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음악>
고려 초기에는 신라시대의 향가 형식이 그대로 남아 있은 듯하다.
그러나 중기로 접어들면서 향가는 차츰 장가(長歌)의 형식으로 발전하여 지식계급에서는 향가에서 변모한 경기체가(景幾體歌)가, 일반 민중 사이에서는 민요가 유행하였다.
오늘날 남아 있는 것으로는 《동동(動動)》 《서경별곡(西京別曲)》《쌍화점(雙花店)》 《청산별곡(靑山別曲)》 《처용가(處容歌)》 《만전춘(滿殿春)》 《이상곡(履霜曲)》 《정석가(鄭石歌)》 《사모곡(思母曲)》 《정읍사(井邑詞)》《가시리》 《정과정곡(鄭瓜亭曲)》 《한림별곡(翰林別曲)》 《관동별곡(關東別曲)》 《죽계별곡(竹溪別曲)》 등으로 그 가운데에 한문조의 가사(歌詞)도 있다. 시조는 중기 이후에 나타났다.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은 우탁(禹倬)·이조년(李兆年)·이존오(李存吾)·최영(崔瑩)·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이방원(李芳遠) 등외 시조이다.
아래의 시조는 우리나라에 전해오는 시조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이며, 시조문학의 백미로 꼽히고 있다.
<시조 1>
春山에 눈 녹인 바람 건 듯 불고 간데업네
적은 덧 비러다가 뿌리고자 마리우희
귀미테 해 묵은 서리를 녹여볼가 하노라
<시조 2>
한 손에 막대 들고, 또 한 손에 가시를 쥐어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렷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주럼길로 오매라
: 우탁 '탄로가'
춘산(春山)에 눈 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 데 업다.
져근 듯 비러다가 마리 우희 불니고져
귀 밋에 해 묵은 서리를 녹여 볼가 하노라.
*주제 : 늙음에 대한 탄식과 그 극복 의지
---참고 우탁 시조 '탄로가' 중 나머지 한 수 <한 손에 막대 잡고 ->
☞ 주제 : 탄로(嘆老), 늙음을 한탄함
☞시어 풀이 * 춘산 : 봄철의 산으로 '청춘'을 비유 * 건듯 : 얼핏, 문득 * 져근듯 : 잠깐. 잠시 동안 * 해묵은 서리 : 백발 (춘산의 대조) * 불리고쟈 : 불게 하고 싶구나
☞ 배경 및 해설 화자는 봄산의 눈을 녹인 따뜻한 바람을 잠깐 동안 빌려다가 자신의 머리 위에 불 게 하여 해묵은 서리를 녹이고 싶다고 한다.
이는 자신의 흰 머리를 다시 검게 해서 젊음을 되찾고 싶은 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춘산'은 청춘, '해묵은 서리'는 화자의 백발을 의미한다.
이것은 솔직하면서도 속되지 않은 기발한 표현으로, 이 시조에 참신한 맛을 더해주고 있다.
늙어감을 한탄하고 있지만 그런 속에서도 인생을 달관한 여유가 느껴진다. 흔히 고려 속요에서 볼 수 있는 감상적, 애상적 정조와는 달리 인생의 허무 의식을 극복하고자 하는 긍정적 자세가 엿보이는 작품이다.
한손에 막대 잡고 - 우탁 <탄로가(歎盧歌)>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길 가시로 막고 오는백발(白髮) 막대로 치려터니
백발이 제 몬져 알고 즈럼길로 오더라. ☞ 주제 : 늙어가는 것에 대한 한탄
☞시어 풀이 * 치려터니 : 치려 했더니 * 제 : 자기가 * 몬져 : 먼저 * 즈럼길 : 지름길, 샛길 ☞ 배경 및 해설 세월이 흘러 어쩔 수 없이 늙어가는 것을 '막대기'와 '가시덩굴'로 막으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읊고 있다. '
백발'과 '늙음'을 의인화하여 직접 사람 자신의 힘으로 막으려는 방법 구상이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고,
초장의 '막대'와 '가시'는 중장의 '늙 길', '백발'과 적절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사람이 태어나서 늙어간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인데,
그 자연의 섭리를 막대와 가시로 막으려는 모습이 무척 익살스럽다.
이 작품은 늙음을 한탄하는 탄로가(歎盧歌)로서, 시적 표현이 매우 참신하여 감각적이다.
늙음을 한탄하는 소박한 표현이 인간의 능력으로 제어할 수 없는 천리(天理)를 달관한 경지에 이르고 있다.
우탁(1262∼1342)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은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춘산에 눈 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 데 없네.
저근듯 빌어다가 머리우에 불리우고자
귀 밑에 해묵은 서리를 녹여 볼까 하노라.
국어 교과서에서 낯이 익은 우탁의 시조 2수이다.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한 것인데 서글픔이 느껴지는게 아니라 미소를 그치지 않게 하는 재치가 있어 재미 있다.
이것은 인생 달관에서나 우러날 수 있는 도인다운 여유일 것이다.
1308년 충선왕이 즉위한 해에 우탁은 감찰규정이란 벼슬에 올랐다.
이 관직은 정치를 비판하고 모든 관리들을 자세히 관찰하여 억울한 것을 바로잡아 주는 일을 맡아하는 것인데
곧고 정직한 성품에 높은 학문을 갖춘 이에게 주어지는 것이 통례 였다.
마침 이때 충선왕이 부왕(왕의 아버지)의 후궁인 숙창원비와 가깝게 지내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니까 왕이 자기의 아버지의 둘째 부인되는 사람을 가까이한 것이었다.
이에 우탁이 백의 차림으로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짊어지고 결연히 대궐로 들어가 극력으로 간하였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며 상소를 읽어 올리는 신하가 상소를 펴 들고는 감히 읽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걸 보자 우탁이 낯빛을 엄히 보이며,
"경이 왕을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로서 왕의 그릇된 것을 바로잡지 못하고 악으로 인도하여 이에 이르니 경은 그 죄를 아느냐?"
하고 소리를 질러 꾸짖으니 좌우에 있던 대신들이 크게 놀라고 왕도 부끄러워하는 빛을 보였다.
그 뒤 우탁은 훌훌히 관직을 떠나 향리로 내려가 학문에 정진하였는
<청구영언>
탄로가(嘆老歌) 평시조/단(형)시조.
춘산에...-'춘산'과 '해묵은 서리'를 각각 '젊음'과 '백발'에 비유했다. 즉, 봄산에 부는 봄바람(젊음-봄을 가져다 주는 바람)을 머리 위에 불게 하여, 그 바람이 산에 쌓인 눈(지난 세월)을 녹여 봄을 부르듯 자신의 젊음을 되찾고 싶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탄로가에 포함되지만 늙어짐에 대해 단순히, 체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긍정적이며 일면, 달관적인(젊고 늙음이라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에 대해 의지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유까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백발을 봄에 대한 '해묵은 서리'로 비유한 점은 그 참신성이 돋보인다 하겠다. * 주제 : 늙음에 대한 탄식과 그 극복 의지
다른 작품
탄로가(嘆老歌) 평시조/단(형)시조. 주제 : 늙음을 탄식함
춘산에 눈 노긴 바람
봄 산에 쌓인 눈을 녹인 바람이 잠깐 불고 어디론지 간 곳 없다. 잠시 동안 (그 바람을) 빌려다가 머리 위에 불게 하고 싶구나. 귀 밑에 여러 해 묵은 서리(백발)를 (다시 검은 머리가 되게) 녹여 볼까 하노라.
요점 정리
작자 : 우탁 연대 : 고려 충혜왕 종류 : 평시조, 단형시조 제재 : 서리(백발) 성격 : 탄로가(嘆老歌) 표현 : 은유법, 도치법 주제 : 탄로(늙음을 한탄)
내용 연구
초장 |
봄바람(청춘) -> 희망적 |
탄로(嘆老) |
중장 |
젊어지고 싶은 의욕 |
종장 |
늙음을 한탄 (관조) |
춘산 : 봄동산에. 여기서는 '청춘'을 비유. '진본청구연언'에는 '청산'으로 표 기되었음. 건 듯 : 문득, 잠깐 간듸 : 간 곳 져근 덧 : 잠깐. 잠시 동안. '덧'은 짧은 시간 비러다가 : 빌어다가. 빌어와서 마리 : 머리(고어에서 짐승과 사람에게 같이 사용되었으나, 현대어에서는 사람 에게만 사용) 우희 : 위에. 우ㅎ(명사) + 의(처소격 조사) 불니고져 : 불게 하고 싶구나. 밋태 : 밑에 해 묵은 서리 : 오래된 서리. '서리'는 '백발'을 비유 하노라 : 한다. '노라'는 1인칭서술형 어미
이해와 감상
인간의 생노병사는 인간이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이지만, 늙음은 그 어떤 것보다 생명의 시들어 감을 보게하는 것이고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이 시조는 자신의 백발을 보고 다시 젊어지고 싶은 의욕을 노래하고 있으며, 인생의 허무함을 극복하려는 긍정적인 태도가 엿보이고 있는 작품이다. 이러한 긍정적인 태도는 유교의 현실적인 태도에 연유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해 본다. 그리고 이 작품은 작가의 또 하나의 작품인 "한 손에 가시들고……"와 함께 널리 알려진 시조이다. 자신의 백발을 젊게 하고 싶다는 심정이 나타나 있다. 어쩌면 체념적인 자세를 통해 긍정을 시도하려는 삶의 자세에서 인생을 달관한 한 노학자를 보는 듯하다.
심화 자료
우탁 (禹倬 1263~1342) 자 천장(天章) ·탁보(卓甫). 호 백운(白雲) ·단암(丹巖). 시호 문희(文僖). ‘역동선생(易東先生)’이라 불렸다. 문과에 급제, 영해사록(寧海司錄)이 되어 민심을 현혹한 요신(妖神)의 사당(祠堂)을 철폐하였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 감찰규정(監察糾正) 때 충선왕이 숙창원비(淑昌院妃)와 밀통한 것을 알고 이를 극간한 뒤 벼슬을 내놓았다. 충숙왕이 그 충의를 가상히 여기고 누차 불렀으나, 사퇴하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뒤에 성균좨주(成均祭酒)를 지내다가 치사(致仕)하였다. 당시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정주학(程朱學) 서적을 처음으로 해득, 이를 후진에게 가르침
春山(춘산)에 눈 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 듸 업다 져근 덧 비러다가 마리 우희 불니고져 귀 밑에 해묵은 셔리를 녹여볼가 하노라
● 전문 풀이 봄 산에 쌓인 눈을 녹인 바람이 잠깐 불고 어디론가 간 곳이 없다. 잠시 동안 (그 봄바람을) 빌어다가 머리 위에 불게 하고 싶구나. 귀밑에 여러 해 묵은 서리[백발]을 녹여(다시 검은머리가 되게) 볼까 하노라.
● 구조 분석 초장 : 젊음(청춘)이 지나감 중장 : 젊어지고 싶은 의욕 종장 : 늙음을 한탄함
● 작품 감상 : 쌓인 눈을 녹여 주는 봄바람으로 하얗게 된 백발을 눈 녹이듯 녹여 자신의 젊음을 되찾겠다고 하는 이 노래는, 흔히 고려 속요에서 볼 수 있는 감상적(感傷的), 애상적(哀傷的) 정조에 비하여 허 무 의식을 극복하고자 하는 긍정적 자세가 엿보인다. 탄로(嘆老)의 한탄 속에서도 인생을 달관한 여유가 한결 돋보이게 한다. 은유법을 적절히 구사하고 있는 이 노래는, 체념적이 아닌 긍정적인 시적 자아의 정신을 '春山'의 '春'으로 대변해 주면서 하얗게 된 백발을 ' 무근 서리'로 표현하여 비유의 참신성을 보여 주고 있다.
● 핵심 정리 ◁ 작자 : 우탁(고려 충혜왕 때) ◁ 출전 : <병와가곡집>, <청구영언> ◁ 종류 : 평시조 ◁ 성격 : 탄로(嘆老)가 ◁ 제재 : 서리(백발) ◁ 주제 : 탄로(嘆老), 늙음을 한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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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에 막대 잡고 / 우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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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를 들고 늙은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우탁(1263~1343);자는 천장(天章),호는 역동(易東). 고려 충혜왕 때의 성리학자. 벼슬은 성균관제주에 이름. 經史, 易學,복서(卜筮)에도 통달하였다고 함.
*탄로가(歎老歌). 한갓 늙음만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넓은 학문 세계에 비해 자신의 유한한 수명을 한탄하고 있다. 이 "한 손에 막대 잡고"는 춘향전에 나오는 '백발가'에 영향을 주었다.
● 전문 풀이 한 손에 막대를 잡고 또 한 손에는 가시를 쥐고, 늙는 길은 가시 덩굴로 막고, 찾아오는 백발은 막대로 치려고 했더니, 백발이 (나의 속셈을) 제가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 감 상 이 노래는 앞의 '춘산에 눈녹인 '(▶ 하단 참조)과 함께 우탁의 탄로(歎老)에 대한 작품이 다. 두 작품을 비교하여 볼 때, '춘산(春山)'의 '춘(春)'은 희망적이요, 미래 지향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노래는 인생 무상(人生無常)을 달관(達觀)한 경지를 엿볼 수 있어, '춘산(春山)에 ∼ '보 다 후대의 것으로 보인다. '늙는 길'과 '백발(白髮)'은 같은 이미지이겠지만 대구적 형식으로 구상 화한 것은 간결하고 소박한 표현 속에 생동감을 주고 있다. ● 핵심 정리 ◁ 작자 : 우탁(1263∼1343) ◁ 출전 : 청구 영언 ◁ 종류 : 평시조 ◁ 성격 : 탄로가 ◁ 제재 : 白髮(백발) ◁ 주제 : 탄로(歎老 : 늙음을 한탄함) ◁ 정서 : 한스러움
한 손에 막대를 쥐고 또 한 손에는 가시를 쥐고 늙는 길을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을 막대로 치려 했더니 백발이 제가 먼저 알고서 지름길로 오는구나.
<요점 정리>
연대 : 고려말 종류 : 평시조, 단형 시조 표현 : 의인법, 대구법, 과장법 성격 : 탄로가, 직서적 제재 : 늙음 주제 : 탄로(늙음을 한탄)
<내용 연구>
막대 : 막다히> 막다이>막대 늙난 : 늙은 '난'은 현재관사형 가싀 : 가시 치려터니 : 치려고 했더니 졔 : 저가 몬져 : 먼저 (단모음화) 즈럼길 : 지름길(전설모음화) 오더라 : 오는구나. 오(동사 어간)+ 더(회상시제선어말어미)+ 라(감탄형어미) 백발이 제가 먼저 알고서 지름길로 오는구나 : 백발이 나의 속셈을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의인법을 사용하였고, 인생무상을 느끼게 하고, 세월에 거역하려는 인 간의 한계를 익살스럽게 표현하였다.
<이해와 감상>
'탄로가(嘆老歌)' 2수 가운데 한 수로 '늙음' 이라는 추상적인 인생길을 구체적이고 시각적인 길로 전환시키고, 세월의 흐름을 가시와 막대기로 막으려는 발상이 재미있지만, 인생 무상을 느끼게 하고 인간이 세월을 거역하려는 것에 대한 익살스런 표현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인간의 한계성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세월(늙는 길)과 늙음(백발)을 구상화한 공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늙음에 대한 안타까움을 간결하고도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춘향전에 나오는 백발까에 '오는 백발 막으려고 우수에 도끼들고, 좌수에 가시들고, 오는 백발 뚜드리며, ……가는 홍안 절로 가고 백발은 스스로 돌아와, 귀 밑에 살잡히고 검은 머리 백발되니……'라는 구절은 이 시조가 잡가화한 것이 아닌가 하고 짐작해 볼 수 있다.
<심화 자료>
우탁 (禹倬 1263~1342)
자 천장(天章) ·탁보(卓甫). 호 백운(白雲) ·단암(丹巖). 시호 문희(文僖). ‘역동선생(易東先生)’이라 불렸다. 문과에 급제, 영해사록(寧海司錄)이 되어 민심을 현혹한 요신(妖神)의 사당(祠堂)을 철폐하였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 감찰규정(監察糾正) 때 충선왕이 숙창원비(淑昌院妃)와 밀통한 것을 알고 이를 극간한 뒤 벼슬을 내놓았다. 충숙왕이 그 충의를 가상히 여기고 누차 불렀으나, 사퇴하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뒤에 성균좨주(成均祭酒)를 지내다가 치사(致仕)하였다. 당시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정주학(程朱學) 서적을 처음으로 해득, 이를 후진에게 가르침. |
감상 및 해설--------------------------------------------------
<청구영언>
탄로가(嘆老歌)
평시조/단(형)시조.
춘산에...-'춘산'과 '해묵은 서리'를 각각 '젊음'과 '백발'에 비유했다.
즉, 봄산에 부는 봄바람(젊음-봄을 가져다 주는 바람)을 머리 위에 불게 하여,
그 바람이 산에 쌓인 눈(지난 세월)을 녹여 봄을 부르듯 자신의 젊음을 되찾고 싶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탄로가에 포함되지만 늙어짐에 대해 단순히,
체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긍정적이며 일면,
달관적인(젊고 늙음이라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에 대해 의지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유까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백발을 봄에 대한 '해묵은 서리'로 비유한 점은 그 참신성이 돋보인다 하겠다.
저서로는 편년강목(編年綱目), 초학계몽(初學啓蒙), 도수편(徒酬編), 역설(易說), 가례정편(家禮精編) 등이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고, 현재「易東先生實記」의 한시 약간 수와 편지, 시조2수 등만 전한다.
우탁(1263-1343)
靑山의 눈 녹인 건듯 부러 간 업다 져근덧 비러다가 불니고져 마리 우희 귀 밋희 묵은 서리를 녹여 볼가 ?搭遺? 건듯:잠깐, 문득. 져근덧:잠시 동안, 잠깐
?? 손에 막 잡고 ?? 손에 가싀 쥐고 늙 길 가싀로 막고 오 백발 막 로 치려터니 白髮이 졔 몬져 알고 즈럼길노 오더라. 嘆老歌. 즈럼길:지름길
시조시(詩)는 국문학적으로 보아 여러가지 지적(智的)인 뜻이 있어 큰 비중을 차지하며 시조창(唱)은 음악적으로 보아 마음을 순화 시키고 건강에도 좋으니 이 또한 큰 비중을 차지 한다.
참으로 국문학, 음악 이 양자간에 우리 국민정서 함양과 훌륭한 문화발전에 크게 이바지함도 사실이다.
더하여 시조시(詩)는 정대(正大)한 가곡으로도 불려오고 다방면으로 응용되니 아름답다.
하면 우리민족의 자랑스런 시조시는 무엇을 영향받아 지어졌을까? 어느 사람이 즉흥적으로, 그저 자연적으로 지어 이날 계승되어 온 것인가? 궁금하다.
한시(漢詩)가 있으니 우리 말의 시도 있어야 하기에 지어봤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신라의 향가(鄕歌)가 생겼을 것이고, 민족고유의 언어(言語)가 있는데 시가 어찌 없을 손가? 어느 누구는 향가를 영향받아 지었다는 이도 있다.
이런 주장일진대 나도 감히 한번 내 나름대로 주장하여 볼까한다. 국문학자들은 시조시는 고려말엽 우탁(禹倬)이 처음으로 지었다 한다. 나는 이 말에 긍정적이다.
우탁의 시조시 두 수(首)를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한손에 가시쥐고 또 한손에 매를 들고
늙는길 가시로막고 오는백발 매로치렸드니 발이 제먼저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청산에 눈녹인바람 건듯불고 간데없다 적은덧 빌어다가 머리위에 불리고저 귀밑에 해묵은 서리를 녹여볼까 하노라
우탁의 위 두 수의 시조시는 명시(名詩)로써 늙는 것을 한탄한 시조시다.
우탁으로 말하면 고려말엽의 큰 벼슬을 한 환관(宦官)이오 성리학(性理學)의 큰 학자이다.
우탁이 명(明)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간 일이 있는데 명나라에 주역(周易)이라는 책이 있어 읽어보니 매우 탐내는 책이라 구(求)하여 본국에 가지고 올라해도 아니 내줌으로, 탐독하여 머리에 외워서 귀국했던 것이다.
이 얼마나 총명하냐 말이다.
그 까다롭고 방대한 분량을 외우다니 실로 수긍이 안갈 정도다.
역동(易東 주역을 동쪽으로 옮겼다는 뜻)이라는 별명(別名)이 붙으니 즉 오늘까지 우역동(禹易東) 이라고도 불리운다.
이러한 총명하고 유식한 큰 성리학자가 신라의 옛말 방언따위의 향가(鄕歌)를 보지도 않았을 것이며 더욱이 모방하여 우리의 시조시를 지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면 뭣에 영향받고 모방하여 우리 시조시를 지었을까? 경전(經傳)인 시경(詩經)을 모방하였을 걸로 나는 생각한다. 시경은 고대로부터 중국(中國)에 널리 퍼져 있는 시를 수집한 것인데 명시(名詩) 삼백오편(三百五篇)이 수록되어 있다.
이 시의 자구(字句)는 4자(四字)단위로 한구절의 뜻이 담겨져 있으니 흡사 우리 시조시(時調詩) 3·4조와 같은 것이다.
그 예를 들어 시경(詩經) 몇구절만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그 많은 시조집에 기록이 전무(全無)하다.
내 1950년대(代)에 김유신전 소설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 이 소설은 1945년 해방후에 나온 소설로 성충에 대한 말이 있으니,
성충은 백제 끝 왕인 의자왕 때의 충신이며 간신들의 참소에 못 견디어 감옥에 가서 지었다는 시조시라고 하는데,
이를 나는 의심적게 생각한다.
소설을 쓴 작가가 아득한 먼 옛날을 추모하여 성충의 충성심을 추켜주느라고 시조시를 지었을 걸로 생각된다.
그 이유인즉 성충이 시조시를 지었다하면 그 이후로 고려 말엽 우탁까지의 650여년 긴 세월동안 그 어느 누가 지은 시조시이건 기록이 전혀 없는 반면 시조시를 처음 지었다는 우탁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시조시는 무려 6,000여 수(首)에 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데 위에서도말했듯이 그 많은 시조집에 성충(成忠)이 지었다는 시조시는 전무하기로 나는 신빙성이 없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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