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의 뜨락/문화재 탐방

묘법연화경과 조맹부

채현병 2014. 2. 2. 20:20

 

妙法蓮華經과 趙孟

 

1.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 法華經) Saddharmapuṇḍarῑka-sūtra

 

 '진실한 가르침의 연꽃이라는 경'의 약칭이다. 천태종(天台宗)을 비롯한 여러 불교 종파에서 불교의 정수를 담고 있는 경전으로 존중되어왔다. 〈법화경〉은 그밖의 여러 종파의 사람들에 의해서도 매우 아름답고 위력을 가진 종교 고전으로 여겨졌으며, 동아시아 불교의 주도적 형태인 대승 불교 전통에서 가장 중요하고 널리 읽혀온 경전의 하나이다.

 

〈묘법연화경 /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는 아득한 옛날에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이른바 '구원불'(久遠佛)로 나타난다. 신앙과 헌신의 지고한 대상으로서 그의 특성은 부분적으로는 그의 불가사의한 능력(즉 순식간에 사방에 제각기 부처를 모시고 있는 수천 개의 세계가 눈앞에 나타나도록 하는 능력 등)에 대한 묘사를 통하여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이 경전에서는, 대승불교 태동기에 초기 불교의 성문(聲聞: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스스로 아라한이 되기를 이상으로 하는 자)과 연각(緣覺:부처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는 자)을 소승(小乘)이라고 매도하며 성불(成佛)에는 이를 수 없는 존재로 멸시하던 입장에서 벗어나 각각의 입장을 성불을 위한 방편이라고 하며, 그들도 궁극적으로는 대승불교의 보살과 마찬가지로 성불에 이르게 된다고 하는 일승묘법(一乘妙法)의 사상을 펼치고 있어 주목된다. 이 때문에 이 경전의 서두에서는 자기의 입장만을 고수하는 독선적 태도를 배척한다. 또한 '여래사'(如來使)라고 하여, 부처에 의해 세상에 파견되어 현실의 한가운데에서 진리를 구현하며 온갖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청정한 불국토(佛國土)를 이루기 위해 힘쓰는 보살의 전형이 제시되고 있는 점도 이 경전의 중요한 특색이다.

 

  이 경전은 대부분 운문으로 되어 있고, 전체가 28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많은 공덕을 가져다준다고 하는 주문(呪文)과 진언(眞言 mantra)을 상당수 포함하고 있다. 3세기에 최초로 한역되었고, 중국·한국·일본에서 널리 읽혀왔으며, 〈법화경〉을 독송(讀頌)하기만 해도 구원을 받게 된다는 믿음이 일반인들 사이에 널리 유포되었다. 특히 자비를 특색으로 하는 위대한 보살인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영광과 특별한 능력들을 묘사하고 있는 제25장은 〈관음경 觀音經〉이라는 이름으로 별도로 중시되어왔다.

 

 

2. 趙孟

 

<조맹부와 부인 管道昇>

 

  몽골의 원(元) 왕조가 중국을 지배하던 시절 최고 명필로 손꼽히던 사람은 조맹부다. 그 직전의 왕조인 송나라를 창건했던 조광윤의 11대 손이다. 이른바 송설체(松雪體)라 불리는 필체를 만들 정도로 서예에 뛰어났던 그는 그림으로도 유명했다. 문장에서도 빼어난 실력을 보여 그에게는 늘 여러 가지의 찬사가 따랐다.

  관도승(管道昇)은 그의 처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기로 이름이 높았고 남편의 실력에 걸맞은 회화와 시작(詩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대나무 그림과 관음상 등 불상을 그리는 재주가 뛰어나 당시의 황제인 쿠빌라이의 칭찬을 받기도 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두 부부의 금실도 좋았다. 조맹부는 예전의 사대부들이 흔히 했던 것과 같은 축첩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부부간의 사랑이 깊어 칭송이 저잣거리에 나돌기도 했다. 그러나 한때 위기가 닥친 적이 있다. 조맹부가 요즘으로 치면 가수라고 할 수 있는 한 여인에게 정신을 팔리고 만 것.

  최운영이라는 이 ‘가녀(歌女)’를 한 잔칫집에서 봤다가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조맹부는 급기야 그녀를 첩으로 들어앉힐 움직임까지 보인다.

  관도승의 움직임이 예사스럽지 않다. 첩으로 들여도 되겠느냐고 물어 오는 남편에게 그녀는 사(詞) 한 수를 내민다. “진흙으로 당신과 나를 빚으니, 기쁘기 이를 데 없네요, 다시 무너뜨려 물을 부어, 이리저리 섞어, 또 당신과 나를 빚지요, 내 진흙 속에는 당신이 있고, 당신 흙 속에는 내가 있지요….”

  결과는 뻔했다.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으로 조맹부는 첩 들이려는 마음을 얼른 거둔다. 어쨌거나 “내 진흙 속…”의 뒤 두 마디 구절은 매우 유명하다. 요즘도 중국에서 싸움이 일거나 다툼이 격해지면 “우리끼리 왜 그래”라는 화해의 뜻을 전할 때 흔히 사용된다. 갈라진 너와 나가 우리라는 통합적인 틀에서 거듭 뭉치도록 긍정적인 작용을 하는 명구다.

 

<작화추색도>

 

 <작화추색도>

 

 

  작화추색도는 원나라때의 서화가인 조맹부의 작품이다. 명,청 시대에 민간에 전해지다가, 청나라때 황궁에 들어갔으며, 현재는 대만의 국립고궁박물원이 소장하고 있다. 작화추색도가 묘사하고 있는 것은 중국 산동성 제남시의 북쪽에 있는 작산과 화산일대의 풍경이다. 1989년 10월 5일 대만정부는 횡으로 4개를 자르는 방식으로 작화추색도 우표를 발행하였다.

 

  조맹부는 송태조 조광윤의 아들의 10대손이었다. 원나라의 세조 쿠빌라이는 중국 한족의 마음을 회유하기 위하여 널리 송나라 황족의 후손들을 찾아서 관직을 주었다. 고향인 절강성 호주에서 지내고 있던 조맹부는 원나라 조정에 불려나가서 졸지에 1품의 관직을 얻게 되고, 천하에 이름을 날리게 된다. 후세인들 중에서는 송나라 조광윤의 후손으로 원나라에 투항하여 벼슬한 것에 대하여 그다지 좋게 보지 않고 그를 폄하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의 서화에 있어서의 성과에 대하여는 거의 부정하는 사람이 없다.

 

  조맹부는 33세에 관직에 나가 제남에서 생활한 적이 있고, 66세가 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가 42세때 고향에 돌아온 적이 있는데, 거기서 22세인 주밀(周密, 자는 公勤)을 만난다. 조맹부가 그림에 적은 글에 의하면 "공근의 부친은 제(산동성) 사람이다" 그러나 조상의 고향이 산동인 주밀은 한번도 산동지방에 가본 적이 없다. 그래서 조맹부는 공근에게 제 지방의 산천을 알려주기 위하여 그림을 그려준다. 조맹부가 별 뜻없이 주밀에게 그려준 이 그림은 그 후 800년간 천하에 이름을 날리게 된다.

 

  <작화추색도>는 조맹부가 고향인 호주에서 산동제남의 기억을 되살려 그린 것이다. 제남이 아름다운 풍경과 강물, 호수, 나무, 농촌집들을 잘 그렸으며 멀리 두개의 산봉우리가 높이 솟았는데, 오른쪽에 뾰족한 산을 "화불주산(華不注山, 지금의 華山)", 왼쪽의 위가 평평한 것이 작산(鵲山)이다.

 

  현재는 작산은 황하의 북쪽에, 화산은 황하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조맹부의 그림을 보면 두 산 사이에 황하와 같이 큰 강이 흐르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조맹부의 그림은 이전의 송나라때의 화가들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 것은 동원, 거연, 범관등이 그린 산수화는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산과 물과 나무였지, 현실에 존재하는 풍경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조맹부는 실제의 산수를 보고 그것을 그렸던 것이고, 이것은 중국 산수화의 일대 변혁잉ㅆ다. 그런데, 왜 조맹부가 그린 제남의 산수의 모습이 실제와 다른 것일까?

 

  그 해답은 황하는 물길을 자주 바꿨다는데서 찾아야 한다. 지금은 황하가 화산과 작산의 사이로 흐르고 있지만, 원나라때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황하가 모래가 쌓여 물길을 바꾸게 된 것이 역사상 큰 것만 26회, 그 중 대규모인 것은 5번이 있다. 네번째는 1128년으로 금나라가 남침하며 송나라가 남쪽으로 도망치기 위하여 황하를 무너뜨려 물길을 남쪽으로 바꾸게 된 것이다. 다섯번째는 1855년으로 황하의 물이 높아져서 물길이 북상하고 다시 산동으로 바다에 들어가게 되었다. 즉, 조맹부가 있던 시절에는 이미 100여년전에 물길을 남쪽으로 바꾸어 황하는 제남으로 지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한가지 의문스러운 것은 현재의 지도를 보면 작산은 화산의 서쪽에 있다. 그런데, 그림에는 작산이 화산의 동쪽에 있다고 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화가의 착각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는 좀 더 따져봐야 할 것이다.

 

<박돌천詩>

 

 

<원(元)조맹부(趙孟頫,1254-1322),박돌천시(書趵突泉詩),(두루마리(卷),종이에 먹,33.1 x 83.3 cm)>

 

 
조맹부는 자는 자앙(子昂)이며 자호(自號)는 송설도인(松雪道人)이라 했다. 송(宋) 황실 출신으로 호주(湖州, 오늘날 절강성 오흥(吳興))사람이다. 송 왕조가 망하고 원 조정에 들어가 벼슬을 하였는데 관직이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다. 사후 위국공(魏國公)으로 봉해졌으며 문민(文敏)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박돌천(趵突泉)은 산동성 제남시(濟南市) 옛 성 서문 밖에 있다. 조맹부가 제남에서 벼슬을 할 때 자주 이곳에 와서 쉬다가 가곤 했다고 한다. 조맹부는 시와 서화, 악과 율 어느 하나 능통하지 못한 것이 없었고 서예에 있어서 전서, 행서, 초서 등 모두 고금(古今)을 막론한 일인자라 하겠다. 초년에는 송 고종(高宗)의 서법을 배웠고, 후에는 왕희지(王羲之)와 왕헌지(王獻之)의 서풍으로 전환하였다가 마지막으로는 다시 이옹(李邕)의 서법을 배웠다. 그는 당(唐, 618-907) 이후의 서예를 집대성한 인물로 동시대뿐만 아니라 후대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다.


조맹부의 글씨는 완전히 유미주의(唯美主義)적인 양식으로 유명하다. 이 작품의 주제가 된 박돌천시(趵突泉詩)는 성종(成宗) 원정(元貞) 원년(元年, 1295) 십이월, 주밀(周密)을 위해서 작화추색도(鵲華秋色圖)를 제작할 무렵에 쓰여진 것이다. 이 작품은 늦어도 대덕(大德) 8년(1304) 주밀이 사망하기 전에 제작된 것으로 조맹부의 나이 42세에서 51세 사이에 쓰여진 작품이다. 우아하고 둥근 필치로 쓰여진 이 작품은 유명한 조맹부 서예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지금까지 전해지는 조맹부의 해서체(楷書體) 서예 작품 중에서 보기 드문 큰 글씨로 쓰여진 것이다. 두루마리에는 “우이제(右二題)”라고 적혀 있지만 지금은 하나만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두루마리의 앞부분은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조맹부체 / 송설체의 우리나라 보급 및 영향>

 

  1254년-1322년 절강성 오흥,호주(湖州) 출신. 자는 자앙(子昻). 호는 송설도인(松雪道人).

중국 원대의 관료, 서화가 시,서,화에 모두 능통했다.


  1254년 송나라 태조의 넷째아들인 진왕 덕방의 자손으로 태어났으며 태조 11대 손자이다.

벼슬은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고 사후에는 위국공에 추앙되고 문민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고려국 충선왕과 이제현등과 특별한 교류를 하였으며 특히 충선왕이 조맹부

서체를 좋아하여 고려에 송설체라 불리는 조맹부체를 널리 보급하였다.


  여기서 주목을 하여야 할 것은 조맹부의 고향이 절강성 오흥,호주 지역근처라는 것이며

석옥청공이 활동한 지역이 절강성 호주지역이며 그 당시 서체의 유행으로 보아

조맹부체가 크게 유행하여 석옥청공이 백운화상에게 넘겨준 불조직지심체요절도

조맹부서체의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으며 고려국 청주목 흥덕사지본 직지심체요절도

조맹부체의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나라 서예사를 살펴보면 초기에는  신라의 전통을 계승하여 당나라 여러 대가들의

필법을 모방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구양순의 서체가 지배적이었으며, 행서는 역시

왕희지풍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중기에 이르러 글씨의 명가로 이름이 높은 고승 탄연(坦然)이 구양순체 일색이었던 당시의 전통을 깨뜨리고 왕희지의 서풍에 기초를 둔서법을 창출하였다.


그러나12세기에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한 뒤에 문학·예술 전반이 크게 쇠퇴하였는데,

서예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은 대체로 13세기 말엽 이전까지 계속되었다.

후기에는 특히 충렬왕 이후에 조맹부의 서체가 들어와 크게 유행, 조선 전기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충선왕은 1314년 아들인 충숙왕에게 양위한 후 연경(燕京)에 들어가서 만권당

(萬卷堂)을 짓고 당시 원나라 명사들과 교유하였는데, 특히 조맹부와 친교가 두터워

그의 영향을 크게 받은 듯하다.


조맹부는 원나라를 대표하는 글씨의 명가로서 충선왕을 따라갔던 문신들 중에는 조맹부의 서법을 따른 사람들이 많았다.


그 대표적 명가가 이암·이제현(李齊賢)이다. 충선왕이 고려로 귀국할 때 많은 문적과 서화를 들여왔으므로 조맹부의 송설체(松雪體)가 들어와 유행된 후 고려는 물론, 조선 초기까지 서예계를 풍미하였으며 조선 초기 글씨로 유명하며 금속활자 주조에도 깊이 참여했던 안평대군의 서체도 조맹부 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위와 같이 절강성 호주지역의 지리적 인문적 환경은 백운화상과 석옥청공과 조맹부와

연결되어 직지심체요절의 존재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掛軸書 趙孟頫 山水  表具: 220x79cm, 本紙: 128x65 cm>

 

<조맹부 (趙孟頫, 1254~1322)>

 

元나라의 화가 ·서예가. 서예에서 王羲之의 전형에 복귀할 것을 주장

하고 그림에서는 당 ·북송의 화풍으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그림은 산수 ·화훼 ·죽석 ·인마 등에 모두 뛰어났고, 서예는 특히 해서,

초서의 품격이 높았으며, 당시 복고주의의 지도적 입장에 있었다.

 

字는 子昻. 號는 集賢, 松雪道人. 諡號는 文敏.

저장성[浙江省] 우싱현[吳興縣] 출생.

 

宋나라 종실 출신이며, 원나라 世祖에 발탁된 뒤 역대 황제를 섬겼고,

벼슬은 한림학사승지,榮祿大夫에 이르렀다. 사후에 魏國公에 추봉됨.

 

송나라 태조의 후손이면서도 원나라를 섬겨 영달하였으므로,

후세에 명분상의 비난을 면하지 못하였다.

 

당시의 대표적인 교양인으로서 정치 ·경제 ·詩書畵에 넓은 지식을

가졌으며, 특히 서화에 뛰어났다.

 

서예에서도 唐나라의 顔眞卿 이래로 송나라에서 성행하였던 서풍을

배격하고, 王羲之의 전형에 복귀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림에서는 南宋의 院體 화풍을 타파하고,

·북송의 화풍으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그림은 산수 ·화훼 ·죽석 ·인마 등에 모두 뛰어났고, 서예는 특히 해서,

행서, 초서의 품격이 높았으며, 당시 복고주의 지도적 입장에 있었다.

 

그의 아내 管道昇은 墨竹에 뛰어났고, 아들 雍(仲穆)

산수 ·화조 화가이며 서예에도 탁월하였다.

 

또 畵友, 門人이라 할 수 있는 錢選, 陳仲仁, 王淵 등이 있어,

우싱파[吳興派]라는 한 파를 이루었다.

 

그림으로 《중강첩장도(重江疊嶂圖)》 《사마도권(飼馬圖卷)》 등이,

글씨 유품으로는 《여중봉명본척독(與中峰明本尺牘)》 등이 있다.

 

서화와 시문에 뛰어나서 원나라의 四大家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저서에 《상서주(尙書注), 《송설재집(松雪齋集)》 등이 있다.

 

조맹부는 송태조 조광윤 11세손이다. 그러나 그는 송을 붕괴시킨

원나라 세조의 부름을 받아들이고 관직에 나아간다. 이 일은 두고두고

그의 불명예가 되었다. 그는 변절자인가?

 

이민족의 통치 하에서도 최소한으로나마 중국 문화를 지속시키기

위해서 역사가 그를 필요로 했던 것일까?

원대의 학문과 書畵는 그리하여 그로부터 시작된다.

출사의 길이 원천 봉쇄된 원대 초의 문인들에게는 미래가 없었다.

그들은 모두 향리에 은거하면서 단지 옛 전통을 음미하며 르네상스를

꿈꿀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복고주의를 가장 치열하게 실천한 사람은 오히려 관직에

있던 조맹부였다. 그는 문약했던 망국의 남송 문화를 극복하고 북송과

그 이전의 예술 정신과 그 질박한 양식으로 회귀하고자 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영감과 새로운 힘을 발견한다. 중국문화의 르네상스를

꿈꾸었던 그는, 어쩌면 단순히 권력에 영합한 변절자가 아니라, 난세에

하수들이 산 속으로 은둔할 때 정말 고수는 '조정 속으로 은둔'한다고

하는 바로 그 '朝隱'을 실천했던 것일까?

 

조맹부는 한 획의 선으로 바위의 형상과 원근을 표현한다. 바위 곁을

흐르는 공기, 바위 속을 흐르는 시간이 새겨놓은 표면의 질감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바위를 생성시키는 자연의 힘과 화가의 정신을 표현하고,

육중한 암괴와 나무를 춤추게 한다. 선 속에 모든 것이 담긴다.

산수화의 일 획은 서예의 전통과 이어져 있다. 하루에 12,000자를 쓰기

도 했다던 서예의 대가 조맹부는 서예의 기법과 운율을 회화의 형상

속에 융합시켰던 것이다.

 

문인화의 書卷氣라는 것은 많은 독서뿐만 아니라 바로 이 서법의 단련

여부와 깊은 관계가 있다. 그리하여 문인의 그림은 화공들처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써야 하는 것이다.

<조맹부의 글과 그림>

조맹부는 산수화 외에도 도석화 인물도 화조화 말 염소와 양 같은 여러

소재에 모두 능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서예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

을 이루었다.

 

안진경 이후 남송의 서법을 물리치고 왕희지의 전형으로 복귀할 것을

주장했던 그는 그의 호를 따서 松雪體라고 명명되는 서체로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

 

송설체가 원 명 청 그리고 고려와 조선에 미친 영향을 실로 지대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그림은 서예의 기법과 융합되었는데, 특히 난초와

대나무, 괴석의 그림에서 서법과 회화의 형상을 탁월하게 융합시켰다.

 

그는 왕유에서부터 시작하여 북송의 문동과 소동파로 이어진 문인화를

중흥시켰으며 그 중에서도 소위 매, 란, 국, 죽의 사군자는 그에게 와서

확실한 장르로 정립된다.

 

 

 

 조맹부(趙孟頫)의 적벽부(赤壁賦) 

 

 ▲ 조맹부(趙孟頫), 《이양도(二羊圖)》, 두루마리 종이에 수묵, 원, 25.2×48.4㎠, 미국 프리어 갤러리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은 새로운 중국을 통치하기 위해 한족 지식인이 필요했다. 그는 32인의 학자를 초빙하였는데, 원나라 유학자 허형이 그 중 하나였다. 그는 부름에 응하여 북경으로 가던 중 그의 친구 유인에게 들렸다. 유인은 “한번 초빙을 받고 바로 이러한 것은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고 묻자, 허형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도가 행해지지 않습니다”고 했다. 후에 유인 역시 쿠빌라이 칸의 초빙을 받았지만 이에 응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하지 않으면 도가 높아지지 않습니다”고 답변하였다. 허형과 유인 두 철학자 모두 ‘도’를 거론하였지만, 한 사람은 쓰임에 역점을 두었고 다른 한 사람은 존엄성에 무게를 두었다. ‘도’의 의미를 천착할 필요없이 오늘날 말로 쉽게 표현하면, 허형은 이민족 통치를 받아들여 이에 합류하였고 유인은 이를 거절하고 저항한 것이다. 허형은 도덕적으로 지탄받아야 할 것이다.

 

최근에 와서 일단 역사적 평가를 보류하고 당시 현실에서 볼 때 어떤 실천이 그 자신들에게 편하였을까 반문하곤 한다. 문화적 자긍심과 명분을 내세우는 한족 사대부들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이민족에 대한 저항으로서 자연에 은거하면서 도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것일 수 있다. 당시 많은 사대부는 이에 따랐다. 그렇다면 허형은 왜 자신에 대한 모멸감을 무릅쓰고 이민족 조정의 관리가 되려고 결심하였을까. 그의 현실적 태도는 무엇일까. 자신의 선택과 역사적 평가는 왜 다르며, 이 두 요인을 어떻게 균형있게 수용하여 평가해야 할까. 이러한 물음을 떠올릴 때마다 첨예하게 대립되어 나타나는 영역이 예술인데, 중국에서는 예술과 정치, 예술과 도덕에 관해 일관되게 논의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 중 가장 많이 다루어지는 것이 원나라 화가 조맹부의 예술세계이다.

 

조맹부 역시 허형처럼 원나라 조정의 관리가 되었다. 다만 조맹부는 송나라 태조의 세 번째 아들인 진왕(秦王) 덕방(德芳)의 후예로 모든 사대부들의 사표가 되어야 할 존재였지만, 쿠빌라이 칸의 부름에 응하여 한림원학사승지(翰林院學士承旨)까지 올랐다는 것이 다르다. 당연히 이러한 행위는 송나라 유민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유민화가 정사초는 조맹부와 절교를 하여 여러 번 방문하여도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차라리 많은 유민의 뜻에 부응하여 지조를 지키며 자연에 은거하였으면 오히려 마음이 편했을 것을, 조맹부는 왜 그렇게 어려운 길을 걸었을까.

 

 

 

 

조맹부(趙孟頫), <작화추색도(鵲華秋色圖)>, 종이에 채색, 원(1295년), 28.4×93.2㎠, 대북 고궁박물원.

조맹부는 산수, 고목수석, 대나무, 말 등을 잘 그렸다. 특히 <작화추색도>와 같은 산수화는 복고와 창신을 통해 중국회화사에서 새로운 전환을 일으켰던 그림이다. 그러나 그의 출사와 관련되어 스스로 항변하고 후대에 비판받아 왔던 것은 말 그림을 통해서가 아닐까 한다. <인기도> <욕마도>에서 보는 것처럼 그의 말 그림에는 두 가지 특색이 있다. 하나는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고, 또하나는 말이 살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후 미술비평가에게 그의 출사와 관련되어 비판받아 왔는데, 당나라 한간의 <조야백>과 원대 유민화가 공개의 <수마도>와 비교하여 감상하면 그 의미가 잘 통한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말에는 완전히 상반되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중국 사대부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주나라 백락(伯樂)이 천리마를 분별하여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임금이 사대부 능력을 인정하여 백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비유된다. 백락이 천리마를 만나고 임금이 명신을 만나는 것은 사실상 ‘천재일우’에 해당하지만, 임금이나 사대부 누구나 바라는 것이다. ‘개원의 치’라고 불리는 당나라 현종 시대에 천자 마구간에 있는 명마를 그린 <조야백>은 이러한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천리마의 골격이 풍만한 살집 안에 감춰져 있고 그 기상이 밖으로 표출되었다.

 

<전 한간(韓幹), <조야백도(照夜白圖)>, 당, 종이에 채색, 30.8×33.5㎠,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그러나 원나라는 군주가 없는 이민족의 통치 시대이다. 자신의 능력을 인정할 수 있는 명군을 잃어버렸다. 당시 사대부들은 이민족 통치를 부정하고 각각 흩어져 은거하였는데, 이러한 모습을 말에 의탁하여 표현한 것이 원나라 유민화가 공개의 <수마도>이다. 천자 마구간에서 뛰쳐나와 황량한 들판에서 수척한 모습으로 외롭게 서 있는 천리마가 바로 그들 자신의 처지가 아니겠는가. 이에 공개는 스스로 다음과 같이 제발을 적었다.

 

 

 

한결같이 구름을 따라 하늘의 관문에서 내려와,
단지 선조의 천자 마구간 열두 칸을 채웠지.
지금은 누가 준마의 기골을 애달파 하리,
석양이 비친 물가의 그림자 산처럼 고요하구나.
一從雲霧降天關,空盡先朝十二閑,
今日有雖憐駿骨,夕陽沙岸影如山.

 

청나라 경학자 완원(阮元)은 일반적인 말은 갈비뼈가 10개 남짓인데 이 말은 15개가 그려져 천리마임을 확증하였다. 원나라말기 4대화가 예찬은 이 그림을 보고 원나라 유민화가로서 나라를 잃은 것에 대한 화사(畵思)와 시정(詩情)이 넘쳐난다고 하였다.

 

 

 

공개(龔開), <수마도(瘦馬圖)>, 두루마리 종이에 수묵, 원, 30×57㎠, 오오사카 시립미술관.

 

 

말의 또다른 의미는 북방 오랑캐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는 북방 유목민족과의 투쟁을 통해 전개되었는데, 유목민족의 침입을 경계할 때 “변방의 말이 살찔 때 목초가 없어진다”고 노래하곤 하였다.

이 두 의미에서 조맹부의 말 그림은 후대 어떻게 평가되었을까. 조맹부는 “한간의 작품 3권을 얻어 비로소 그 뜻을 얻어서” 그렸던 <인기도>에서 “스스로 당나라 사람에 부끄럽지 않다고 말하였지만” 명나라 담경봉은 “정교하여, 당나라 화가의 온후하고 옛스러운 맛이 없다”고 비판하였다. 정교(精巧)는 고졸(古拙)과 다르게 현실을 따르는 미학적 개념이다. 이는 그가 원나라 왕조에 복직한 현실적 달콤함을 빗댄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조맹부의 말 그림은 송나라를 멸망시켜 공을 세운 변방의 말을 임모한 것이며 그림에 나오는 관리의 고급스런 관복은 조맹부의 입조임을 풍자한 것으로,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의 말 적려(赤廬)가 곤경에 빠진 주인을 구해낸 것과 같은 정신이 없는가라고 반문하였다. 명나라 서발(徐勃)이 “천자의 마구간 열두 마리의 진실로 뛰어난 종자, 한갓 북풍을 향해 슬피 우네”라고 시를 지은 것은 조맹부의 말 그림과 공개의 <수마도>를 대비시켜 그의 회절을 역설적으로 노래한 것이다.

 

여기에서 조맹부의 생각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는 “행동의 실천이 마음과 다름을 거듭 탄식하면서”, “지나간 일은 이미 어떻게 말할 수 없고, 다만 충직으로 원나라 황실에 보답하련다”고 자책하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는 <이양도>를 그려 자신을 변호하였다. 한 마리는 곧바른 자세로 서있고 다른 한 마리는 고개를 쑥이며 풀을 뜯고 있는데, 아주 사실적으로 섬세하게 그렸다. 조맹부는 스스로 다음과 같은 제문을 썼다.

 

나는 말을 그린 적은 있어도 양을 그린 적은 없었다. 중신이라는 사람이 (양의) 그림을 요구하기 때문에, 나는 고의로 장난삼아 그렸다. (이 그림은) 비록 옛사람(의 경지)에 꼭 들어맞을 수 없다 하더라도, 상당히 기운에 있어서는 성취한 바가 있다.


余嘗畵馬, 未嘗畵羊, 因仲信求畵, 余故戱爲寫生, 雖不能逼近古人, 頗於氣韻有得.

여기에서 말을 그렸다는 것은 지조의 지킴을 말하며, 양을 그린 것은 자기희생을 의미한다. ‘중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외부의 요구에 의해 자신이 시대의 희생이 되었다고 강변하는 것 같다.

원나라를 통치한 몽고족이 어떤 민족인가. 고려에 침입하여 많은 문화재를 파괴하였듯이, 세계문화사에서 문화파괴주의자 반달족에 버금가는 민족이 아닌가. 한족의 뛰어난 문화가 몽고족에 의해 파괴되고 있는 상황에서 조맹부는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고 한 몸 희생을 통해 한족의 정신을 구원하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옛사람(의 경지)에 꼭 들어맞을 수 없다 하더라도, 상당히 기운에 있어서는 성취한 바가 있다”고 자부하면서 작품에서 오로지 “고의(古意)”를 강조하였다. <인기도>의 제발에서 “그림은 어렵지만 그림을 이해하는 것은 더 어렵다”고 말한 것을 보면, 이러한 고의(古意)의 추구는 누구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스스로 위안을 삼은 것으로 보인다.

 

 

 

조맹부(趙孟頫), <인기도(人騎圖)>, 종이에 채색, 원(1296), 30×52㎠, 북경 고궁박물원.

 

그의 <조량도>를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말의 갈기는 곧바로 세워져 있고, 꼬리는 뒤돌려져 있으며, 마부는 소매를 들어 얼굴을 가리고 그 옷은 바람에 날리고 있다. 이 네 가지의 움직임은 모두 오른쪽 방향으로 쏠려있다. 그런데 말의 형상은 바로 공개의 <수마도>에 나오는 천리마를 연상시키지 않는가. 황량한 들판에서 삭풍으로부터 보호하여 안정시키려는 인물의 의지적인 얼굴 표정이 인상적이다. 회화적으로 조맹부 이후 많은 화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그가 지키고자한 한족의 문화정신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조량도(調良圖)>, 화첩 종이에 수묵, 원, 22.7×49㎠, 대북 고궁박물원.

 

조맹부의 수석소림도(秀石疏林圖)

 

춤춰라 갈라진 붓끝, 느껴라 숨쉬는 바위

세상 더럽다면 모두 은둔하라, 나는 오히려 나아가 큰 획을 그을터이니.

 

 

 

영국의 미술비평가 로저 프라이는 동양화를 손으로 연출하는 춤의 기록이라고 하였다. 실로 조맹부(1199~?)의 '수석소림도'는 수려한 붓의 춤이다. 붓은 지금 이 순간에도 화폭 위를 춤추는 듯 한데 그 역동적 붓의 궤적이 만들어내는 형상은 바위와 성긴 나무들로 이루어진, 한 채의 고요하고 소슬한 풍경이다. 수억 년 생성의 시간을 고속 촬영하여 한 순간에서 보여주는 듯이 꿈틀거리고 있는 바위, 잎새를 다 떨어뜨리고 바위를 닮아 가는 나무, 바람을 머금은 대나무와 풀잎들. 귀를 기울이면 스산한 바람 소리가 들리고, 손을 내밀면 청량한 가을의 허공이 손끝에 묻어날 것만 같다. 조맹부는 이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썼다(寫)'

 

                                   * 동명서원(해월정) / 한양조씨(문화유적)에서 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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