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의 시조마루/시조학

나의 문학세계 / 채현병

채현병 2019. 12. 31. 19:49

  <한국시조문학 제17호 / 2020년 봄호 PP240~248, 수록>


                                                나의 문학세계
                                                                                                                               海月 채현병


 며칠 전, 시진회 편집실로부터 ‘나의 문학세계’를 주제로 글을 써 달라는 원고청탁을 받았다. 앞뒤 생각 없이 승낙을 해버리고는 이내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며칠 동안 바쁘기도 했지만, 얕고도 얕은 내 문학적 소양으로는 나의 문학세계를 소재로 한 글을 쓰기가 참으로 어려웠고 한편 부끄럽기도 했다. 그래서 원고마감일을 넘기면서까지 미루고 미루다가 이제야 붓을 드는데, 아직도 자신이 없기는 매한가지다. 연목구어(緣木求魚)란 이를 두고 한 말인가 보다. 지금 내가 그 격이다.


    1. 시조계(時調界) 입문과정


 나는 50대 후반에야 형님(春軒 채윤병)의 안내를 받아 <시조와 비평> 신인상으로 시조단에 들어왔다. 그 때 추천해 주신 분이 荷人 오승희 박사님이다. 나는 참으로 늦깎이이다. 그래서 뒤늦게 中觀 최권흥 선생님께 시조와 한학을 사사 받으며, 甲皐 홍영표 선생님과 初志 예찬건 선생님으로부터 시조창을 비롯하여 가곡, 가사를 사사 받기도 하였다.
 
    2. 나의 시조문학세계(時調文學世界)


  가. 바탕


 ‘시조는 종합예술이다’라는 관점에서 나는 매우 행복한 사람이다. 여태까지 칠십여 년을 살아오면서 시조의 바탕이 되는 여러 분야를 다양하게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장기에는 형님으로부터 한글서예를 배웠으며, 사회에 나와서는 조경가로서 자연스럽게 자연 현상과 인간 척도를 익히게 되었고, 이 후에 문화재 애호가로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사랑하게 되었으며, 시조시를 가사로 하여 부르는 가곡, 가사, 시조창도 익힐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 나의 시조연가(時調連歌)


 시조시(時調詩)를 가사로 하여 불리어 온 노래들은 가곡(歌曲), 시조창(時調唱), 노랫가락, 서양가곡 등이다. 이 곡들의 발생 시기를 살펴보면 가곡(歌曲)은 고려 후기, 시조창(時調唱)은 조선 중기, 노랫가락은 조선후기, 서양가곡은 일제강점기이다. 우리의 오랜 역사를 통해서 발생되어 사랑을 받아 온 이들 노래는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애창되고 있으나, 다른 음악 장르에 의해 비해 점점 쇠퇴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옛 부터 우리 선조들은 시조(時調)를 즐겨왔다. 특히 우리네 선비들은 대우주의 운행과 대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며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을 절제하여 왔고, 수신(修身)을 통하여 내면의 세계를 가꾸어 왔다. 그리고 이를 주제로 하여 많은 시조를 읊어왔고, 아울러 높은 정신문화를 향유하여 왔다. 이 속에는 학문과 경륜을 바탕으로 한 선비들의 크나큰 이상향(理想鄕)이 담겨져 있다. 이 노래들을 들어보면 그야말로 광대무변(廣大無邊)하면서도 미묘한 강유(剛柔)의 농담(濃淡)으로 유유(油油)하고 호호(浩浩)하여 마치 선계(仙界)를 오르내리는 듯하다.

 시대는 변한다. 이는 마치 유유(悠悠)히 흐르는 강물 같아서 그 정신은 그대로인데 흐르는 양태(樣態)는 늘 변화하고 있다. 대중문화도 바뀌어 간다. 그냥 바뀌는 것이 아니라 온 지구촌을 하나로 묶어 매우 빠른 속도로 바뀌어 간다. 이에 시조도 바뀌어야 한다. 흐르는 강물처럼 그 정신은 그대로이되 연출하는 무대와 내용은 시대상에 맞추어야 한다.
 나는 오랫동안 시조연가(時調連歌)를 꿈꾸어 왔고, 이를 위해 여러 편의 시조를 지어왔다. 그 이유는 시조를 보다 더 큰 무대에 올려 우리 고유의 정신문화를 세계 속에 심어보자는 의도에서였다. 오늘날의 무대는 전파를 타고 SNS에 의해 점점 더 다양화하고 있으며 대중문화의 추세에 따라 대형화하고 있다. 이 속에 시조를 심어나가려면 무엇보다도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 이를 위하여 시조연가(時調連歌)는 반드시 필요한 시조의 한 장르가 될 것이다. 이에, 나의 시조연가 몇 편을 소개하는 것으로 ‘나의 시조문학세계’에 가늠하고자 한다.


 1) 정조원행, 팔일 간의 축제


 1795년 을묘년은 정조임금이 왕위에 오른 지 20주년이 되는 해이자 아버지 사도세자와 동갑인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회갑을 맞이하는 특별한 해였다. 정조는 아버지가 영면해 계신 수원에서 어머니 회갑잔치를 열기 위해 7박 8일 일정으로 수행원 6,000여명을 이끌고 수원에 행차하였다.
 정조 임금은 이 행차를 통하여 위민정책을 바탕으로 한 이상국가 건설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를 자세히 그려 의궤로 남겼다. 본 시조는 정조임금의 팔일 간의 수원 행차를 기리고, 이를 큰 무대에 올리기 위해 각 장면들을 34수의 시조로 읊었다. 지면 관계로 이 중 6수를 올린다.



 <序 -1>        정조원행(正祖園幸) - 1   


            을묘년 이월구일 묘시(卯時)를 맞이하매            

            어마님 모시옵고 원행(園幸)을 행(行)하셨다           

            아 벌써 이백이십 년 긴 세월이 흘렀다


             * 園幸 : 園(세자, 혹은 후궁의 묘)에 가는 임금의 거둥(行幸;행차).
             * 乙卯년(1795) 윤2월 9일 卯時, 正祖大王의 園幸이 시작되다.



 <序 -2>         정조원행(正祖園幸) - 2


           세월은 흘러가도 행행(幸行)은 광휘(光輝)하고            

           거둥을 회상하니 만물(萬物)의 표상(表象)이라           

           높은 뜻 기리 받들어 전수(傳授)코자 함일레


            * 幸行 : 임금이 대궐 밖으로 행차함.
            * 거둥 : 임금의 행차.



 <序 -3>         정조원행(正祖園幸) - 3
 
           천명(天命)을 받드시매 도리(道理)를 다하시고          

           천심(天心)을 읽으시매 이상(理想)을 펼치도다          

           백성(百姓)도 함께일러니 여민동락(與民同樂) 하리라
 
            * 與民同樂 : 임금이 백성과 더불어 즐김.



 <첫째 날 -1>    숭례문(崇禮門)을 나서며


           숭례문(崇禮門) 열고나니 아침해 싱그럽고           

           주교(舟橋)를 건너가니 봄빛이 완연하다           

           청아(淸雅)한 삼부음조(三部音調)에 금부용(金芙蓉)도 웃는다
 
            * 舟橋 : 배다리
            * 三部音調 : 아악(생황, 대종, 쇠북, 경쇠 등), 일상음악(질장구, 북, 피리 등),
                          군대음악(뿔피리, 진거, 나팔 등)의 합주.
            * 金芙蓉 : 서울 장안 지형을 ‘金 연꽃’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첫째 날 -2>    혜경궁(惠慶宮) 관광(觀光)
 
           붉은 옷 입은 여관(女官) 좌우로 벌려서니           

           황금빛 치장 안에 혜경궁(惠慶宮) 계오시네           

           눈빛이 저리 맑으니 우러르지 않으리
 
            * 덩 : 德應. 왕실 여인(공주, 옹주 등)이 타는 가마.
            * 觀光 : 王(빛)을 바라봄.



 <첫째 날 -3>    정조(正祖) 관광(觀光)
 
           한 조각 붉은 기운 말 위로 내려앉듯           

           융복(戎服)을 걸치시고 전립(戰笠)을 쓰셨으니           

           그 모습 하나만으로 관광(觀光)하게 하시네
 
            * 戎服 : 天翼. 조선시대 무관의 公服.
            * 戰笠 : 융복을 입을 때 갖추어 쓰는 갓.


 2) 한국 선비의 이상향


 2014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이상향을 꿈꾸다’전에서 이인문의 ‘강산무진도’와 함께, 같은 시대의 작자미상 작품인 ‘태평성시도’를 보았다. 이 그림들은 그 당시 새로 도입된 실학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새나라 건설이라는 대전제를 바탕에 깔고 그린 명작들이었다. 이 그림들을 보면서 시조를 안 지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한국 선비의 이상향’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37수의 시조를 지었다. 이 중에 5수를 올린다.



<序詩>      이인문(李寅文)의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자연도 그려내고 사람도 그려내니            

            우리네 이상향(理想鄕)이 여기가 아니던가            

            심안(心眼)을 열어젖히고 빠져들어 보세나


              * 국립중앙박물관 2014특별전 <이상향을 꿈꾸다>전에서



 <2-1>             이상향(理想鄕) - 1


            다섯 개 비단 폭을 잇대어 그리시니            

            여백(餘白)이 시작이라 경물(景物)도 하나 없다            

            오로지 산봉우리가 떼 지어서 날더라


              * 李寅文(1745~1824)의 江山無盡圖 (1)
              - 18세기 선비들이 꿈꾸어온 최고 이상국가의 형상을 그린 그림.
              - 비단에 엷은색. 43.9 * 856.0Cm. 덕수 소장. 



 <2-2>            이상향(理想鄕) - 2


            돌다리 건너거니 입구가 여기로다            

            벼랑길 돌아드니 인간사 별천지요            

            별천지 돌아가 보니 그 곳 또한 별천지다



 <2-3>            이상향(理想鄕) - 3


            또 다시 벼랑길이 높높이 솟구치고            

            천길 속 폭포소리 만봉(萬峰)을 휘젓는데            

            어찌타 기암괴석(奇巖怪石)은 물 만난 듯 뛰노누



 <2-4>             이상향(理想鄕) - 4


           돌문을 들어서니 새 세상 열리거다           

           대자연(大自然) 너른 품에 모두가 슬기롭다           

           승강기(昇降機) 아니라 해도 이상향(理想鄕)을 알겠네


  3) 금메달리스트, 영광의 순간들


  나는 시조를 그 때 그 때 짓는다. 즉석시조이다. 그 순간이 지나면 감흥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금메달리스트, 영광의 순간들’도 매 순간 그렇게 태어났다. 때로는 혼자서, 때로는 가족과 함께 보다가 승리의 순간을 포착하여 즉석에서 짓는다. 2012년 런던올림픽,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 2016년 리우올림픽,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등을 관전하면서 67수의 시조를 뽑아내었다. 이 중에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시조 5수를 올린다.



 <1-개막식>       2018 평창동계올림픽
 
            오천만이 준비해 온 지구촌 겨울축제            

            하나 된 열정으로 서막을 열었나니            

            최고봉 오르기 위해 뛰고뛰고 또 뛰세


             * 제23회 <평창동계올림픽>
              - 개막식 : 2018. 2. 9. 저녁 8시~
              - 전세계 92개국 2925명의 선수들이 참여한 동계스포츠제전. 



 <2-첫 금메달>   쇼트트랙 임효준 선수


            올림픽 밤하늘에 빛나는 금빛질주            

            빙상의 황제인가 쇼트트랙 귀재인가            

            첫 번째 금메달로써 우리 대한 빛내네


             * 평창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500m에서 2분 10초 485로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우리나라에 첫 금메달을 안겨준 임효준 선수를 기려. (2018. 2. 10, 저녁)



<3-스노보드 금메달>   클로이 김


            하늘을 나르는 듯 천상(天上)을 휘저으며           

            설국(雪國)을 넘나드니 대한의 딸이더라           

            금메달 목에다 거니 극락조화(極樂鳥花) 같아라


           * 재미교포 <클로이 김>이 평창동계올림픽 스노보드 여자 하프파이프 우승을
             기려. (2. 13. 오전)



 <4-쇼트트랙>      보아라 태극낭자


            보아라 태극낭자 저 힘찬 레이스를            

            달리다 넘어져도 기어이 쫓아가서            

            휙휙휙 모두 제치고 태극기를 꽂았소


             * 평창동계올림픽 쇼트트랙 3,000m 계주 준결승전에서 보여준 대한민국 대표선수들의
               뛰어난 기량과 불타는 투지를 보고.
               - 출전 선수 / 심석희, 최민정, 김예진, 이유빈 (2. 10, 저녁)



 <5-스켈레톤>        윤성빈 선수


            빛보다 빠른 선수 윤성빈 대표선수            

            광음 속 뱃속 길에 금빛을 뿌려가며            

            이 세상 낮은 자세로 최고봉에 오르네


             * 평창동계올림픽 스켈레톤 윤성빈 금메달리스트의 쾌거를 기려.
                (2018. 2. 16. 오후)



<채현병 약력>


* 약력
  - <시조와 비평>으로 등단
  - 제12회 한국문학신문 문학상 시조부문 대상
  - 제2회 한국시조문학상 대상
  - (사)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 연락처
  - 휴대폰 010-6207-7326
  - 이메일 : ssamgipark@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