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의 뜨락/문학계 소식

2025 신춘문예 시조부문 당선작 모음

채현병 2025. 1. 3. 12:14

2025 신춘문예 시조부문 당선작 모음

                              (2025.1.3. 海月 채현병)

 

경남신문

소원의 가격 / 최태식

 

소원 판매점에는 기도값이 각각이다

산중턱에 자리한 바람이 줄을 설 때

양초는 제 몸에 쓰인 문구에 집중한다

 

절박한 크기마다 생각이 많아져서

정갈하게 모셔 놓아 소원이 즐비한 집

기도발 소문에 끌려 사람들 모여든다

 

몸 낮춘 자리마다 촛불은 뜨거워져

쉽게 살 수 없는 꿈 저마다 간절한데

묵중한 내일 앞에서 오늘은 빈 몸이다

 

 

경상일보

인사이더 식사법 / 오향숙

 

푸성귀같은 날들 집으로 가져와서

큰 그릇에 버무리면 사람이 모여든다

내 편과 네 편의 입맛 한때는 겉돌아도

 

속속들이 배어든 유연한 참기름 말

제 각각 살아있는 뿌리의 속마음은

밖으로 내뱉지 않아 싸울수록 순해진다

 

싱거운 나의 하루 쓴맛이 녹아들어

혀가 만든 비법 하나 스며든 인사이더

싱싱한 유일한 재료 입 닫고 귀를 연다

 

 

국제신문

수어(手語) 배우기 / 김이령

 

손끝에서 부푸는 말

둥글게 빚어진다

 

듣지 못한 아이들은

손으로 글썽이고

 

모음은 부스러기가

많아서 따스하다

 

창밖엔 소리 없이

떠다니는 흰 눈들

 

손으로 빚어놓은

새들이 눈을 뜨면

 

첫 눈은 입을 벌린 채

가만히 녹아간다

 

침묵으로 세상은

환하게 오는 거라

 

꿈결에 처음 듣는

자신의 목소리에

 

말들은 잇몸을 가져

벙긋이 태어난다

 

 

농민신문

어떤 광합성 / 김영곤

 

병실에 누워있다, 깡마른 나무 한 그루

한뉘 내내 둥근 세상 사각 틀로 깍아내다

제 몸을 보굿*에 끼워

몸틀처럼 앙버티는,

 

무엇을 기다릴까, 천 개의 귀를 열고

한 번도 부화하지 않은 톱밥의 언어들이

끝내는 해독 못한 채

침묵 속에 갇히고,

 

저 왔어요 한 줌의 말 광합성이 되는 걸까

핏기 잃은 가지에서 붉은피톨 감돌 때

고집 센 심장박동기

뿌리째 팽팽해지는,

 

무척산에 옮겨 심은 유듬지 저류에서

썩지 않는 후회가 시간의 뺨 데우며

절단된 둘째손가락

단풍 빛깔로 손 흔드는,

 

*보굿: 나무껍질의 순 우리말

 

 

동아일보

절연 / 류한월

 

불꽃이 튄 자리엔 그을음이 남아 있고

뭉쳐진 전선들은 서로 등을 돌린 채로

흐르던 전류마저도 구부러져 잠들었다

 

구리선을 품에 안은 검은색 피부처럼

한 겹 두 겹 둘러싸는 새까만 침묵으로

철로 된 마음 속에서 절연되는 가족들

 

한 번의 접전으로 미세 전류 흐르는데

묻어 둔 절연층엔 전하지 못한 말들이

심장의 전압 내리고 가 닿는 길 찾으려

 

 

 

매일신문

자화상의 오후 / 김정애

 

빈칸 생의 여백이 귓불을 뜯게 했나

느닷없는 살 조각을 붕대로 친친 매고

회색빛 푸른 눈동자 거울 앞에 앉았다

 

아직 남은 소음에 대해 눈빛이 묻고 있다

오후 내 낯선 색채를 캔버스에 게워내며

진녹색 코트 여미고 파이프를 문 사내

 

색을 고르는 일은 칼날을 세우는 일

울분 한 붓 슬픔 한 붓 거칠게 찍어 눌러

죽어도 들키기 싫은 고독을 덧칠한다

 

 

부산일보

어느 모텔 수건의 공식 / 김동균

 

나란한 공식으로 하얗게 각 잡힌 날

씻어낸 자리마다 낯가림이 띠로 없어

한 번만 쓰고 버려도 표정 없는 얼굴이다

 

두꺼운 커튼 사이 햇살을 막아두고

계절을 빨아 놓아 돌고 도는 순백의 시간

아무리 흩어 놓아도 반듯하게 접혀 있다

 

새겨진 문신처럼 씻어도 그대론데

눈총으로 찍힌 낙인 구석으로 밀려날 때

객실 벽 초침 소리는 꽃무늬에 스며든다

 

 

서울신문

달을 밀고 가는 휠 체어 / 박락균

 

 

오륙도신문

비대칭 모임 / 한 정

 

하현달 기울다가 벽에서 일그러질라

급하게 서두르면 평면 사이 어려운

길 하나 사이에 두고 금 쩍 가면 난감하지

파도가 밤새도록 벼린 날 집어삼켜

현 위치 가늠 못 해 어느 때 낮이 올지

끝과 끝 서로 맞닿아 부메랑이 되어올까

바다는 마음 없이 가만히 두고 볼 일

야위다 풍성하다 저 혼자 여유롭게

선대칭 데칼코마니 회전축에 포갠다

 

 

조선일보

취급주의 / 한승남

 

계단을 오르내리며 슬픔을 운구한다

얼굴 없는 수취인 이름도 희미해졌다

똑똑똑 대답 없는 곳

긴 복도가 느려진다

저 많은 유품들은 누가 보내는 걸까

주문을 외우면 외로운 착각의 세계

반품도 괜찮을까요

열지 못한 사연들

상자도 사람도 구석에서 자라고 있다

유리 같은 마음입니다 던지지 마세요

날마다 포장된 시간

기적을 쌓는다

 

 

한라일보

뜨개질하는 여자 / 박숙경

 

맞은편 유리창 속 나 같은 여자 하나

구겨진 종이 가방 무릎 사이 세워놓고

안뜨기 바깥뜨기로

남은 오후 짜 늘이네

 

실마리 움켜잡고 내달리는 두 개의 손

바늘 끝 시선까지 한 코씩 엮어내면

상상을 더하지 않아도

이미 따뜻한 겨울

 

살다 보면 가끔씩 그럴 때 있기도 해

덜컹 덜컥 흔들리다 저절로 아귀 맞는

까무룩 졸다 깨보니

한 뼘이나 자란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