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調 / 五丈原 秋夜月에
- 郭輿 -
<곽여의 시조 2수 중 1수>
오장원(五丈原) 추야월(秋夜月)에 어엿블손 제갈부후諸葛武候
갈충보국(喝忠報國)다가 장성(將星)이 떨어지니.
지금(至今)에 양표충언(兩表忠言/爲國忠誠)을 못내 슬허 하노라
진정공(眞靜公) 곽여(郭輿, 1058~1130)
[예종의 스승이었던 궁궐의 신선]
글 : 신대(新垈)파 35世 선기(善基)
요약
아버지 곽상(郭尙)이 25세 때 차남으로 태어났고 곽탄의 동생이다.
고려 16대 예종의 스승이었으며 문신이자 시인이었다.
어려서 꿈에 어떤 사람이 여(輿)라고 명명하였으므로 이름을 삼고 몽득으로 자를 삼았다.
아버지가 청주에서 향리였으므로 그곳에서 살다가 당시 왕자의 신분으로 모시고 있던 선종의 왕위 등극으로 개경(개성)으로 식구들이 당시 26세에 함께 올라옴.
문과에 급제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내시부에 속해 있다가 합문지후를 거쳐 홍주사로 나아가 홍주를 다스렸다는 기록이 있다.
간단히 그의 중년 이후 나이별 약력을 살펴보면,
37세에 선종의 아들인 헌종에 즉위하였으나,
38세에 선종의 아우인 숙종이 왕위를 찬탈하였다.
이후 숙종 대에 아버지 곽상이 관료의 중요요직을 두루 재직하게 되고, 숙종의 아들이며 세자인 예종의 스승으로서 정신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48세에 예종이 등극하였고, 곽여는 예종이 궁중 순복전에 있으면서 왕의 스승으로 담론에 응하였다고 한다. 이에 사람들은 곽여를 금문우객(궁궐의 신선)이라 하였다고 한다.
49세에 부친 곽상이 별세하였다.
50세에 윤관이 여진을 정벌하여 동북 9성을 축조하였으나 2년 후에 관리문제로 되돌려 준다.
65세에 예종이 별세하고 인종이 즉위하였고, 곽여는 관직에서 물러나 초당에 은거하였다.
69세에 이자겸이 난을 일으켜 스스로 왕이 되려하였으나 척준경에 의해 제거되었다.
70세에 현풍 곽씨의 시조인 곽경이 귀화하였다.
73세에 별세하셨다.
고려왕조 계보도 청주곽씨 계보도
예종 즉위 3년 후 이자겸이 둘째딸(순덕왕후)을 예종과 혼인이 성사되면서 권력욕을 드러내지만, 예종은 생전에 외척의 발호를 상당히 경계하였기 때문에 이자겸은 예종시기에는 그다지 큰 힘을 휘두르지는 못했다.
예종이 죽으면서 14세의 아들인 인종보다는 그 동생들이 왕위를 계승받아 나라의 안정을 유지하고자 한안인 등 신료들이 힘썼으나 이자겸은 인종이 즉위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막대한 권력을 행사한다.
우선 한안인을 역모죄로 몰아 귀양길에 암살하고 그와 관련된 50여명을 귀양, 파직 등의 방법으로 제거하여 기반을 공고히 하고, 후에 조선국공(朝鮮國公)이라는 책봉을 인종에게 강요하고, 셋째딸과 넷째딸을 시집보냄으로서 외손자이자 사위이기도 한 왕을 손가락으로 부르는 등 신하로서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을 하였다 한다.
그리고 자신의 생일을 인수절이라 부르는 등 스스로 국왕처럼 행동하면서 지군국사(국사를 처리하는 직책)로 정하고 임의대로 금나라와 군신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청년이된 인종은 장인인 이자겸을 제거하려 하나 이를 발각당해 이자겸의 집에 감금당하는 신세가 되기도 했으나, 결국 척준경에 의해 제거되어 영광으로 유배 보내진 후에 최후를 마치게 되는데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이자겸의 난이다.
이처럼 정치적인 혼란기에는 문신과 무신을 포함한 여러 신료들이 정권을 잡거나 제거되면서 많은 희생이 따르게 되는데, 이자겸의 반대세력이었던 한안인 측근세력들이 먼저 해를 입게 되고, 나중에는 이자겸의 난을 거치면서 이자겸 측근 세력들이 죽거나 몰락하게 되는데 이때 어느 쪽에 줄을 서느냐가 자신은 물론 식솔과 자손의 미래까지도 영향을 미치게 됨은 뻔한 일이다.
7대 곽여의 경우 이자겸 세력이 강해지는 인종 초에 이미 65세였고, 예종의 아들 인종이 즉위함과 동시에 정계에서 은퇴하였음은 김해의 초당에 은거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조카들인 8대 곽동약과 곽동순 형제가 정치적인 혼란기에 어떻게 대처했는지 궁금하기만 할 뿐이다.
곽여는 어려서부터 맵고 냄새나는 채소를 먹지 않았으며, 여러 아이들과 함께 놀기를 싫어하고 항상 홀로 한방에 거쳐하여 학문에 힘썼다. 종신토록 결혼하지 않았으며 산재에서는 다만 비첩(婢妾)만 데리고 있었다. 그는 몸이 부대하고 수염이 없었으며 눈은 구슬 같았다고 전해진다.
홍주목사로 있을 때 성 바깥 시냇가에 작은 암자를 짓고 장계초당(長溪草堂)이란 이름을 붙이고 공무의 여가만 있으면 매양 그곳에 가서 휴식하였다. 임기가 차서 돌아와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이 되었다고 한다.
왕(예종)이 그가 오래 궁중에 있음에 혹 나가 놀기를 생각할까 하여 서화문(西華門) 밖에 별장(別莊)을 주었다. 송나라로 사신가는 왕자지(王字之)와 문공유(文公裕)를 위하여 자기 별장에서 전송하는 연회를 차리고자 왕에게 청하였더니 왕이 주과(酒果)를 내렸는데, 정도에 지나치게 성대하여 당시의 여론이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 뒤 그가 궁중에서 물러가서 은거할 것을 요구하자 왕이 성동(城東) 약두산(若頭山)에 집을 짓고 살게 하였다. 그는 호를 동산처사(東山處士)라 하고 거처하는 방을 허정당(虛靜堂), 서재를 양지재(養志齋)라 이름지었다. 왕(예종)이 친히 편액(건물 중앙에 거는 현판)을 써서 하사하였다.
예종이 하루는 왕이 산재(山齋)에 미행(微行)하였더니 곽여가 마침 서울에 올라가 없자 오래 산중에서 배회하다가 벽상(壁上, 벽 윗부분)에 시부(詩賦)하고 돌아온 일도 있다. 또 뒤에 산재에 행행(行幸)하였다가 만나자 손을 잡고 반가워 외쳤다고 하니 예종이 대단히 대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직 후에는 김해(金海)의 초당(草堂)에 은거하였다고 한다.
다음 시조 2수가 그의 작이라 하여 전해온다.
"오장원(五丈原) 추야월에 어엿블손 제갈 무후.
갈충보국(喝忠報國)다가 장성이 떨어지니.
지금히 양표충언(兩表忠言)을 못내 슬허 하노라."
"남양(南陽)에 궁경(躬耕)함은 이윤(伊尹)의 경륜(經綸)이요.
삼고초려(三顧草廬)함은 태공의 왕좌재(王佐才)라.
남대후 정대 인물(正大人物)은 무후(武侯)런가 하노라."
년도별 약력 및 주요사건
년도 | 왕력 | 나이 | 세부내용 |
1058년 | 문종12년 | 1세 | 곽상의 둘째로 태어나다 |
1075년 | 문종29년 | 18세 |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 출생 |
1079년 | 문종33년 | 22세 | 왕우(숙종장남, 후에 예종) 출생 |
1083년 | 순종, 선종원년 | 26세 | 7월 순종이 즉위하였으나 병환으로 3개월 만에 죽고 선종 즉위. 청주에서 개경(개성)으로 식구들이 거처를 옮김. |
1094년 | 헌종원년 | 37세 | 3월에 선종이 과로로 병상에 누웠는데 위독함에 곽상(郭尙)이 측근에서 시병하였다. 5월에 헌종(선종의 아들)에게 양위하고 별세하였다. |
1095년 | 숙종원년 | 38세 | 10월에 조카 헌종을 쫒아내고 숙부인 숙종이 즉위 |
1100년 | 숙종5년 | 43세 | 왕우(예종)을 태자에 책봉 |
1101년 | 숙종6년 | 44세 | 대각국사 의천 별세 |
1105년 | 예종원년 | 48세 | 숙종이 고구려 동명왕 묘역에 제사지내고 돌아오다 병사함. 예종(숙종 아들)이 즉위하여 문하시중에 위계정, 문하시랑평장사에 최홍사와 이오, 중서시랑평장사에 윤관, 상서좌복야에 임의, 어사대부에 오연총, 이부상서에 왕가, 예부상서에 정문, 형부상서에 이위, 병부상서에 최유정, 호부상서에 황유현을 각각 임명한다. 예종이 세자일 때 곽여를 사귄 정으로 불러서 궁중 순복전(純福殿)에 있으면서 왕의 스승으로 담론(談論)에 응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그를 금문(金門, 대궐문)의 우객(羽客, 신선)이라고 하였다. |
1106년 | 예종1년 | 49세 | 부친 곽상 73세로 별세. |
1107년 | 예종2년 | 50세 | 윤관의 여진정벌로 동북9성을 얻음. |
1108년 | 예종3년 | 51세 | 이자겸의 둘째딸 순덕왕후 이씨 입궁 (후에 인종을 낳고 왕비에 책봉됨) |
1109년 | 예종4년 | 52세 | 관리문제로 동북9성을 반환하기로 하고 철수 |
1110년 | 예종5년 | 53세 | 개각을 단행하여 문하시중에 윤관, 판리예부사에 최홍사, 문하시랑평장사에 김경용, 중서시랑평장사에 오연총, 추밀원사에 자신의 장인인 이자겸을 각각 임명한다. |
1111년 | 예종6년 | 54세 | 예종이 송나라의 문화를 흠모하였는데 호종단이라는 송나라 출신의 귀화인을 신임하여 그를 우습유(右拾遺)·지제고(知制誥)에 이어 권지직한림원(權知直翰林院), 보문각 대제(寶文閣待制) 등의 관직에 임명하였다. 윤관 죽음. |
1112년 | 예종7년 | 55세 | 승려이면서 왕숙인 승통 왕규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제거됨. 또한 혜민국을 설치하여 빈민들의 질병을 돌보게 함. |
1114년 | 예종9년 | 57세 | 정지상 과거급제 |
1115년 | 예종10년 | 58세 | 여진의 추장 아골타가 금 건국. 예종이 미복으로 곽여가 있는 순복전에 가서 주연을 배설하고 근신들과 함께 글을 강론하다가 새벽이 되어서 헤어진 일이 있었다. |
1116년 | 예종11년 | 59세 | 종친과 곽여를 불러 주연을 베풀고 왕이 시 세편을 짓고 곽여에게 화답시를 지어 올리게 한 일이 있었다. |
1117년 | 예종12년 | 60세 | 송나라에서 대성악이 들어왔는데 이는 궁중음악인 아악의 시초이다 |
1119년 | 예종14년 | 62세 | 천리장성을 세 자 높여 여진(금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
1121년 | 예종16년 | 64세 | 김부식이 임금에게 경사를 강의하는 임무를 맡음. |
1122년 | 인종원년 | 65세 | 4월에 예종이 별세하고 인종이 즉위함. 이자겸이 왕위를 노리는 예종의 아우들을 저지하고 조서에 따라 인종을 즉위시키는데 공헌함. 혜음사, 혜음원 완공함. 이 시기에 관직을 사직하고 은거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됨. |
1123년 | 인종1년 | 66세 | 송나라의 사신 서긍이 고려의 사신으로 옴. 그는 고려에서 보고 들은 것을 모두 기록하여 ‘고려도경’이라는 책을 집필함 |
1124년 | 인종2년 | 67세 | 이자겸이 셋째 딸을 인종과 혼인시킴 |
1125년 | 인종3년 | 68세 | 이자겸이 넷째 딸을 인종과 혼인시킴.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망시킴 |
1126년 | 인종4년 | 69세 | 이자겸이 난을 일으켜서 스스로 왕이 되려 하였으나 척준경에 의해 제거됨. |
1127년 | 인종5년 | 70세 | 거란(요) 멸망 |
1130년 | 인종8년 | 73세 | 곽여 별세. 이를 애통하게 생각한 인종이 명을 내려, 당시 지제고(知制誥;국왕이 반포하는 조서, 교서 등의 글을 지어 올렸던 관직)로 있던 정지상을 시켜 《산재기(山齋記)》를 써 비(碑)를 세움 |
영정
출처
고려사, 고려사절요, 고려왕조실록 등 기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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