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의 시조마루/시조학

삼호정시사

채현병 2021. 4. 24. 12:13

삼호정시사(三湖亭詩社)

 

김금원(金錦園)은  1845년(헌종 11)에는 김덕희와 함께 서도와 금강산을 유람하다가 1847년(헌종 13)에 돌아와 서울 용산에 있는 김덕희의 별장인 삼호정(三湖亭)에 정착하였다. 김금원은 이곳에서 사대부들과 시를 지으며 어울리는 동시에 여성 4명과도 <삼호정시사(三湖亭詩社)>를 만들어 교류하었다. 삼호정시사는 여성 문학의 새 지평을 마련한 조선 최초 여성 시인들의 시 모임이었다. 이들은 우아한 성품과 뛰어난 재주로 당시 명사들과 교유하며 시를 주고받았고 이들 여류들의 시는 1800년대 서울 장안에 인기 문학작품이었다. 연천 김이양의 소실인 성천 기생 운초, 화사 이판서의 소실인 문화 사람 경산, 송호 서기보의 소실인 원주 사람 죽서, 추천 홍태수의 소실인 자기 동생 경춘 등이 회원이었다.

 

삼호정(三湖亭)

 

위치 : 서울 용산구 산청동 200 일대

현재 산청동부군당 아래 산천동 마을마당 소공원 내에 표석(서울시 표석 661, 용산구 5)이 세워져 있다.

 

김금원(金錦園1845년(헌종 11) 김덕희와 함께 서도와 금강산을 유람하다가 1847년(헌종 13)에 돌아와 서울 용산에 있는 김덕희의 별장인 삼호정에 살면서 같은 처지의 벗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을 규합하여 시문을 지으면서 시단을 형성하였다. 당시 용산 한강부근은 풍광이 좋아 사대부들의 정자나 별장이 많았다. 그 중에 특히 삼호정은 특히 경치가 아름다웠다고 한다.

 

 

남장하고 조선팔도 여행한 여류시인 김금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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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에서 태어난 김금원은 당시 조선 여성으로는 드물게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워 사서삼경 등 유교경전과 역사서를 통달했고 시문을 지을 수 있었다. 책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일찍부터 깨달았다. 그러나 책에 머물지 않고 담장 밖 세상을 향한 열망을 품었다. 그녀가 여행을 결심했을 때 아버지는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1850년 그녀는 자신의 모든 여행 과정을 기행문으로 남겼다. 충청도 호서 지방의 호(湖), 금강산과 관동팔경의 동(東), 평양과 의주 등 관서지방의 서(西), 서울 한양의 낙(洛)을 따서 책 이름을 `호동서락기'라 했다. 제목 자체가 그녀의 여행지인 셈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금원은 서울 한강변의 삼호정이라는 정자를 중심으로 여성으로만 구성된 시모임 `삼호정시사(三湖亭詩社)'를 만들었다. 삼호정시사는 여성 문학의 새 지평을 마련한 조선 최초 여성 시인들의 시 모임이었다. 김금원은 일생 하고픈 일을 기어이 해냈던 대표적인 의욕 있는 여성이었다.

 

 

** 김금원(金錦園, 1817~?)  호는 금원(錦園). 강원도 원주(原州)출신. 삼호정시단(三湖亭詩壇)의 동인이다.

  원주 출신으로 열네 살 때인 1830년에 남장을 하고 금강산 여행을 다녀왔다. 그의 부모에 대해선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어린 딸이 금강산 여행을 다녀오도록 허락한 것을 볼 때 상당한 경제력과 자유분방한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 추정된다.

 금강산 여행을 다녀온 이듬해 원주 관아의 기생이 되었다가 김덕희(金德喜)의 소실이 됐다. 김덕희는 추사 김정희의 육촌으로 결혼 당시에는 벼슬을 하지 않고 있었다. 뒤에 평안도 의주로 발령 나자 김금원은 남편보다 먼저 황해도와 평안도를 여행한 뒤 의주에서 임기마칠 때까지 함께 생활했다.

 김덕희는 의주 근무를 마친 뒤, 1847, 서울 용산의 삼호정(三湖亭) 부근에 정착했다. 김금원은 삼호정에서 사대부들과 시를 지으며 어울리는 동시에 여성 4명과도 <삼호정시사(詩社)>를 만들어 지냈다. 연천 김이양의 소실인 성천 기생 운초, 화사 이판서의 소실인 문화 사람 경산, 송호 서기보의 소실인 원주 사람 죽서, 추천 홍태수의 소실인 자기 동생 경춘 등이 회원이었다.

 열네 살 때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유람하면서 지었던 시와 평양과 의주를 여행할 때 지었던 시 등을 모아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 1850)>를 만들었다. 그 뒤 행적은 전하는 것이 없어 미상이다.

*김금원이 시우(詩友)인 죽서(竹西)의 시집에 붙인 발문에서.

[출처] 열네 살에 남장(男裝)하고 금강산 유람한 김금원|작성자 아산선인

 

 

 

 <생애 및 활동사항>

 어려서부터 병을 잘 앓아 몸이 허약하므로 그의 부모가 글을 배우도록 했는데, 글을 뛰어나게 잘해서 경사(經史)에 능통했고 고금의 문장을 섭렵하여 시문에 능했다. 평생 남자로 태어나지 못하였음을 한하면서 1830년(순조 30) 3월 14세 때 남자로 변장하고 단신 금강산을 유람하여 견문을 넓혀 시문을 짓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돌아와서 시랑이며 규당(奎堂)학사인 김덕희의 소실이 되었다. 1843년(헌종 9)에는 27세의 나이로 문명을 떨쳐, 세상에서 ‘규수 사마자장(司馬子長)’이라고 칭호하였다.

 1845년(헌종 11)에는 김덕희와 함께 서도와 금강산을 유람하다가 1847년(헌종 13)에 돌아와 서울 용산에 있는 김덕희의 별장인 삼호정에 살면서 같은 처지의 벗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을 규합하여 시문을 지으면서 시단을 형성하였다. 이때의 동인들이 김운초(金雲楚)·경산(瓊山)·박죽서(朴竹西)·경춘(瓊春) 등이었다.

 1850년(철종 1)에는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를 탈고하고 1851년(철종 2)에 『죽서시집』 발문을 썼다. 일찍부터 충청도·강원도·황해도·평안도 일대, 즉 호동서락(湖東西洛) 등의 명승지를 주유 관람하고, 또 내·외금강산과 단양일대를 두루 편력하면서 시문을 써서 시 「호락홍조(湖洛鴻爪)」 등이 수록된 시집 『호동서락기』를 남겼다.

 

 

 1817년 강원도 원주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난다. 가사나 바느질 대신 글공부를 했다. 경서와 사서의 대략을 통하고 옛 문장들을 본받아 시와 문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열네 살에 부모 허락을 받고 남장(男裝)을 한 채 여행을 떠난다. 충청북도 제천에 있는 의림지를 시작으로 단양을 거쳐 금강산 일대를 마음껏 누비고 관동팔경을 빠짐없이 유람한 후 설악산을 관통하였다. 한양을 섭렵한 후 그는 첫 여행을 멈췄다.

 ‘여자가 남자의 복색을 갖춤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그침이 옳을 것이다’라고 스스로 말한 후 그는 여성으로 돌아왔다. 몇 년 후 김덕희의 소실이 되었고, 29세가 되던 해 의주부윤의 벼슬을 받은 남편을 따라 평양을 유람하고 의주에서 2년을 지낸다. 31세가 되던 해 벼슬에서 물러난 김덕희와 함께 한양 용산 지역에 있던 삼호정(三湖亭)에 머물면서 여성 시회(詩會)를 조직하여 19세기 여성문학사에 한 획을 긋는다. 34세가 되던 1850년 봄날 자신이 여행했던 기록들을 모아 ‘호동서락기’를 완성하였다. 1851년에서 1856년 사이의 어느 날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하였다. 19세기 조선 여성문학사의 중심에 우뚝 선 그녀가 바로 김금원(金錦園)이었다.

 

 그는 짐승이 아닌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야만국이 아닌 조선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겼다. 다만 가난한 집에서 여자로 태어났다는 것을 불행으로 생각했다. 총명하고 넓은 식견을 가졌어도 여성에게는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채 흔적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을 슬퍼하였다. 강한 여성의식은 동생인 경춘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금원의 눈에 비친 경춘은 외모와 문학적 자질이 뛰어나 고금(古今)에서 구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금원은 ‘경춘이 규중의 여자였으므로 세상에 쓰이지 못했음’을 애석해했다.

 

 의주 생활 2년간 보았던 풍경 중 가장 주목했던 것은 바로 남다른 기녀들의 모습이었다. 금원이 기록한 기녀들은 아름답게 화장을 하고 군복을 입고는 굳센 말에 올라타 대오를 갖추고, 호각과 북소리에 맞춰 마장 안으로 들어간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당당하였다. 삼호정에서 지냈던 시간 역시 당대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주체적이었다. 운초(雲楚)라 불렸던 김부용(金芙蓉), 경산(瓊山), 박죽서(朴竹西), 경춘 등과 함께 시회를 주도했다. 이 모임을 삼호정시단(三湖亭詩壇)으로 칭하기도 한다. 특히 금원은 당대 최고의 문인인 홍한주(洪翰周), 신위(申緯), 서유영(徐有英) 등과 문학적 교류를 가졌다. 삼호정시단 활동은 동우회 수준을 넘어 여성문학사의 지평을 넓혔다.

 

 금원은 기괴한 곳을 탐색하고 이름난 곳을 여행했던 사실에 대하여 ‘남자가 할 수 없는 것을 해냈다’는 자부심을 강하게 드러냈다. 평생지기였던 운초 역시 금원을 여자 중 영웅호걸이라 불렀고 남자가 되지 못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음을 슬퍼하였다. (강문종 제주대 교수)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

근대
금원김씨
조선 말기, 1851년(간행)
시집
문헌
1책
문학/한문학
신구현(개인소장)

요약 조선후기 여류시인 금원 김씨의 시 「제천의림지」·「유점사」·「시유경성」 등을 수록한 시집.

 

개설

1책. 사본. 여류시인인 저자가 호중(湖中) 4군과 관동지방의 금강산 및 관동팔경, 관서지방에서 특히 의주, 그리고 한양일대를 두루 유람하면서 보고 느낀 것을 시로 쓴 것을 모은 시집이다. 발문 ‘호동서락기’가 시집명칭이 되었다.

발문은 1850년(철종 1)에 쓰고, 편집은 이듬해에 하였다. 서문격으로 김원근(金瑗根)이 머리시를 쓰고 주를 달아 금원의 약력을 소개하였다. 발문에서는 이 책의 전말을 썼고, 「음사절(吟四絶)」의 머리 주에서는 삼호정동인들을 소개하면서 그 시의 특징을 저자가 쓰고 있다.

내용

이 시집에는 ‘호락홍조(湖洛鴻爪)’라는 항목으로 「제천의림지(堤川義林池)」 외 10편과 금강산시로 「유점사(楡岾寺)」 외 4편, 관서지방의 시로 「통군정관개시거화(統軍亭觀開市擧火)」 외 3편, 낙양의 시로 「용산삼호정(龍山三湖亭)」 외 6편이 실렸다.

저자가 14세에 지은 「시유경성」이라는 시에서는 처음 서울에 와본 감상을 적었는데, “내고향 아니라 탓할 것 없으니, 부평초처럼 떠돌다 이르는 데가 고향이라.” 하는 달관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대체로 유람한 자취를 남긴 기행시가 많다. 『조선여속고(朝鮮女俗考)』에는 「음사절」 등 12편이 수록되어 있다. 신구현(申龜鉉)이 소장하고 있다.

 

개요

湖東西洛記. 조선 후기의 여성 문인 금원김씨(錦園金氏, 1817년 ~ ?)가 1830년(순조 30) 3월에 남자로 변장하고 호중(湖中) 4군과 관동 지방(금강산관동팔경), 관서 지방(의주), 한양을 유람하며 지은 글들을 모아놓은 기행 문집.

내용

 


조선 후기의 여류 시인인 금원당 김씨가 14살 소녀이던 1830년에 강원도 원주에서 의주를 거쳐 충청북도 제천 의림지금강산 관동팔경을 돌아 설악산서울까지 약 1,000km를 여행하며 지은 시와 유람기를 모아놓은 책이다. 세상의 눈을 피하고자 머리를 동자처럼 땋고, 남자 옷을 입은 채 여행하였다.

이 여행을 계기로 그녀의 용기에 감동한 규당(奎堂)학사 김덕희의 소실이 되었고, 훗날 헌종으로부터 세상의 문명을 떨쳤다 하여 '규수 사마자장(司馬子長)'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후 김덕희의 별장인 삼호정에 살면서 같은 처지의 여성 벗들인 김운초(金雲楚) · 경산(瓊山) · 박죽서(朴竹西) · 경춘(瓊春) 등과 어울리면서 그들을 규합하여 시문을 지으면서 여류시인단을 형성하였다. 호동서락기 저술 이후에도 망한양(望漢陽), 강사(江舍) 등의 시를 남겼고, 당시 유명했던 같은 여성 문인인 죽서박씨(竹西朴氏)가 쓴 여성 시집인 죽서시집(竹西詩集)의 발문을 써주기도 하였다.

병인양란록, 의유당일기, 병자일기, 산성일기, 계축일기, 한중록, 난설헌시집, 정부인 안동장씨 실기, 내훈 등의 여러 작품들과 함께 조선 시대 여성들의 문학 사상을 알 수 있는 작품이다.

 

 

김운초(金雲楚)

 

김부용(金芙蓉)의 호는 운초(雲楚),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의 예술인이다. 평안남도 성천(成川)에서 태어나 성천의 관기(官妓)가 되었다가, 연천(淵泉) 김이양(金履陽·1755~1845)을 만나 첩실이 되었다. 어린 나이에 기녀가 되어 소실(小室)로 생애를 마감한 탓인지 생년월일조차 정확하지 않다.

기녀 김운초가 관료 김이양의 첩실이 된 것은 신묘년(1831)이다. 이때 운초는 20대였고, 김이양은 77세였다. 김부용의 시집 ‘운초기완(雲楚奇玩)’ 말미에 “지난 신묘년에, 나는 칠십칠세이셨던 연천노인의 소실이 되었다”라고 회고하였다. 김이양의 졸년이 1845년임을 감안할 때 두 사람이 부부의 인연으로 산 기간은 14년 정도 되고, 부실(副室)이 되기 전 성천의 기녀 신분일 때부터의 기간까지 감안하면 대략 20년의 인연이다.

운초는 성천의 관기였을 때, 김이양을 대면하였다. 김이양은 57세 때인 1811년 12월, 홍경래 난의 진압을 위해 함경감사에 부임하였다가 1815년까지 서북지방에 머물렀는데, 이때 운초를 알게 되었다. 김이양은 홍성 사람으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1561~1637)의 후손이다. 김상용→광현(光炫)→수빈(壽賓)→성익(盛益)→시술(時述)→헌행(憲行)→이양(履陽)으로 이어지는 가계이다. 김이양이 1843년 과거에 급제한 지 예순 돌이 되는 회방년(回榜年)을 맞아 충청도 홍성·결성·천안 일대를 성묘할 때 부인의 예로써 행차에 함께하였다.

1832년 2월. 운초는 김이양을 따라 성천에서 한양으로 이주해 왔다. 남편과 함께 한강 가의 별장 일벽정에 머물며 승경(勝景)을 유람하고, 남편 벗들의 각종 연희에 참여하여 시·그림·음악·춤 등의 예술가로 활동하였다. 한양 최고의 경화사족(京華士族)들과 여유와 자적의 문화 활동을 유감없이 만끽하였다. 이때 함께한 여성 예술인이 경혜(景蕙)·경산(瓊山)·금원(錦園)인데, 운초처럼 기녀에서 소실이 된 예술인들이다. 운초는 이 소실 그룹의 친구들과 19세기 여성 예술사를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특히 운초·경산·금원·경춘·죽서 등 다섯 명은 ‘삼호정시사(三湖亭詩社)’라는 시 동아리를 결성하여 문학의 창작과 감상, 향유 활동을 주도하고 예술 문화계의 선두그룹으로 활동하였다.
조선시대 여성문화에서 볼 수 없었던 ‘여성 동료와 그룹’이라는 면에서 주목된다. 현재 알려진 김운초의 시는 300여 수로, 시집 ‘운초기완’, ‘운초당시고’, ‘운초시’ 등의 형태로 전해진다.
19세기 최고의 여성 예술가로 활동했던 김운초. 그녀의 삶은 화려한 듯 쓸쓸하였다. 운초는 죽어서도 남편의 곁에 묻히길 소원하였다. 그녀의 뜻대로 천안 광덕산 기슭 김이양의 무덤 가까운 곳에 운초의 무덤이 허허롭게 있다.

 

 

<박죽서(朴竹西)>

 

조선 후기의 여류 시인 박죽서(朴竹西)의 '춘조(春鳥)'이다.

1819년 박종언의 庶女로 태어났으나 시문과 한시에 능하였으며 후에 서기보의 소실이 되었다. 33세에 병으로 하직하자 남편인 서기보가 죽서의 유고(遺稿)를 모아 '죽서시집'을 펴내었다.

 

窓外彼啼鳥 (창외피제조): 창 밖에 우는 저 새야

何山宿便來 (하산숙편래): 어느 산에 자고 이제 왔느냐

應識山中事 (응식산중사): 당연히 산 중의 네가 알리니

杜鵑開未開 (두견개미개): 두견화는 피었는가 아니 피었나

 


만춘(晩春)

꽃이 지는봄 첮가을과 같네
밤이 되니 은하수도 말게흐르네
한많은 이몸 기러기 만도 못한신세
해마다 임이 계시는 곳에 가지도 못하고 있네.

 

삼십대 젊은 나이로 요절한 죽서(竹西)

 

금원과 동년배로 원주 출신 조선 후기의 여류시인이다.

본관은 반남(潘南). 호는 죽서(竹西). 박종언(朴宗彦)의 서녀이며, 서기보(徐箕輔)의 소실이다.

대략 1817∼1851년에 생존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워 어려서부터 10세에 이미 뛰어난 시를 지어 천재성을 발휘하였는데,

시문은 매우 서정적이며 대개 임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여심과 기다리다 지친 규원(閨怨)을

나타내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데 죽서시집(竹西詩集)을 남기고 있다.

 

죽서시집 [竹西詩集]
조선 후기의 여류시인 죽서박씨(竹西朴氏)의 시집.
구분 목활자본?시집
저자 죽서박씨
시대 1851년
소장 국립중앙도서관?고려대학교 도서관

1851년 남편 서기보(徐箕輔)의 재종 돈보(惇輔)가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돈보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작자의 친구인 여류시인 금원(錦園)의 발문이 있다.

오언절구 1수, 칠언절구 40수, 칠언율시 125수, 모두 166수의 시가 실려 있다.


맨 앞의 10세에 지은 오언절구 《십세작(十歲作)》은 작자의 천부적인 시재(詩才)를 보여 준다.

임을 그리는 간절한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기정(寄呈)》 《술회(述懷)》,

덧없는 세월을 한탄하며 여자로서 늙어가는 슬픔을 나타낸

《우음(偶吟)》 《제석(除夕)》 등이 있다.
《추일기금원(秋日寄錦園)》 《연견금원서(連見錦園書)》 등

금원과 창화(唱和)한 시도 몇 수 실려 있다.

 

窓外應識 (창외응식)

窓外彼啼鳥 (창외피제조) 창밖에 우는 저 새야
何山宿更來 (하산숙경래) 어느 산에 자고 왔느냐?
應識山中事 (응식산중사) 산중 일을 너는 응당 알리니
杜鵑開不開 (두견개불개) 진달래 피었더냐 안 피었더냐?

미모가 뛰어나고 침선에도 능하였다 하며, 동시대의 여류시인인 금원(錦園)과는 같은 원주사람
으로 시문을 주고 받으며 깊이 교유하였는데 병약하여 30세 전후에 죽었다.

 

만춘 (晩春)

낙화천기사신추(落花天氣似新秋) 꽃이 지는 봄은 첫 가을과 같네
야정은하담욕류(夜靜銀河淡欲流) 밤이 되니 은하수도 맑게 흐르네
각한차신불여안(却恨此身不如雁) 한 많은 몸은 기러기만도 못한 신세
년년미득도원주(年年未得到原州) 몇 년 동안 고향 땅 원주에 가지 못하고 있네

 

달 가고 해 가면 별은 멀어도 산골짝 깊은 골 초가 마을에
봄이 오면 가지마다 꽃 잔치 흥겨우리 아 이제는 손 모아 눈을 감으라
고향 집 싸리 울엔 함박 눈이 쌓이네 고향집 싸리 울엔 함박 눈이 쌓이네
-고향의 노래 김재호 작시 이수인 작곡

 

시집가서 아들 낳고 딸 낳고 남편 사랑 받으며 잘 살아도 멀리 두고 온 고향 집

친정 부모 형제가몹시 그리울 때가 어찌 없겠는가.

죽서는 어느 늦은 봄날 문득 고향이 그토록 그리워서 밤 하늘 울며 날아가는 기러기에

자신의 신세를 비유해 봤을까…


안타까운 것은 이런 천재 여류시인들이 거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스물일곱 아직 꽃다운 나이에 바람 부는 어느 날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 이런 슬픈 노래를 나직이 읊조리며 꽃잎처럼 스러져 가 버린

허란설헌이 그렇고 삼십대로 인생을 활짝 꽃피울 나이에 자기의 죽은 시체를 묻지 말고

버러지들의 밥으로 주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어간 황진이가 그렇고,

그 황진이의 무덤에 술 한잔 따르며 인생의 허무를 탄했던 풍류남아 임제도 38살의 아쉬움이

많이 남는 나이에 숨을 거두었으며, 여기 30대 전후인 죽서의 삶을 마감하는 모습이 또한 그렇다.

 

삼호정시(三湖亭詩)

서호(西湖)의 좋은 경치 이 정자가 제일인데,
생각나면 올라가 마음대로 노닌다네.

양쪽 언덕의 봄 풀은 비단처럼 깔려 있고,
강 위의 푸르고 누런 물결 석양이 흘러간다.

구름이 골짜기를 덮으니 외로운 돛대 보이지 않고,
꽃이 낚시터에 떨어지는데 피리소리 멀리서 들린다.

가 없는 풍인(風烟)을 남김없이 거둬들이니,
비단 주머니의 밝은 빛이 난간 머리에 번쩍인다.

 

-자료-

耳谷齋블로거http://blog.daum.net/bs2158/17442846

 

 

경산(瓊山)의 회고

"내가 일찍부터 금원의 이름을 듣고는
선망하고, 사모하였는데 마침 강가 이웃에 살게 되었다.
뜻을 함께하여 모이니 무릇 다섯 사람 이었는데 생각하는 것이 넓고 풍류가 넘쳐 흘렀다.
이름난 정자에서 술잔 기울이며 시를 읊조리니 그 즐거움이 도도했다.
아름다운 안개비, 옥 같은 눈가루는
재자(才子)의 붓끝에서 춤추는 듯하고
붉은 꽃, 푸른 풀은 시인의 입에서 모두
향기를 뿜는 듯했다.
이 모두는 마음 속에서 저절로 우러나는
자연스런 즐거움으로 스스로 멈출 수 없는 것이었다."

 

(카카오스토리 문창섭 님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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