ㄴ 한국, 한국인/한국인의 뿌리

한민족의 계통과 형성과정

채현병 2018. 5. 10. 21:28


한민족의 계통과 형성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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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역사 /조선시대사

요약  /   퉁구스 계의 몽고 종족으로 한반도를 중심으로 남만주 일부와 제주도 등의 부속된 섬에 거주하는 단일민족.

                                     개설

  어느 민족의 계통과 형성과정을 알기 위하여서는 그 민족이 속하여 있는 인종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아야 한다. 즉, 그 인종이 세계의 인류 가운데 어떠한 위치에 있으며, 언제 어디서 형성되었나 하는 점들을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인류학의 연구에 따르면 지구상에는 여러 인종이 있으나 모두가 같은 뿌리에서 기원하였다고 한다.

  즉, 인류의 출현은 약 500만년 전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에서 시작되었고, 이것이 오랜 세월 동안 진화하여 약 100만년 전에는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가 출현하였으며, 그 다음 단계에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로 진화하였다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살았던 시기가 고고학적으로는 구석기시대의 중기 및 후기에 해당하며, 바로 이 호모 사피엔스가 세계 여러 곳에서 발달하여 오늘날 여러 인종들의 기원이 되었다.

  그리하여 지금으로부터 약 4만년 전, 고고학적으로는 구석기시대 후기에 현대인의 직접적인 조상들이 나타났으며, 지역적으로는 아시아·아프리카·유럽 등에 널리 분포하였다.

                   계통과 형성과정

1. 계통

  오늘날 지구상에는 여러 인종이 살고 있으며, 그들은 피부 색깔, 골통의 모양, 머리칼의 색깔과 조직 등 형질적 특징에 따라 몽고종(Mongoloid)·코카서스종(Cocasoid)·니그로종(Negroid) 등 세 인종으로 분류된다. 이 가운데 우리 민족이 속한 몽고종은 주로 동쪽 아시아에 살고 있으며, 피부 색깔에 따라 황인종이라고도 불린다.


  이 몽고종은 본래 제4빙하기(第四氷河期), 고고학적으로는 구석기시대 후기에 시베리아의 추운 지방에서 기원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몽고종의 형질적 특징으로서 얼굴에 광대뼈[顴骨]가 나온 것이나 눈꺼풀이 겹쳐진 것[epicantic fold]이 추운 기후에 적응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확인된다. 우리 한민족도 이러한 형질적 특징을 가지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시베리아의 몽고종은 옛시베리아족(Paleo-Siberians) 또는 옛아시아족(Paleo-Asiatics)·옛몽고족(Paleo-Mongolians)과 새시베리아족(Neo-Siberians) 또는 새몽고족(Neo-Mongolians)의 두 그룹으로 나뉜다.

  이는 옛시베리아족이나 새시베리아족 모두 몽고종의 형질적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뒤에 부족적 이동에 따라 새 지역의 환경에 따른 형질적·문화적 차이가 생겼기 때문이다. 특히 두 그룹 사이에는 언어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오늘날 시베리아에 살고 있는 옛시베리아족은 축치족(Chukchi)·코리약족(Koryaks)·길리약족(Gilyaks)·캄차달족(Kamchadals)·유카기르족(Yukagirs) 등이다. 이들의 한 갈래가 베링해를 건너 아메리카로 이동하여 아메리카 인디언의 조상이 되었고, 다른 한 갈래는 사할린과 북해도로 이동하여 아이누족(Ainu族)의 조상이 되었다.


  한편, 시베리아에 살고 있는 새시베리아족에는 터키족·몽고족·퉁구스족(Tungus)·사모예드족(Samoyeds)·위구르족(Uigurians)·핀족(Finns) 등이 있다.

  이 가운데 터키족·몽고족·퉁구스족의 언어에는 문법구조·음운법칙·공통조어(共通祖語) 등에서 서로 깊은 관련이 있으므로 이를 알타이어족(Altaic Language Family)이라고 한다. 반면, 사모예드족·위구르족·핀족은 다른 하나의 어족을 이루어 이를 우랄어족(Uralic Language Family)이라 한다. 우리 한국어는 이 가운데 알타이어족에 속한다.


  알타이어족은 본래 예니세이강(Yenisei江) 상류지방과 알타이산 기슭에서 발생하였다. 이 지역은 삼림 및 초원지대로서 주민들은 일찍부터 목축을 주로 하고 농경을 부업으로 하는 생산경제 단계로 들어갔으며, 또한 알타이 산지에서는 구리와 주석이 많아 청동기문화의 발달에 유리하였으므로 안드로노보(Andronovo)문화·카라수크(Karasuk)문화·타가르(Tagar)문화 등 독특한 시베리아 청동기문화를 발달시켰다.


  그런데 이러한 문화는 동유럽으로부터 전파된 것으로, 문화의 전파에 따라 유럽 인종과 원주민인 몽고족 사이에 혼혈이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북방 아시아 몽고종 계통의 민족에게서 가끔 유럽종의 형질적 요소가 발견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제4빙하기에 시베리아 지방에서 형질적 특성이 완성된 몽고종은 제4빙하기 후기에 기온이 상승하여 빙하가 녹으면서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옛시베리아족이 시베리아의 동쪽과 남쪽으로 이동하였는데, 그 시기는 고고학적으로 후기구석기시대 및 신석기시대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들에 의해서 후기구석기문화와 신석기문화가 전파되었다.


  한반도의 경우에도 후기구석기시대의 유적이 발견되었지만, 아직 그 인종의 형질적 특성을 확인할 만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신석기문화는 몽고·만주·한반도를 비롯하여 동쪽으로는 사할린·북해도를 거쳐 아메리카대륙에까지 전파되었다. 따라서, 이들 지역의 신석기문화가 모두 같은 문화전통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신석기시대 토기의 경우, 반란형(半卵形:반 계란의 형태)의 토기 표면에 직선이나 점으로 구성된 기하문(幾何文:사물의 형태·크기 등을 본뜬 무늬) 장식을 한 것이 시베리아·만주·한반도 지역과 북아메리카 및 일본열도의 북부에 분포되어 있어 그것이 모두 시베리아로부터 전파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시베리아의 신석기문화는 이들 여러 지역에서 각기 변화하여 발달하였으므로 다소의 차이가 있지만, 이들 지역의 신석기문화는 아직 수렵과 어로의 채집경제 단계에 있어서 농경문화가 시작되지 못하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러나 만주나 한반도의 신석기 유적에서도 역시 인골(人骨)이 발견된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 주민의 인종적 특성을 알기는 어렵다.


  알타이 산지와 바이칼호수의 남쪽지대에 살고 있던 알타이족이 남쪽으로 이동한 것은 옛시베리아족의 이동에 뒤이은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은 원주지의 초원지대에 이어져 있는 초원지대로 이동하였으며, 유목(遊牧)·기마(騎馬) 민족이었으므로 이동이 용이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초원이 펼쳐진 한계까지, 즉 서쪽으로는 카스피해, 남쪽으로는 중앙아시아와 몽고를 거쳐 중국 장성(長城)지대까지, 남동쪽으로는 흑룡강 유역에서 만주 북부까지 이동하였다.

그 결과 터키족은 중앙아시아와 중국 북쪽에, 몽고족은 지금의 외몽고를 거쳐 중국 장성지대와 만주 북부에, 퉁구스족은 흑룡강 유역에 각각 분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알타이족과 함께 시베리아에 살던 한민족도 이동의 물결을 따라 몽고를 거쳐 중국 장성지대의 동북부와 만주 서남부에 이르러 정착하였던 것이다.


  단, 오늘날 알타이족이라 하면 터키족·몽고족·퉁구스족을 가리키고 한민족은 포함시키지 않는데, 이는 한민족이 남하하는 과정에서 일찍부터 알타이족에서 갈라져 만주 서남부에 정착하였고, 여기서 하나의 민족단위를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알타이족에 의해서 중국 북부에 전파된 시베리아의 청동기문화는 오르도스·내몽고지방과 만주 서남지방, 즉 요령(遼寧)지방에서 각각 꽃피었는데, 전자는 내몽고족이 발달시킨 것이고 후자는 한민족의 조상들이 발달시킨 것이다. 이 두 청동기문화는 모두 시베리아 청동기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상당히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요령의 청동기문화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비파형(琵琶形)의 단검(短劍)이나 기하문경(幾何文鏡) 등 고고학적 유물에 의하여 확인된다. 이로부터 한민족의 조상들이 요령지방을 중심으로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알타이족이 다른 민족과도 구별되는 독특한 청동기문화를 발달시켰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문헌에 따르면 춘추시대에 장성지대 깊숙이 침입한 누번(樓煩)이나 임호(林胡), 그리고 만주 북부의 동호(東胡) 등의 이름이 보이는데 이들이 곧 알타이족 중의 몽고족을 가리키는 것이며, 장성지대 서북쪽의 흉노(匈奴)는 터키족 또는 몽고족을 가리킨다.


  터키족이나 몽고족에 비하여 중국 동북부의 민족으로서 숙신(肅愼)·조선(朝鮮)·한(韓)·예(濊)·맥(貊)·동이(東夷) 등이 주(周)나라 초기부터 중국 문헌에 나타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 민족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가운데 ‘肅愼(숙신)’과 ‘朝鮮(조선)’은 중국 고대음으로는 같은 것이고, ‘韓(한)’은 ‘khan>han’에 대한 표기로서 ‘크다’ 또는 ‘높은 이’ 등의 뜻을 가진 알타이어다. ‘貊(매)’의 ‘豸(태 또는 치)’는 중국인들이 다른 민족을 금수로 보아 붙인 것이고, ‘百’이 음을 나타내는데, ‘百’의 중국 상고음(上古音)은 ‘pak’으로서 이는 우리의 고대어 ‘밝’ 또는 ‘박’에 해당하며, ‘광명(光明)’이나 ‘태양’을 뜻한다.


  한민족에 의하여 발달한 요령 청동기문화는 대체로 대흥안령(大興安嶺)의 산줄기를 경계로 중원(中原)문화와 접하였다. 그런데 요령지방은 북으로는 삼림·초원지대를 이루고, 남으로는 난하(灤河)·대릉하(大凌河)·요하(遼河)의 하류지역에 농경에 적합한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다. 따라서 요령지방의 조선족은 본래 시베리아에서는 목축을 주로 하고 농경을 부업으로 하였지만, 요령지방에 정착한 뒤로는 그 환경에 적응하여 농경을 주로 하면서 목축을 부업으로 하는 농경문화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한반도에 이르러서는 그 자연적 환경에 따라 목축은 거의 잊어버리고 오로지 농경을 하는 민족으로 되었다. 이와 같이 앞선 청동기문화와 농경문화를 가진 조선족(새시베리아족)이 한반도에 들어와 선주민인 옛시베리아족을 정복, 동화시켰음은 고고학적 유물뿐 아니라 신화·언어 등의 연구에 의해서도 증명된다. 이와 같이 한민족은 몽고종에 속하며, 그 가운데서도 새시베리아족의 알타이족에 속한다.


  그러나 한민족은 알타이족의 이동 과정에서 일찍부터 갈라져 나와 만주의 서남부, 요령지방에 정착하여 농경과 청동기문화를 발달시켰으며, 그 가운데 한 갈래가 한반도에 이주하였다. 그리하여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선주민인 옛시베리아족을 정복, 동화시켜 오늘날의 한민족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들에 의해서 여러 읍락국가(邑落國家)가 형성되고 나아가서 읍락국가의 연맹체가 성립되었으며, 고조선이 바로 그 연맹의 맹주국(盟主國)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정치적·사회적 공동체를 이룩함으로써 하나의 민족 단위로 성립되었다. 또한, 이러한 민족공동체가 이루어짐에 따라 여러 집단의 언어가 통일되어 한국어가 되었다.


  이렇게 우리 민족이 하나의 민족 단위로 성립된 것은 요령지방에서 농경과 청동기문화를 발달시킨 때부터이다. 그것은 단군신화에서 전하는 고조선의 건국연대와 대체로 부합되는 기원전 2000년대로 볼 수 있다.


2. 고고학적 측면에서 본 특질

  한반도에서 구석기 유적의 발견은 증가하고 있으나, 아직 유적의 문화적 성격이나 특히 그 주민의 인종적 특질 등은 충분히 밝혀지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중국 북경이나 주구점(周口店)에서 발견된 전기구석기 유적이나 그 밖의 동아시아 지역에서 발견된 구석기시대 여러 시기의 유적들과 어떤 관계에 있으며, 나아가 그 인종적 관련은 어떠한지도 구명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로서는 이를 밝힐 수 있는 인류학적·고고학적 자료들이 너무 적다. 한반도와 주변지역의 문화적·인종적 관련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부터이다. 고고학적 자료에 따르면 한반도의 신석기문화와 청동기문화는 만주와 몽고,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 시베리아 남부지방의 그것과 관련되어 있다.


  시베리아 지역의 청동기문화는 아직 농경이 시작되지 않고 수렵·어로의 채집경제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이는 근동지방이나 남부유럽지역의 경우 일찍이 신석기시대부터 농경이 시작되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리고 시베리아 신석기문화의 영향을 받은 몽고·만주 및 한반도의 신석기문화 역시 수렵·어로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시베리아의 신석기문화에서는 토기에 있어서 ‘캄케라믹(Kammkeramic)’의 특징이 중요하게 지적된다. ‘캄케라믹’이란 ‘빗살무늬토기’로 번역되어 우리 나라의 신석기시대 토기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이 토기는 ‘뾰족 밑’ 또는 ‘둥근 밑’에서 위로 벌어진 반란형의 형태에 토기의 표면 전면에는 기하문을 장식한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표지적(標識的)인 특징은 뒤에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지역에 따라 또는 시대에 따라서 다소의 변화를 겪게 된다.

  예컨대 만주에 있어서는 송화강(松花江)을 경계로 하여 그 서남쪽과 동북쪽에 토기의 모양과 무늬에 있어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그 하나는 기형(器形)에 있어서 송화강 동북쪽에서 흑룡강에 걸친 지역의 토기의 바닥은 평저(平底)인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은 한반도의 동북부에도 전하여졌다.

  그러나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토기는 동북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뾰족 밑 또는 둥근 밑으로부터 위로 벌어진 반란형이며, 토기 전면에 기하문을 장식한 것이 표지적인 특징이다.


  그리고 이것이 신석기시대 후기에 이르러서는 그 모양이나 무늬에서 변화가 생기는 것은 물론이다. 이와 같이 시베리아·몽고·만주 및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토기는 지역적으로 혹은 시대적으로 다소의 변화를 겪었지만, 그 기본적인 토기문화의 전통에는 공통되는 점이 있다.


  일례로 이들 토기의 무늬에 특이한 연속호선문(連續弧線文, rocker stamping)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흔들림 무늬'라고도 하는 것으로 호선을 좌우로 연속시킨 무늬이다. 이 무늬의 토기가 한반도에서는 매우 드물었으나, 최근 충무 앞바다의 상노대도(上老大島) 패총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인류학·고고학 연구에 있어서 인접한 지역에서 어떤 특이한 문화현상이 공통적으로 나타났을 때는 그 지역 사이의 문화적 연관을 증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신석기시대 석기(石器)의 경우 시베리아 신석기문화의 그것은 대체로 타제(打製)인 점과 세석기(細石器)인 점이 특징이다. 그리고 이러한 석기문화가 역시 몽고·만주 및 한반도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이러한 석기 수법 때문에 이들 지역의 석기들이 후기구석기나 중석기시대의 것으로 오인되는 일이 이따금 있어 왔다.


  다만, 한반도의 세석기는 함경북도 지방과 남해안 일부 지역에서 발견된 일이 있을 뿐이고 극히 드문 예에 속하지만, 그것은 아마 한반도에서 산출되는 석재의 특징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한반도에서는 부싯돌[燧石]이나 흑요석(黑曜石)이 거의 산출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구석기시대나 신석기시대에 석기의 제작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실제로 흑요석이 산출되는 함경북도 지방과 남해안의 부산 동삼동 패총, 충무 상노대도 패총에서는 흑요석의 세석기가 출토되고 있다. 이 가운데 상노대도 패총은 특히 주목되는 유적으로, 여기서는 둥근 밑, 평평한 밑의 두 가지 토기와 타제·마제의 두 가지 석기 모두가 있는 것으로 보아 각각 다른 두 시대의 문화유적인 듯하다.


  패총이기 때문에 층위(層位)가 교란되어 층위상으로는 두 시대의 유물을 구별하기 어려우나, 유물을 형태학적으로 분류하면 둥근 밑 토기와 타제석기가 신석기시대의 유물일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토기 가운데는 신석기시대의 특징적인 연속호선문 토기가 함께 출토되므로 신석기시대의 문화 유물임이 확인된다.


  이와 같이 토기와 석기에서 나타나는 한반도의 신석기문화는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만주·몽고를 거쳐 시베리아의 신석기문화에 이른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의 전파는 그 문화의 주인공인 옛시베리아족의 이동에 따른 것이었다.


  한반도의 청동기문화 역시 시베리아의 그것에서 기원하여 몽고·만주를 거쳐 요령 및 한반도로 전파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 역시 시베리아로부터 알타이족의 이동 경로와 일치한다. 즉, 시베리아의 청동기문화가 남쪽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알타이족의 한 갈래인 우리 민족의 조상이 요령지방에 정착하여 요령지방과 한반도에 이르는 지역에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청동기문화를 발달시켰던 것이다.


  이를 요령 청동기문화라 할 수 있는데, 한편으로는 시베리아 청동기문화의 특징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지역에 전파된 시베리아 청동기문화와 비교되는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요령 청동기에는 청동단검·동부(銅斧)·청동단추·청동도자(刀子)·동착(銅鑿)·동패(銅牌)·재갈 등의 마구(馬具), 거울 모양의 원형 동기(銅器)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단검의 경우 검신(劍身)의 봉부(鋒部) 하단에 돌기가 있고 검신 아랫부분이 외호(外弧)를 이루어 비파의 동체와 비슷한 것이 특징이다.

  또, 이 단검은 검신과 자루를 따로 만든 것이 특징인데, 초기에는 자루를 나무로 만들어 착장(着裝)하였고, 후기에는 청동으로 T자 모양의 자루를 주조하여 못으로 고정시켰으며, 그 뒤로는 주형(鑄型)에 검신과 자루를 고정시킨 형태로 주조하고 못으로 고정시킨 흔적을 나타냈다.


  이에 비하여 몽고족에 의하여 발달한 오르도스 청동기문화에서는 단검의 검신과 자루를 함께 붙여 주조한 점이 다르다. 이는 요령의 청동기문화가 청동 단검의 고식(古式)을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안드로노보 단검의 경우에도 검신과 자루를 따로 만들어 붙이고 있다.


  또한, 요령 청동기에 있어서 동부(銅斧)도 고식을 보이고 있다. 즉, 요령의 동부는 날이 부채꼴로 퍼지고 머리 하단에 돋을띠[突帶]를 둘렀으며, 거기에 간단한 기하문을 새기고 있는 등 안드로노보나 카라수크의 동부 형식을 잇고 있다.

  이에 비하여 오르도스의 동부는 날쪽이 아래로 좁아지고 머리 부분의 장식도 퇴화되었다. 다시 말하면 오르도스의 동부는 요령 청동기문화 전기의 동부보다 늦은 시기의 형식이며, 요령에서도 후기에는 오르도스 동부와 같은 형식이 나타나고 있다.


  요령지방의 청동기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은 청동단추에서 변화하여 발달한 거울 모양의 원형 동기이다. 청동단추는 지름 3∼10㎝ 내외의 작은 원형동기를 안쪽으로 약간 구부리고 내만(內彎)한 쪽에 반원형의 꼭지[鈕]를 단 것으로, 시베리아 카라수크 문화나 오르도스 및 요령의 청동기 문화에서 모두 보이는 것이다.

  요령 청동기문화에 있어서는 지름이 10∼20㎝ 내외로 커지고 내만한 쪽의 꼭지가 2∼4개로 늘어나 다뉴(多鈕)로 변하였으며, 내만한 면의 전면에 기하문이 장식된 새로운 청동기로 발전하였다.

  이것은 카라수크문화나 오르도스문화에서는 볼 수 없는 요령 청동기문화의 독특한 특징으로서 뒤에 한반도에서 더욱 정치한 기하문경으로 발달하여 다뉴기하문경(多鈕幾何文鏡)이 되었다.


  요령의 청동단검은 그 형태에 따라 비파형단검이라고도 하고, 그 문화의 중심지 이름을 따서 요령식단검이라고도 한다. 이 비파형단검은 후기에는 점차 봉부의 돌기가 퇴화하고 검신 하부의 너비가 좁아졌으며, 한반도에 이르러서는 검신의 너비가 더욱 좁은 세형동검(細形銅劍)으로 발전하였다.


  이와 같이 요령의 청동기문화는 단검이나 원형동기뿐 아니라 그 밖의 다른 청동기도 거의 대부분이 한반도 청동기문화의 조형(祖形)이 되었다. 이러한 요령의 청동기문화는 더 거슬러 올라가 시베리아의 청동기문화와 연결되는 것이며, 시베리아 청동기문화의 몽고·만주·한반도로의 전파는 역시 시베리아로부터 알타이족의 민족이동에 따른 것이다.


    형질

  1. 체질

  체질이란 사람의 정신적·신체적 형질(形質)의 총화를 말하는 것으로, 지금은 체질과 형질을 같은 말로 사용하고 있다. 사람은 생물학적으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라는 단일속(單一屬)·단일종(單一種)에 속하지만, 각기 다른 물리적 환경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인종에 따라 그 체질 특성에 어느 정도의 차이가 생기게 되었다.


  즉, 계절·일광(日光)·기온·습도·기압·우량(雨量)·수질·토양·음식 등 수천 가지 인자의 영향을 받은 것이 누적되어 체격·피부·모발·홍채(虹彩) 등에 차이가 생김으로써 각종 인종이 구별되는 것이다.


  한민족은 몽고종에 속하는 퉁구스족의 하나로서, 몽고와 만주를 거쳐 남하하여 한반도에 정착하면서 단일민족을 형성하였다. 물론, 우리 나라의 지리적 위치나 역사적 배경으로 보아 인근 민족이 한국인의 체질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에게서 군(群)으로서의 수많은 체질 특성들이 추출되므로 단일민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 골격

  한국인의 평균 두개(頭蓋) 용적은 남자가 1,475cc, 여자가 1,330cc로서 사라신(Sarasin) 구분에 의한 대두형(大頭型, aristocephaly)에 속하며, 따라서 뇌중량(腦重量)도 남자가 평균 1,413g, 여자가 1,268g으로 세계 상위에 속한다. 그리고 두장(頭長)은 남자가 175.0㎜, 여자가 168.2㎜이고, 두폭(頭幅)은 남자가 142.4㎜, 여자가 138.6㎜이다.


  이 두 계측치에서 산출한 두지수(頭指數)는 두형(頭型)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한국인 남자는 81.5, 여자는 82.7로서 남녀 모두가 단두형(短頭型, brachycranial)에 속한다.

세계에는 단두형의 중심지가 세 곳이 있는데, 소련의 투르키스탄(Turkestan)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아시아 일대와 스위스의 알프스 지방, 그리고 우리 나라이다. 한국인의 단두형은 이웃 중국인의 중두형(中頭型)과도 구별된다.


  두고(頭高)는 남자가 평균 140.0㎜, 여자가 133.3㎜이며, 두장고지수(頭長高指數)는 남자가 80.1, 여자가 79.4로 고두형(高頭型, hypsicranial)에 속하는데, 이것 역시 한국인 두개의 큰 특징으로 몽고인의 정두형(整頭型)과 구별된다.


  또한, 두폭고지수(頭幅高指數)는 남자가 98.5, 여자가 96.2로서 남자는 약한 첨두형(尖頭型, acrocranial)이고 여자는 높은 중두형(中頭型, metriocranial)에 속해 있어 역시 몽고인의 저두형(低頭型)과는 다르다.


  전두최소폭(前頭最小幅)은 남자가 92.4㎜, 여자가 89.2㎜이고, 전두두폭지수(前頭頭幅指數)는 남자가 65.0, 여자가 64.3으로서 모두 협액형(狹額型, stheno-metopia)에 속한다.


  다음으로 안두개(顔頭蓋)의 경우 한국인의 안장(顔長)은 남자가 평균 95.5㎜, 여자가 93.6㎜이고, 협궁폭(頰弓幅)은 남자가 136.0㎜, 여자가 126.5㎜이다. 여기서 산출한 안지수(顔指數, Kollmann)는 남자가 90.6으로 약한 협안형(狹顔型, leptoprosopia)에, 여자는 89.4로 강한 중안형(中顔型, mesoprosopia)에 속한다.


  상안고(上顔高)는 남자가 73.9㎜, 여자가 68.6㎜이다. 상안지수(上顔指數, Kollmann)는 남자가 54.5, 여자가 54.3으로 모두 중상안형(中上顔型, mesene)에 속하여 있다. 전측면각(前側面角)은 남자가 83.7°, 여자가 82.5°로 중악형(中顎型, mesognath)에 속한다.


  다음으로 상악치조장(上顎齒槽長)은 남자가 52.1㎜, 여자가 51.2㎜이고, 상악치조폭(上顎齒槽幅)은 남자가 66.0㎜, 여자가 61.3㎜이며, 여기서 산출한 상악치조지수(上顎齒槽指數)는 남자가 126.8, 여자가 120.2로서 남녀 모두 단치조형(短齒槽型, brachyuranic)에 속한다.


  구개장(口蓋長)은 남자가 43.7㎜, 여자가 43.1㎜이고, 구개폭(口蓋幅)은 남자가 41.2㎜, 여자가 39.3㎜이다. 여기에서 산출한 구개지수(口蓋指數)는 남자 94.1, 여자가 90.6으로 모두가 단구개형(短口蓋型, brachystapirine)에 속한다.


  안과폭(眼窠幅)은 남자가 43.3㎜, 여자가 41.4㎜이고, 안과고(眼窠高)는 남자가 34.9㎜, 여자가 34.1㎜이며, 여기서 산출한 안과지수(眼窠指數)는 남자가 80.8, 여자가 82.4로서 모두 중안과형(中眼窠型, mesoconch)에 속한다.


  비폭(鼻幅)은 남자가 25.7㎜, 여자가 25.2㎜이고, 비고(鼻高)는 남자가 53.8㎜, 여자가 49.9㎜이며, 여기서 산출한 비지수(鼻指數)는 남자가 48.2로 저비형(低鼻型, chamaerrhine)에, 여자는 50.7로 약한 중비형(中鼻型, mesorrhine)에 속한다.


  하악골장(下顎骨長)은 남자가 107.5㎜, 여자가 101.3㎜이고, 하악과상돌기간폭(下顎髁狀突起間幅)은 남자가 124.4㎜, 여자가 117.1㎜이며, 여기서 산출한 하악지수(下顎指數, Thomson)는 남자가 85.1, 여자가 86.4로서 중악형(中顎型, mesonath)에 속한다[표 1].


[표1]頭蓋計測成績


항목\성적例數평균±평균오차표준편차항목\성적例數평균±평균오차표준편차
頭蓋容積(㎜)1781,475.2±8.7115.7上顎齒槽長(㎜)13652.1±0.293.37
501,330.5±15.8111.53951.2±0.362.24
頭最大長(㎜)178175.0±5.206.88上顎齒槽幅(㎜)12566.0±0.394.31
50168.2±1.037.312861.3±0.562.98
頭最大幅(㎜)178142.4±0.445.89上顎齒槽
指數
114126.8±0.788.34
50138.6±0.674.7528120.2±1.206.36
頭指數17881.5±0.344.60口蓋長(㎜)14543.7±0.263.17
5082.7±0.654.634143.1±0.382.42
頭高(㎜)178140.0±0.374.90口蓋幅(㎜)11741.2±0.293.12
50133.3±0.624.412739.3±0.371.91
頭長高指數17880.1±0.253.35口蓋指數11194.1±0.828.65
5079.4±0.533.722790.6±1.236.40
頭幅高指數17898.5±0.334.42下顎骨長
(㎜)
102107.5±0.565.67
5096.2±0.523.7122101.3±0.914.25
前頭最小幅(㎜)17892.4±0.385.04下顎

狀突起間幅(㎜)
102124.4±0.656.54
5089.2±0.594.1822117.1±0.813.78
前頭頭幅指數17865.0±0.283.33下顎指數
(Thomson)
10285.1±0.535.33
5064.3±0.493.432286.4±1.004.70
顔高(㎜)145122.8±0.516.05

幅(㎜)
17843.3±0.151.87
41112.6±0.935.565041.4±0.251.78
頰弓幅(㎜)178136.0±0.415.41

高(㎜)
17834.9±0.151.99
50126.5±0.614.305034.1±0.312.21
顔指數
(Kollmann)
13990.6±0.374.37

指數
17880.8±0.364.75
3689.4±0.734.365082.4±0.714.99
上顔高顔高(㎜)14573.9±0.333.95鼻幅(㎜)17825.7±0.150.20
4168.6±0.684.335025.2±0.241.72
上顔指數
(Kollmann)
14554.5±0.232.78鼻高(㎜)17853.8±0.222.95
4154.3±0.493.135049.9±0.382.67
前側面角(。)14583.7±0.283.28鼻指數17848.2±0.314.16
4182.5±0.432.775050.7±0.55

3.90


  이와 같이 한국인이 단두형인 점은 몽고인과 비슷하지만 고두 및 첨두형인 점은 오히려 중국인이나 일본인과 가깝고, 협액형인 점은 몽고인과 중국인에 가깝다. 안지수와 상안지수가 중안형으로 나타나는 점은 몽고인 및 일본인에 가깝고, 중국인과는 멀다. 이러한 차이가 결국 우리 나라 -사람의 얼굴 이미지로 나타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악형(顎型)·안과형(眼窠型)·비형(鼻型)에는 별차이가 없다[표 2] .


[표2]인근민족과의 두 개형 비교


항 목한국인몽고인중국인일본인
頭蓋容積大頭大頭大頭大頭
頭指數短頭短頭中頭中頭
頭長高指數高頭整頭高頭高頭
頭幅高指數尖頭低頭尖頭尖頭
橫前頭頭頂指數狹額狹額狹額中額
顔指數남:狹顔中顔狹顔中顔
여:中顔
上顔指數中上顔中上顔狹上顔中上顔
前側面角中顎中顎中顎中顎
上顎齒槽指數短齒槽短齒槽短齒槽短齒槽
口蓋指數短口蓋短口蓋短口蓋短口蓋


指數
中眼
中眼
中眼
中眼
鼻指數中鼻中鼻狹鼻남:中鼻
여:低鼻
下顎指數中顎中顎남:短顎
여:中顎

  다음으로 한국인의 척추전장(脊椎全長)은 남자가 평균 770.0㎜, 여자가 704.4㎜이다. 천골상직폭(薦骨上直幅)은 남자가 98.0㎜, 여자가 101.0㎜이다. 천골전직장(薦骨前直長)은 남자가 104.9㎜, 여자가 98.5㎜이며, 여기서 산출한 장폭지수(長幅指數)는 남자가 93.9로서 장천골형(長薦骨型, dolicohieric)에, 여자는 102.7로 중천골형(中薦骨型, subplatyhieric)에 속한다.


  남녀 차이가 가장 뚜렷한 골반(骨盤) 계측에 있어서는 골반 입구의 진경(眞徑)이 남자가 100.4㎜, 여자가 107.1㎜이고, 횡경(橫徑)은 남자가 116.5㎜, 여자가 124.4㎜인데, 여기서 얻은 골반지수(骨盤指數)는 남자가 86.3, 여자가 86.1로서 모두 편골반형(扁骨盤型, platypelly)에 속한다.


  해부골반고(解剖骨盤高)는 남자가 203.4㎜, 여자가 188.6㎜이며, 골반 최대폭은 남자가 261.0㎜, 여자가 254.3㎜로서 여기서 계산한 골반폭고지수(骨盤幅高指數)는 남자가 79.0, 여자가 74.4이다. 해부골반심(解剖骨盤深)은 남자가 166.0㎜, 여자가 166.3㎜이고, 골반폭심지수(骨盤幅深指數)는 남자가 63.7, 여자가 64.5이다.


  상전장골극간폭(上前腸骨棘間幅)은 남자가 225.3㎜, 여자가 224.7㎜로서 상전장골극지수(上前腸骨棘指數)는 남자가 86.3, 여자가 88.5이다. 골반출구시상경(骨盤出口矢狀徑)은 남자가 103.6㎜, 여자가 110.9㎜이고, 횡경은 남자가 91.4㎜, 여자가 105.6㎜로서 여기서 산출한 골반출구지수(骨盤出口指數)는 남자가 113.9, 여자가 106.1이다.


  흉골(胸骨)의 전장(全長)은 남자가 147.0㎜, 여자가 120.1㎜이고, 흉골체(胸骨體) 최대폭은 남자가 38.8㎜, 여자가 28.2㎜로서 여기서 산출한 흉골장폭지수(胸骨長幅指數)는 남자가 26.5, 여자가 23.7이다.


  견갑골(肩甲骨)의 형태폭(形態幅)은 남자가 153.6㎜, 여자가 134.6㎜이고, 형태장(形態長)은 남자가 100.7㎜, 여자가 90.2㎜로서 여기서 산출한 견갑골지수는 남자가 65.7로서 중견갑형(中肩甲型, mesomorph)이고, 여자는 67.0으로 광견갑형(廣肩甲型, brachymorph)에 속한다[표 3].


[표3]軀幹骨計測値


항목\성적例數평균±평균오차표준 편차항목\성적例數평균±평균오차표준 편차
脊柱長(㎝)2577.13.54骨盤幅深指數12663.7±0.384.26
1870.43.357464.5±0.514.36
薦骨上置幅(㎜)6098.0±0.343.99上前腸骨棘間幅(㎜)126225.3±1.2914.51
32101.0±0.998.3074224.7±2.0117.32
薦骨前置長(㎜)60104.9±0.738.34上前腸骨棘指數12686.3±0.323.64
3398.5±1.5713.367488.5±0.524.51
薦骨長幅指數6093.9±0.657.51骨盤出口矢狀徑(㎜)126103.6±0.728.13
32102.7±1.5412.9274110.9±1.3111.30
骨盤眞徑(㎜)126100.4±0.778.67骨盤出口橫經(㎜)12691.4±0.626.96
74107.1±0.998.5174105.6±1.169.99
骨盤橫經(㎜)126116.5±0.586.50骨盤出口指數126113.9±1.0411.70
74124.4±0.917.8674106.1±1.5313.14
骨盤指數12686.3±0.687.66胸骨全長(㎜)75147.0±0.8010.22
7486.1±0.776.605120.1
解剖學的骨盤高(㎜)126203.4±0.778.64胸骨體最大幅(㎜)7538.8±0.084.90
74188.6±1.099.37628.2
骨盤最大幅(㎜)126261.0±1.2714.20胸骨長幅指數7426.5±0.283.62
74254.3±1.7114.70523.7
骨盤幅高指數12679.0±0.333.72肩胛骨形態幅(㎜)95153.6±0.629.03
7474.4±0.393.395134.6±0.672.24
解剖學的骨盤深(㎜)126166.0±0.879.78肩胛骨形態長(㎜)95100.7±0.334.81
74163.3±1.3011.20590.2±1.34

5.94


  한국인의 상완골(上腕骨) 최대장(最大長)은 남자가 292.8㎜, 여자가 265.9㎜이며, 최소위경(最小圍徑)은 남자가 63.2㎜, 여자가 54.3㎜인데, 여기서 얻은 상완골장후지수(上腕骨長厚指數)는 남자가 22.2, 여자가 21.0이다.


  또, 상완골체의 최대후경(最大厚徑)과 최소후경은 각각 남자가 22.4㎜, 17.3㎜, 여자가 19.8㎜, 14.8㎜로 여기서 산출한 상완골횡단지수(上腕骨橫斷指數)는 남자가 77.7로서 광상완형(廣上腕型, curybrachia)에, 여자는 73.2로서 편상완형(扁上腕型, platybrachia)에 속한다.


  요골(橈骨)의 생리장(生理長)은 남자가 217.4㎜, 여자가 196.8㎜이고, 최소위경은 남자 41.0㎜, 여자 35.1㎜로 여기서 계산한 장후지수(長厚指數)는 남자가 19.2, 여자가 18.0이다.


  대퇴골(大腿骨)의 생리전장(生理全長)은 남자가 421.4㎜, 여자가 379.6㎜이며, 골간위경(骨幹圍徑)은 남자가 84.0㎜, 여자가 71.3㎜로서 여기에서 얻은 대퇴골장후지수는 남자가 19.9, 여자가 18.7이다.


  다음 대퇴골간시상경(大腿骨幹矢狀徑)은 남자가 27.1㎜, 여자가 22.2㎜이고, 횡경은 남자가 26.5㎜, 여자가 23.4㎜로 여기서 계산한 필래스터(Pilaster)지수는 남자가 102.6, 여자가 95.4이다. 마지막으로 경골전장(脛骨全長)은 남자가 345.0㎜, 여자가 312.2㎜이고, 최소위경은 남자가 80.1㎜, 여자가 68.4㎜이다.


  또한, 경골체중앙시상경(脛骨體中央矢狀徑)은 남자가 28.6㎜, 여자가 25.8㎜이고, 횡경은 남자가 20.7㎜, 여자가 17.6㎜로서 여기서 산출한 경골지수는 남자가 72.5, 여자가 74.9로서 모두 광경골형(廣脛骨型, euric-nemic)에 속한다[표 4].


[표4]上下肢骨計測値


항목\성적例數평균±평균오차표준 편차항목\성적例數평균±평균오차표준 편차
上腕骨最大長(㎜)115292.8±0.8513.90大腿骨幹圍(㎜)6484.0±0.635.0
10265.9±2.7412.901371.3
上腕骨最小圍(㎜)11563.2±0.253.93大腿骨長厚指數6419.9±0.141.09
1054.3±0.864.031318.7
上腕骨長厚指數11522.2±0.091.40大腿骨幹矢狀徑(㎜)6427.1±0.252.0
1021.0±0.221.021322.2
上腕骨體最大厚徑(㎜)11522.4±0.101.66大腿骨幹橫徑(㎜)6426.5±0.221.8
1019.8±0.291.341323.4
上腕骨最小厚徑(㎜)11517.3±0.071.15Pilaster指數64102.6±1.018.07
1014.8±0.281.331395.4
上腕骨橫斷指數11577.7±0.325.01脛骨全長(㎜)132345.0±1.5017.24
1073.2±1.145.329312.2±6.3218.97
橈骨生理長(㎜)112217.4±0.7712.1脛骨最小圍(㎜)13680.1±0.424.86
10196.8±2.4912.3968.4±1.273.81
橈骨最小圍(㎜)11441.0±0.193.00脛骨中央矢狀徑(㎜)13628.6±0.172.01
1035.1±0.663.10925.8±0.882.65
橈骨長厚指數11119.2±0.091.43脛骨中央橫徑(㎜)13220.7±0.151.73
1018.0±0.221.02917.6±0.651.55
大腿骨生理全長(㎜)64421.4±2.2117.6脛骨指數13172.5±0.526.02
13379.6974.9±1.955.86

   3. 체격

  한국인의 평균 두장은 남자가 181.9㎜, 여자가 174.8㎜이고, 두폭은 남자가 153.1㎜, 여자가 146.2㎜이며, 두지수는 남자가 84.3, 여자가 83.7로서 남녀 모두 단두형(brachcephalic)에 속한다. 두이고(頭耳高)는 남자가 130.3㎜, 여자가 124.5㎜이며, 두장이고지수(頭長耳高指數)는 남자가 72.2, 여자가 71.3으로서 모두 심한 고두형(hypsicephalic)에 속한다.


  또, 두폭이고지수(頭幅耳高指數)는 남자가 85.2, 여자가 85.5로서 탑두형(塔頭型, acroce-phalic)에 속한다. 즉, 두형은 두개측량치에서와 마찬가지로 단두·고두·탑두라는 특이한 형태로서, 이러한 형태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다. 형태안고(形態顔高)는 남자가 119.2㎜, 여자가 109.4㎜이며, 형태안지수(形態顔指數)는 남자가 83.2, 여자가 81.9로 모두 광안형(廣顔型, europrosope)에 속한다.


  용모안고(容貌顔高)는 남자가 190.2㎜, 여자가 179.1㎜이며, 용모안지수는 남자가 132.7, 여자가 133.8이다. 또, 횡두안지수(橫頭顔指數)는 남자가 93.7, 여자가 91.6으로서 남자는 약한 대안형(大顔型, macropside)에, 여자는 중안형(中顔型, mesopside)에 속하여 있다. 비고는 남자가 46.9㎜, 여자가 44.0㎜이고, 비폭은 남자가 36.5㎜, 여자는 33.8㎜이며, 비지수는 남자가 77.8, 여자가 77.0으로 모두 중비형(mesorhine)에 속한다.


  용모이장(容貌耳長)은 남자가 64.4㎜, 여자가 61.8㎜이고, 용모이폭(容貌耳幅)은 남자가 31.7㎜, 여자가 30.7㎜로서 용모이지수(容貌耳指數)는 남자가 49.4, 여자가 49.8이다. 구순폭(口脣幅)은 남자가 50.5㎜, 여자가 46.2㎜이고, 구순고(口脣高)는 남자가 18.5㎜, 여자가 17.6㎜이며, 구순지수는 남자 37.1, 여자 38.2로서 모두 중순형(中脣型, medium thickness)에 속한다[표 5].


[표5]頭顔部計測値


항목\성적例數평균±평균오차표준 편차항목\성적例數평균±평균오차표준 편차
頭長(㎜)1,531181.9±0.596.66橫頭顔指數1,52993.7±0.323.41
683174.8±1.016.3568391.6±0.483.03
頭幅(㎜)1,531153.1±0.576.07鼻高(㎜)10446.9±0.212.18
683146.2±0.774.954344.0±0.412.71
頭指數1,53184.3±0.444.63鼻幅(㎜)10436.5±0.151.57
68383.7±0.653.954333.8±0.271.78
頭耳高(㎜)1,567130.3±0.869.06鼻指數10477.8±0.575.83
679124.5±1.488.894377.0±0.855.59
頭長耳高指數1,52372.2±0.525.46容貌耳長(㎜)4264.6±0.624.11
67871.3±0.865.355261.8±0.382.74
頭幅耳高指數1,52385.2±0.606.15容貌耳幅(㎜)4231.7±0.382.46
67885.5±1.006.115230.7±0.362.57
頰弓幅(㎜)1,528143.4±0.485.15容貌耳指數4245.4±0.724.67
683133.2±0.714.545249.8±0.654.71
形態顔高(㎜)1,523119.2±0.555.91口脣幅(㎜)10250.0±0.323.28
668109.4±0.885.554746.2±0.443.04
容貌顔高(㎜)1,521190.2±0.669.19口脣高(㎜)10218.5±0.272.82
668179.1±1.257.814717.6±0.372.59
形態顔指數1,57883.2±0.434.54口脣指數10237.1±0.585.90
66881.9±0.704.424738.2±0.886.08
容貌顔指數1,521132.7±0.666.98
670133.8±0.925.93


  한국인의 평균신장은 남자가 167.7㎝, 여자가 155.5㎝로서 모두 중신형(中身型, mesosome)에 속해 있는데, 마틴(Martin)이 세분한 분류법에 의하면 남자는 상중형(上中型, supra-medium)에 속하고, 여자는 중중형(中中型, medium)에 속한다.

  따라서, 한국인은 황색인종 중에서는 신장이 큰 편에 속한다. 한국인의 체격을 종경(縱徑)·횡경(橫徑)·위경(圍徑)으로 구분하여 나타내면 [표 6]과 같다.


[표6]구간사지부계측치


항목\성적例數평균±평균편차항목\성적例數평균±평균편차
身長(㎝)3,641167.7±5.0上腕圍(㎝)3,64129.1±1.5
1,106155.5±5.31,10626.8±1.5
乳頭高(㎝)3,641121.7±4.1前腕圍(㎝)3,64126.7±1.5
1,106111.1±4.41,10626.7±1.5
上前腸骨棘高
(㎝)
3,64190.5±3.8前腕最小圍
(㎝)
3,64116.4±0.7
1,10684.2±3.81,10615.2±0.7
肩峰高(㎝)3,641135.2±4.4手長(㎝)3,64118.3±1.0
1,106125.8±2.61,10616.7±1.0
橈骨頭高(㎝)3,641195.6±3.6手幅(㎝)3,6418.7±0.5
1,10691.4±3.71,1067.6±0.5
橈骨莖高(㎝)3,64183.5±3.2足長(㎝)3,64125.2±1.1
1,10678.1±3.21,10623.0±1.0
坐高(㎝)3,64191.8±3.2足幅(㎝)3,6419.7±0.5
1,10685.2±3.81,1068.7±0.5
指極(㎝)3,641167.2±5.5體重(㎏)3,64161.3±5.9
1,106154.1±5.71,10652.7±5.4
肩峰間幅(㎝)3,64139.0±1.7上體指數3,64154.7
1,10635.0±1.71,10654.8
胸幅(㎝)3,64179.9±1.4骨格指數3,64182.7
1,10677.5±1.51,10685.5
胸深(㎝)3,64129.9±1.4肩幅指數3,64123.3
1,10622.8±1.71,10622.5
乳頭間幅(㎝)3,64119.4±1.4腸骨櫛間指數3,64119.5
1,10616.8±1.31,10620.1
腸骨櫛間幅(㎝)3,64132.7±1.4肩峰腸骨間指 數3,64183.8
1,10632.0±1.51,10691.4
上肢長(㎝)3,64155.4±2.0胸廓圍指數3,64153.0
1,10651.4±2.11,10655.0
胸圍(㎝)3,64189.0±3.9上肢指數3,64133.0
1,10685.6±4.51,10633.1
腰圍(㎝)3,64174.5±3.4手指數3,64147.5
1,10667.9±4.11,10645.5
臀圍(㎝)3,64190.2±3.8下肢指數3,64153.9
1,10689.1±3.81,10654.1
大腿圍(㎝)3,64152.8±2.9足指數3,64138.5
1,10651.9±3.01,10637.8
下腿圍(㎝)3,64135.9±1.6上下肢指數3,64178.8
1,10633.1±1.61,10677.8
下腿最小圍(㎝)3,64122.2±0.8
1,10621.2±0.9


  한국인의 체형은 상체지수(上體指數, cormic index)와 골격지수(骨格指數, skeletal index)에 의하면 남녀 모두 장상체형(長上體型, macrocorm)과 단골격형(短骨格型, brachyskeletal)에 속한다. 따라서, 한국인은 상반신이 비교적 짧은 편이다.


  또한, 견폭지수(肩幅指數)에 의하면 광견형(廣肩型, broadshouldered)이고, 장골즐간지수(腸骨櫛間指數)에 의하면 단골반형(短骨盤型, brachypelvic)이며, 견봉장골즐간지수(肩峰腸骨櫛間指數)에 의하면 방구간형(方軀幹型, rectangula)이고, 흉곽위지수(胸廓圍指數)에 의하면 중흉곽형(中胸廓型, medium thorax)이다. 이 때문에 전체적으로 구간형(軀幹型)은 상하가 비슷한 전후로 압평(壓平)된 원통형을 하고 있다.


  상지지수(上肢指數)에 의하면 단상지형(短上肢型)이고, 하지지수(下肢指數)에 의하면 단하지형(短下肢型)에 속하여 장상체형(長上體型)과 일치한다. 손과 발은 수지수(手指數)와 족지수(足指數)에 의하면 중수형(中手型, mesocheir) 및 중족형(中足型, mesopod)에 속한다.


  소마토타입(somatotype)에 의한 체형 분류에 의하면, 한국인 남자는 중배엽형(中胚葉型)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평균 소마토타입은 443형으로 비교적 균형형에 속한다. 그리고 여자는 내배엽형(內胚葉型)이 절반에 가깝고 평균 소마토타입은 역시 443형이다.

  그런데 남자의 경우 20대에는 353형이 많다가 30대에 443형으로 이행하고, 여자는 10대에서 443형이던 것이 20대에는 543형으로 이행하여 연령에 따른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이 한국인은 신장이 세계인종 중 중상위권에 속하며, 뇌중량도 남자는 1,400g이 넘고, 여자는 1,300g에 가까워 가장 무거운 군(群)에 속하여 있다.


  두부(頭部)는 두장경(頭長徑)이 짧은 특이한 단두형이며, 안부(顔部)는 광안형에 속해 있다. 구간부는 광견형 및 단골반형으로서 방구간형에 속하며, 또한 중흉곽형으로 비교적 수신형(瘦身型)이라 할 수 있다.


  상지와 하지는 모두 단상지형·단하지형이며, 손과 발은 모두 중수형·중족형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한국인의 소마토타입은 남녀 모두 443형으로서 비교적 균형잡힌 몸매를 가지고 있다.


                      언어

  우리 민족을 세계의 다른 민족과 구별시켜 주는 현저한 특징으로는 무엇보다도 먼저 언어를 들 수 있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수많은 언어가 있는데, 우리 민족의 언어인 한국어는 매우 큰 언어의 하나일 뿐 아니라 매우 특이한 언어의 하나이기도 하다. 민족의 표지로서 언어를 드는 일은 흔히 볼 수 있지만, 한국어는 특별히 뚜렷한 민족적 표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지구상에 있는 언어의 총수는 학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7,000을 헤아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중에는 중국어나 영어와 같이 몇 억의 인구를 가진 것도 있고, 시베리아의 어떤 언어와 같이 겨우 몇 천 또는 몇 백의 인구를 가진 것도 있다. 이런 작은 언어들은 소멸 직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상 언어의 역사를 보면 엄청나게 많은 언어가 소멸되었음이 확인된다.


  한국어는 이런 소멸을 면하고 지금까지 존속해 온 7,000 안팎의 언어 중에서 20위 안에 드는 큰 언어의 하나이다. 특히,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어·일본어와 함께 3대 문명어(文明語)를 이루고 있다. 한국어는 이처럼 큰 언어이면서도 가까운 친족관계(親族關係)에 있는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점이 또한 주목된다. 쉽게 말해서 한국어와 비슷한 언어가 없는 점이다.


  한국어는 퉁구스어·몽고어·터키어 등 이른바 알타이 제어(諸語)와 친족관계에 있을 개연성이 크며, 일본어와도 유사성을 보여주지만, 이들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한편, 한국어와 중국어는 어느 모로나 비슷한 점이 전혀 없다. 이렇게 한국어는 이웃에 아주 비슷한 자매어(姉妹語)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어는 고립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고립성은 한국어가 형성되어 온 역사에서 그 연유를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우리 민족의 형성과정을 연구함에 있어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사실이다.


  세계에서 20위 안에 드는 큰 언어로서 한국어처럼 고립된 언어는 드물다. 아마도 한국어 외에 일본어를 더 들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들이 둘 다 동아시아에 위치하고 있음도 주목할 만하다.


  1. 역사

  한국어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창제되어 이 문자로 한국어가 표기된 뒤로만 따져도 500년이며, 그 이전에 불완전하게나마 한자(漢字)로 표기된 것을 합치면 아득한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어의 역사를 살피는 데 있어 맨 먼저 부닥치는 문제는 고조선을 비롯하여 부여·고구려·옥저·예 등과 마한·진한·변한 등 이른바 삼한의 언어가 어떠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형편이어서 결론적인 것을 말할 수는 없으나, 이들 언어는 한 조상, 즉 조어(祖語)에서 갈려나온 갈래들이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그 중에서 북쪽의 부여·고구려·옥저·예 등의 언어가 서로 가까웠고, 남쪽의 삼한의 언어가 서로 가까웠을 것이다. 이들의 조어를 부여·한조어(夫餘韓祖語)라고 부른다면, 이것이 오늘날 한국어에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최고(最古)의 단계가 될 것이다.


  위에 말한 북쪽 갈래는 뒤에 고구려의 언어로 대표되었고, 남쪽 갈래는 백제와 신라의 언어로 대표되기에 이르렀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언어 자료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를 종합하여 보면, 이들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으나 공통점도 많았음이 확인된다.


  일반적으로 한 조어에서 분리된 언어(方言)들이 상당 기간 독자적으로 변화하게 되면 그들 사이에 분화가 일어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19세기 이래 발전해 온 역사·비교언어학이 밝힌 바인데, 한국어의 경우 고대 단계에 이미 언어(방언)의 분화가 상당히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오늘날에도 한국어는 통일된 단일어지만, 그 방언들 사이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음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한 가지 문제는 한반도나 만주 지역에 어떤 선주족(先住族)이 있었다면, 그들의 언어는 어떠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특히 근래에 와서 선사시대에 관한 고고학적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선주족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하여서도 현재로서는 확실한 답을 할 수는 없으나, 어떤 선주족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언어가 한국어의 핵심부를 이루지는 못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예를 들어 프랑스 지역에서는 옛날에 켈트어(Celtic)가 말하여졌는데, 오늘날 프랑스어에 남아 있는 그 흔적은 겨우 몇 개의 지명에서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이로 미루어보아 우리 나라에서도 선주족의 언어의 흔적은 매우 부분적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국어의 오랜 역사는 본래 단일한 언어에서 출발하여 분화의 길을 걸은 뒤 다시 통일되는 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 통일의 계기는 신라의 삼국통일에서 마련되었다.

  그러나 한국어가 오늘의 모습으로 굳게 자리잡은 것은 고려의 건국에서 비롯되었다. 이때 개성지방의 방언이 우리 나라의 중앙어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고려 초의 개성 방언이 매우 큰 중요성을 띠게 된다. 이 지방은 본래 고구려의 고토(故土)였고, 통일신라시대에는 그 서북 변방이었다. 따라서, 이 방언에는 고구려어의 요소가 상당히 짙게 남아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오늘의 한국어에는 고대 삼국의 언어적 요소가 모두 담겨 있다. 앞으로 우리 나라의 방언 연구가 진전되면 이 사실을 증명할 여러 증거가 드러날 것으로 기대된다.

  2. 계통

19세기 이래 언어의 비교 방법이 발달하여 언어들간의 친족관계가 증명되었고, 그 결과 여러 어족(語族)이 형성되었다. 언어들의 친족관계는 그 언어가 가지고 있는 요소들 속에서 공통적인 것을 확인하고 그것들이 옛날의 한 조어에 거슬러 올라감을 밝힘으로써 이루어진다. 흔히 비교를 한다고 하면, 비슷한 것을 찾아내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언어들은 쉬지 않고 변하며, 그 변화의 방향이 언어에 따라 다르므로 한 조어에서 갈려나온 언어들 속에 그 조어시대의 어떤 단어가 비슷한 모양으로 남아 있기보다는 아주 다른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오히려 많다.


  따라서, 언어학자들은 비교연구에 있어서 엄격한 음운대응(音韻對應)의 규칙을 수립하고 이 규칙에 의해서 작업을 진행할 것을 강조한다. 이런 규칙에 의하지 않은 비교연구는 아무리 그럴듯하더라도 가치가 없는 것이다.


  한국어의 계통에 관한 연구는 아직도 어떤 확실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오늘날 한국어는 알타이 제어와 친족관계에 있다는 것이 가장 유력한 학설로 되어 있으나,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남아 있다.


  언어의 비교가 보여준 가장 큰 난점은 한국어와 알타이 제어를 비교함에 있어 음운대응의 규칙을 엄격하게 수립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는 이들 언어의 고대 자료의 빈곤 내지 결여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들의 친족관계가 워낙 소원한 데 근본적인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분리연대가 오랠수록 분화가 심화되며, 그 결과 그들 사이의 체계적인 비교가 어렵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알타이어에는 터키어·몽고어 및 만주-퉁구스어 등의 여러 언어가 포괄된다. 이들은 각각 단일한 언어가 아니라 여러 언어 및 방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유라시아대륙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이들 중 한국어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것이 만주-퉁구스어이다.


  지리적으로 인접하여 있다고 해서 언어적으로도 가까운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만주-퉁구스 제어가 한국어와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몽고어나 터키어도 한국어와 가까운 면들을 보여주고 있어 이들과의 비교에도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은 물론이다.


  한국어와 알타이 제어의 비교연구는 여러 가지 난관에 부닥쳐 있으나 지금까지의 연구로 밝혀진 공통점 중에도 자못 현저한 것들이 있어 앞으로의 연구전망을 밝게 해 주고 있다.

  특히, 언어의 비교에서 가장 중요한 문법체계의 비교에서 거둔 성과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음운체계의 비교에는 아직 많은 문제가 있으나 앞으로의 노력에 의하여 어느 정도 극복될 수 있을 것으로 믿어진다.


  어휘는 가장 많은 변화를 겪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 중에도 보수적인 것들이 적지 않은데, 한국어와 알타이 제어 사이에서 지금까지의 연구를 종합해 볼 때, 한국어와 알타이 제어의 친족관계는 완전히 증명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그 개연성이 매우 큼을 밝혔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하면 한국어와 일본어의 비교는 더욱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어 지금으로서는 그 장래를 전망하기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3. 구조적 특징

  한국어는 여러 가지 구조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 중에는 역사적 변화를 거쳐 후대에 이루어진 것도 있고,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있다. 여기서는 한국어가 고대로부터 지녀온 것으로 믿어지는 구조적 특징들에 대해서 논하기로 한다. 이러한 논의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겠으나, 여기서는 편의상 알타이 제어와의 관련에서 그들과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을 나누어 서술하기로 한다.


  먼저 음운에서는 모음조화(母音調和)를 가장 현저한 특징으로 들 수 있다. 모음조화란 본질적으로는 한 단어 안에서 나타나는 모음들의 동화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터키어와 몽고어의 모음조화 규칙을 보면 전설모음(前舌母音)만으로 되어 있는 단어와 후설모음(後舌母音)만으로 되어 있는 단어는 있으나, 이 두 계열의 모음이 한 단어 안에 공존할 수는 없다.

  단, 몽고어에는 중립모음 ‘i’가 있어 위의 두 계열의 어느 모음과도 공존할 수 있지만, 이것은 본래 전설모음 ‘i’와 후설모음 ‘i’의 합류의 결과인 것으로 보인다.

  만주-퉁구스어의 모음조화는 오늘날 상당한 변모를 보이고 있으나, 기원적으로는 역시 전설모음과 후설모음의 대립을 기초로 하는 체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어의 경우에도 15세기에는 ‘아, , 오’와 ‘어, 으, 우’ 등 두 계열의 대립을 주로 한 모음조화 규칙이 자못 뚜렷하였는데, 그 뒤에 이 규칙이 크게 흔들려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두 계열은 역사적으로 보면 알타이 제어의 두 계열과 대체로 일치하는 것으로 믿어진다. 또한 중립모음 ‘이’가 있는 점도 몽고어와 일치한다.


  모음조화는 한국어와 알타이 제어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며, 아프리카·아메리카 대륙의 언어에도 있다. 그러나 알타이 제어와 한국어가 모음조화의 세부적 내용에 있어서까지 현저한 일치를 보이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음운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단어의 첫머리에 오는 자음의 제약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유음(流音)이 이 자리에 오는 것을 피하는 점이 주목된다. 한국어에는 본래 ‘ㄹ’로 시작되는 단어가 없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15∼16세기의 문헌을 보면 한자어의 첫머리에 오는 ‘ㄹ’이 모두 ‘ㄴ’으로 바뀌어 있음이 눈에 띈다.


  이처럼 단어의 첫머리에 유음을 기피하는 현상은 알타이 제어에서도 볼 수 있다. 알타이 제어에는 유음으로 ‘r’과 ‘l’이 있는데, 특히 ‘r’이 단어의 첫머리에 오는 것을 피한다. 몽고어에서 보면 ‘r’로 시작되는 외국어를 차용하는 경우 그 앞에 모음을 덧붙이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다음으로, 단어의 첫머리에 자음군(子音群)이 없는 점도 주목된다. 한국어와 알타이 제어에서 모든 단어는 모음이나 하나의 자음으로 시작되며, 둘 또는 그 이상의 자음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 자리에 두 개의 자음이 오는 단어도 간혹 있으나, 이것은 후대의 변화에서 말미암은 것임이 확인된다. 한국어에서도 15세기에는 몇몇 자음군이 단어의 첫머리에 올 수 있었는데, 이는 그 자음들 사이에 모음이 탈락하였거나 그 밖의 변화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어와 알타이 제어의 공통적인 문법적 특징으로는 여러 가지를 지적할 수 있으나, 무엇보다도 먼저 교착성(膠着性)을 들 수 있다. 이 말은 19세기에 유럽에서 성행한 세계 언어의 형태적 분류에서 연유한 것으로, 주로 접미사(接尾辭)를 붙여 파생(派生)이나 굴절(屈折)을 일으키는 점을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접미사의 연결이 매우 기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과 모든 접미사가 단일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의 여러 언어 중에는 접미사 이외에 모음교체(母音交替)와 같은 방법에 의존하기도 하며, 접미사를 사용하는 경우에도 한 접미사가 몇 가지 기능을 동시에 가지는 예들이 있는데, 한국어나 알타이 제어에서는 이런 예를 볼 수 없다.


  한국어와 알타이 제어의 문법에서 부동사(副動詞)의 존재는 또한 특기할 만하다. 세계의 다른 언어들에서는 동사와 동사가 연결되는 경우에 접속사(接續詞)가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한국어와 알타이 제어에서는 앞의 동사에 일정한 어미가 붙어 접속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는 한국어와 알타이 제어에 기원적으로 접속사가 없었던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이상, 한국어와 알타이 제어에 공통적인 몇 가지 구조적 특징을 들어보았는데, 여기서 특별히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한국어와 알타이 제어를 둘러싼 언어들 중에 이런 특징을 가진 것들이 없지 않으나, 그 모두를 가진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한국어와 알타이 제어가 이런 특징의 묶음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음은 매우 중요한 사실로 해석된다.


  그러나 한국어와 알타이 제어의 구조에는 차이점도 없지 않다. 무엇보다도 현저한 차이로는 한국어의 경어법(敬語法)을 들 수 있다. 신라어에 이미 경어법이 확립되어 있었음이 오늘날 남아 있는 자료에서 밝혀졌을 뿐 아니라, 이 체계가 변화를 거치면서 현대 한국어에까지 이어지고 있음이 확인된다.


  한국어의 경어법은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특이한 것이다. 여러 가지 사실로 미루어보아 이런 체계가 원시 한국어에도 있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것이 언제 어떻게 발달했는지 지금으로서도 밝히기 어렵다.


  역시 문법 분야에서 들 수 있는 차이로는 한국어에는 주격접미사가 있는데 알타이 제어에는 그것이 없는 점, 알타이 제어에서는 동사 어간이 아무런 어미 없이 그대로 명령형으로 쓰이는데 한국어에서는 반드시 어미를 붙여야 한다는 점 등이 지적되어 왔다.

  이에 대하여, 한국어의 주격접미사 ‘이’는 원시적인 것이 아니라 어느 후대에 대명사 ‘이’로부터 발달한 것이라는 설명이 있고, 몽고어에도 이와 비슷한 사실이 있음을 들어보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최근의 연구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만주어를 비롯한 남방 퉁구스어에서도 명령형 어미는 결코 특수한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한국어와 알타이 제어가 보여주는 구조적 차이 중에는 앞으로의 연구에 의하여 그것이 본래적인 차이가 아니라 나중에 발달한 것임이 밝혀질 것도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실상 동일 어족에 속하는 언어들도 오랜 변화를 겪고 나면 상당한 구조적 차이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영어·프랑스어·러시아어 등은 다 같은 어족에 속하는 언어들인데, 그들 사이에는 크나큰 구조적 차이가 있음을 쉽게 볼 수 있다. 본래 하나의 조어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서로 다른 방향으로 변화를 겪게 되면 이와 같이 그 구조에 큰 차이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한국어와 알타이 제어가 한 어족에 속한다 해도 그들이 구조적인 차이를 보이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의식과 생활  

  한국인의 의식, 사회적 성격, 또는 가치관을 논할 때 흔히 빠지기 쉬운 두 가지 오류가 있다.그 하나는 한국인에 관한 기록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데서 빚어지는 오류이다. 기록은 의식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기록을 언제, 누가, 무슨 목적에서, 어떠한 방법으로 작성한 것인가 하는 점들이 면밀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 나라 역사에 관한 기록 가운데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삼국사기≫는 고려시대에 들어와 기록된 것이다. 그것도 한자를 사용할 수 있는 지배층에 의하여 편찬된 것이고, 다분히 삼국 중 신라의 입장에 치우쳐 있다. 기록의 내용은 정치적·군사적 사건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기록은 고구려나 백제, 일반서민, 일상생활에 관련된 부분은 무시되어 한국인의 의식을 왜곡시켜 파악하게 하기가 쉽다.


  또 한 가지 빠지기 쉬운 오류는, 앞의 오류와 같은 맥락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한국인의 의식을 역사시대에 들어선 뒤의 사건들에 의해서 파악하려는 경향이다. 역사시대에 한국인이 어떤 자연환경과 사회·문화적인 상황 속에서 생활하였는가를 이해하고 그 속에서 한국인의 의식을 파악하려는 방법에는 일면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의식은 보다 더 뿌리가 깊고 넓은 무의식(無意識)의 세계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무의식에 잠겨 있는 내용이 인간의 오랜 진화와 문화적·역사적 흐름 속에서 형성된 것이므로, 이러한 방법으로는 한국인의 진실된 의식과 무의식의 내용을 옳게 파악하기 어렵다.


  물론, 역사시대 이전의 한국인의 생활체험을 이해한다는 것은 자료가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매우 어렵다. 그러나 언어학·고고학·인류학 등의 영역에서 국내의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는 한편, 과거에 우리 민족과 깊은 관계에 있던 민족들에 대한 연구를 참고함으로써 선사시대에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었던 의식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하여 역사시대를 거치는 동안에 형성된 의식도 더욱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 종교적 의식

  한국인은 일찍부터 한족(漢族)과 인접하여 살아왔고, 역사시대에 들어와서는 문화적·정치경제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러나 한국인의 언어가 알타이어 계통으로 한족의 언어와 근본적으로 다르듯이 한국인의 종교적 의식 가운데 가장 뿌리가 깊은 것은 흔히 샤머니즘이라고 불리는 본래적 민간신앙 및 그 신앙과 관련된 개념들이다.


  원시신앙으로서의 샤머니즘은 세계 여러 곳에 존재하였으며, 한국의 샤머니즘이 본래 어떤 것이고 다른 민족의 샤머니즘과는 어떻게 다른가 하는 점은 아직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샤머니즘적인 신앙의식이 한국인 일반에 상당히 뿌리깊이 박혀 있어서, 오늘날에도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는 샤머니즘적인 관행에 따르는 경향이 강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중국에서 전래된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이나 불교 및 도교의 요소들과 혼합되어 다양한 형태를 띠게 되었으며, 전통사회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발생한 신흥종교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샤머니즘적 요소가 한국인의 의식에 뿌리깊이 박혀 있다고 하여서 그것이 현대사회에서 과학적인 지식과 기술의 활용을 억제할 정도로 의식의 표면에 강하게 노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2. 조선시대의 사회의식

  유교는 삼국시대에 이미 전래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한국인의 의식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기본적인 윤리로서, 그리고 정치철학으로서 양반 치자계급(治者階級)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예(禮)를 존중하고 삼강오륜(三綱五倫)을 강조하며 상위자와 하위자 간에 권위적 통제와 절대적 복종의 관계가 요구되었다.


  또한, 중앙집권적인 관인신분사회에서 부귀를 누릴 수 있는 신분은 양반에 국한되어 있었고, 따라서 한국인에게는 관직에 오르려는 신분지향적 의식과 관존민비(官尊民卑) 관념이 강하다.


  그리고 관직에 오르는 합법적인 통로가 유교적 소양을 지니고 학문에 통달하여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었으므로 학문을 존중하는 의식이 강하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강한 교육열의 의식적 근원이 된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양반 치자(治者)들은 공허한 이념과 형식적인 예를 숭상하는 데 치우쳐 노동과 생산활동을 경시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사회적 발전을 추구하는 데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였다. 조선 후기에 일부 양반들 사이에서 실학사상(實學思想)이 대두하였지만, 그 영향력은 이러한 사회분위기를 바꿀 정도로 크지는 못하였다.


  유교에서 가장 중요한 관념 중의 하나는 효(孝)이다. 그리고 효를 중요시하는 가치관념과 세습적인 신분제도로 말미암아 조상들의 관직과 공덕을 족보에 밝히고 제사를 통하여 조상을 숭배하는 한편, 가계(家系)를 계승하고 가문의 위세를 떨치려는 의식이 양반들 사이에서는 매우 강하였고, 이러한 관념은 하층신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여기서 말미암은 가족중심주의적 관념은 현대사회에도 한국인의 사회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령 한국인이 중동(中東)과 같은 외국의 어려운 생활조건에서도 열심히 일하는 데에는 행복을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가족 전체로서 성취하고, 가장으로서 가문을 빛내려는 전통적인 의식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가족을 넘어서서 보편적인 원리에 의하여 단결하고 사회에 기여하려는 의식은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다.


  조선시대의 사회현상을 보고 한국인은 사대주의적 관념을 가지고 있으며, 단결을 하지 못하는 민족적 성격이 강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작은 나라가 이웃의 큰 나라를 의식하는 것은 비단 한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조선시대의 양반 치자들 사이에 사대주의적 관념이 있었다는 것을 전적으로 부정하기는 어렵지만, 거기에는 조선 말기에 이르러 중국에 정치적으로 의존하려는 정치인들을 공격하기 위해서 지나치게 과장된 점도 없지 않다.


  더욱이 양반들 사이에 어느 정도 그런 관념이 있었다고 하여도 그것을 한국인 전체에 확대 적용하여 마치 민족성을 형성할 정도로 굳어진 의식인 것처럼 논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사대주의적 관념이라기보다는 역사적으로 큰 국가와의 외교관계를 매끄럽게 유지하기 위하여 정책적인 차원의 사대방책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 민족이든 자신의 자존을 지키려는 독립정신은 있을 것이며, 더욱이 수천 년 동안 강대국에 위협과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도 민족과 역사를 굳건히 지켜온 것은 자존과 독립정신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편, 당쟁(黨爭)의 현상을 보고 한국인이 단결하지 못하는 민족성을 가진 것처럼 주장하는 것도 역시 잘못된 것이다. 물론 공개적인 경쟁의 여지가 적고, 관직의 수에 비하여 관직에 오르려는 희망자가 훨씬 많았던 조선왕조에서 양반들 사이에 정치적 파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배계급 내부의 정치권력을 둘러싼 대립은 어느 나라 역사에서나 항상 존재하는 것이며, 조선시대의 그것은 붕당정치(朋黨政治)라는 틀 속에서 오히려 반대 당파의 존재와 상호비판을 전제로 하는 나름대로의 발전된 운영원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와 같은 한국인의 의식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우리 민족의 자성(自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한국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악의적으로 날조한 식민사관(植民史觀)인 타율성론·당파성론 등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3. 서민의식

  조선 말기에 한국사회를 관찰한 외국인들의 기록 중에는 촌락에서 농민들이 민주적인 자치단체를 조직하여 훌륭한 공동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감명깊게 서술한 것들이 있다.


  조선시대의 일반 서민들은 관인이나 양반들의 압박을 받으면서도 계(契)·두레 등을 통해서 재앙을 미연에 방지하거나 수습하기 위하여 상호 부조하며, 영농을 비롯한 경제적·사회적 활동들을 공동의 노력으로 효과있게 전개하여 왔다. 이것을 보더라도 한국인이 단결하지 못한다는 평가는 근거가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한국의 문화를 한(恨)과 슬픔에 의하여 특징짓기도 한다. 지배층의 압박에 시달리고 외세의 침략 밑에서 신음한 경험이 많은 한국인들에게 그러한 측면이 없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일반 서민들이 낙천적이고 해학을 즐기며 율동적인 활동을 전개하는 것을 보고 놀라는 외국인들도 적지 않다.


  조선시대에는 유교가 정치이념으로서 숭상되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치자계급에서의 일이지 서민의 의식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생활면에서 보면 유교의 영향은 정치제도와 가족제도에 크게 미쳤지만, 일반 서민의 일상적인 의식주생활에 있어서는 오랜 옛날부터 전해오는 본래적인 문화적 요소를 보존하여 온 면이 더 강하다.


  또한, 서민들은 샤머니즘을 비롯하여 토속적 신앙의식은 강하지만, 외래 종교의 영향은 강하게 받지 않아 왔다. 그리하여 그 종교들에서 강조하는 보편적 윤리의식과 내세관(來世觀)보다는 현세적(現世的)이고 실용적인 사고를 취하는 경향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에 서민들은 현실의 변화에 부응하여 신축성 있게 대처하는 능력이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현재 기독교 등 서구의 종교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나서 사회 전체적인 흐름을 이끄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바로 서구문물의 유입에 따른 현실의 변화와 부응이라는 대처능력의 한 방편이라 생각된다.

  4. 민족의식

  한국인의 생활터전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이며, 대륙에 접한 북쪽 경계는 백두산과 거기서 흘러내리는 두 개의 강으로 분명하게 갈라져 있기 때문에 민족의 동일성과 문화적 고유성을 견지하기에 비교적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형성된 한국인의 민족의식은 전통시대에 있어서 지배계급이 중국으로부터 정치적·문화적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모화적(慕華的:중국에 기대고 따름)이지 않다. 조선 말기로부터 한국인은 민족적 자주의식을 발휘하였고, 그것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받으면서 반일감정을 깊이 간직한 민족의식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한국인의 민족의식은 배타적이지 않으며, 서방세계에 대해서는 매우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로부터 한국인은 단결된 행동으로 위기에 대처하였으며, 서방세계에서 발전한 민주주의의 가치관념과 문화·기술 등을 적극 수용할 수 있었다.


  한국인의 민족의식은 광복 후 남북분단과 6·25전쟁의 처참한 체험을 통하여 반공적인 감정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한국인이 강한 반공의식을 가지게 된 이유는 한편으로는 통합된 민족의식이 한국인의 정신 기반에 깔려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목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광복 후 식민지 통치세력이 붕괴하였고, 일제강점기에 사회의 상층에 있던 양반지주계급이 농지개혁(農地改革)에 의해서 몰락하였으며, 새로운 시대에서 주도적 임무를 담당할 신진세력의 대두를 가로막는 전근대적 요소들이 무력해지거나 약화되었다는 것이다.

  5. 복지사회 건설과 의식개혁

  최근까지 한국인의 민족성·가치관·의식내용 등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그리하여 의식개혁의 필요성이 다양하게 제기되었고, 실제로 구체적인 운동도 전개되었다.

  근대화 초기에 있었던 문명개화운동·애국계몽운동을 비롯하여 지역사회 개발운동, 5·16군사정변 후의 국민재건운동·새마을운동, 그리고 제5공화국에서의 사회정화운동과 의식개혁운동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운동들과 더불어 광복 후 일관해서 강조되어 온 중요한 가치관념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 생활의 합리화, 허례허식의 배제, 민족주체성의 확립, 민주주의의 신장과 인권의 존중, 국민총화와 국가안보, 경제적 번영, 근대적 시민의식의 확립 등이었다. 이것들은 물론 한국인이 당면한 문제들을 슬기롭게 해결하고 보다 행복한 내일의 복지사회를 이룩하는 데 긴요한 것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거기에는 몇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첫째, 지나치게 정부 차원에서 국가 위주로 특정한 가치를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이다. 개인에게 있어서 국가가 매우 중요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더욱이 국가의 안보가 항상 위협받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 한국인 각자가 국가의 안보를 보장하려는 노력을 잠시도 소홀히 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떠나서 국가가 성립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국가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동시에 개인의 존엄성과 개인의 생활터전인 가족과 직장을 튼튼히 하는 데 필요한 가치관도 소홀히 취급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후자의 측면을 등한시함으로써 오히려 국민 각자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한 국가에의 기여를 약화시킬 가능성이 없지 않다.


  둘째, 정신혁명이나 의식개혁이 말로 강조함으로써 달성될 듯이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필요한 말은 해야 하며, 특히 듣는 사람측의 동기 부여에 따라서는 상당한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판에 박은 말의 기계적인 반복은 경우에 따라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의식은 통합된 자아의 주체적인 체험이며, 따라서 그것은 개인이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련 밑에 책임 있게 살아가는 가운데 얻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책임감 있는 자기실천이 없이 말만 한다고 해서 의식이 개혁될 수는 없을 것이다.


  셋째, 의식개혁이 법의 준수, 질서 유지, 상위자에 대한 복종을 강조하는 데 그치고 비판·항의와 같은 갈등의 측면을 무시 또는 경시함으로써 오히려 개혁보다 정체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불가피하게 갈등 속에서 살고 있다. 다른 사람과 합일화(合一化)의 극치에 도달하는 순간이 있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항상 어느 만큼의 갈등이 내재하여 있다. 갈등은 피차에 긴장감을 일으키고 괴로움을 주기 때문에 바람직한 상태는 결코 아니다.

  그러나 갈등은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며, 이러한 갈등을 흡수하고 해소시키면서 서로의 이해를 증진시키고 협동하여 활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사회가 발전하고 문화가 풍부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립과 갈등이 서로에게 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힘과 정당성에 한계가 있다는 인식 위에 변증법적인 과정을 통해서 높은 수준의 공동생활을 이룩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한 의식개혁의 방향일 것이다.


  넷째, 의식개혁은 흔히 과학과 합리성을 강조하는 데 그치고 그것이 한계가 있다는 것을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 물질의 풍요를 가져오려면 과학적 지식과 기술을 발전시키고 경제적 활동을 합리적으로 조직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인간생활에 있어서는 과학적 방법과 합리적 사고방식을 적용하는 데 한계가 있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적용하려고 노력해야 하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합리를 넘어서서 오히려 비합리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올 때가 있다.


  경제발전이 진행되고 물질적으로 풍요해짐에 따라 한국인이 지나치게 물질주의·황금만능주의로 흐르고 있다는 우려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삶의 진실한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고 인간 자체를 수단시함으로써 실존(實存)을 상실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산업이 발달한 서구 선진사회에서는 벌써부터 기계적 물질문명이 지배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위기에 처하여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리하여 덜 기계적이고 물질적이었던 동양인의 의식형태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요소 또는 방안을 찾으려는 노력이 전개되고 있다. 그리하여 인도의 불교나 힌두교, 또는 중국의 도교나 그 밖의 사상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러한 동양의 철학사상을 재평가하려는 기운이 일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본래적인 우리의 의식형태를 잘 모르면서 덮어놓고 부정적으로 보는 한편, 외래적인 서방사회의 의식형태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대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그러나 점차 주체적인 자세를 다지는 가운데 제노포비아(xenophobia:외국 또는 외국인 혐오)와 제노피리아(xenophilia:외국 또는 외국인 선호)가 혼합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우리의 본래적인 의식을 냉정하게 밝히고 다각도로 검토하는 한편, 서구적인 관념에 대해서도 비판적 자세를 취하여 선택적 평가를 가함으로써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데 필요한 새로운 정신체계를 창조해 나가려는 기운이 보편화되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화와 습속

1. 신화와 습속의 관계

  신화와 습속의 관계는 원칙적으로 민간 구술전승(口述傳承) 일반과 습속의 관계에서 유추할 수 있다. 즉, 민간 구술전승이 습속의 언어적 표현이듯이 신화 또한 습속의 언어적 표현인 것이다. 이럴 경우 신화와 구술전승을 습속의 구술상관물(口述相關物)이라 부르게 된다.


  그러나 신화가 습속의 구술상관물이라고 해서 반드시 습속을 앞세우고 신화를 습속에 뒤따르는 언어표현체로만 보는 것은 아니다. 신화와 습속은 동일한 발상법(發想法)에서 비롯된 서로 다른 표현체이기 때문이다. 즉, 같은 사고방식이나 관념체계를 육체를 통하여 표현한 것이 습속이라면 언어를 통하여 표현한 것이 신화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습속은 매우 포괄적인 말이다. 일반적으로는 전승되어서 관례화된 생활양식 및 행동양식이라고 정의할 수 있으나, 그 외연이 커서 적지 않은 내포를 지니고 있다. 제례(祭禮)나 의식(儀式)과 같이 격식화된 생활양식 및 행동양식만이 아니고 일정한 윤리체계에 의하여 뒷받침되는 일상의 생활양식도 습속에 포함될 수 있다.


  따라서, 신화와 관련된 습속에 대하여 서술함에 있어 먼저 제례·의식 등 격식화된 생활 및 행동양식을 다루고, 다음으로 일상 생활습속에 대하여 설명하려 한다.


  ≪삼국지≫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보이는 초기 고구려의 혼인풍속은 ≪동국이상국집≫에 실려 있는 동명왕신화(東明王神話)에서 해모수(解慕漱)가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와 혼인하는 과정과 매우 비슷하다.


  이것은 신화와 습속의 일부인 혼인풍속에 존재하고 있는 특정한 병행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로부터 논의를 확대해 갈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러한 혼인풍속이 후대의 이른바 신행제도에까지 그 자취를 남기고 있는 것이라면, 고구려 신화가 당시의 혼속만이 아니라 현대의 혼속에 대하여도 상관성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2. 신화맥락 속의 습속과 굿

  오늘날에도 동해안 일대와 영남·호남 일부, 그리고 경기도 일부에서 시행되고 있는 마을굿은 촌락공동체가 주기적으로 치르는 계절적인 통과의례이다.


  별신굿·도당굿·서낭제·당굿·동제(洞祭)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마을굿은 마을의 골막이, 곧 수호신이 한 해에 한 번 혹은 3년 내지 5년에 한 번씩 마을에 내릴 때마다 마을사람들이 그 신령을 모시고 마을의 풍요와 주민의 건강을 다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들 마을굿 가운데 일부는 서낭나무 또는 당나무라 일컬어지는 신성수(神聖樹) 아래서 신내림을 받는다. 사람이 잡고 있는 서낭대의 떨림으로 표현되는 신내림을 받은 마을사람들은 제주 또는 당주를 중심으로 하여 신령을 모시고 마을굿을 올리게 된다.


  이와 같이 성스러운 나무 아래서 신내림을 받아 치르는 마을굿의 현장은 단군신화(檀君神話)에서 환웅(桓雄)이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오는 장면과 신단수를 둘러싸고 베풀어진 신시(神市)를 연상시켜 준다.


  그런가 하면 하늘에서 내려와 숲속의 거룩한 나무에 섬겨지는 마을굿의 신령은 김알지(金閼智)의 신화를 연상하게 한다. 이러한 사례들로 미루어보면 오늘날의 마을굿은 옛날의 신화를 몸짓으로 재현하고 있는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단군신화와 김알지신화의 육체적 재현이 곧 마을굿인 것이다.


  그러나 상고대의 신화 그 자체를 언어표현체로서만 국한시킬 수는 없다. 오늘날 전해지는 상고대 신화에서 어느 만큼이 제의 내지 굿이고 어느 만큼이 신화인지를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굿과 이야기의 복합이 곧 상고대의 신화이다. 다시 말해서 상고대에 치러진 굿을 언어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상고대의 신화인 것이다.


  ≪삼국유사≫<가락국기 駕洛國記>의 수로맞이 부분은 그와 같은 신화와 굿의 복합에 대하여 말해주는 구체적인 보기이다. 하늘에 있는 신령의 공수를 받들어 공수가 일러주는 대로 춤추고 노래하면서 신맞이한 절차가 곧 <가락국기>의 수로맞이 부분이다. 고구려의 동맹(東盟)이나 수신굿 또는 삼한의 소도굿 등과 함께 <가락국기>의 신맞이가 오늘날의 별신굿이나 도당굿의 선례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별신굿 또는 도당굿이 단순히 상고대 신화의 육체적 재현이라는 면에서만 습속과 신화의 유대에 대하여 말하여 주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별신굿 또는 도당굿은 보다 더 심층적이고 근원적인 차원에서 특정한 신화적 발상법이 습속과 맺고 있는 관련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다.


  별신굿에 내포되어 있는 신화적 발상법은 자연과 인간 사이의 공시화(共時化)이다. 자연이 지닌 시간적 기복에 인간들이 자신의 삶의 기복을 맞추어서 자연과 인간 사이에 동일한 풍요의 원리 및 재생의 원리가 존립하게 하는 것이 바로 공시화이다.


  이것은 인간이 자연적인 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살아가는 적응 이상의 것으로, 계절의 변화를 있게 하는 자연의 원리 또는 힘에 인간이 직접 참여하여 그것을 인간의 몫으로 확보함으로써 비로소 이루어진다고 믿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의 힘이 신령의 내림과 함께 인간에게 주어지는 현장이 곧 별신굿판이다. 자연의 힘과 신령과 인간의 일체화가 그 굿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별신굿판이 정월 보름에 벌어지는 것에서 확인된다. 작게는 어둠·무거움·닫힘·부정(不淨) 등의 의미를 함축하고 크게는 죽음을 의미하는 겨울과 봄의 가름에서 치러지는 이 굿판은 작게는 밝음·가벼움·열림·맑음 등을 불러들이고 크게는 새로운 생명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이때 별신굿판은 계절의 가름에 자리잡은 통과의례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별신굿의 이러한 구실은 ‘난장판’에서 더욱 분명히 나타난다.‘난장’은 묵은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 옮겨가는 중간 과도기에 위치한 ‘계획된 무질서’, ‘만들어진 혼돈’이다. 이 같은 속성 때문에 난장은 묵은 것을 청산하고 새것을 예비하는 창조적 계기가 되는 것이다.


  제의적 광란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난장은 한국인의 집단적인 ‘신명판’이고 ‘신바람판’이다. 그것은 단순히 춤과 풍악과 노래가 있어서가 아니며, 난장판에서의 신명은 매우 다원적인 것이다. 우선 춤과 노래와 놀이가 있는 흥겨움이 신바람의 요소인 것은 틀림없지만, 이러한 흥겨움보다 더 심층적이고 중요한 신바람의 요인들이 있는 것이다.


  전통사회의 양반과 상민 사이의 갈등을 상민의 처지에서 발산할 수 있었던 것도 신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된다. 이것은 또한 잠복된 공격성향을 사전에 누그러뜨리는 구실도 하게 된다. 그리고 놀이가 부분적으로나마 예술의 경지에서 표현될 때, 거기서 공격심성의 승화된 표현을 모아낼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다원적 요소를 지닌 신바람은 신지핌 내지 신내림(혹은 신실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해진다. 실제로 별신굿판은 무당을 통하여 당주(제주)가 받은 신내림이 마을 안에 널리 퍼져가는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다. 접신(接神) 상태의 집단적 감염이라 부르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결국 별신굿판에서 한국인이 경험하는 신바람은 종교성·사회성·경제성과 생리적 욕구 및 정서적 욕구 등 여러 차원에 걸친 복합성을 지닌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신바람을 피울 수 있는 난장이 겨울에서 봄으로, 묵은 것에서 새것으로, 부정에서 맑음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옮아가는 자연의 변화에 인간이 직접 참여하는 계기, 말하자면 인간이 자연과 공시화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정해진 달력을 따라 베풀어진 별신굿판은 한국인의 삶의 리듬이자 제의라는 습속이었다. 그런데 별신굿이 한국의 전통적인 농경사회가 지켜오면서 관례화되고 제도화된 습속임을 생각한다면, 여기서 한국인의 생활습속에 깊이 관여한 신화적 원리를 찾을 수 있다. 더욱이 별신굿이 신화와 제의의 복합적 표현인 <가락국기>나 단군신화를 회고하고 있다는 사실은 별신굿과 신화의 연계성을 더욱 굳혀주고 있다.

  3. 신화와 일상습속

  마을굿은 단순한 종교적 행위가 아니며, 자연종교에 있어 어느 경우나 그렇듯이 별신굿도 매우 총체적이고 구체적인 행위이다. 그리고 그것은 전통사회에서 한국인의 생활 전반에 관여하였다.

  난장판의 신명만 하여도 그것이 한국인의 감정생활 및 정서생활에 끼친 영향은 간과될 수 없다. 이는 별신굿이라는 습속과 맺어진 신화가 훨씬 더 깊고 넓은 차원에서 한국인의 생활습속에 관여하였음을 짐작하게 해주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인의 생활습속을 규제하고 있는 관념체계, 예컨대 크게는 민간사고(民間思考)나 속신(俗信), 작게는 방위관념이나 시간관념 혹은 성(聖)과 속(俗)의 관념 등은 물론이고 지킴이나 가림 등의 행동체계도 별신굿판과 관련지어서 생각할 수 있다. 가령 외지(外地)가 부정한 곳이라는 생각, 그래서 외지는 가려야 하는 곳이라는 생각은 별신굿판을 신성하게 혹은 정(淨)하게 확보하려는 의도와 맺어져 있는 것이다.


  별신굿을 비롯한 마을굿에서 마을사람들은 당연히 외지인과의 접촉이 금지된다. 가림과 지킴은 대체로 부정과 금기에 대응하고 있거니와, 이 둘은 별신굿판의 행동지침이 됨과 동시에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매우 넓게 그리고 깊게 한국인의 습속을 제약하고 있다. 부정을 가리지 않으면 동티·살 등으로 표현되는 재앙을 입게 되며, 마찬가지로 지킬 것을 지키지 못해도 재앙을 입게 된다.


  한국인은 일상의 나들이, 경제활동, 타인과의 교제 등에서 가리고 지키는 생활습속을 익혀온 것이다. 외지와 함께 여성과 죽음이 부정한 것임은 별신굿에서나 일상생활에서나 다를 바가 없다. 만일 이 세 가지를 한국인이 지켜온 부정의 3대원리라고 부른다면, 그것들은 별신굿이라는 습속 안에서 기능하면서 아울러 일상의 생활습속에서도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한국인들은 부분적으로나마 여성을 부정시하고, 먼 데 나들이에 신경을 쓰고, 남의 죽음을 되도록 멀리하려고 한다. 별신굿판에서 작용하는 부정의 3대원리가 현대의 생활습속으로 굳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여파는 이른바 남아선호(男兒選好)로 나타나 인구문제에까지 미치는가 하면, 생사관의 올바른 정립을 어렵게 만들고 있기도 하다. 별신굿판을 둘러싼 지킴과 가림이 생활습속에도 그물처럼 얽혀 있는 것이다.


  별신굿판은 상고대의 신화 및 의례를 오늘에 재현하는 집단적 종교의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과 동화하면서 살아가는 농경사회의 경제원리를 포괄하고, 사회적 행동규범을 제약하고 있다. 그것은 종교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포괄적이고 현실적이다. 그러나 별신굿판의 포괄성 내지 다양성이 여러 요소들의 대등한 병치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그 다양한 국면 속에 지배적이고도 통합적인 원리가 존재하였던 것이다. 그 원리란 다름아닌 무속신앙과 맺어진 종교적 믿음이며, 또한 그 믿음과 짝지어진 신화성(神話性)이다. 신령과 인간, 성과 속, 그리고 하늘과 땅 등의 양립론적 대립을 전제하면서도 종국적으로 그 대립이 지양된 상황에서 이룩될 풍요와 안정을 구하면서 별신굿은 치러졌다.


  그것은 우주론적인 차원으로 확대된 인간존재론의 특수한 표현이기도 했던 것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최선인가 하는 물음과 맺어져서 무엇이 인간들의 삶을 떠받들고 있는 으뜸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구체적 해답이 별신굿판에서 실연(實演)된 것이다.


  별신굿판의 이와 같은 우주론적인 혹은 자연주의적인 존재론을 간과하지만 않는다면 한국인의 신화 내지 신화적 발상법이 존재론적 체계에 편입된 구체적 표현으로서 그 굿판을 이야기하여도 좋을 것이다.


  존재론적인 명제가 행동양식·행동규범 등 실제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습속을 제도화되고 관습화된 행동체계로 규정한다면, 상고대 신화의 오늘날에 있어서의 육체적 재현인 별신굿판이 이러한 습속을 가능하게 하고 제약하는 불문(不文)의 헌법 구실을 하였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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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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