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의 뜨락/주변 이야기

마크 피터슨 교수의 한국이야기

채현병 2021. 7. 25. 10:38

한국인도 잘 모르는 한국 이야기-조선중기의 족보와 양자 제도에 대하여

빅whitehorse 추천 0 조회 100 18.04.11 17:0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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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글 본문내용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EBS 초대석 정관용입니다. 미국의 대학교에서 한국학을 연구하고 가르치시는 미국인 교수님이 한 분 계십니다. 이 분의 전공이 그야말로 조선 중기시대의 상속제도, 입양제도 이런걸 전공하셨다고 합니다. 참 독특하시죠. 이런 미국인 교수분 모시고 한국의 역사, 한국의 문화에 대해서 좀 새로운 시각을 얻어 보고자 오늘 초대석에 특별히 모셨습니다.


마크 피터슨 교수이신대요, 교수님, 어서 오십시오. , 감사합니다. (마크 피터슨/한국학자), 어마 어마합니다. 조선중기의 상속과 입양제 그거 아는 한국 사람도 거의 없을 걸요.


마크 피터슨/미국인 학자: 제가 원래 한국에 왔을 때 한국의 문화, 한국의 가족제도에 관심이 있어서, 아주 특별해요. 한국의 제도와 가족은 단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원인을 알고 싶어서 족보 같은 역사자료를 연구해서 한국중기, 조선중기에 연구를 많이 해왔습니다.


정관용/사회자: 대단하십니다. 한국말도 참 잘 하십니다.


마크: 못하는 말이 많습니다. 어색합니다.


정관용: 한국에 처음 오신건 언젭니까?


마크: 이제 51년 넘었습니다. 처음은 65년도 11월에 나왔습니다.


정관용: 1965?


마크: ,


정관용: 어떤 일로?


마크: 그때는 선교사로 나왔습니다. 선교할동했습니다. 그때 2년반 하다가 끝나서 미국가서 보통생활을 다시 하는데 나는 한국이란 걸 공부해야 되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정관용: 2년 반을 어디 계셨어요?


마크: 원래 서울에 있다가 나중에 전남 광주에 개척선교사로 갔습니다. 그게 첫번째 자랑스런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끝나고 서울로 다시 와서 몇 개월 동안 봉사했습니다.


정관용: 그때 한국 모습 떠오르세요?


마크: 그때 한국은 아주 가난했죠. 아주 가난했어요. 그때는 수입이 1인당 일년에 125불이었어요. 지금은 3만 넘었잖아요.


정관용: 아직 3만 못됐습니다. 가까이 가고 있어요.


마크: 근데 지금 한국은 부자나라 잖아요. 그때는 아주 가난했어요. 그런데, 그때 사람들의 인심이 좋았어요. 아주 사람들이 친절하고 우리 오는 거 환영도 하고, 그때와 지금도 친구가 많아요.


정관용: 그래도 그때만해도 파란 눈에다가 키가 크시고 코가 높으시고, 무서워들 하지 않았나요?


마크: 애들은 무서워하기도 하고, 장난도 쳤죠. 길에 다니면 어떤 아이들은 그 당시에 뱅코 뱅코라고 불렀어요. 그런 재미있는 일이 많았어요. 그때는 내 키가 193cm 인데 상당히 키가 큰 편이었습니다. 그때 나만큼 키 큰 사람이 한 명 있었어요. 그때 호텔 프런트 데스크에서 일한 사람이 한명 키가 컸어요. 택시 부르는 사람이, 난 그 사람 만날 때 서로 눈과 눈으로 만나고 서로 즐거웠습니다. (1965년 처음 한국을 찾은 푸른 눈의 미국인 청년 선교사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 남짓의 최빈국 그러나 따뜻한 인심과 정이 넘쳤던 나라, 미국에서 조선시대 족보를 뒤지며 한국유교문화를 재발견하다. “한국의 독자적인 유교는 남녀 평등한 가족제도였다. 조선의 유교사회를 긍정적으로 재조명한 한국학자, 마크 피터슨).


경력: 브리검영 대학교(BYU) 아시아학부 한국학 교수


미국 아시아학회 소속 한국학 위원회 회장


한국 풀브라이트 장학재단 이사장


학력: 하버드대학교 동아시아학 박사


하버드대학교 동아시아학 석사


브리검영 대학교 아시아학/인류학 학사


저서: 유교사회의 창출






정관용: 한국의 인심에 반했다, 한국사람의 인심,


마크: , 인심이, 난 한국 사람을 좋아해요. 인심이 좋다고 생각해요. 어떤 외국 사람은 여기 와서 한국 사람은 조금 냉정하다고 하지만, 나는 안 그래요. 사람이 알게 되면 모르는 사람 같으면 조금 냉정하지만, 아는 사이면 한국 사람은 마음이 따뜻해요.


정관용: 그 시절 2년반 계시면서 이미 한국의 가족제도가 매우 독특하구나 하는 느낌을 받으셨어요?


마크; 그 당시에 봤지요.


정관용: 어떤 점에서 독특합니까?


마크: 어떤 점이냐 하면은 애들을 교육시킬려고 하는 것, 한국의 교육열이 세계에서 제일 높잖아요. 그 당시는 아무 것도 못하니까 그런데 그때는 가능성이 있었어요. 앞으로 훌륭한 교육제도가 발전해 가지고 훌륭해져야겠다고 했는데, 그런데 지금은 염려해요. 어떤 가족은 교육을 위해 가족과 떨어지내고 있어요. (기러기 아빠 등 교육 때문에 가족이 해체되는 현실). 기러기 아빠, 바로 그거예요. 그거 난 환영 안해요. 그러니까 한국의 두 가지 가치관, 교육과 가족, 두 개 있는데, 오늘 날은 교육가치관이 가족 가치관보다 높아요. 그러면 안되고 가족이 제일 높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정관용: 그래서 2년반 선교사 생활 마치시고 미국가셔서 한국을 제대로 공부해야 되겠다.


마크: 이게 괜찮아요. 이 경험은 어떤 경험인가? 제가 학술면으로 깊이 알고 싶었어요. 그때 같이 나온 사람들이 동창생들이 법대가고 의대가고 했는데 사업도 했는데 나는 이걸 공부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정관용: 그래서 언제부터 공부를 시작한 거예요?


마크: 68년부터 원래 난 유타 주립대학 1학년에 갔다가 선교사로, 그런데 유타 주립대학교는 한국학, 동양학이 없었어요. 내가 동양학과가 있는 브리검영 대학교로 옮겼죠. (1968년에 동양학과가 있는 브리검영 대학교에서 공부시작). 석사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했습니다. 거기서 박사도 했으니까 (하버드 대학교에서 동아시아학 석, 박사 학위취득). 저는 한걸음 한걸음씩 한국학을 공부했어요. 언제가는 안되겠다고 염려도 했죠. 그래서, 진짜 직업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직업도 없이 난 이것만 합니다.


정관용: 한국학 교수가 평생 직업인 거죠. 하버드에서 석사, 박사하시면서, 한국의 현대사나 근대사를 연구하실 수도 있는데 조선중기, 그것도 족보를 통해서, 그건 참 접근하기 어렵잖아요?


마크: 그 이유는 아마 무엇보다도 제 은사님이 와그너 박사 때문에,


정관용: 에드워드 와그너 교수님? , , (에드워드 와그너 1924~2001: 하버드대학교 동아시아학 교수, 하버드 한국학 연구소의 창시자).


마크: 한국에 이름이 많이 알려져 있고,


정관용: 저도 오래 전에 그분 뵌 적이 있습니다.


마크: 그분은 누굴 만날 때 성을 듣고 어디 성씨냐고 항상 물어요.


정관용: 저한테도 그러셨어요. 제가 1992년에 가서 뵈었는데 정관용입니다. 그랬더니 어디 정씨예요?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저 청주 정가입니다. 그랬더니 그 성씨는 고려말에 누가 만든 성씨고 딱 아시더라구요. 청주 정가라는게 그렇게 흔한 정씨도 아닌데 그걸 아시더라구요.


마크: 아주 드문 정씨죠. 정씨는 보통 진주 정씨, 하동 정씨, 연일 정씨, 그런 정씬데 청주는 아주 드물어요.


정관용: 피터슨 교수님도 대단하신데요


마크: 와그너 박사와 비교할 수 없어요.


정관용: 그분 밑에서 공부하셨군요.


마크: 그분 밑에서 족보, 가족제도를 공부하는데 난 원래 학부에서 인류학을 했어요. 인류학 겸 아시아학 두 개를 했는데 하버드 가서 인류학 할려고 했는데 인류학은 재미가 없었어요. 내 입장에서 오히려 와그너 선생님 하는 일이 무척 재미있었어요. 잘 어울리고 그래서 거기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정관용: 그러면 한국말 배우기도 쉽지 않았을텐데 한자까지 알아야 하잖아요.


마크: 한자 알아야죠.


정관용: 그리고 족보는 족보 나름의 법칙이 어렵잖아요.


마크: 사실 족보는 양식이 간단하니까 쉬워요. 자주 보면 이름, 연호, 육십 회갑도 그 법을 배우면 조금 쉬워요. 실록은 어려워요. 왕조실록은 어려워요. (양식만 알면 알기 쉬운 족보에 비해 해독이 어려운 조선왕조실록). 많이 읽었습니다. 그거 진짜 어려운건데 왕조실록은 요새 번역되어 나왔으니까요. 나는 번역된 것 읽지는 못했고 원본을 읽었어요.


정관용: 한문으로?


마크: 그렇죠. 한문으로 그 당시는 한문 선생을 만났어요. 나갑주라는 분인데 그 사람은 사서삼경을 다 외울 수 있는 사람이에요. 지방에 계셨다가 서울에 오시고 제가 학생 때 만났는데 그분한테서 한 5년 동안 배웠어요.


정관용: 저보다 한자 실력이 훨씬 뛰어나실 것 같애요.


마크: 그렇지 않을 것 같은데---참 재미 있었어요. 실록 읽을 때는 실록은 왕하고 대화하는 거 잖아요. 가끔 이상한 표현이 나와요. 말이 안되는 표현인데 나갑수 선생님한테, 이게 무슨 뜻 이에요? , 그건 시경에 나오는 거예요. 시경, 서경, 춘추 어디에 있다고 금방 알아요.


정관용: 다 외우시니까


마크: 아주 대단한 선생님 이셨습니다.


정관용: 그래서 조선 중기시대에 상속 입양은 어떤 특징이 있었습니까?


마크: 왜 조선중기를 공부하게 되었느냐면 족보를 보니까. 족보는 연호로 깊이 갈수록 달라져요.


정관용: 어떻게 달라져요?


마크: 조선 중기서 부터는 남녀 똑같이 기록을 안했어요 (조선 중기까지는 족보에 여성도 등재). 조선후기에는 남자만으로 유명한 부계계통, 이건 나중에 기록한 거예요. 조선중기까지는 남녀평등하게 기록했고요. (조선중기까지 남녀가 평등했던 사회). 상속제도는 원래 족보를 보는데 나중에 상속제도를 보니까 상속문서는 꽤 있어요. 17세기 까지 있어요. (17세기 까지 존재했던 상속문서). 18세기는 없어졌어요. 왜냐하면 18세기에 들어오면 장자, 큰아들 한테 다 주는 거에요. 그러니 기록할 필요가 없지요. 그런데 17세기 후반대까지는 기록을 했어요. 예를 들면 제 가족이 남남녀녀라면 기록은 그대로 했어요. 그런데 어떤 집안이 녀녀남녀녀남 이면 난 순서대로 기록을 했어요. (경국대전(經國大典)-조선시대에 나라를 다스리는 기준이 된 기본법전. 육전중 형전(形典)에 따르면 남녀 균분(均分)상속을 규정하고 있음). 그런데 경국대전을 안바꾸고 습관만 바꾸었어요.


장관용: 경국대전이 조선초에 일종의 조선의 헌법처럼 만든 거잖아요. 거기에는 남녀가 평등하게 재산을 상속하라고 되어있었고 그게 17세기까지는 지켜졌다.


마크: 그렇죠. 그러다가 18세기에 들어가면서 17세기 말에 습관이 바뀌어졌어요. 그때부터는 유교사상을 따라가겠다 해가지고 장남한테 재산을 다 주고 그때부터 여자는 출가외인이 되는 거예요. (18세기부터 가부장제 유교사회로 변모). 17세기 1660, 1670년대까지는 남녀평등사회였습니다. 예를 들면, 유명한 이이 율곡 선생, 율곡선생은, 그의 분재기 (분재기(分財記)-자녀를 비롯한 가족에게 재산을 상속하거나 분배하여 준 문서)를 보면. 율곡선생이 7남매인데 남녀 똑같이 땅과 노비 재산을 나눠줘요 (율곡 이이의 형제자매들은 모두 평등하게 재산을 상속받음). 그런데 율곡선생의 어머니가 신사임당이잖아요. 신사임당의 분재기도 오죽헌에 가면 있습니다. 신사임당은 5자매중 둘째인데 분재기를 보면 5자매에게 똑같이 상속을 해주었습니다. 5 분지1 씩으로 (5자매였던 신사임당도 부모에게 재산을 균등하게 상속).


정관용: 신사임당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갖고 있던 재산을 딸들한테 골고루 나눠줬다.


마크: 그렇죠. 신사임당이 만약 이백년 후에 살았다면 재산을 못받고 조카를 하나 입양 해야 했고 다섯 자매는 모두 출가외인이 되었을 거예요. 그런데 신사임당이 지금 우리 오만원 짜리 지폐에 나오잖아요. 훌륭한 모범 여성 어머님이라고 하잖아요. 조선 후기 살았으면 여유있는 사람이 아니었을 거예요. (조선후기였다면 신사임당은 여유 있는 사람이 아니었을 거예요). 또 생각해 보니까 여유있는 여자 처자들 허난설헌, 황진이 같은 사람 모두 조선초기의 사람들이었어요. (허난설헌, 황진이 등은 모두 초선초, 중기의 여성). 여유있는 사람들로 공부 원하면 공부할 수 있었고 미술 원하면 미술 할 수 있었고,


정관용: 신사임당 어머님께서는 아들을 못낳으셨군요. 조선후기였으면 어디서 아들을 입양해서 재산을 거기다 다 주었을 것이고, 재산이 그렇다면 제사는 돌아가며 모셨습니까.


마크: 맞아요. 그것도 기록이 남아 있어요. 재산을 똑같이 했으니까요. 제사, 제사집행하는 것은 돌아가면서 책임을 지웠습니다. (조선중기까지 남녀 돌아가며 지냈던 제사).


정관용: 아들뿐 아니라 딸까지도요.


마크: 그래요, 딸까지도. 이것은 재밌어요. 미국사람으로서 이해가 가는데 미국서 명절 때 제사는 안지내지만 명절 때는 가족끼리 모였어요. 내가 어렸을 때 부활절에 이모집에서 모였어요. 또 크리스마스 때는 작은 아버지 집에서 모이고, 추수감사절 일 때는 고모 집에 모였어요. 이렇게 돌아가면서 모이 거예요. 한국이 옛날에 그렇게 했었을 거예요.


정관용: 온전히 미국식이군요.


마크: 그런데, 그게 조선후기 부터는 한국에는 큰집, 큰집을 따지게 됐습니다.


정관용: 지금 이 방송을 보시는 분들 가운데도 아마 처음 이런 얘기를 듣는 분이 많을 겁니다. 조선중기까지는 남녀가 평등했고 재산도 똑같이 상속받았고 제사는 돌아가며 모셨다. 그런데 그게 18세기 이후에 바뀌었다. 자 왜 바뀌었을까?


마크: 그 이유를 알기가 힘들지만 세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18세기 이후 남녀평등제도가 달라진 이유?). 첫번째 이유는 인구입니다. 18세기에 진입하면서 인구가 늘면서 한반도 땅에 여유가 없었어요. (조선후기 한국사회의 유교문화가 달라진 이유 1. 늘어난 인구). 그 전에는 땅의 여유가 있었어요. 땅이 있는데 오랫동안 안썼다가 가족이 늘어나서 거기서 마을 하나 만들었던 일이 있었어요. 이런 일이 있었어요. 17세기 후에 들어오면 인구문제가 하나 생기고 다른 나라도 인구문제 있을 때는 상속법을 바꾸는 일이 있어요. (다른 나라의 경우에도 인구문제로 상속법 변화). 어떤 나라는 평등하게 나눴다가 장남에게 주고 어떤 나라는 딸한테 주는 것도 있어요. 그런데 한국은 장남에게 주었어요.


정관용: 인구가 늘어나고 소위 말해서 새로 개척할 땅이 없어진 그런 상태에서 (늘어난 인구로 개척할 땅이 부족)


마크: 산으로 올라갔다가 바다로 내려갔다가 이렇게 여유가 없는 거예요. 그게 첫번째고, 두번째는 한반도에는 유교사상이 삼국시대에 들어왔는데 유명한 유학자들 최치원, 설총 같은 분들은 신라 사람인데 유교를 공부한 사람들인데 그런데 유교를 수입할 때 Korean style confucianism 한국식 유교로 수입을 했어요.


정관용: 유교를 한국식으로 가져왔다.


마크: 무슨 말이냐 하면 원래 주례 예기란 책에 보면 상속은 어디까지나 장남이 한다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그걸 무시했어요. 왜냐면 남녀평등해야 하니까요 (남녀 평등한 가족제도를 도입했던 한국식 유교). 제사를 남녀평등법으로 보면 그때 말로 윤행이란 말이 있어요. (윤행(輪行)-남녀, 재가(再家)한 자손 등 모든 자손이 차별없이 조상의 제사를 돌아가며 지내는 것). 윤행, 돌아가면서 하는 법이죠. 한국이 유일하게 했고, 중국은 안했거든요. 그런데 제사제도를 천년동안 신라시대 삼국시대부터 17세기까지는 한국식 유교로 진행돼 왔어요. 그런데 그 이후로는 율곡선생이 퇴계선생의 글을 읽어보니까 중국 유교는 장남을 우선시 하였어요. 고로 16세기는 유교를 철학으로 받아들였는데 17세기에 들어오면은 유교를 집행 한 거예요. (조선후기 한국사회의 유교문화가 달라진 이유 2. 정통유교의 정착).


정관용: 철학이 아니라 실행으로 장남 우선이라는 글자 그대로,


마크: 또 세번째 이유는 명나라가 망한 것에요. (조선 후기 한국 사회의 유교문화가 달라진 이유 3. 명나라의 멸망).


정관용: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로 바뀌었죠.


마크: 그래요. 명나라는 조선에 있어서는 형님이지요. 형님으로써 우리가 잘 따르고 존경하는 형님이었는데 형님이 죽었어요. 명나라가 없어졌어요. 그 대신 청나라가 들어왔는데 청나라는 야만인이에요. 오랑캐라고,


정관용: 오랑캐라고 그랬죠.


마크: 청나라는 문화에 있어서 한국보다 밑에 있는 나라였죠. 그때부터 한국에서 우리가 진짜 유교사상을 그대로 따라야 되겠다. 그러니까 늘어난 인구, 정통유교, 명나라 멸망 이 세가지 이유로 한국사회가 혁명적으로 달라졌죠. (혁명적으로 달라진 한국의 유교사회). 사고방식이 바뀌는 것은 혁명 이에요. 상속문서, 상속제도, 제사 집행하는 것, 아들 대우하는 것 (남아선호사상), 출가외인, 이런 것 또 결혼문제도 바꾸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한국엔 아직도 어원이 남아 있는데 장가 간다고, 보통 장가든다 하지만, 나는 장가간다 하는 소리를 해요. 왜냐면 시집 가는 것은 흔한데 조선 초기에 시집가는 여자도 있지만 장가가는 남자도 있습니다. (남자가 장가를 가기도 했던 조선 초기).


정관용: 그러니까 처가살이 하러 가는?


마크: , 처가살이라고 하는 소리지만 그때는 당연한 거였어요. 유명한 예가 몇 개 있습니다. 아까 율곡선생 이야기 했는데 율곡선생의 아버지가 서울 파주 사람이에요. (처가살이를 했던 율곡 이이의 아버지). 그런데 장가갈 때 강릉으로 갔습니다. 율곡선생이 어디서 태어났죠? 강릉 오죽헌


정관용: 강릉에서, 그러니까 파주 사람이 강릉처가에 가서 거기서 산 거구요. 자식 낳고,


마크: 또 하나 유명한 케이스가 양동, 유네스코가 인정한 마을, 양동마을 경주, 거기서도 이언적 선생이란, 유명한 학자가 계신데 (이언적(1491~1553)-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경상북도 경주출신, 본관은 여주). 그분의 아버지가 송씨집으로 장가갔어요. 또 송씨는 윤씨집으로 장가 갔고, 같은 양동마을에서. 그러니까 옛날에 장가가는 사람이 많이 있었어요. 이 관계로 제가 한국에 올 때 김씨가 많은데 다 같은 김씨가 아니에요. 본관에 따라 다르다고 배웠습니다.


정관용: 그렇죠.


마크: 그런데 본관에 계시는 사람 거의 없잖아요. (본고향에 사는 사람들이 드문 오늘날). 그렇지요,청주 정씨도.


정관용: 저와 같은 사람 본관에서 안살죠.


마크: 또 청주에 안살죠. 왜 고향을 떠나셨습니까? 한국의 부계계통으로 쭉 내려왔다면 여자는 출가외인으로 나가고 남자는 본관에 있는 거잖아요. 남자는 전부 본관을 떠났잖아요. ?


정관용: 전부 흩어져 살죠. 장가갔기 때문에? 그거군요. 재미있네요. (여건에 따라 장가를 가기도 시집을 가기도 했던 조선 초, 중기). 그것도 일종의 남녀 평등이었던 거죠.


마크: 그때는 결혼을 자유롭게 했어요. 신사임당 같은 여자는 여유가 있으니까 남자가 들어오는 거죠. 그런데 어느 집에서 남자가 여유가 있으면 여자가 남자한테로 가고, 그런데 남자도 가고 여자도 가고 한국 사람들이 김해 김씨는 김해를 떠났고 진주 이씨는 진주를 떠났고, 이렇게 여러 곳에 여러 성씨가 계신데 다 자기 본관에 안계시는 것은 그건 혼인이에요.


우리가 바라본 한국의 역사 끊임없는 외침과 분열된 당파싸움


당신들은 당신들의 역사를 모른다


지배층을 포섭해 평화적 교체를 이뤘던 신라, 고려 그리고 조선.


역사상 침략전쟁이라 부를만한 사건은 원나라의 침입과 임진왜란 뿐이라고 생각한다.”


수백년간 왕조를 유지한 안정과 평화의 나라, 조선


한국의 역사에 지극한 긍지를 가져라


정관용: 우리가 너무나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조선시대는 장남 우선이었고 남녀 불평등했고 가부장제가 있었고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조선 후기다. (조선후기부터 가부장제 사회?).


마크: 조선후기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는 오백년 이잖아요. 마지막 이백년은 그렇고 앞에 삼백년은 평등 상속법으로 살았어요. 평등상속, 평등결혼제도, 평등 마을, 이런거 모두 중간은 아니고 앞 삼백년과 이백년으로 나뉘었다고 생각됩니다.


정관용: 민주적인 가치로 볼때는 전반부 삼백년이 훨씬 나았군요.


마크: 그래요. 또한 민주주의 라고 생각하신다면 조선왕조가 상당히 신하들이 비평을 많이 하잖아요? 삼사, 삼사가 비평하는데 그것은 진짜 민주 같애요. (삼사(三司)-조선시대 언론을 담당한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을 가리키는 말).


정관용: 신하들의 임무는 왕을 비판하는 거죠. 그 당시에 그랬죠.


마크: 또 왕이 비평을 들어줘야 되는 거예요. 어느 정도 한국에는 민주주의가 아주 뿌리 깊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한국에는 민주주의의 깊은 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정관용: 이렇게 하나도 우리 국민들이 모르던 사실들을 연구를 통해 직접 밝혀내시는 거군요.


마크: 나는 그 관계로 한국의 교육제도에 좀 비평이 있습니다. 그것은 최근에 제가 책도 하나 쓰고 있습니다. 그 책의 제목은 아마 우물 속에서 나온 청개구리가 본 역사


정관용: 우물에서 나온 청개구리가 본 역사?


마크: , 왜냐면 한국에 우물 안에 청개구리 라는 표현이 있잖아요?


정관용: 그렇죠.


마크: 너무나 한국역사관이 우물 안의 청개구리 같애요. (“한국 역사관이 우물 안의 청개구리 같애요”). 어떤 점이 그러냐 하면은, 한국에 왕조는 오래갔는데요. 오백년,


정관용: 조선왕조 오백년은 세계역사에서도 상당히 긴 왕조였죠. (500여년의 긴 왕조를 유지했던 조선).


마크: 다른 나라를 우물 안에서 나온 청개구리로 본다면 다른 나라의 왕조는 짧아요. 이백년, 이백오십년, 길다면 삼백년 이에요. (다른 나라의 경우는 길어야 300년인 왕조). 일본 그렇고 중국 그렇고 유럽 그렇고 희랍도 그렇고 애굽도 그렇고 다 이백오십년 이에요. 그런데 한국서는 오백년이 갔어요. 그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는 상당히 안정하다고 생각해요. (비교적 안정적인 왕조를 유지했던 한국).


정관용: 안정적이다. 안정적이니까 오백년 왕조가 있는 거지요.


마크: 그런데 그것을 생각한다면 임진왜란 있잖아요. 임진왜란 때 3대국이 참여했잖아요.


정관용: 일본 명나라 조선


마크: 명나라가 상당한 군대를 보냈어요. 육군과 해군을 보냈는데, 그런데 일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히데요시 아들은 계속 정권을 유지하지 못했어요. 도쿠가와가 생겼잖아요. 명나라도 망했어요. 그러니까 명나라도 정권이 바뀌었죠. 한국은요 유지됐죠. (왕권이 교체된 명나라와 일본과 달리 조선은 왕조를 유지). 한국은 제일 많은 피해를 봤잖아요. 제일 많은 피해를 봤어도 왕조는 유지했다. 그때 조선은 선조였죠. 그 사람 신의주까지 도망갔잖아요. 백성들이 선조에게 돌맹이 던져잖아요. 그래도 돌아와서 다시 왕이 되고 또 양반은 그대로 양반이 됐고 노비는 그대로 노비됐습니다.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왕을 다시 받아들였던 백성들). 노비는 혼란을 통해서 해방된 거 아니었고,


정관용: 못했죠.


마크: 또한 조선왕조는 그렇고 고려왕조도 역시 오백년이에요. 원나라가 들어왔어도 유지를 했어요 (원나라의 침입에도 500년 가까이 왕조를 유지한 고려). 통일신라시대는 260년인데 삼국시대까지 신라는 천년을 유지했어요. 상당한 역사인데 그뿐만 아니라 왕조와 왕조가 무너지는 것은 제가 보기에는 상당히 평화스럽게 무너졌다고 생각해요. (비교적 평화적으로 교체되었던 역대 왕조들).


정관용: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오고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는 게 평화적이었다.


마크: 그보다도 가야에서부터 합시다. 왜냐하면 신라시대와 통일신라시대를 공부한다면 김유신이란 사람이 등장하잖아요. 김유신은 가야사람이에요. 원래 가야 사람인데 할아버지는 가야의 마지막 장군이었어요. 그런데 가야 사람뿐만 아니라 그의 누이가 김춘추한테 시집갔어요. 혼인했어요. 그런데 신라통치구조는 피라밋식이잖아요. 성골 진골 육두품 양민 천민 이렇게 아주 상당한 신분제 사회였죠. 그렇죠? 엄격한 신분사회 가운데 어떻게 최고위층 높은 자리에 가야 사람이 들어와요? 그렇지 않아요? 이거 굉장히 놀라운 사실이에요. 그러니까 가야가 무너질 때 완전히 멸망시킨게 아니고 포용한 거예요. (가야를 멸망시켰을 때 지배층을 포용했던 신라). 그러니까 그것은 한국역사에 왕조를 무너뜨리는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아주 특수한 거예요.


정관용: , 멸망시키되 포용해서 지배기반을 공고히 한다.


마크: 똑같이 신라가 무너질 때는 고려한테 갈 때는 17년 동안 후고구려가 신라를 보호했잖아요. 신라가 무너질 때는 경주 지배층 사람들이 개성으로 많이 올라갔잖아요. (고려가 세워졌을 때 개성으로 이주한 신라호족들). 그러니까 두개의 왕조이지만 연결된 왕조예요. 또 고려가 조선으로 옮길 때, 내가 학생 때 질문하고 싶은 것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갈 때 몇 사람이 죽었습니까? 그러니까 무지무지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많이 안죽었는지에 따라 무너지는 게 이해가 됩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될 때 내 답변은 두 사람 밖에 죽지 않았어요.


정관용: 그게 누구지요?


마크: 최영과 정몽주. 정몽주는 일부러 새로운 왕조를 지지할 수가 없잖아요.


정관용: 그러면 사실은 두명이 아니지요.


마크: 몇 사람 죽었지요. 근데 많은 사람은 아니었어요. 우왕 창왕도 죽었고, 제 포인트는 아주 무지 많은 사람이 죽지 않았다는 거고, (대학살 없이도 들어선 새로운 왕조).


정관용: 대학살 이런게 전혀 없었다.


마크: 없었어요.


마크: 왕조를 건국한 다음에 왕실에서 몇사람 죽었어요. 그런 일 있었는데 그런데 비교적으로 우물 밖에서 개구리가 보기에는 큰 싸움은 아니었고 평화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해요. 또 한가지 헤아릴 수 있는 것이 기간이에요.


정관용: 기간이 길다는 거요.


마크: 왕조는 길었지만 왕조에서 왕조로 넘어가는 기간은 아주 짧았어요. 이성계가 개성에 들어와 정권을 잡았을 때는 하루 오후에 잡았어요. (아주 짧은 시간에 정권을 잡았던 이성계).


정관용: 한방에 그냥,


마크: 그게 아주 특수한 거예요.


정관용: 보통 다른 나라에서는 심각하게 오랜 내전을 겪지요.


마크: 전쟁을 몇 년을 또는 몇십년을 싸우는 나라가 있어요. 그러니까 내 눈에 한국은 아주 평화스러운 나라였다. (“한국은 아주 평화스러운 나라다”). 이것은 일반 한국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죠. 왜냐하면 20세기에는 싸움이 많았죠. 그런데 역사를 길게 전체를 볼다면 우리는 현재를 떠나야 돼요.


정관용: 알겠습니다.


마크: 그러니까 우리 한국역사는 안정하고 평화스러웠다는 몇가지 증거도 있습니다. 하나는 노비제도입니다. 한국은 노비제도가 세계적으로 우물 밖으로 나온 청개구리로 본다면 다른 나라에 비해서 노비제도가 있다 없어집니다. 한국에서는 노비제도가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일제시대까지는 유지돼 왔습니다. (신라시대부터 조선말까지 유지되었던 노비제도). 왜 노비같은 하층사람들 해방을 못시키느냐 하면 사회혼란이 없어서 그래요. (큰 혼란이 없었기에 노비제도의 유지가 가능했다고 생각).


정관용: 그만큼 안정적이었다. 임진왜란 같은 전쟁을 겪었으면서도 불구하고 노비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왕조를 뒤엎을 만큼의 혼란은 없었다. 그렇게 보는 거지요?


마크: 한국에 혼란이란 임진왜란이 있었지만 그게 충분한 혼란은 아니었어요.


정관용: 그러니까 가야부터 시작해서 조선까지 보니까 진짜 한국의 왕조는 세계 평균보다도 매우 길었다. 그리고 왕조에서 왕조로의 교체는 포용적이었고 심각하고 오랜 기간의 갈등은 없었다. 그런 면에선 매우 안정적이었다. 이거는 일반 우리 국민들이 알고 있는 거와 너무 다른데요. 우리는 끊임없는 외침에 시달려왔고 내부적으로는 끊임없는 당파싸움으로 분열돼 왔다 라는 인식하고는 반대인데요.


마크: 그것도 제 의견하고 좀 달라요. 저는 한국서 20세기에 혼란이 많다는 거 먼저 일제부터 시작했고 분단됐고 전쟁이 일어났고 계속 분단된다는 것은 한국사람이 20세기에는 어쩔 수 없이 희생자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어요. (일제 강점기와 분단을 겪었던 20세기의 한국). 또한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소리가 20세기 소리예요. 전에는 그런 소리가 없었을 거예요. 또한 21세기에 들어와서 그런 소리가 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한국 사람 새우라고 생각해요? 아니죠. 그러니까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역사를 써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20세기의 혼란을 떠나서 한국의 역사를 전체를 본다면 평화스런 역사라고 생각해요.


정관용: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는 외침에 시달려왔고 내부적으로는 당파만 했고 이런 것은 사실, 일제가 심어 놓은 식민사관이 영향을 미친 거죠.


마크: 그런 거 있어요. 틀림없이 그런 게 있어요. 또한 침략했다는 것이 내가 보기에는 큰 침략, 두 개 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임진왜란 하고 몽고 원나라의 침입 (“큰 침략은 임진왜란과 원나라 침입 박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청나라 병자호란 때 그때는 완전히 다른 침략입니다. 그때는 청나라 군대가 들어왔다가 왕의 항복 받고 떠났습니다. 임진왜란과 몽고 침입 때는 많은 사람 죽이고 그때 침략한 군인들 코 하나 갖고 있으면 은 20개 돈으로 받았어요. 그런데 청나라는 안 그랬어요. 항복받고 연합하자는거 중국에 갈테니까 그거 완전히 다른 침략이라고 생각해요. 침략이라는 사고방식이 옛날에 개인 학자 교수 한 사람아니고 집에서 공부하는 사람 한번 만났는데 그 사람은 침략의 전문가입니다. 모든 책에 따져 보고 실록과 문집 여러책에 보니까 침략이 9천 몇백번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사고방식이 온전히 피해자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정관용: 다시 말하면 여진족이 잠깐 동안 왔다갔다 한 것도 그냥 침략으로 본다?


마크: 저는 작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임진왜란과 몽고 침입 때는 수백만명이 죽었어요. 그만큼 죽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여진이나 해변가에 왜구들이 출몰한 거 배 한 척이 들어 와서 쌀 한가마 돼지 한마리 훔쳐간 것이 이건 침략이 아니에요. (단순한 도적질은 침략으로 보기 어렵다고 생각).


정관용: , ,


마크: 그러니까 질에 따라 진짜 침략, 작은 침략, 침략아닌 침략이 있다구요. 진짜 침략은 두개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그런 피해의식은 한국사람으로 또 자존심 상하죠. 우린 새우가 아니다. (역사에 대한 피해의식을 탈피했으면 하는 바람).


정관용: 그리고 역사적으로 아니었다. 피해자로 계속 살았던 건 전혀 아니다. 새우가 아니었다.


마크: 그래요. 한반도는 오래 안정적이었고 평화스러웠다는 사실이 한국 책에 기록되고 한국역사에서 읽었으면 좋겠어요.


정관용: 그래야지요.


마크: 내가 그거 주장하는 거예요. 재미있는 일 하나 말할 게요. 제가 가끔 미국 내에 학자들 미국의 교과서 쓰는 사람들 세계 역사책 쓰는 사람들을 데리고 한국에 대해서 좀 더 배울려고 답사 나옵니다. 미국 책에 한국에 대해서 왜곡된 내용들이 많아서 고칠려고 애를 좀 썼습니다. (미국 교과서의 왜곡된 한국역사를 수정).


정관용: 그럼 미국 교과서 내용을 바꾸는 그런 역할을 하신 거예요


마크: 한 이십년 동안 했었습니다.


정관용: 실제로 많이 바뀌었습니까


마크: 많이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왜곡된 것 보다는 양이 너무 부족한 거예요.


정관용: 한국을 몇 페이지 정도나?


마크: 세계사를 보면 어느 책에 한 페이지 내지 두 페이지 밖에 안되는 책이 있어요. 우리가 애를 써서, 예를 들어, 17페이지 내지 20페이지 정도 나왔습니다. 한국에 대해서 좀 더 길게 쓰는 관심 있습니다. (미미했던 한국역사 분량을 20 페이지 정도까지 늘림).


정관용: 저희가 할 일을 교수님이 다 해주고 계시는 군요.


마크: 저도 해야 할 일인데—한번 학자들 데리고 경주에 갔었어요. 경주 왕릉 앞에서 천마총에 대해서 말씀하는 거 있잖아요. (미국 역사학자들과 경주 왕릉 답사를 했던 일화). 한 고고학자가 질문했습니다. 이 무덤은 언제 도굴당했습니까? (무덤이 언제 도굴됐는지 물었던 한 미국인 동료학자). 아주 당연한 질문이잖아요. 그 분은 중동에서 일했던 사람이고 중동에는 도굴 안당한 무덤이 없어요. 그런데 한국은 안그렇거든요. 한국에는 고고학자들이 연구할 때는 모두 금 왕관 다 발견해요. 실제 있는 거예요. 훔쳐간 거 아니고.


정관용: 도굴을 당한 고분이 몇개 없죠.


마크: 그 학자가 질문하기를 언제 도굴당했냐. 우리는 도굴당한 일이 거의 없습니다. 안믿습니다. 그래요. 무덤이라는 거는 도굴을 당하는 거예요. 도굴은 안당했습니다. 연구할 때 왕관 그대로 있잖아요. 그 사람이 놀라는 거예요. 제가 이미 한국역사는 안전한 역사라고 발표했으니까 그 사람이 날 보고 피터슨 교수의 말이 맞구나 하고 지지하는 겁니다. (한국이 평화로운 나라라는 의견에 동의했던 동료). 증거가 있구나. 한국에서는 그렇게 안 보죠?


정관용: 우리는 신라 고분무덤을 보면서 저거는 도굴도 안당했을 뿐아니라 연구목적으로도 아직 손을 안댔다. 몇 개만 손댔고 그대로 우리 갖고 있다. 이런걸 알고는 있는데 그게 다른 나라에 비하면 대단한 것이다 라는 건 몰랐던 거지요.


마크: 그래요. 그것도 조상을 존경하는 의미지요.


정관용: 왕조 역사로 봐서 다른 왕조역사 보다는 분명히 안정적이고 평화로웠다. 이걸 우리가 내부 당파싸움만 했다든지 외침만 당했다든지 이렇게 이야기 하면 안된다.


마크: 당파 싸움은 다른 나라도 당연히 해요. 다 있는 거예요. 한국에 하나도 특수한 것이 없어요.


정관용: 알겠습니다. , 교수님한테 한국민의 민족적 자긍심을 미국 교수님한테 이렇게 일깨움을 배울 줄이야 제가 깜짝 놀라고 있구요. 게다가 미국 교과서 수정까지 하신다니까 제가 더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드려야 될 것 같고,


마크: 감사합니다. 요새, 지금 미국서 하는 일이 시조관계 일을 해요. (현재 미국 학교에 한국 시조를 알리는 활동중). 한국시조, 시조는 한국의 아주 특수한 문화를 가지는 시의 양식이라고 생각되는데 미국서는 이미 애들이 모두 하이쿠를 배워요. (하이쿠-행마다 5-7-5 17()으로 이루어진 일본 고유의 단시형).


정관용: 하이쿠? 그건 일본식?


마크: 맞아요. 미국 사람들은 다 하이쿠를 알아요. 옛날에는 고등학교 때 공부했는데 지금은 3, 4학년 때부터 공부해요.


정관용: 거기서 하이쿠를 배워요?


마크: 미국에서 우리는 여러 사람들에게 운동을 해요. 시조도 합시다.


정관용: 한국시조도 미국 아이들에게 가르칩시다?


마크: 미국 아이들 저 멀리 일본시를 배웠다가 바로 그 옆에 나라 한국도 시있다. 이것은 시조다. 이런 운동합니다. 나하고 하버드 대학교 데이몬 텐 교수하고, 사립기관인데 세종문화센터라고 있어요. 거기서 시조시합합니다. 학생들을 위한 시조시합이에요. (미국 고등학생들을 중심으로 한국시조글짓기 대회개최). 그런데 문제는 한국서 시조는 대상으로만 공부해요. 옛날 것이다. 제가 어떤 한국친구에게 시조를 좋아한다고 하니까, 옛날에 시조를 썼다 라는 사고방식인데 지금 옛날에 쓰는 사고방식이 아니고 현재에 쓰는 거예요. 미국말로 쓰는 거예요. (시조 배우는 것을 넘어 직접 써보는 교육도 필요).


정관용: 시조의 형식을 가지고 오늘날 우리 말로 새롭게 창작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씀인 거죠. 옛날 시조를 달달달 외우는 것 말고,


마크: 옛날 시조를 배우고 어떤 양식인지, 이몸이 죽고 죽어~~, 청산리 벽계수야~~이렇게 공부를 하고 그 방법을 배우고 나서 자기가 창작해서 시조를 씁니다.


정관용: 그런 시조형식을 가지고 창작하도록 연습시키는 교육이 왜 중요합니까?


마크: 왜 중요하냐면 상당히 창조력이 생기는 거예요. (창조력을 키워주는 시조창작). 생각해 보세요 한국서는 시조를 옛날 것으로만 배웠어요. 그리고 창조를 안해요. 창조력이 발달할 수 없지요. 창조할 기회를 잃는 거예요. 한국 학교에서 시조를 안쓰죠. 우리 교실에서 일년에 한 오십명 학생들이 두개 정도 시조를 써야 되는데 우리 교실에서 일년에 한 백개 씁니다. 우리 교실에서 쓰는 시조가 온 한국에서 쓰는 시조보다도 많아요.


정관용: 부끄러운데요.


마크: 부끄러워 마시고 대신에 한국의 교육제도를 개선해서 각 학교에서 아이들의 시조시합을 합시다.


정관용: 시조경진대회 이런 거?


마크: 좋지요. 우리 학교에서 그런 거 해요. 재미있어요. 그럼 아주 재미있는 시조가 나와요. 시조의 양식이 짧지만 아주 의미가 깊을 수가 있습니다.


정관용: 기승전결이 있는 그런 걸, 교수님, 한국 이름 있으시죠?


마크: 옛날에 한국이름 하나 작명했죠. 영어 이름이 피터슨 이잖아요. 피터슨 발음을 딴 한국이름 ‘배도선’으로


정관용: 배도선


마크: 길 도 착할 선


정관용: 어디 배씨신가요?


마크: 나주 배가 라고 합니다.


정관용: 나주는 배가 많이 나는 고장이라


마크: 흔히 하는 농담이죠


정관용: 나주 배씨 배도선 교수님, 오늘 귀한 말씀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EBS 초대석 8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 이야기-한국학자 마크 피터슨”에서 정리)






조선왕조 역사는 오백년, 오백년은 전기 삼백년과 후기 이백년으로 나뉩니다. 전기 삼백년은 평등 상속법으로 살았어요. 남녀평등상속, 윤행제사, 평등결혼제도, 그런데 후기 이백년은 상속과 제사법에 있어서 장남 우선, 출가외인, 남녀가 불평등했고 가부장제로 살았다. 조선왕조기간 오백년 전체가 장남 우선, 남아선호 가부장제, 남녀 불평등이 아니었다. 이런 모든 것들은 다 조선 후기 이백년 때 습관이었다. 고로, 민주적인 가치로 볼 때는 전반부 삼백년이 훨씬 나았다.


경국대전은 조선초에 조선의 헌법이었다. 거기에는 남녀가 평등하게 재산을 상속하라고 되어있었고 그게 17세기까지는 지켜졌다. 그러다가 18세기에 들어가면서 17세기 말에 습관이 바뀌어졌다. 그때부터는 유교사상을 따라가겠다 해가지고 장남한테 재산을 다 주고 그때부터 여자는 출가외인이 되었다. 18세기부터 가부장제 유교사회로 변모. 17세기 1660, 1670년대까지는 남녀평등사회였다. 예를 들면, 유명한 이이 율곡 선생, 율곡선생은, 그의 분재기 (분재기(分財記)-자녀를 비롯한 가족에게 재산을 상속하거나 분배하여 준 문서)를 보면. 율곡선생이 7남매인데 남녀 똑같이 땅과 노비 재산을 나눠줬다. (율곡 이이의 형제자매들은 모두 평등하게 재산을 상속받음). 그런데 율곡선생의 어머니가 신사임당이다. 신사임당의 분재기도 오죽헌에 가면 있다. 신사임당은 5자매중 둘째인데 분재기를 보면 5자매에게 똑같이 상속을 해주었다. 5 분지1 씩으로 (5자매였던 신사임당도 부모에게 재산을 균등하게 상속). 신사임당의 부모는 갖고 있던 재산을 다섯 딸들한테 골고루 나눠줬다.


지금 이 글을 보시는 분들 가운데도 아마 위 얘기를 처음 듣는 분이 많을 겁니다. 조선중기까지는 남녀가 평등했고 재산을 아들 딸에게 균등하게 상속했고 제사는 자식들이 돌아가며 모셨다(윤행). 그런데, 그게 18세기 이후에 바뀌었다. 왜 바뀌었을까요?


그 이유가 세가지인데 이로 인하여 한국사회가 혁명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해요. 첫번째이유는, 소위 말해서 인구가 늘어나면서 새로 개척할 땅이 없어진 상태였다. 두번째 이유는 한반도에 유교사상이 삼국시대에 들어왔는데 유교를 수입할 때 한국식 유교(Korean style Confucianism)로 수입을 했다. 유교상속은 어디까지나 장남우선으로 하는데 한국에서는 그걸 무시하고 남녀평등으로 했다. (남녀 평등한 가족제도를 도입했던 한국식 유교). 조상의 제사는 돌아가며 지냈다. 한국이 유일했고, 중국은 안했다. 그런 제사제도를 삼국시대부터 17세기까지 천년동안 한국식 유교로 진행해 왔다. 그런데 그 이후로 율곡선생이 퇴계선생의 글을 읽어보니까 중국 유교는 장남을 우선시 하였다. 16세기는 유교를 철학으로 받아들였는데 17세기에 들어오면서 유교를 집행했다. (조선후기 정통유교의 정착). 세번째 이유는, 명나라의 멸망이다. 중국대륙은 명이 청으로 바뀌었다. 조선에 있어서 명나라는 형님으로 존경했는데 형님이 죽었다. 그 대신 청나라가 들어왔는데 오랑캐였다. 청나라는 문화에 있어서 한국보다 밑에 있었다. 그 때부터 조선에서 우리가 진짜 유교사상을 그대로 따라야 되겠다.






한국의 역사는 안정되고 평화스러웠다. 그 실례로, 한국의 노비제도는 가야부터 시작해서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 일제시대까지 유지돼 왔다. 노비같은 하층민 해방을 왜 못시켰느냐 하면 큰 혼란이 없었기에 노비제도의 유지가 가능했다. 임진왜란 같은 전쟁을 겪었으면서도 불구하고 노비들이 왕조를 뒤엎을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혼란이란 임진왜란이 있었지만 그게 충분한 혼란은 아니었다. 진짜 한국의 왕조는 세계 평균보다도 매우 길었다. 왕조에서 왕조로의 교체는 포용적이었고 심각하게 오랜 기간 갈등이 없었다. 그런 면에서 매우 안정적이었다. 이런 논리는 우리는 끊임없는 외침에 시달려왔고 내부적으로는 끊임없는 당파싸움으로 분열돼 왔다라는 기존의 우리의 역사인식하고는 반대이다. 우리 국민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과는 너무 다르다.


한국에서 20세기에 혼란이 많았다는 얘기는 먼저 일제 때부터 시작됐고 20세기에 한국이 분단됐고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은 어쩔 수 없다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소리는 20세기 소리이다. 전에는 그런 소리가 없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는 그런 소리 하지 말아야 된다. 지금 한국 사람은 새우가 아니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역사를 써야 한다. 한국의 역사 전체를 본다면 평화스런 역사였다.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는 외침에 시달려왔고 내부적으로는 당파싸움만 했고 이런 것은 사실 일제가 심어 놓은 식민사관의 영향이다.


한국역사에서 침략당했다는 것은 큰 침략, 두 개 밖에 없다. 임진왜란 하고 몽고 원나라의 침입이다 .청나라 병자호란 때는 완전히 다른 침략이었다. 그때는 청나라 군대가 들어왔다가 왕의 항복 받고는 바로 떠났다. 임진왜란과 몽고 침입 때는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런데 청나라 때는 안 그랬다. 항복받고 연합하고 바로 출병했다. 옛날에 침략을 집에서 책가지고 공부하는 사람을 한번 만났다. 침략이 9천 몇백번이라고 했다. 그 사람의 사고방식은 온전히 피해자 의식이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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