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의 시조마루/시조학

새끼줄 악서

채현병 2021. 4. 22. 13:44

김천택의 청구영언은 우리말 새끼줄 악서 시조집의 문서본

새끼줄 악서 추천 1 조회 128 18.03.20 19:39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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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글 본문내용

김천택의 청구영언이, 우리말 새끼줄 악서 시조집의 문서본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말의 옛 기록 방법이 새끼줄 악서였기에, 시조 또한 새끼줄 악서로 기록됨이 흔했으리라. 예를 들어,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가 당시에 우리말 새끼줄 악서로 기록됐다.

우리말의 옛 기록 방법이 없었다고 아는 사람은 '하여가''단심가'가 한문으로 기록됐었다고 볼까?

아니면 구비전승으로 보리라. 우리나라에서 구비전승은 3897 BC 전에 끝났다고 봐야 한다. 현존하는 배달유기가 그때부터 기록됐으니 말이다. 물론 새끼줄 악서가 널리 보급되기 전에는 구비전승이 있었겠으나, 이 글의 범위를 넘는 문제라서 다루지 않는다.

 

우리말이 3897 BC부터 새끼줄 악서로 기록됐다. 그 후 1762년까지 5,650년 동안 쓰였다. 다산 정약용의 시에 기록이 부실하게 지어지기 오천 년 (載籍荒疏五千歲, 재적황소오천세)”이라고 나온다. 다산이 증언한다. 5,000년 동안 썼던 우리말의 옛 기록 방법이 있었다고. 인터넷 검색창에 저 한자 7자를 입력하면, 저런 시가 실제로 나온다.

 

우리말의 옛 기록 방법을 온 민족이 망각했지, 없었음이 아니다. 우리 조상들이 5,650년 동안 썼던, 새끼줄 악서라는 원시적 기록 방법이 있었다.

 

다시 청구영언으로 돌아간다. 아마 김천택이 새끼줄 악서의 악사였으리라. 읽는이가 이 악사라는 직업을 잘 알아야 한다. 음절을 초성+중성+종성으로 분석하는 교육과 훈련을 몇 년간 이수해야 악사가 될 수 있었다. 음절을 초성+중성+종성으로 분석하기를 속문(屬文)이라고 불렀다. 속문의 기술자가 악사였다. 이 악사가 말의 음절을 초성+중성+종성으로 분석하여, 3개의 사운드 코드로 바꾸고, 그 사운드 코드를 새끼줄에 매듭으로 기록했다. 보통 사람은 속문이 안 돼, 말을 기록하지 못 했다.

 

해독은 이렇다. 사운드 코드를 연주하며, 초성의 값, 중성의 값, 종성의 값을 떠올린 후 그 셋을 합쳐 음절을 발음한다. 듣는이는 그 발음을 듣고, 새끼줄 악서를 이해한다.

새끼줄 악서의 악사는 말의 기록과 해독 말고, 기록물의 전승이라는 일도 했다. 예를 들어, 배달유기를 176세대의 악사들이 5,300년 동안 전승하여, 그 한역본이 현존한다. 단군세기를 123세대의 악사들이 3,696년 동안 전승하여, 그 한역본이 현존한다.

 

읽는이가 기억할 만한 전승의 사례가 소전거사이다. 이 이가 전승했던 기록물의 한역본이 이명의 진역유기와 범장의 북부여기이다. 이암은 단순히 한역하지 않고, 기록물을 바탕으로 태백진훈을 저술했다. 우리나라의 5,650년 동안의 새끼줄 악서의 시대에서 유일하게 이름이 남은 악사가 바로 이 소전거사이다.

 

소전거사는 몇 천 년 묵은 경전과 사서를 전승했는데, 김천택은 고작 몇 백 년 묵은 시조나 전승했다. 몇 천 년 묵은 새끼줄 악서는 이미 근대 조선의 조정이 다 찾아내 한역을 마친 후였다. 남은 건 고작 몇 백 년 묵은 시조뿐이었. 그나마 제대로 하려면, 스승 악사를 잘 만나야 했다. 스승이 전승하는 새끼줄 악서가 많아야, 제자 악사가 편했다. 스승이 없으면, 엄청나게 불리했다.

 

김천택이 자기 소유의 새끼줄 악서를 청구영언으로 문서화했음은 현대인이 모르는 의미가 있는 행위였다. 첫째, 김천택이 새끼줄 악서의 악사 생활을 접을 생각이었. 새끼줄 악서가 악사의 장사 밑천이었. 문서화는 그 장사 밑천의 가치를 제로로 만든다. 따라서 악사 생활을 접을 생각이 아니라면, 하지 않을 행위이다. 둘째,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문서를 유포할 만한 때였다. 달리 말해, 훈민정음을 읽는 인구가 전체의 10%쯤 되는 때였다. 그 이하로는 회의감이 커서 문서화의 결정이 어렵다. 30%는 너무 높다. 10%쯤이 적당한 때라는 생각이 든. 그러므로 청구영언이 문서화됐던 1728년경 우리나라의 전체 인구 중 10%가 훈민정음을 읽었다고 보라.

 

1728년이 우리나라에서 충격적인 해가 될 뻔했다. 배달의 정사인 배달유기, 단군 조선의 정사인 단군세기, 그 밖의 많은 사서와 새끼줄 악서들이 일제히 문서화되어 유포됐으리라. 조상들이 크게 놀랐으리라. “뭔 놈의 옛 기록이 이리도 많냐?”는 비명이 들렸으리라. 그것이 악사들의 유일한 목적이었. “우리 문자로 문서화할 때까지 전승한다.”

 

그런데 이암이 1363년 단군 조선의 정사를 한역하며, 추세가 크게 달라졌다. 단군세기를 읽고 후끈 단 세종이 배달유기를 찾으라고 신하들을 닦달했다. 결국 배달유기를 찾아내 한역했다. 또 근대 조선의 조정에서 옛 기록 찾기 붐이 일었다. 100년 동안 많은 사서와 새끼줄 악서들을 찾아내 한역했다.

 

그 한역본들을 모두 도난당했음은 한 달 전쯤 글을 올렸다.

 

, 정작 청구영언의 책 이름을 설명하지 않았다. 청구(靑丘)는 배달의 14대 환웅인 치우 천왕이 중국 대륙의 중심부까지 영토를 확장한 후 청구국(靑丘國)이라고 칭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우리나라를 가리킨다. 영언(永言) 중 영에 읊다의 뜻이 있다. 따라서 청구영언은 우리나라가 말을 읊다의 뜻이다.

 

그런데 영언이 특별한 의미로 쓰였는지 모른다. 우리말 새끼줄 악서의 발음을 삼국시대에는 노래 가()라고 불렀다. 악기를 연주하며 발음함이 마치 노래를 부르는 듯했으리라. 그런데 노래와 결승에 기록된 말의 발음을 둘 다 노래 가()라고 표기하면, 혼동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를 달리 표기한 것이 영언인 듯싶다. 그 경우라면, 청구영언은 우리나라가 결승에 기록된 말을 발음하다의 뜻이다. 그런 뜻이라면, 김천택이 새끼줄 악서의 악사였고, 자기 소유의 새끼줄 악서를 청구영언으로 문서화했다는 추측이 맞는다.

 

영언이 조선왕조실록에 64, 승정원일기에 108건의 용례가 나온다. 다 읽고, 정확한 의미를 아는 대로 글을 올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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