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의 시조마루/시조학

강원감사 신헌조(申獻朝)의 시조 (2)

채현병 2021. 4. 26. 20:06

님 만난 두 더위

 

각시(閣氏)네 더위들 사시오. 일은 더위 느즌 더위 여러 해포 묵은 더위 오륙월 복 더위에 정(情)에 님 만나이셔 달 발근 평상(平牀) 우희 츤츤 감겨 누엇다가 무음 일 하엿던디 오장(五臟)이 번열(煩熱)하여 구슬땀 들니면서 헐덕이난 그 더위와 동지달 긴긴 밤의 고은 님 픔의 들어 다스한 아람목과 둑거온 니블 속에 두 몸이 한 몸 되야 그리져리하니 슈죡이 답답하고 목굼기 타올 적의 웃목에 찬 슉늉을 벌덕벌덕 켜난 더위 각시네 사려거든 소견대로 사시압소.

쟝사야 네 더위 여럿 듕에 님 만난 두 더위난 뉘 아니 됴화하리 남의게 파디 말고 브대 내게 파라시소.

<신헌조(申獻朝) 봉래악부(蓬萊樂府) 20>

길지만 걸판지고 재미있는 시다. 모를 말이 하나도 없다.

***이 시조를 지은 신헌조(申獻朝, 1752~1807)에 대해서 알아본다. 이하의 글은 아래 블로그에서 옮겨온 것이나 임의로 고친 곳이 여러 군데 있다.

 

https://blog.naver.com/jaseodang/220669230972

신헌조는 정조·순조 때의 문신이다. 자는 여가(汝可), 호는 죽취당(竹醉堂)이며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실록과 그의 행장(行狀)에 의하면, 31세(1782, 정조6)에 관학 유생으로 송덕상과 홍국영, 홍낙순 등의 죄를 상소했다. 38세(1789, 정조13)에 문과에 장원하여 부교리, 교리가 되었다. 40세에 수찬으로 홍낙안을 치죄하라고 상소했고, 전라도 도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암행어사가 되었다. 42세에 부친상을 당했고, 44세에 대사간이 되었다. 46세에 승지를 거쳐 양주목사가 되었다.

50세(1801, 순조1)에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듬해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다. 52세에 민가에 불이 나서 횡성 창고의 곡식 900여 석이 타자 세를 탕감하고 진휼했다. 53세에 강원도 내 여러 곳에 산불이 나서 재산과 인명의 피해가 많았다. 진휼미와 목재 운반의 일로 민폐와 민원을 일으켰다고 탄핵받아 파직되고, 단성현(丹城縣)에 유배됐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55세에 대사간이 되었으나, 권유(權裕)의 옥사에 대한 상소로 삭출(削黜)되어 다음 해 죽었다. 시조집 ‘봉래악부(蓬萊樂府)’에 시조 25수가 전한다.

  이 몸 나던 해가 성인(聖人) 나신 해올러니

  존고년(尊高年) 삼자은언(三字恩言) 어제런 듯하건마는

  어찌타 이 몸만 살아 있어 또 한 설을 지내는고.

  창오산(蒼梧山) 어디메오 백운향(白雲鄕)이 멀어졌네.

  이왕은총(已往恩寵)이 꿈속에 봄이로다.

  백수(白首)에 호올로 살아 있어 눈물겨워 하노라.

  대한(大漢)이 경퇴(傾頹)할 제 반가울손 유황숙(劉皇叔)이

  풍설(風雪)을 무릅쓰고 초려(草廬)에 삼고(三顧)하니 평생에 품은 경륜 한때가 바쁘거든

  어찌타 긴긴 봄날에 때 그른 잠만 자는고.

 

  에굽고 속 휑뎅그레 빈 저 오동나무

  바람 받고 서리 맞아 몇 백 년 늙었던지 오늘날 기다려서 톱 대어 베어 내어 잔 자귀 세 대패로 꾸며내어 줄 얹으니

  손아래 둥덩둥당딩당 소리에 흥을 겨워하노라.

  왕준누선하익주(王濬樓船下益州)하니 천고영웅쾌활사(千古英雄快豁事)라

  평오(平吳)할 큰 계교를 몇 해를 경영(經營)한지 용양만곡(龍驤萬斛)을 오늘날 이뤄내어 금범(錦帆)을 높이 달고 장풍(長風)에 흘리 놓아 타루(舵樓) 높은 곳에 큰 칼 짚고 앉았으니 한 조각 석두성(石頭城)을 경각간(頃刻間)에 파(破)하려든

  우습다, 삼산노장(三山老將)은 배 돌으라 하느니.

​ 이상은 정조 임금에 대한 그리움의 정과 자신의 포부를 드러낸 작품이다. 처음 두 수는 정조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첫 수에는 임금과 자신이 같은 해[壬申年]에 태어난 것을 남다른 인연으로 생각하고, “나이 든 이를 존중한다.”던 왕의 말씀이 기억에 생생한데, 임금은 49세로 붕어하고 자신만 살아 있어 또 한 해를 보낸다고 하였다.

 둘째 수는 총애해 주었던 임금을 따라 죽지 못한 회한의 눈물을 흘린다는 내용이다. 창오산(蒼梧山)은 중국 호남성 영원현 동남쪽에 있는 산인데, 순임금이 순수(巡狩)하다가 죽은 곳으로 왕후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따라 죽었다고 한다. 백운향(白雲鄕)은 신선이 사는 땅이다. 초장의 의미는 임금을 따라 죽지도 못하고 신선이 되지도 못한 자탄이라고 하겠다. 중장에서는 임금의 은총이 꿈속의 봄날처럼 기억 속에 되살아난다고 하였다. 그러니 흰 머리로 홀로 살아 임금을 그리워하며 한탄하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이 다음 세 수는 고사나 상징을 통해 자신의 포부를 드러낸 것이다. 셋째 수에서 유비가 제갈량을 삼고초려(三顧草廬)로 맞이했던 고사를 인용하여 그때 천하의 풍운이 바쁘게 돌아갈 때인데 제갈량이 한가로이 봄날의 낮잠에 취했느냐고 물었다. 세상을 경륜할 큰 꿈을 지니고 한가로이 있을 수 없다는 자신의 포부를 은근히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넷째 수는 늙은 오동나무를 베어 좋은 악기를 만드는 과정을 읊은 것. 자신도 그 오동나무처럼 임금의 치세에 좋은 악기가 되고 싶다는 뜻이다. 굽고 속이 빈 오동나무가 바람과 서리를 견디며 늙었는데, 이것을 베어 다듬어서 거문고나 가야금을 만들면 흥겨운 소리를 낼 것이라고 했다. 오동나무로 좋은 인재를 상징한 것이다.

 마지막 수는 진(晋)나라 익주자사 용양장군 왕준(王濬)이 오(吳)나라를 멸망시킬 때 전선을 이끌고 장강을 따라 남하하여 오나라 서울 건업(建業)의 석두성을 치려는 장한 풍모를 그린 것이다. 한시의 7언구를 나열하여 왕준이 누선(樓船)을 타고 익주로 내려오니 영웅의 장쾌한 일이라고 했다. 사실(史實)은 왕준이 익주에서 전선을 타고 내려와 오나라 손호의 항복을 받았다. 그때 왕준이 두예(杜預)의 격려를 받고 건업으로 진격하려는데, 왕혼(王渾)이 반대했던 것을 들어 중대사에 꽉 막힌 판단으로 일을 방해하는 인물에 대한 답답한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그도 당시의 정치 현실에서 이런 답답한 심정을 느꼈나 보다.

  청룡기(靑龍旗) 사명기(司命旗)와 교서절월(敎書節鉞) 앞에 섰다.

  청도(淸道) 한 쌍, 금고(金鼓) 한 쌍, 순시영기(巡視令旗) 벌였는데 언월도(偃月刀) 서리 같고 취타(吹打) 소리 웅장하다.

  저렇듯 위의(威儀) 성한 곳에 중한 책망(責望) 어이리.

 

**임철순의 주=맨 앞에 나오는 청도기(淸道旗)는 관원의 행차 때 많은 깃발 중 제일 앞에 세워 사람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던 깃발을 말한다. 바탕은 남빛, 가장자리 화염은 붉은색이며 ‘청도(淸道)’라는 두 글자를 써놓았다.

  성명(聖明)이 임(臨)하시니 시절이 태평이라.

  관동(關東) 팔백리에 할 일이 바이없다.

  두어라 황로청정(黃老淸淨)을 베퍼볼까 하노라.

  벌이줄 잡은 갓을 쓰고 헌 옷 입은 저 백성이

  그 무슨 정원(情原)으로 두 손에 소지(所志) 쥐고 공사문(公事門) 들이달아 앉는구나. 동헌(東軒) 뜰의 쥐 같은 형방(刑房)놈과 범 같은 나졸들이 아뢰어라 한 소리에 혼비백산하여 하올 말 다 못하니 옳은 송리(訟理) 굽어지네.

  아마도 평이근민(平易近民)하여야 도달민정(道達民情)하리라.

 위 두 수는 목민관으로 부임하여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려는 마음이 드러난 작품이다. 첫 수는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는 광경을 그린 것. 깃발과 절월을 앞세우고 호령하며 풍악을 울리고 시위(示威)하면서 부임하는 장쾌한 모습이다. 그러나 관찰사의 이런 행차 뒤에는 선정을 베풀어야 하는 무거운 책무가 지워져 있는 것이라 했다. 사실 그가 부임한 이듬해 횡성 민가에 불이 나 관의 창고에 쌓아둔 곡식 9백여 석이 타서 어려움을 겪었고, 그다음 해는 강원도 여러 고을에 불이 나서 탄핵을 받아 유배되기까지 했다.

 둘째 수는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한가한 때에 백성을 일없고 편안하게 다스려 보겠다는 심정을 읊은 것이다. 새 임금(순조)이 밝은 정치를 해서 태평시절이라면서 강원도에 별 일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노자가 가르친 대로 백성을 괴롭히지 않는 맑은 정치를 해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 해와 그다음 해에 일어난 화재로 인해 이런 각오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셋째 수는 백성이 원정이 있어 관에 호소하려 해도 아전들의 횡포로 그 사정을 알기 어려운 실상을 여실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초라한 차림의 백성이 진정을 하려고 문서를 들고 등청하면 사욕이나 살피는 형방과, 백성에게 으름장이나 놓는 나졸들 때문에 백성의 원정이 왜곡되어 송사가 잘못 처리된다면서 쉽고 편안하게 백성에게 다가가야 임금의 치도(治道)가 백성에게 도달할 것이라고 하였다.

  수풀에 까마귀를 아이야 쫓지 마라.

  반포효양(反哺孝養)은 미물(微物)도 하는구나.

  나 같은 고로여생(孤露餘生)이 저를 부러하노라.

 

**부모에 대한 효도의 마음과 남에게 선을 행하라는 권계(勸誡)를 표현한 작품이다. 까마귀가 먹이를 물어와 어미를 봉양하니 쫓지 말라면서 나처럼 아버지를 여윈 사람은 까마귀의 효도를 부러워한다고 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공조판서에까지 오른 신응현(申應顯, 1722∼1797)이다.

 

  시하(侍下)적 작은 고을 전성효양(專城孝養) 부족터니

  오늘날 일도방백(一道方伯) 나 혼자 누리는고.

  삼시(三時)로 식전방장(食前方丈)에 목 맺히어 하노라.

 

**부모를 모시지 못하는 슬픔을 표현한 작품. 부모님을 모실 때에는 작은 고을을 맡아서 봉양하기에 어려움이 있더니, 이제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부모님은 계시지 않아 끼니마다 사방 열 자의 상에 잘 차린 음식을 대하여 부모님 생각으로 목이 맺힌다고 했다. 그가 51세에 강원감사가 되었을 때 부모를 봉양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표현한 것이다.

  아침에 한 일 착히 하면 이 마음이 흐뭇하고

  저녁에 한 일 착히 하면 흐뭇던 마음이 즐거우니 일일이 착하고 또 착하면 날마다 흐뭇하고 또한 아니 즐거운가.

  예부터 동평왕창(東平王蒼)의 말이 위선(爲善)이 최락(最樂)다 하니라.

 

**착한 일을 하면 마음이 흐뭇해지고 즐거워지니,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의 여덟 째 아들 동평헌왕(東平憲王) 유창(劉蒼)이 말한 바, “착한 일이 가장 즐겁다”는 말을 새겨들을 만하다는 것이다.

  하늘이 복(福) 가지고 값을 보고 주시나니

  값이 값이 아니라 덕(德) 닦기가 값이오니 작은 덕 큰 덕 덕대로 복이로세.

  자네들 복 받으려거든 덕 닦기를 힘 쓰시소.

 

**넷째 수는 하늘은 착한 일로 덕을 닦아야 복을 준다면서 착한 일을 해 덕을 닦으라고 권장하는 내용이다. 뒤의 두 수는 교훈을 표면에 내세웠다. <계속>

 

[출처] 사랑 시조· 성 시조 <5>|작성자 fusedtree

 

'해월의 시조마루 > 시조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벽계수  (0) 2021.05.06
고금가곡 / 송계연월옹  (0) 2021.04.26
강원감사 신헌조의 시조 (1)  (0) 2021.04.26
삼호정시사  (0) 2021.04.24
새끼줄 악서  (0) 2021.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