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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옥진 "기적의 공연"

채현병 2010. 6. 30. 15:36

 

            인간문화재 공옥진 "기적의 공연"

 

                   <명인명무전 : 2010.6.27. 19:00  국립극장 '해오름'>

 

 

 

 

"공옥진이 죽지 않으면, 죽지 않으면 또 오겠습니다".

우리시대의 광대 공옥진, 그가 다시 무대에 섰다.

6월27일 국립극장에서 열린'명인명무전'에서 초인적인 공연을 했다.

세 번의 수술, 두 번의 뇌졸증, 그리고 교통사고....

서 있기도 어려운 몸으로 살풀이 춤을 추고 심청가를 불렀다.

그리고 다시 오겠다며 무대를 떠났다.

그날이 올것인가.

'죽으면' 올 수 없기에, 기약 없는 다짐이 더 아프다.

그와 함께 했던 한 시대가 저물고 있음이다.

공연은 예정에 없었다.

관객들도 인사말정도를 기대했는데 79세의 광대는 혼신을 다해 병마를 떨쳐냈다.

공연을 마쳤을 때는 감동이 객석을 휘감았다.

기립박수를 치며 더러는 흐느꼈다.

기적의 20분 공연, 그리고 선생은 전남 영광의 작은 마을로 숨어버렸다.

공옥진이란 이름은 이미 전설이다.

지난 세월 무명저고리, 버선 한 켤레,부채하나로 관객을 사로잡앗다.

소리, 춤, 재담을 섞어서 만든 1인 창무극은 거칠 것이 없었다.

웃다보면 마침내 울음이나왔다.

삶을 희롱하다가 끝내는 삶을 껴안았다.

이름만 내 걸어도 공연장에 사람들이 몰렸다.

무대인생은 화려했지만 선생의 삶은 그의 말처럼 '징하고 팍팍했다'고 한다.

임방울 같은 명창에게 소리를 배우고 최승희에게서 춤을 사숙했지만 결혼에 실패하고는정 붙일 곳이 없었다.

수도승, 국극단원이 되었다가 농사를 지었다.

그러던 어느날 선생의 타고난 예인 기질이 폭발했다.

한과 설움도 함께 폭발했다.

선생이 숨어사는 마을에 경향신문 기자가 찾아갔다.

'광대는 울고있었다.

 야속한 세상에, 병든 몸때문에 ,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우는 듯했다.'

기자는 그의 간절한 절규까지 전했다.

"천지 신명이여! 한번만 공연하게 해 주시오."

공 선생은 끝내 춤을 추었다.

기다리는 관객이 있기에 돌아왔다.

선생이 양아들로 삼은 박동국 동국예술 기획대표는 " 살아계신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했다.

우리는 그를 오랫동안 방치했다.

온통주변이 노을인데, 이제서야 그의 창무극이 무형 문화재로 지정 받았다.

선생의 소원이었다.

비로소 그의 병신춤에 녹아있던 신명을 보존할 길이 열렸다.

광대는 울지않고 웃어야 한다.

다시 그를 기다린다.         ---------경향신문 김택근 논설위원

 

 

                                                  경향신문 6월 30일  p.34  여적  공옥진'기적의 공연'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