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론>
海月 채현병
1. 선비의 뜻
가. 국어사전 :【명사】
(1) 학문을 닦아 學德을 갖춘 사람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
(2) 재물을 탐내지 않고 의리와 원칙을 소중히 여기는 학식 있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3) 옛날에, 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은 사람.
(4) 품성이 얌전하기만 하고 현실에 어두운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나. 백과사전 (브리태니커)
전근대사회에서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에 대한 호칭.
특히 유교이념을 구현하는 인격체 또는 신분계층을 가리킨다.
선비는 한자어의 '사'(士)와 같은 뜻이다. 우리말의 '선비'는 몽골어에 어원을 둔 '어질고 지식이 있는 사람'을 뜻한다는 설이 있다. 한자의 '사'는 '사'(仕 : 벼슬하다)로서 일정한 지식과 기능을 갖고 어떤 직분을 맡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거나, '사'(事 : 일하다·섬기다)로서 낮은 지위에서 일을 맡는 기능적 성격으로 보기도 한다. '사'는 주대(周代)의 봉건사회에서 하급관리에 속하는 계급이었으나, 춘추시대부터 '사'의 인격적 측면이 강조되었다. '사'는 신분적 의미에서 대부와 결합하여 '사대부'(士大夫)라 일컬어지며, 인격적 의미에서 군자와 결합시켜 '사군자'(士君子)로 일컬어진다.
'유'(儒)도 선비와 같은 뜻으로 유교이념을 담당한 인격을 의미한다. 한편 '사'는 독서로 학문을 연마하여 관료가 될 수 있는 신분으로서, 농·공·상의 생산활동에 종사하는 서민들과 병칭되어 사민(四民 : 士·農·工·商)의 첫머리에 놓인다.
삼국시대 초기에 유교문화가 수용되면서, 선비에 관한 자각과 이해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2세기 말엽 고구려의 을파소(乙巴素)는 재상으로 부름을 받자,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어 살고 때를 만나면 나와서 벼슬하는 것이 선비의 떳떳한 일이다"라 하여 선비의 나가고 물러서는 도리를 제시하고 있다. 고구려의 태학(太學)을 비롯하여 삼국은 교육기관을 두어 인재를 가르치면서 선비를 배양하는 것을 제도적으로 확립했다.
고려 때에는 한층 더 교육제도와 과거제도가 정립되어 선비들이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확보되었다. 고려 말엽 안향(安珦) 등에 의하여 원나라로부터 주자학(朱子學)이 도입된 뒤에 선비의 자각이 심화되었다.
조선 건국 이후 유교이념을 통치원리로 삼으면서 선비는 유교이념의 실천적 담당자로 등장했다. 조선초 사림파(士林派)는 도학이념을 철저히 수련하고 실천할 것을 주창했다. 이에 대해 훈구파(勳舊派)가 사림파를 과격한 이상주의자로 배척하여 억압하자, 사화(士禍)가 일어나 사림파의 선비들이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그러나 선조 때를 전후하여 선비들이 정치와 문화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해 조선시대를 이끌어갔다.
한말에 이르면 도학이 다시 활기를 찾으면서 선비정신도 새로운 활력을 얻는다. 한말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의 선비들은 당시에 전파되던 천주교를 이단으로 배척하고, 서양의 세력을 오랑캐로 거부하면서, 이질적 가치관을 배척하고 도학의 정통성과 민족의 문화적 우월성에 대한 신념을 확고하게 지켰다.
1876년 개항 이후 정부가 개화정책을 취하게 되자 한말 유학자들은 정부의 입장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유중교(柳重敎)는 "선비란 조정에서 아무 것도 받은 바가 없을지라도 그의 자리는 천위(天位)요, 그의 임무는 천직(天職)이다"라 하여, 천명에 따르는 선비의 지위와 직책을 내세워 군주의 세속적 권력을 넘어설 것을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왕권에 지배되지 않는 선비의 지조와, 왕명이 부당할 때는 거부할 수 있는 선비의 천직을 강조했다.
일본의 침략에 저항해 의병을 일으켜 선비의 저항정신을 밝혔던 유인석(柳麟錫)은 국가존망의 위기에 선비의 대처방법으로, '의병을 일으켜 침략자를 쓸어내는 일'(擧義掃淸), '멀리 떠나서 옛 제도를 지키는 일'(去之守舊), '죽음으로써 지조를 온전히 하는 일'(到命遂志)의 3가지를 제시했다
2. 선비정신 (조선시대 선비의 삶과 선비정신)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지식인은 선비(士)로 이해되고 있다. 선비는 오늘날의 왜소한 지식인과 곧잘 비교되기도 한다. 특히 꼿꼿한 지조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두려워 않던 강인한 기개, 옳은 일을 위해서는 賜藥 등 죽음도 불사하던 불요불굴의 정신력, 항상 깨어있는 청청한 마음가짐으로 특징 지워지는 선비의 모습은 아직도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일제시대와 광복 후 현대사의 전개과정 속에서 지식인들이 보여 주었던 체질적 한계와 현실 타협적인 처신은 전통시대 지식인인 선비와 비교되면서 선비정신에 대한 재조명이 요청되고 있다.8)
조선시대에 선비라는 용어가 문자로 기록되어 최초로 나타나는 것은 세종대에 창제된 ?용비어천가?이다. ?용비어천가?에서 선비는 儒士, 儒生을 뜻하고 있다. 선비의 용례가 ?용비어천가?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그것이 이미 고려중기 또는 말기에 일반화되어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선비가 유교적 교양을 습득한 文士로서 관료나 그 후보자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은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9)
조선시대에 國是로 정해진 이념은 성리학이었다. 그리고 이 성리학을 공부하던 조선시대 지식인의 대명사가 선비였다. 그러나 성리학이 지방사회에까지 정착되기까지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고, 16세기 지방을 중심으로 사림세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면서 성리학의 보급이 확산되었다.
중앙 정계에서 성리학 이념의 보급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인물은 조광조였다. 조광조는 성리학의 이념에 입각한 정치질서, 향촌사회의 안정을 위한 개혁을 시도하다가 훈구파들의 반격을 받고 좌초하였다.10) 그러나 조광조가 뿌렸던 성리학 이념의 씨앗들은 그의 사상에 동조하는 사림들에게 전파되었고 16세기 조선사회에 성리학이 뿌리를 내리고 선비학자들 다수가 출현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16세기에는 지방을 중심으로 학문을 연마하면서 관직 진출을 준비했던 학자들을 통상 선비라 지칭했다. 이들은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는 것을 주목표로 삼았으나, 16세기에 접어들어 士禍가 연이어 발생하면서 지방에서 성리학을 연마하여 지방의 백성들을 교화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
이들은 성리학을 기본 학문으로 하였지만, 학자에 따라서는 성리학 이외에 도교나 불교에 관심을 가지는 선비가 있었고,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천주교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상에 심취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도교나 불교, 천주교 등은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禁忌時 했지만 성리학의 체계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으로서 도교나 노장사상, 병법에 관심을 갖는 선비들이 나타났다. 16세기를 살아간 선비 중에는 서경덕과 조식, 그리고 이들의 문인들 사이에서 이러한 경향이 가장 두드러졌다.11)
18세기 이후에는 박지원, 박제가 등 소위 북학파 학자들 사이에서 상공업과 利用厚生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박지원이 「허생전」, 「양반전」 등에서 無爲徒食하는 양반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허생이라는 선비를 통해 이제 선비도 경제 활동에 종사해야 함을 강조한 것도 이러한 분위기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조선시대 선비의 기본이 된 학문은 성리학이었다. 선비는 성리학을 주전공으로 하여 그 이념을 실천하는 學人으로써, 士의 단계에서 修己하여 大夫의 단계에서 治人하는 修己治人을 근본으로 하여 학자관료인 士大夫가 되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선비의 修己는 ?小學?에서 시작되었다. ?小學?은 朱子가 三代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經史子集의 여러 책에서 주요한 내용을 발췌하여 편집한 책으로, 灑掃應對之節을 비롯하여 愛親, 敬長, 忠君, 隆師, 親友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소학?은 수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士林派 학자들의 성향에 부합되는 측면이 많았다. 16세기 사림파를 대표하는 인물인 金宏弼은 ‘小學童子’라 칭해지기도 했으며, ‘業文으로서는 天機를 알 수 없었는데 ?小學?에서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하여 詞章의 한계성을 ?小學?으로 극복하려는 모습을 보였다.12)
나아가 이들이 기본교과서로 채택하였던 四書三經을 비롯한 유교의 경전들의 내용은 ?大學?의 주요지침인 修身‧濟家‧治國‧平天下를 실천하기 위한 이념서이자 지침서라 할 수 있는데, 선비들은 ?소학?을 통해 修身을 하고, 유교 경전을 철저히 이해한 바탕 위에서 治國, 平天下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16세기의 학자 중 이황과 이이는 외래사상인 성리학을 조선적으로 변용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황은 성리철학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통하여 성리학을 조선의 정신으로 이념화하는데 큰 공을 세워 ‘동방의 朱子’라고 칭해졌고, 李珥는 치자의 학문이라 할 수 있는 ?대학?의 조선적 변용인 ?聖學輯要?를 저술하여 성리학을 조선의 정치 문화에 토착화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여겨진다.
선비들의 삶에서 가장 중시되었던 것 중의 하나는 學行一致였다. 배운 것은 행동으로 옮길 때 의미가 있는 것이므로 입으로 아무리 거룩한 말을 하여도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면 비판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과 함께 자신을 속이는 거짓을 행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선비들은 남에게는 후하고 자신에게는 박하게 하는 薄己厚人의 정신을 체질화시켜 淸貧하고 儉約한 생활방식을 자연스럽게 몸에 익혔다. 이러한 청렴 정신은 조선시대에 수많은 淸白吏를 탄생시키는 요인이 되었다.13)
조선시대에 청렴하게 살아간 선비들에 대해서는 淸白吏라 하여 국가에서 이들을 표창하고 청백리는 ‘가문의 영광’이 되었다. 청백리 제도는 고려시대부터 연원했으나 조선시대에 와서 그야말로 청백리의 전성시대를 맞게 된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때 安星 등 5명을 청백리로 뽑은 이래, 태종 때 8인, 세종 때 15인, 세조 때 8인, 성종 때 20인, 중종 때 34인, 명종 때 45인, 선조 때 26인, 인조 때 13인, 숙종 때 22인, 경종 때 6인, 영조 때 9인, 정조 때 2인, 순조 때 4인 등 모두 217인을 淸白吏혹은 廉謹吏로 선발한 기록이 있다.
청백리는 제도화되지는 않았으며, 효종에서 현종 때를 비롯하여 한동안 청백리 선발이 중지된 적도 있었다. 또 ‘청백리’와 ‘염근리’의 의미가 분명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조선시대 관리들을 분야별로 체계적으로 정리한 ?淸選考?에는 186인의 청백리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14)
淸白吏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쓰인 贓吏들은 그 자손에 대해 영구히 과거 응시를 금지할 만큼 뇌물에 대해 가혹한 조처를 취한 것이나, 奔競 금지법을 법제화하여15) 관리들의 인사 청탁을 억제한 것도 그만큼 깨끗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시기적으로 관리들의 부패상이 완전히 없었던 시대는 없었으나, 그나마 조선사회가 부정과 타락에 물들지 않는 도덕국가를 지향할 수 있었던 것에는 선비정신과 맥을 같이하는 이러한 제도들이 한 몫을 하였다.
또한 선비들은 조정에 권신이나 외척의 부정이 있으면 단호한 상소문을 올려 이들의 부정과 비리를 비판하고 고발하였다. 曺植이 문정왕후를 과부로 비유하면서 까지 외척정치의 모순을 비판한 상소문을 올린 것이나,16) 趙憲과 같은 인물은 상소를 올릴 때 도끼를 소지하는 과격함을 보인 것은 올바른 것을 위해서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선비정신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3. 선비생활
《소학(小學)》에서 나오는 선비의 생애는 다음과 같다.
어린아이가 가정에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다가 10살이 되면 남자아이는 사랑에서 아버지와 자며 선생을 찾아가 배우고, 20살이 되면 관례를 하고 널리 배우며, 30살에는 아내를 맞아 살림을 하며, 40살에서는 벼슬에 나가고, 70살에는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난다.
이런 생애는 누구나 비슷하지만 특히 선비에게는 학업과 벼슬이 중요하다. 선비는 한평생 학업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 선비는 타고난 신분이 아니라 학문과 수련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비는 독서인이요, 학자다. 선비가 배우는 학문의 범위는 인간의 일상생활 속에서 부딪히는 일의 마땅한 도리를 확인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선비는 학문을 통해 지식의 양을 쌓는 것이 아니라 도리를 확인하고 실천하는 인격적 성취에 목표를 둔다.
《대학(大學)》에서도 자신의 내면에 주어진 ‘밝은 덕을 밝히는 일’과 ‘백성과 친애하는 일’의 사회적 과제를 가르친다. 선비는 항상 자신의 인격을 닦아야 하지만 동시에 그 인격성을 사회적으로 실현해야 한다. 그래서 선비는 자신의 덕을 사회 속에서 실현하기 위해 관직에 나가야 한다. 따라서 일찍부터 과거시험을 치고 벼슬할 기회를 갖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비는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못해 벼슬길에 나가지 못했다. 소수의 선비만이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선비가 관직에 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을 목적으로 삼아서가 아니라 관직을 통해 자신의 뜻을 펴고 신념을 실현하는 기회를 얻는 것이라고 여겼다.
조선 시대 선비들이 맡은 관직도 주로 자신들의 학문과 신념을 펴는 직책이 많았다. 홍문관, 예문관, 성균관, 사헌부, 사간원 등 학문을 전문으로 하는 기관이거나 언로를 맡아 임금에게 간언하는 직책이었다.
관직에 오르면 위로는 임금을 섬겨야 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돌보아야 하는 책임이 있다. 선비는 임금에게 무조건 복종과 충성을 하지는 않았다. 선비는 임금과 의리로 관계를 맺기 때문에 언제나 그 직책의 성격과 임금의 역할에 대해 성찰하여야 했다. 임금에게 잘못이 있으면 아뢰어 바로잡으려 하고, 직책이 도리에 합당하지 않으면 물러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선비는 나아가기를 어려워하고 물러서기를 쉽게 생각하는 태도를 가져야 했다. 그것은 부귀의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불의에 대한 비판 정신을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선비로서 평생 과거시험을 보지 않거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는 경우를 흔히 ‘처사(處士)’라고 하였다. 처사가 관직에 나간 선비보다 많은 존경을 받았다. 학문에 조예가 깊어 후생을 많이 가르치고 바른 도리를 제시하는 사람을 ‘선생(先生)’이라고 불렀다. 선생은 벼슬에 나간 사람의 호칭인 ‘공(公)’에 비해 훨씬 높은 존중을 받았다.
선비에겐 지향하는 두 가지 방향이 있다. 하나는 한 시대에 나가서 도를 시행하고, 또 하나는 후세에 말씀을 내려주어 가르침을 베푸는 일이다. 즉 자신의 학문을 제자들을 통해 전하기도 하지만 직접 저술을 하여 후세에 가르침을 내려주는 것이다.
이렇게 선비의 일생은 도를 밝히고 자신을 연마하여 세상을 바로잡고자 노력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4. 性理學的 人間養成 敎育
가. 理性訓練 方法 - 格物, 窮理, 致知를 통하여 세상 만물의 이치에 통달하고, 明澄한 자기 성찰의 우주관을 갖도록 했다.
1) 格物 : 사물의 이치를 알기 위하여 관찰하고 실험하는 단계로서 <앎>의 기초가 된다.
몽매함 속에서 <앎>이란 곧 ‘빛’인 것이다.
2) 致知 : 격물의 결과로서 <앎>에 이르게 되는 경지이다.
3) 窮理 :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것으로 격물에서 치지에 이르는 과정이다.
나. 詩, 書, 畵를 통한 感性訓練
1) 완벽한 인격체는 격물치지로 얻은 합리성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다. 이의 보완을 위하 여 詩, 書, 畵를 통한 感性訓練을 중요시 하였다.
2) 詩社를 조직하고 詩會를 열어 시를 짓고, 글씨를 쓰며, 그림을 그려서 서로 돌아가며 감상하는 등, 일련의 예술행위로 풍류를 즐겼다.
3) 이성과 감성이 잘 조화된 인격완성을 위한 예술행위에는 나무와 꽃 등의 자연물이 자 주 등장하기 마련이다. 예) 松, 竹, 梅, 菊 등
5. 선비문화
가. 詩 (문장)
나. 書 (글씨) 서예.
다. 畵 (그림) 한국화~ 동양화
라. 歌 (노래) 正歌 (시조시에 곡을 붙여 부르는 노래)
마. 樂 (예악)
바. 舞 (선비춤, 궁중무용)
사. 茶 (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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