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의 뜨락/문화재 탐방

도미 이야기

채현병 2015. 2. 22. 10:33

<草堂 鄭榮基 선생님의 블로그에서 복사한 자료입니다>

 

도미설화(都彌說話)와 암사동(岩寺洞) 두무개에 대한 소고(小考)

초당 정영기(鄭榮基)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도미설화는 백제 개루왕(蓋婁王 128~165) 때의 사람인 도미(都彌)의 이야기다. 구전(口傳)으로 내려온 설화를 신라 성덕왕 3년(704) 한산주 도독 김대문(金大問)이 편찬한 『한산기(漢山記)』에 도미전이 기록되어 있고, 1145년에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8 열전(列傳) 도미의 처 조(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도미부인 영정

 

都彌百濟人也 雖編戶小民 而頗知義理 其妻美麗 亦有節行 爲時人所稱 蓋婁王聞之 召都彌與語曰 凡夫人之德 雖以貞節爲先 若在幽昏無人之處 誘之以巧言 則能不動心者鮮矣乎 對曰 人之情不可測也 而若臣之妻者 雖死無貳者也 王欲試之留都彌以事 使一近臣 假王衣服馬從 夜抵其家 使人先服王來 謂其婦曰 我久聞爾好 與都彌博得之 來日人爾爲宮人 自此後爾身吾所有也 遂將亂之 婦曰 國王無妄語 吾敢不順 請大王先入室 吾更衣乃進 退而雜飾一婢子薦之 王後知見斯大怒 誣都彌以罪 臛其兩眸子 使人牽出之 置小船泛之河上 遂引其婦 雖欲淫之 婦曰 今良人已失 單獨一身 不能自持 況爲王御 豈敢相違 今以月經 渾身汙穢 請俟他日薰浴而後來 王信而許之 婦便逃至江口 不能渡 呼天慟哭 忽見孤舟隨波 而至乘至泉城島 遇其夫未死 掘草根以喫 遂與同舟 至高句麗蒜山之下 麗人哀之丐以衣食 遂苟活 終於覊旅.

  도미는 백제 사람이다. 비록 벽촌의 소민(編戶小民)이지만 의리가 매우 깊은 사람이었다. 그의 아내는 예쁘고 또한 절개가 있었다.

  개루왕(蓋婁王)이 소문을 듣고 도미를 불러 말하기를 “부인의 덕은 정절이 으뜸이라 하지만 만약 사람이 없는 그윽한 곳에서 교묘한 말로 유혹한다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여자는 드물리라”하였다. 이에 도미가 대답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다 하나 소신의 아내는 죽어도 두 사내는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이를 시험하려고 도미를 붙잡아 두고 측근의 신하를 시켜 왕의 옷을 입혀서 밤에 도미의 집으로 보냈다. 거짓으로 왕이 왔다고 도미 부인에게 알리고 “내가 오래전부터 너의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네 남편과 내기 장기를 두어 내가 이겼다. 내일은 너를 왕궁으로 데려가 후궁을 삼을 것이니 이제 너의 몸은 나의 소유인 것이다.”라고 하면서 겁탈하려 하였다. 이에 부인이 말하기를 “대왕께서 망령된 말씀을 하실 리가 없아온대 어찌 제가 감히 순종하지 않겠습니까? 청하옵건대 대왕께서는 먼저 방으로 들어가소서. 곧 옷을 갈아입고 들어가 모시겠나이다.”라 아뢰고 물러나와 여종을 자기처럼 몸치장을 하여 대신 들어가 수청을 들게 하였다.

  왕은 후에 속았음을 알고 대로하여 도미를 잡아다 두 눈을 도려내고 빈 조각배에 실어 강에 띄워 보냈다. 그리고 그 부인을 다시 끌어들여 왕이 강제로 겁탈하려 하니 부인이 “지금 저는 남편을 잃어버린 몸이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혼자서 살아 갈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대왕을 모시게 되었으니 어찌 감히 거역하겠습니까? 하오나 지금은 월경 중이라 몸이 더럽사오니 다른 날에 목욕재개하고 오겠나이다.”라 아뢰니 왕이 믿고 허락하였다.

  부인은 그 길로 도망쳐 남편이 버려진 강가에 이르렀다. 배가 없어 건널 수 없으므로 하늘을 우러르고 통곡했더니 갑자기 빈 배가 파도에 밀려 나타났다. 그 배를 타고 천성도(泉城島)에 이르러 아직 살아있는 남편 도미를 만나 풀뿌리로 연명하다가 배를 타고 고구려 땅 산산(蒜山)에 이르러 구걸하며 일생을 마쳤다.

  『삼국사기』이후 도미설화는 여러 책에서 다루어졌다. 조선 성종 때 서거정 등이 편찬한 『동국통감(東國通鑑)』, 중종 때 유희령이 편찬한 『표제음주동국사략(標題音注東國史略)』, 영조 때 안정목이 편찬한 『동사강목(東史綱目)』, 권별의 『해동잡록(海東雜錄)』, 세종 때 편찬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도 실려 있다.

  현대에는 1908년 장지연이 편찬한 『여자독본(女子讀本)』, 1932년 김윤경이 『동광(東光)』에, 1940년 박종화가 『문장(文章)』에 도미부인을 발표하였으며 2002년 최인호가 『몽유도원도』라는 소설을 발표하였다.

  ‘도미설화’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 즉, 많은 사람의 전기(傳記)를 차례에 따라 기록한 부분에 소개되어 전함으로 해서, 일반의 많은 설화가 막연하게 인물(人物)과 지명(地名)을 설정해놓고 집중적으로 서사(敍事) 전달에만 급급하고 있는데 비해, 이 경우는 그렇지 않은 것이 특징 중에 하나다. 다만 특기할 점은 삼국사기에는 역사적 기록을 토대로 한 전기(傳記)의 끝에 이 저술서의 집필자 또는 편찬내용을 감수했던 김부식(金富軾 : 고려문신 · 역사학자 1075~1151)에 의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 덧붙여놓은 논찬(論贊)이 있는 것이 통례이나 이 경우는 생략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열전’의 형식규범을 따르지 않고 설화 자체만을 기술한 것은 이 설화를 게재한 이유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 목적에 따른 편입보다는 여인의 부덕(婦德)을 강조해 귀감으로 삼게 하기 위해 포함시켰던 것으로 볼 수 있거나 백제가 역사무대에서 사라진 후 거의 600년이 지나 기록한 사례인 만큼 신빙성 있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수도 있다. 다만 서사 중에 분명한 역사적 인물인 백제의 4대 국왕 개루왕(蓋婁王)이 등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삼국사기에 소개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로 볼 수 있다.

  개루왕은 128년부터 166년까지 재위했으며, 이 기간 중인 132년에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쌓아 대방군(帶方郡)의 옛 땅을 백제에 편입시켜 북방진출을 위한 근거지를 마련하는 업적을 남겼다. 이 당시 개루왕이 북한산성을 축조했던 것은 한민족 3국이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한 각축전에서 우위(優位)를 차지하기 위함이었으나 고구려 장수왕 때와 신라 진흥왕 때는 백제의 세력권에서 이탈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155년 신라의 길선(吉宣)이 아찬(阿飡) 벼슬에 있으면서 반란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백제로 도망해오자, 개루왕은 망명을 허락한 적도 있고, 신라에서 되돌려 보내주기를 청했으나 국왕은 단호히 거절하자 신라왕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온 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초기 백제 때는 국력이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알려진 대로 삼국사기는 고려 때, 김부식 등이 인종(仁宗)의 명을 받아 1145년에 편찬해낸 기전체(紀傳體)의 역사책으로, 삼국유사와 함께 우리나라에 현전하는 것 중엔 가장 오래된 역사문헌이다. 물론 이전에도 삼국뿐만 아니라 그 이전 시대에 기록되어 전하는 많은 역사서가 있었을 것이나 전란(戰亂) 및 화재(火災) 등으로 소실되어 사라진 것이 많고, 여럿으로 나뉘어져 명맥을 유지하던 동족(同族) 국가(國家)를 통합한 고려가 그 자부심으로 편찬한 것으로 이 책은 총 5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기(本紀) 28권(신라 및 통일신라 12권 ․ 고구려 10권 ․ 백제 6권) ․ 연표 3권 ․ 지(志) 9권 ․ 열전 10권, 이 중 도미설화는 <열전> 중에 게재되어 있음은 이미 밝힌 바 있는 사실이다.

  이 설화는 근본적으로는 악행을 저지르는 권력자로 설정된 국왕을 비난하는 사적(私的) 감정(感情)이 개입된 내용이긴 하지만, 그보다는 남편 도미를 향한 그의 아내의 극진한 사랑을 칭송하기 위한 의도가 강하게 노출된, 남편과의 신의를 지킨 여성에게 승리의 월계관을 얹어준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설화의 가치는 이 점보다 그들이 여생을 괴롭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 즉, 현실적인 비극성(悲劇性)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세 인물들은 모두 다 같이 비극적 상황에 놓인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신분적 열등성 때문에 두 눈을 잃은 도미와 도미 부부의 사이에 끼어들었다가 욕망도 채우지 못한 채 오점(汚點)만 싸안게 된 국왕, 그리고 도미의 처가 안고 살아야했던 고단한 삶− 생(生)은 누구에게도 어쩔 수 없이 비극일 수밖에 없음을 이 설화는 제시하고 있어서다.

  이 설화는 위에서 살핀 바를 종합해 판단할 경우, 인간뿐만 아니라 생명을 부여받아 생존하다 예외 없이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만큼 동일한 운명 즉, 비극적 존재임을 함축해 제시하고 있다.

  도미설화의 역점은 도미부인의 정절에 주어져 있다. 아울러 인간 본연의 한 면을 나타낸 것이다. 구성이 잘 되어 있어 단순한 설화라기보다는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볼 수 있다.

  최근에는 몇 곳의 지방자치단체에서 도미설화를 자기 고장의 설화로 꾸미고 여러 가지 행사와 홍보를 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보령의 도미설화

  충청남도 보령군 오천면 소성리 빙도 맞은편에는 예부터 도미항, 됨망, 되미망, 도미망 등으로 불리는 작은 포구가 있다. 보령군에서는 도미설화에 관한 논의가 계속되어 오다가 1991년 소책자인 『보령의 도미설화』를 발간하였다. 1992년 상사봉 정상에 정절각(貞節閣)을 만들고 1994년 정절각 남쪽에 도미부인 사당인 정절사(貞節祠)를 만들었다. 그리고 2003년에는 도미부인과 남편 도미 공 합장묘를 거대하게 조성해 놓았다.

 

2. 진해시 청안동의 도미설화

  경상남도 진해시 청안동 소간산에는 도미정승 묘가 있었다. 산이라고 하나 우뚝 솟은 산이 아닌 뭍이 바다로 내민 곶의 한 등성이의 마을 뒷산이다.

  1930년 성주도씨(星州都氏)가 도미정승 무덤이라고 하여 비를 세웠다. 비문에는 ‘백제정승 도미지묘 배 정열부인(百濟政丞都彌之墓配貞列夫人)’이라 새겼다. 2003년 6월 임해공단 개발로 인해 충남 보령군 오천면 소성리로 무덤을 이장하였다. 무덤에서는 유물이나 뼈조각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3. 하남시의 도미설화

  경기도 하남시 도미나루(渡迷津)는 검단산과 예봉산이 마주하는 협곡이다. 백제 초기 왕경(王京)을 고골(古邑: 지금의 춘궁동)로 주장하고, 도미(都彌)와 동일한 도미진(渡迷津)이라는 지명이 예로부터 전해오고 있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하남시의 도미설화를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2001년에 간행한 『하남시사(河南市史)』에는 ‘도미나루’를 간단하게 기술하였고, 2009년 10월 하남문화원에서 제1회 도미설화 학술대회까지 개최하였다.

 

4. 강동구의 도미설화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 두무개를 도미천(都彌遷)으로 부르고 있다. 도미 또는 두미의 지명은 두 물이 만나는 곳에 대한 고어(古語)인 ‘두무’이다. 암사동 점마을의 담뱃개울과 한강이 만나는 곳의 지명이 ‘두무개’이다. 오랜 옛날부터 이곳에는 도미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강동문인회에서는 1993년『강동문학』제 11호 특집으로 ‘도미부인’을 재조명하였고, 강동구에서는 지역 역사문화의 재조명과 지역 주민에게 올바른 성 가치관을 심어주어 후세의 표상으로 삼고자 2004년 3월 20일 천일공원에 도미부인상(都彌夫人像)을 건립하였다가 2009년 12월 천호대교와 광진교 사이 녹지공원으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강동국악인협회에서는 2008, 2009년과 2014년에 소리극 ‘도미부인’을 아트센터에서 공연하기도 하였다.

 

강동구의 도미부인상(천일공원)

 

  결론으로 확실한 고증도 없이 도미와 비슷한 음상(音相)의 지명이 있다고 하여 도미설화를 위작(僞作) 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보령군과 진해시의 경우 ‘강변과 강안’을 ‘해변과 항구’로 원본을 고친다든지 하남시의 경우 초기 백제의 왕경(王京)을 고골로 주장하는 것이다. 역사학계에서는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의 고고학적 조사 결과와 유물 출토로 보아 고골을 부정하고 있다.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배알미리의 도미진(渡迷津)을 주장하는 것은 큰 우를 범한 것이다.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박대재 교수는 도미진은 고대사학계에서는 1980년 이래 한성시기 백제 왕성의 위치는 서울 송파구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2성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대세라고 하며 한강 하류에 서 “두무”라는 지명은 서울 옥수동의 “두무개” (頭毛浦) 또는(豆毛浦)와 암사동의 “두무개”처럼 한강의 지류가 합류하는 지점에서 확인된다고 하였다.

  암사동의 ‘두무개’는 풍납토성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이곳에는 구리(九里)로 건너갈 수 있는 토막나루와 참앞(站前)이 있어 도미부인이 한밤중에 걸어서 도망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삼국사기』권48 원본의 음상(音相)으로 보나 지리적 위치로 보나 암사동의 ‘두무개’가 도미천(都彌遷)이라는 주장은 가장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현재 광진대교 부근 녹지공원에 있는 ‘도미부인상’을 두무개인 구리암사대교 동측 공원으로 이전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겠다.

 

광진대교 부근 녹지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