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 김용환의 해동명산도 스케치 코스
김홍도(金弘道), 금강사군첩 - 현종암
1788년. 한국화 견본담채 30 x 43.7 cm
개인소장
출처 : 한국데이터진흥원
김홍도는 44세 때인 1788년 가을 정조의 어명으로 금강산 및 관동팔경 지역을 사생 여행하게 되었다. 이때 정조대왕은 김홍도와 함게 동료이자 선배화원인 김응환도 동행할 것을 명하고, 두 사람이 거쳐가는 지방의 수령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부족함이 없이 준비해 주라고 특별히 지시하였다. 정조가 이처럼 김홍도에게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그려오라고 지시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정조 자신도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무척이나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금강산은 우리나라 최고의 명승지로서 우리나라 국민은 물론이고 멀리 중국인까지도 그 명성을 듣고 가보고 싶어했으니 만큼 인간 정조로서도 같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國政에 힘써야 하는 군왕으로서 최소 한달은 걸리는 금강산 유람을 다녀올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림으로나마 그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에 적합한 화가는 자신이 왕세손(王世孫) 시절부터 신임하고 아꼈던 김홍도가 적임이었다.
그런데 김홍도가 다녀온 금강산과 관동팔경 사생 여행의 경로는 요새 남한 사람들이 즐겨 가는 금강산 유람을 가던 코스와도 달랐다. 요새 사람들은 바닷길로 해금강, 외금강을 볼 뿐이고, 옛날의 금강산 유람도 한양에서 철원, 회양을 거쳐 단발령을 넘어 내금강을 주로 보는 코스였다. 그런데 김홍도는 한양에서 출발하여 지금의 영동고속도로와 동해안 해안도로, 그리고 금강산에 이르는 코스를 잡았다. 이것은 김홍도의 여행 목적이 단순히 금강산 뿐만이 아니라 관동팔경까지 포함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조선시대 우리 조상들이 관동팔경의 명승지를 얼마나 가보고 싶어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금강산은 관동팔경과 함께 바다와 산(海山)승경의 중심이었지만, 오직 금강산만이 볼만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김홍도가 지나간 지역 중에는 남한의 대표적 명산, 설악산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음에는 김홍도가 지나간 여로를 순서대로 열거해 보기로 한다.
한양을 떠나 양근, 지평(楊根, 砥平: 현재의 양평군)을 거쳐 원주에 이르러 淸虛樓를 그렸다. 청허루에 대해서는 『동국여지승람』원주목 조에 "추천현 객관 서쪽에 있는데 절벽과 맑은 담이 있다(在酒泉懸客官西 石壁削立 下有澄潭)"이라 되어 있다.
원주를 떠나 평창군 방림(芳林), 대화(大和)를 거쳐 淸心臺를 그렸다. 청심대는 대화에서 진부로 가는 중간에 위치하며, 진부에서 정선으로 가는 405호 지방도로변에 있다. 현재는 영동 고속도로나 서울->강릉간 국도에서 다소 떨어져 있지만 당시에는 강릉으로 가는 大路였다.
청심대를 지나면 진부를 거쳐 오대산으로 들어간다. 월정사, 사고(史庫), 상원, 중대를 그리고 다시 큰길로 나와 횡계를 거쳐 대관령을 넘었다. 대관령 고개마루에서 좀 내려와 멀리 강릉을 조감하며 대관령을 그렸다. 강릉에서는 천연정, 구산서원, 경포대, 호해정을 그리고 난 후 남쪽 삼척으로 갔다. 삼척에서는 죽서루와 능파대, 두타산 소금강 무릉계와 용추폭포를 그렸다. 능파대는 현재는 추암, 촛대바위로 불리고 있다. 이어 계속 남쪽으로 울진 성류굴, 망양정, 평해 월송정을 그렸는데 이곳이 남쪽 끝이다.
다음부터는 다시 북상하여 강릉을 지나 양양으로 갔다. 낙산사, 관음굴을 그리고 설악산으로 들어가, 토왕폭, 계조굴(울산바위), 와선대, 비선대 등을 그렸다. 속초를 지나 간성(고성군 토성면)의 청간정을 그렸다(현재의 청간정은 위치가 달라짐). 더 북상하여 감호와 영랑호를 그렸는데 후자는 속초의 것과 이름이 같으니 위치가 다르다. 감호는 현재 동해안 최북단 통일전망대에서 구선봉(九仙峰) 아래 위치해 있다. 고성에서는 대호정, 해산정, 해금강, 삼일포를 그렸다. 이어 북상하여 통천 초입의 옹천을 그리고, 문암, 금란굴, 총석정, 환선정을 그렸다. 또 북상하여 흡곡에 이르러 안변호반에 있는 시중대를 그렸다.
다음 안변 가학정을 그렸는데 이곳이 김홍도의 여행 중 가장 북쪽 끝이다. 남하하여 철령을 넘어 회양에서 취병암과 맥판을 그렸다.(회양에서 강세황과 만남). 며칠 후 강세황 일행과 함께 내금강으로 들어가 장안사와 내금강 일대를 그렸는데, 노쇠한 강세황은 먼저 회양으로 돌아갔다. 김홍도 일행은 내금강에서 우선 명경대 골짜기를 그렸다.(명경대, 문탑, 백탑, 증명탑, 영원암). 다음 명연, 삼불암, 백화암 부도, 표훈사를 그리고 정양사로 올라가 헐성루에서 금강산을 조망한 모습을 그렸다. 다음 원통암 골짜기로 가서 원통암, 수미탑을 그리고 다시 내려와, 만폭동 골짜기를 그려 나갔다. (흑룡담망보덕암, 분설담, 진주담, 마하연, 묘길상 등).
내금강을 다 그린 후에는 외무재령을 넘어 동해안쪽 외금강으로 갔다. 유점사로 내려가는 길목에서 은선대에서 십이폭포를 바라보고 그렸다. 효운동과 선담, 유점사를 그렸다. 이어 외금강 유점사 계곡 문호인 백천교를 건너 고성쪽으로 나왔다가 발연과 그 위의 치폭도 그렸다. 다음 신계사 계곡으로 들어가 신계사, 옥류동, 비봉폭, 구룡연 등을 그렸다. 다시 나와 온정을 거쳐 만물초를 그리고 온정령을 넘어 회양으로 가서 강세황에게 그림들을 보여 주었다. 회양으로 가기 전 단발령에 올라 금강산과 작별하고 내려오면서 맥판을 그렸을 것이다. 단발령과 맥판은 회양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렸을 수도 있다. 한양으로의 귀로에 금성 피금정을 그리고, 금화, 영평을 거쳐 돌아왔다.
'해월의 뜨락 > 문화재 탐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효명세자와 정재 (1) | 2024.04.23 |
---|---|
경복궁 색채 (0) | 2022.05.19 |
한국화에서의 준법 (0) | 2019.09.10 |
한국화에서의 수지법 (0) | 2019.09.10 |
한국화에서의 준법의 종류 (0) | 2019.09.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