 그리고 할아버지는 일본을 싫어하셨어요. 뭔날이 되면 학교에서 꼭 일장기를 집에 달라고 했는데, 할아버지가 싫어하셔서 달지를 못했었으니까요. 글씨도 학교 다니며 일본어 배우지 말고 당신한테배우라고 하셨으니까요. 우리 할아버지를 연구해 줘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하지만 후손들은 “조선패망과 8.15해방, 6.25사변 등 격변의 시기를 지나며 집안이 온전치 못해 현재는 진품 한 점 제대로 보전치 못하고 있는 점이 무척 송구스럽다”고도 했다.
그럼에도 “익산시 왕궁면에는 여전히 증조할아버지를 포함한 선조들이 묻힌 선산이 남아있고, 금마에서는 생가터가 발견됐으며, 정읍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공방이었던 석강 도화서도 확인 됐으니 오늘같은 관심이 조금만 더 이어진다면 좋은 결실이 맺어 질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김상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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