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의 시조마루/옛시조

오우가(五友歌)

채현병 2011. 1. 13. 11:47

  

    오우가(五友歌)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내 벗이 몇이냐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에 달(月)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 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구름 빛이 좋다 하나 검기를 자로 한다
바람 소리 맑다 하나 그칠 적이 하노매라
좋고도 그칠 뉘 없기는 물뿐인가 하노라
 

 

qnrgksrkd1.jpg 

한강을 향해 유유히 흐르는 북한강의 여유롭고 그침없는 물줄기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 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는 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치 아닐 손 바위뿐인가 하노라
 

 

 

b[3].jpg

설악산 공룡능선. 웅장하면서도 정감어린 바위山群

 

 

더우면 꽃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느냐
구천(九泉)에 뿌리 곧은 줄을 그로 하여 아노라
 

 

c-1[3].jpg

하남시 검단산의 소나무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시기며 속은 어이 비었느냐
저렇게 사시(四時)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d-2[3].jpg

부산 범어사 대나무숲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추니
밤중의 광명이 너만한 이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아니 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e[1].jpg

지리산 10景중의 벽소령 명월(明月)

 

 

 

[이해와 감상] 
윤선도(尹善道)가 56세 때 해남 금쇄동(金鎖洞)에 은거할 무렵에 지은 《산중신곡(山中新曲)》속에 들어 있는
6수의 시조로, 수(水)·석(石)·송(松)·죽(竹)·월(月)을 다섯 벗으로 삼아 서시(序詩) 다음에
각각 그 자연물들의 특질을 들어 자신의 자연애(自然愛)와 관조를 표백하였다.
이는 고산 문학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것으로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어 시조를 절묘한
경지로 이끈 백미편(白眉篇)이다.


[서시]
'오우가(五友歌)'의 서시로서, 초, 중장은 문답식으로 다섯 벗을 나열하였다.
자연과 벗이 된 청초하고 순결한 자연관을 고유어의 조탁(彫琢)으로 잘 표현하였다.
작자의 동양적 체관(諦觀)을 발견할 수 있다.


[水]
'오우가(五友歌)' 중 물의 영원성을 기린 노래이다.
구름과 바람은 가변적(可變的)이요 순간적(瞬間的)이라 한다면,
물은 영구적(永久的)이다. 물은 구름이나 바람과 달리 깨끗하고 항시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고산(孤山)이 좋아하는 자연이 되고 있다. 

 

qnrgksrkd11.jpg


[石]
'오우가(五友歌)' 중 바위의 변하지 않는 생명성을 찬양한 노래이다.
꽃이나 풀이 가변적이고 세속적이라 한다면, 바위는 영구적이요 철학적이다.
꽃이나 풀이 부귀 영화의 상징이라면, 바위는 초연(超然)하고 달관한 군자의 모습이다. 

 

b-1[2].jpg

 

[松]
'오우가(五友歌)' 중 소나무의 변함없는 푸름에서 꿋꿋한 절개를 느껴 찬양한 노래이다.
소나무는 역경에서도 불변하는 충신 열사(烈士)의 상징으로 여긴다.
여기에서도 절의의 상으로서의 소나무를 칭송하면서, 자신의 강직한 고절(高節)을 나타내었다.

 

c-11.jpg

 

[竹]
'오우가(五友歌)' 중 대나무의 푸름을 찬양하여, 아울러 그가 상징하는 절개를 나타낸 것이다.
대나무는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 옛 선비들의 굳은 절개를 상징하는 상징물로서 사랑을 받아온 것이다

 

d-2[4].jpg


[月]
'오우가(五友歌)' 중 달(月)을 노래한 것인데, 달이란 작은 존재로 장공(長空)에 홀로 떠서 세상만 비출 뿐
인간의 미, 추, 선, 악을 꼬집지도 헐뜯지도 않아 좋다고 했다. 이는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扈從)치 
않았다고 해서 반대파들로부터 논척을 받고 영덕에 유배되기까지 한 고산(孤山)으로서는 말없이 장공에 떠서
보고도 말 아니하고 오직 세상만 골고루 비춰 주는 달만이 벗이라고 할 만하다.

 

e[2].jpg

 

 

*윤선도 [, 1587~1671]

본관 해남(). 자 약이(). 호 고산() ·해옹(). 시호 충헌(). 1612년(광해군 4) 진사가 되고, 1616년 성균관 유생으로 권신() 이이첨() 등의 횡포를 상소했다가 함경도 경원() 등지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의금부도사()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 여러 관직에 임명된 것을 모두 사퇴했다. 1628년 별시문과() 초시()에 장원, 왕자사부()가 되어 봉림대군(:)을 보도()했다. 1629년 형조정랑() 등을 거쳐 1632년 한성부서윤()을 지내고 1633년 증광문과()에 급제, 문학()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 하여 영덕()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은거했다.

1652년(효종 3) 왕명으로 복직, 예조참의 등에 이르렀으나 서인(西)의 중상으로 사직했다가 1657년 중추부첨지사()에 복직되었다. 1658년 동부승지() 때 남인() 정개청()의 서원() 철폐를 놓고 서인 송시열() 등과 논쟁, 탄핵을 받고 삭직당했다. 1659년 남인의 거두로서 효종의 장지문제와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를 가지고 서인의 세력을 꺾으려다가 실패, 삼수()에 유배당하였다.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으나 경사()에 해박하고 의약 ·복서() ·음양 ·지리에도 통하였으며, 특히 시조(調)에 더욱 뛰어났다. 그의 작품은 한국어에 새로운 뜻을 창조하였으며 시조는 정철()의 가사()와 더불어 조선시가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사후인 1675년(숙종 1) 남인의 집권으로 신원()되어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고산유고(稿)》가 있다. (출처:네이버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