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의 강좌 (2)/해월의 한글서예 강좌

궁체사 / 궁체 생성기(정희왕후 수렴청정과 궁체 생성)

채현병 2019. 4. 3. 22:04

         2. 궁체사(宮體史)

 

        2.1. 궁체(宮體) 생성기(生成期)

 

     2.1.1.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수렴청정(垂簾聽政)과 궁체생성(宮體生成)

 

  궁체는 대왕대비로 수렴청정을 한 세조비(世祖妃) 정희왕후(貞熹王后)에게서 비롯되었다. 1468(세조 14) 세조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예종이 19세로 즉위하자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이는 조선시대 첫 번째 섭정이었다. 이후 예종이 재위 12개월 만에 사망하자 정희왕후는 그의 맏아들 덕종의 둘째아들인 자은산군(성종)을 당일로 즉위하게 하고, 이후 7년 동안 섭정을 계속하였다.

 

  국정을 직접 결단하는 대왕대비전하가 주사관(奏事官)으로 하여금 한문으로 적은 문서를 정음(正音)으로 번역하여 아뢰도록 하고, 교지를 내릴 일이 있으면 궁녀가 작성한 정음 문서를 주사관(奏事官)이 한문으로 번역하여 내렸다. 이것은 정음을 깨치지 못한 원상(院相) 및 의정부(議政府) 관리들과 한문을 모르는 대왕대비 사이의 충돌을 막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이 때의 번역자는 주로 사관이나 승지가 되는데, 이 임무를 밑은 사람을 주사관(奏事官)이라 부른다. 이와 같은 절차는 안건이 있을 때마다 반복된다. 이 때 동조(東朝)인 대왕대비의 명령을 받아 공문을 필사하는 궁녀가 지밀에 속한 궁녀이다.

 

  그 당시의 궁체는 매우 엄격하고 근엄한 상황에서 생성되었기 때문에 흘림체라는 글씨꼴이 있을 수 없었다. 이 당시 한글로 된 문서를 작성해야 했던 궁녀들은 내훈(內訓)을 바탕으로 생활해야 했으므로 자율적인 개성의 표출은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엄격하게 통제된 상태에서 직무수행만을 해야 했기 때문에 서법에 맞는 정음 글씨를 써야만 했다.

 

  훈민정음이 반포된 것이 세종 28(1446)이고, 성종이 즉위한 해가 성종원년(1469)이니 햇수로 계산하면 23년이 된다. 이 정도의 기간으로서는 새로 창제 반포한 훈민정음이 익히기 쉽고 쓰기에 편한 글자이긴 했으나, 온 국민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기간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리고 그 당시의 사회, 교육, 신분제도 등의 제반 여건으로 인하여 궁중의 대왕대비를 비롯하여 왕대비, 대비 그리고 중전들은 모두 10세를 전후하여 왕비로, 세자빈으로 책봉이 되어 입궁함으로써 한문에 능통한 사람이 매우 드물었으며, 반면 높은 벼슬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정음을 해독하지 못하는 사람마저 있었다. 조선왕조는 국가의 모든 공용문서를 한문 일변도로 처리하였으나, 수렴청정이라는 통치과정 기간에는 국사처결에 있어서 문자사용을 이원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대왕대비가 왕의 권위를 대신하여 행하는 수렴청정이므로 8년간이라는 긴 세월동안 이러한 글씨를 쓸 때, 그곳에는 자연스럽게 일정한 규범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맑고 깨끗하며, 바르고 단정하며, 정성이 깃든 궁체가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