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장. 시조(時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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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조의 개념
- 명칭; 영조 때의 가객 이세춘의 ‘시절가조(時節歌調)’에서 비롯
- <‘시조’ 명칭을 최초로 사용한 문헌> → 신광수「석북집」中「관서악부」
- <문학 명칭으로 정식 사용된 시기> → 19C 이후
(2) 시조의 기원
☞ 외래 기원설 ***
1. 한시기원설
- 시조의 7言과 5言은 한시의 영향
- 한시를 번역했거나 구절을 인용한 시조가 상당수
⇒ but 글자수를 중시하는 한시와 달리, 시조는 창으로 불려졌었음.
2. 불가기원설
⇒ but 불가곡의 3分과 시조의 3章의 구성 내용이 전혀 다름.
☞ 재래 기원설 ***
1. 민요신가기원설
노랫가락인 신가를 원형으로 한다는 說
- 시조의 형식은, 민요의 6구 3절형이 파생한 것이라는 說
- 민요 형식 중 아무 의식없이 쓰이던 것이, 특정시기에 이르러 시조로 독립한 것이란 說
⇒but 평시조는 짧은 형식, 사설시조는 여음없는 긴 형식 민요로 기원을 다르게 본 문제점이 있음.
2. 향가기원설
- 三句六名의 뉘앙스가 시조의 3장 형식과 비슷
- 향가의 차사(嗟辭)가 있는 낙구(落句)와 시조 종장의 감탄구가 비슷
- 향가와 병존하던 시조시형이 향가 소멸 후 장점만 살려 나타남
- 우수의 구보다 기수의 구가 더 짧다
⇒ but ① 삼구육명 해석에 아직 정설이 없음
② 낙구와 종장에 나타난 양대분적 성격은 속가․시조에도 있음
③ 향가의 의미상 분절과 시조의 3장은 통사적 대응에 무리
④ 이직 향가의 창법에 대한 규명이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시조와 연결은 무리
3. 고려속요기원설
- <서경별곡>도 끝연의 사설․의음을 제거하면 3장의 노래가 됨
- <만전춘>․<동동>의 분장(分章)이 시조 형식과 흡사
⇒ but ① 여음을 함부로 제외해도 되는가
② 위 가설은 시조창과 가곡창이 동시대 존재했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
(3) 시조의 발생 시기
1. 고려말엽발생설 - 별곡․시조의 형태상 닮은점과, 고려말기작가의 작품이 많다는 說
- 시조라는 명칭과 시조를 부른 음악이 고려시대에는 ×
- 시조의 안정된 형식이 고려말 정치격변기에 나타날 수 있는가?
- ∴ 정치적 안정기인 16세기에 형성되었을 것이라는 說
3. 고려중엽발생설 - 시조가 속가의 음악적 분단을 모태로 태동하였다는 說
- <사설시조> → (주로 17C의 생성기를 거쳐, 18C에 성행했다는 것이 일반적)
- 명종代 상층계급에 의해 생성 說
- 평시조와 동시대 형설 說
2. 17세기 이후 발생설 - 임․병 양란 이후 양반사회가 몰락한 결과, 시조의 향유층이
창곡가들에게 옮겨져, 사실화․장형화 됐다는 說
(4) 시조의 형식과 율격
․ 평시조 / 엇시조 / 사설시조 |
- but 경계선 모호 |
․ 단형시조 / 장형시조 |
-‘형식/내용/발생시기/향유층’이 확연히 구별 - 최근 가장 널리 쓰이는 방식 |
- 율격 → 시조의 율격 연구는 음수율론에서 출발하여 음보율론으로 발전
- ex) 3 ․ 4 ․ 3 ․ 4 / 3 ․ 4 ․ 3 ․ 4 / 3 ․ 5 ․ 4 ․ 3
- 시조가 음절적 정형성을 갖지 않는다는 한계성 내포
- 4음절 음보를 平音步, 이하는 소음보(小音步), 이상은 과음보
(5) 시조의 전개과정
1. 제1기; 고려말
- 특징; 특정 작가군에 의한 상층 문학의 성격.
- 내용; ① 늙음에 대한 탄식 ② 황음한 군주에 대한 걱정 ③ 무인의 우국충절
④ 쇠락해가는 고려왕조에 대한 번민 ⑤ 혼란한 정치에 대한 원망 등.
- 의의;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는 왕조교체기의 고민을 한시가 아닌
시조로 토로함으로써, 이후 신흥사대부층의 시조가 격조 높고 울림이 큰 서정시로
받아들여지는 계기가 됨.
(and 사고의 자유롭게 집약하는 효과적 형식으로 인식하게 하는 데 큰 역할)
- 한계; 다양한 제재를 취해 단편적 심정 토로
2. 제2기; 조선전기
원호, 월산대군, 성종
- 서정적 특징을 반영한 여말유신들의 회고풍 시조 (→ 주목! ‘정도전’도 씀)
- 태평시대의 일면으로, 자연 속에 유유자적하는 강호가도 노래
ex) 맹사성 <강호사시가>, 外 변계량의 작품
-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둘러싼 사육신․생육신의 작품 ex)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 정치적 변혁기를 거쳐 다시 안정되기 시작한 15세기 말, 왕족이 지은 시조 출현
ex) 월산대군, 성종
(→ 성종 시조 관련 기록 <吳(오)山(산)說(설)林(림)草(초)藁(고)>는, 시조발생을 조선으로 보는 근거.)
3. 제3기; 조선중기
- 시문보다 도학(道學) 표방에 힘씀
- 사대부가 시조를 지은 이유 ―→ 한시는 단지 읊조리는데 반해, 시조는
(이황 ‘도산십이곡발 中) 우리말로 되어 있어 노래로 부를 수 있기 때문
- but 세상에서 벗어나 강호에 노닐면서도 완세불공(玩世不恭)에 빠지지
않고 온유돈후한 경지를 살려야 함을 강조
- 도학적 전통의 미흡으로 江湖歌道의 세계에 몰입하진 못했지만,
규범화된 수사를 배격 및 인간․자연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경지 노래
- 영남에 비해 훌륭한 작품을 남긴 이가 많고, 정철에 이르러 절정 도달
- <기녀시조의 등장>
- 관습화 되어가던 시조에 생기를 불어 넣음
- 중의법과 시각적 이미지화의 절묘한 구사
- 임을 그린 심정을 읊은 3수와 권유,별한,무상을 나타낸 작품이 전함
(外 [전기]-소춘풍․계낭․한우 , [후기]-홍낭․명옥․천금 등)
- 의의; 후기의 작가층 확대와 더불어 시조가 새롭게 탈바꿈하는 데 바탕 마련
4. 제4기; 조선후기
; 임진왜란(1592~1598)과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 등 반세기에 걸친 국난 발생
(→시대배경; ①경제 파탄 ②신분제 붕괴 ③천주학 유입 ④성리학을 배격하고 실학발달)
- <강호가도의 작품>
(→ 시조와 가사의 역사적 기능이 달랐음을 암시)
(→ 아직 시조가 산문정신을 수용할 만큼 개방되지 않았음을 암시)
- 윤선도; 정상의 시조 작가로 75수의 작품을 남김.
- 外 신흠, 홍서봉, 이정환 등
- 형태; 평시조의 삼행시형태를 그대로 살리면서도, 중장이 길어짐.
- 내용; 남녀의 사랑과, 이별, 정치 풍자 등 소재 및 주제 다양화
- 작가; 중인 이하의 서민층으로 확대
- 한계; 정제되지 못한 시어 선택 및 18C 이후 얇아진 작가층
⇒ ∴ 전문가객들만이 소수의 평시조를 짓고 기존의 것을 부르는 쪽으로 바뀜.
- <전문가객 등장>
- 노래 장단을 표시하는 ‘매화점’ 창안 및 ‘소용’이라는 새로운 곡조를 만듦
- 시조 창법 개발
- 전문가단의 설립 및 후진 양성
- 노가제가단; 김수장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당대 가단의 실질적 중심
- 이세춘가단; 18C 중․말엽에 활동한 ‘연희집단’ (초기의 가단과는 다름)
- 가집 편찬을 통한 시조의 보존
; <해동가요><청구영언>- 김천택․김수장에 의해 편찬된 시조집으로
구전되어 오던 수많은 시조들을 집대성
가객들 역시 창작에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
⇒ but <가곡원류>; 박효관․안민영 두 가객이 승평계를 조직하여 편찬
⇒ and 조황․이세보의 시조; 사대부 시조의 마지막 모습
(6) 시조 작품
- 강호에서 자연을 즐기며 임금의 은혜를 생각하는 내용
- 초장은 ‘강호(江湖)’, 종장은 ‘역군은(亦君恩)이샷다’로 끝남
- <강호가(江湖歌)>, <사시한정가(四時閑情歌)>라고도 함
- 문집으로 <기촌집>이 있고, 작품에는 한역된 <면앙정가>와 시조 <황국화>
- 이현보 <어부사>; 고려 때부터 전해오던 어부 단가 10수를 고쳐 지은 연시조.
- 전6곡은 자연에서 느끼는 심정, 후6곡은 학문을 닦는 심경 읊음
- 일명 <석담구곡가(石潭九曲歌)>라고도 함
- 근대 탐미주의에 통하는 향락사상이 담겨 있음.
- 황진이;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림
- 박인로 <모현>; 수양산의 은사 백이․숙제와 초의 충신 굴원을 사모한 내용
- 윤선도 <몽천요> - 당시 조신들의 방해로 은퇴한 비통한 심정과 혼탁한 조정 개탄
⇒ but 비분․증오 감정을 직설적 노출 않고, 함축적․상징적으로 처리
- 김수장; 사설시조를 가장 많이 창작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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