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 호걸지사의 맹주가객
박효관
朴孝寬
출생 | 180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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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80년 |
공산에 우는 접동 너는 어이 우짖는다
너도 나와 같이 무슨 이별하였느냐
아무리 피나게 운들 대답이나 하더냐
한양 인왕산 필운대의 마지막 주인은 위 시조를 지어 노래한 가객 박효관(朴孝寬, 1800~80)이다. 2002년 문화관광부(지금의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우륵 · 왕산악 · 박연 등과 함께 국악을 대표하는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지만, 그의 생애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인적 사항을 설명할 수 있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심지어 그가 과연 중인 출신인지도 확실치 않다.
박효관이 필운대 일대에서 몇 십년 풍류를 즐기다 세상을 떠난 뒤 그가 활동하던 운애산방 역시 배화학당이 들어서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금은 이곳에 배화여고와 과학관이 들어서 있고, 과학관 뒤 필운대 바위에는 박효관 이름 석 자만 남아 있다.
흥선대원군의 후원으로 운애산방을 만들어 제자를 가르치다
유봉학 교수가 『공사기고(公私記攷)』를 소개한 글에 의하면, 박영원 대감의 겸인으로 일했던 서리 이윤선이 1863년에 재종매를 혼인시키면서 박효관을 동원했는데, 이때 그를 수군(守軍)이라는 직함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는 오군영(五軍營)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궁중 음악과 무용을 담당했던 장악원(掌樂院)의 악공(樂工)들은 노비 출신이지만, 오군영의 세악수(細樂手)들은 노비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연주를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했고, 최소한의 한문도 쓸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박효관이 가곡(歌曲)의 정통성에 대해 자부심이 높았던 것을 보면, 최소한 중간 계층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오군영 세악수들은 18세기 이래 민간의 가곡 연행에 점점 더 깊이 개입해, 군인 봉급에 의존하지 않고 민간 잔치에 불려 나가 연주하고 받은 돈으로 생활하였다. 그러나 장악원 악공들은 고유 업무가 있기 때문에 두 가지 일을 하는 것이 자유롭지 않았다. 국왕의 정사(萬機)에 참고하도록 재정과 군정의 내역을 기록한 『만기요람(萬機要覽)』을 보면 오군영에 배속된 군사들의 급료미는 매삭 9두인데, 세악수는 6두로 되어 있다. 국가에서는 낮은 보수를 주는 대신, 군악 연주 외에 민간 행사에도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해 준 듯하다.
구포동인(안민영)은 춤을 추고 운애옹(박효관)은 소리 한다
벽강은 고금(鼓琴) 하고 천흥손은 피리 한다
정약대 박용근 해금 적(笛) 소리에 화기융농(和氣融濃) 하더라
박효관의 연행에 참여한 기악 연주자는 대부분 오군영 세악수였다. 북을 치거나 피리를 부는 군사들의 명부인 『고취수군안(鼓吹手軍案)』 등을 통해 신경숙 교수가 세악수 명단을 분석한 연구에 의하면, 『금옥총부(金玉叢部)』 92번 시조에 활동 모습이 담긴 천흥손 · 정약대· 박용근 등은 오군영 소속의 세악수이다. 군안(軍案)에는 세악수의 인적 사항에 아버지를 밝혔는데, 친아버지뿐만 아니라 보호자나 스승 역할을 하는 사람의 이름도 썼다. 피리를 전공했던 용호영의 군악수 천흥손이 대금 이귀성, 윤의성, 피리 김득완의 아버지로 올라 있다. 정형의 세악 편성에서 세피리는 두 명이 필요했으니, 천흥손은 하나의 악반을 주도하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구포동인은 흥선대원군이 안민영에게 내린 호이다. 여든이 된 스승은 노래하고 환갑이 지난 제자는 춤을 추었으며, 후배들은 반주했다. 안민영이 40년 배웠다고 했으니, 제자의 제자들까지 박효관을 찾아 모인 셈이다.
인왕산 하 필운대는 운애선생 은거지라
풍류재사(風流才士)와 야유사녀(冶遊士女) 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날마다 풍악이요 때마다 술이로다.
─『금옥총부』 165번
박효관이 필운대에 풍류방을 만들어 제자들을 가르치며 스스로 즐기자, 흥선대원군이 그에게 운애(雲崖)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 안민영은 그를 운애선생이라 불렀으며, 풍류재사와 야유사녀들은 ‘박선생’ 이라 불렀다. 위항시인들이 시사를 형성한 것과 같이, 풍류 예인들은 계를 만들어 모였다. 안민영은 『금옥총부』 서문에서 그 모임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때 우대(友臺)에 아무개 아무개 같은 여러 노인이 있었는데, 모두 당시에 이름 있는 호걸지사들이라, 계를 맺어 노인계라 하였다. 또 호화부귀자와 유일풍소인(遺逸風騷人) 들이 있어 계를 맺고는 승평계라 했는데, 오직 잔치를 베풀고 술을 마시며 즐기는 게 일이었으니, 선생이 바로 그 맹주였다.
평생 연주를 즐겼던 원로 음악인들의 모임이 바로 노인계이다. 안민영은 『승평곡(昇平曲)』서문에서 박한영 · 손덕중 · 김낙진 등의 노인계원 10여명 이름을 들고 “당시에 호화로운 풍류를 즐기고 음률에 통달한 이들” 이라고 소개했다. 유일풍소인은 세상사를 잊고 시와 노래를 벗 삼은 사람이다. 벼슬한 관원은 유일(遺逸)이 될 수 없고, 풍류를 모르면 풍소인(風騷人)이 될 수 없다. 승평계는 경제적인 여유를 지닌 중간층이 풍류를 즐겼던 모임인데, 역시 수십 명의 연주자와 함께 대구 기생 ‘계월’, 강릉 기생 ‘행화’, 창원 기생 ‘유록’, 담양 기생 ‘채희’ 등의 이름이 밝혀졌다.
성무경 선생은 “박효관의 운애산방은 19세기 중 · 후반 가곡 예술의 마지막 보루”라고 표현했다. 가곡은 운애산방을 중심으로 세련된 성악 장르로 거듭나기 위해 치열한 자기 연마의 길에 들어섰던 것이다. 그러한 결과를 스승 박효관과 제자 안민영이 『가곡원류(歌曲源流)』로 편찬하였다.
제자 안민영과 함께 편찬한 『가곡원류』
음악에는 여러 갈래가 있지만, 박효관과 안민영의 관심은 가곡에 있었다. 문학 작품인 시조를 노래하는 방식은 시조창(時調唱)과 가곡창(歌曲唱)이 있다. 시조창은 대개 장구 반주 하나로 부를 수 있고, 장구마저 없으면 무릎장단만으로도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가곡창은 거문고, 가야금, 피리, 대금, 해금, 장구 등으로 편성되는 관현 반주를 갖춰야 하는 전문가 수준의 음악이다. 오랫동안 연습해야 하고, 연창자와 반주자의 호흡이 맞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객은 전문적인 음악가라고 할 수 있다.
전문적인 가객을 키우려면, 우선 가곡의 텍스트를 모은 가보(歌譜)가 정리되고, 스승이 있어야 하며, 가곡을 즐길 줄 아는 후원자가 있어야 했다. 박효관과 안민영은 40년 넘은 사제지간으로 흥선대원군같이 막강한 후원자를 만나 가곡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흥선대원군이 십년 섭정을 마치고 이선으로 물러서자 위기의식을 느꼈다. 언젠가는 천박한 후원자들에 의해 가곡이 잡스러워질 것을 염려한 것이다. 박효관이 1876년에 안민영과 함께 『가곡원류』를 편찬하면서 덧붙인 발문에 그러한 사연이 실렸다.
근래 세속의 녹녹한 모리배들이 날마다 서로 어울려 더럽고 천한 습속에 동화되고, 한가로운 틈을 타 즐기는 자는 뿌리 없이 잡된 노래로 농지거리와 해괴한 장난질을 해대는데, 귀한 자고 천한 자고 다투어 행하(行下)를 던져준다. (줄임) 내가 정음(正音)이 없어져 가는 것을 보며 저절로 탄식이 나와, 노래들을 대략 뽑아서 가보(歌譜) 한 권을 만들었다.
그는 이론으로만 정음(正音), 정가(正歌) 의식을 밝힌 것이 아니라 창작으로도 실천했다. 안민영은 사설시조도 많이 지었는데, 박효관이 『가곡원류』에 자신의 작품으로 평시조 15수만 실은 것은 정음 지향적 시가관과 관련이 있다.
님 그린 상사몽(相思夢)이 실솔의 넋이 되어
추야장 깊은 밤에 님의 방에 들었다가
날 잊고 깊이 든 잠을 깨워 볼까 하노라.
사설시조는 듣기 좋아도 외우기는 힘든데, 훌륭한 평시조는 저절로 외워진다. 박효관의 시조는 당시에 널리 외워졌는데, 위의 시조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지금도 널리 외워지고 있다. 님 그리다 죽으면 귀뚜라미라도 되어 기나긴 가을 밤 님의 방에 들어가 못다 한 사랑노래를 부르겠다고 구구절절이 사랑을 고백할 정도로, 그의 시조는 양반 사대부의 시조에 비해 직설적이다. 고종의 등극과 장수를 노래한 송축류, 효와 충의 윤리가 무너지는 세태에 대한 경계, 애정과 풍류, 인생무상, 이별의 슬픔 등으로 주제가 다양하다.
3대 가집으로 『청구영언』, 『해동가요』, 『가곡원류』를 드는데, 『가곡원류』는 다른 가집들과 달리 구절의 고저와 장단의 점수를 매화점으로 하나하나 기록해 실제로 부르기 쉽도록 했다. 남창 665수, 여창 191수로 합계 856수를 실었는데, 곡조에 따라 30항목으로 나눠 편찬하였다. 몇 곡조는 ‘존쟈즌한닙’, ‘듕허리드는쟈즌한닙’ 등의 우리말로 곡조를 풀어써 가객들이 찾아보기도 편했다. 그랬기에 이 책은 가장 후대에 나왔으면서도 10여 종의 이본이 있을 정도로 널리 사용되었는데, 곧이어 신문학과 신음악이 들어왔으므로 전통 음악의 총결산 보고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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