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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변천사

채현병 2019. 5. 7. 11:14

                              아리랑 변천사


 강등학 강릉원주대 명예교수는 9일 인천광역시 인천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에서 열린 2018 한국민속학자대회에서 ‘분단 전후 아리랑의 전개 국면과 민족공동체 복원을 위한 아리랑의 활로 모색’이라는 주제의 기조발표를 통해 이렇게 지적했다. 강 교수는 이날 분단 이전과 이후 아리랑의 변모상과 활로를 찾는 방안 등에 대해 설명했다.


 아리랑은 강원도 동부 산간지역에서 불리던 향토민요였다. ‘아라리’, ‘엮음아라리’, ‘자진아라리’ 등3종이 대표적이다. 19세기 중반 서울에도 아리랑이 유행했다고 한다. 아리랑은 경복궁 중건 때 부역꾼들에게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아리랑을 대중민요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곡은 ‘아리랑 타령’이다. 사당패가 ‘아라리’를 재창작한 것이다. 이 노래가 유행한 뒤 ‘강원도 아리랑’, ‘해주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등이 나왔다.

2018 한국민속학자대회는 9~10일 인천광역시 일대에서 ‘황해에서 경계를 넘어선 한민족을 보다’라는 주제로 진행된다.


 하지만 이들 노래는 아리랑타령의 인기를 넘지 못했다. 아리랑이 새로운 국면을 맞은 것은 1926년이다.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인 ‘아리랑’은 ‘자진아라리’를 새롭게 편곡한 것이다. 강 교수는 “이 영화가 크게 성공해 주제가가 인기를 끌면서 삽시간에 ‘아리랑타령’의 인기를 능가해 ‘서울아리랑’ 또는 ‘대표 아리랑’, ‘아리랑’이 되었다”며 “당시 민족공동체의 현실적 정서가 함축된 사회적 성격을 아울러 지니게 되었다”고 말했다. 남북이 민족 공동체를 의식해 국제적 스포츠 행사 때 함께 부르는 노래도 ‘대표 아리랑’으로 불리는 아리랑이다.


 해방 이후 아리랑 콘텐츠는 남북 양쪽 모두 문화예술 전 분야에서 다양하게 축적됐다. 남한의 아리랑은 민요, 대중가요, 민중가요 등 세 범주로 존재하지만, 그 수급은 대중가요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강 교수는 남한에선 ‘아리랑 목동’(박단마·1958)처럼 “한동안 감성지향이 주도하다가 1980년대부터 의식지향이 활성화되었다”고 지적했다. ‘홀로 아리랑’(한돌·1989)처럼 1980년대 이후엔 의식지향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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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869596.html#csidx3111f5cc3c75ff8af00f13e04344ee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