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의 발생과 한글표기 시점
주영숙/문학박사
‘당시에 유행하던 노래’라는 뜻의 시절가조(時節歌調)에서 시작하여 어느덧 세계 유일의 장르로 자리 잡은 우리나라 고유의 문학 브랜드 시조. 시조의 ‘시’는 시간을 의미하는 시(時)로서 일반적인 시(詩)와 구별되는데, 그렇게 알고 들면 시조는 시조(時調)이기에 가장 첨단의 ‘현대문학’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이지엽 교수는 “새로운 글쓰기의 보고 - 세상 모든 글쓰기”라는 랜덤하우스 시리즈에서 ?현대시조 쓰기?의 부제를 “세계인이 다 놀라는 우리만의 노랫가락”이라고 명명하였다.
‘시조문학의 전개 과정은 다른 문학 장르와 마찬가지로 줄곧 그 기원(起源)을 망각하고자 시도해온 역사이다. 창작 계층의 특수화를 부정하면서 국민문학으로, 고정된 형식을 부정하면서 현대시조로, 노래(歌)를 부정하면서 시(詩)로 변모’(강상희, ?시조시학?상반기 특집호, 시조시학사, 2001, 159~161)해왔다. 그러나 시조에 내재한 가락은 변해서도 안 되고 변해지지도 않는다. 그것은 단순한 노래도 아니고 단순한 시도 아니기 때문이다. ‘시조’ 명칭의 원 뜻은 ‘시절가조(時節歌調)’로서, 아무리 노래를 부정하며 변모해왔다고는 하나, ‘엄격히 보면 시조는 문학 분류보다 음악 곡조에 속한다. 근대에 들어오면서 서구 문학의 영향을 입어 창가 ․ 신체시 ․ 자유시 등이 나타났고, 그들과 이 시형을 구분하기 위해 음악곡조의 명칭인 시조를 문학 분류 명칭으로 사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통용되는 시조라는 명칭이 문학적으로는 시조시형이라는 개념으로, 음악적으로는 시조창이라는 개념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이러한 까닭에서이다.’(이지엽, ?현대시조쓰기?, 랜덤하우스, 2007.)
“시조의 원형은 본시 6구3절식인 민요형에서 파생되었다고 봄이 옳을 것인데, 그것은 시조 잡가의 한역(漢譯)에서 알 수 있다. 삼국시대에는 가락의 한 창사(唱詞)로서, 그 원시적 민요형에서 그다지 진전이 없었던 시조는 고려에 들어와서 하나의 완성된 시형으로 성장하게 되었다.”(백철 ‧ 이병기 공저, ?국문학전사?, 신구문화사, 1980) 라는 문헌상 자료로 살펴보면 시조는 언제부터인지 가늠할 수도 없을 만큼 까마득한 옛날, 적어도 삼국시대부터 있어온 우리의 생체리듬이 중얼거림이나 노래로 이어져 오다가 한자로 표기되었다고 추정된다.
①서불제명석각(徐巿題名石刻): 화상문자의 하나. 지금의 경남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에 있는 큰 바위 위에 무늬모양으로 새긴 글자. 가로 50cm, 세로 1m임. 전설에는 중국 진시황이 보낸 서불이라는 사람이 동정녀 500명을 거느리고 삼신산에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왔다가 이곳에 새겨놓고 간, 동양 최고의 화상문자(畵像文字)라고 함. 정인보(鄭寅普)는 이 글자를 서불이 새긴 것이 아니고 훈민정음 이전의 우리 고대문자로서 그 뜻은 ‘사냥하러 이곳으로 물을 건너와 기를 꽂다’라고 해석하기도 하였음. 서불과차. 남해도 각자. 남해 석각. ②한자로 ‘서불과차’ 곧 ‘서불이 이곳을 지나다’라는 뜻을 지녔다는 양아리 각자는 이동면 양아리에서 금산 부소암으로 오르는 길목에 자리 잡은 가로가 칠 미터, 세로가 사 미터 가량인 바위에 새겨진 글자를 말한다. 전해 오는 바에 따르면, 진시황 시대에 서불이 동남동녀 오백 명을 거느리고 이 곳 금산을 찾았다고 한다. 이때 서불이 떠나기에 앞서 바위에 글자를 새긴 것이 오늘날 양아리 각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전설이며, ‘서불과차’로 보인다는 각자 또한 상형문자 이전의 화상문자인 만큼 적어도 이천 년 내지 삼천 년 전의 고문자로 미루어 짐작된다. 그럴 경우 이 문자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문자임에 틀림없다. 이를 두고 중국의 어느 학자는 “서불기배일출”이란 여섯 글자라고도 하나, 훈민정음 이전의 한국 고문자라고 짐작하는 이(정인보)도 있는 것이다. ‘서불과차’를 일축하는 기록, 그것은 ?한단고기?라는 책이다. 그 말을 뒷받침하듯 ?한단고기?의 「태백일사」에는 이 문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대변설>의 주에 말하기를 ‘남해현 낭하리(양아리) 계곡의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이 있다. 그 글에, 한웅이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리다’라고 씌어 있다고 했다.” 그 밖에도 이 글자를 산스크리트어 계통의 글자로 보아 옛날 남방 계통의 민족이나 아랍인이 남기고 간 글자로 보는 이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주장도 확실한 것은 아니다. 아무튼 이 각자가 풀이는 되지 않고 있지만, 귀중한 고대 유물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양아리 각자가 관심을 끄는 또 하나의 까닭은, 각자가 있는 양아리 계곡에서 이와 비슷한 또 하나의 고문자가 새겨진 바위가 발견되었다는 것이고, 거기서 가까운 밭 언덕 받침돌에서도 선사 시대의 것으로 짐작되는 새 모양의 줄 그림이 발견되었으며, 양아리 벽련 마을 뒷산 바위에서도 위의 각자와 비슷한 고문자가 발견되었다. 이런 고문자들과 뜻 모를 그림의 관계는 분명 우리 고대 문화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될 것으로 짐작되지만,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는 것이 못내 아쉽다.
(국어사전, 인터넷 백과 등에서 발췌, 재정리)
서불제명석각(徐巿題名石刻)에 대한 위의 글과 같은 해석에서 한글창제 이전에도 우리 고대문자가 존재했었다는 문헌상 근거는 미미하나마 있지만, 시조의 한글표기는 한글창제 285년 후 조선조 대표적인 삼대 가집(영조 때의 ?청구영언? ?해동가요?, 고종 때의 ?가곡원류?) 중의 하나인 ?청구영언?에 와서야 이루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타당하다. 이 가집은 악보 없이 노랫말만을 실어놓은 셈이고, 그 노랫말이 바로 시조이다. 그런 추정의 성립은 우리나라에 한자(漢字)가 처음 들어온 시기가 중국 주(周)나라 초기나 은(殷)나라 말기 무렵인 서력기원전 12세기 전반쯤, 우리나라의 기자조선(箕子朝鮮)(단군과 교체하여 기원전 1127년에 세워진 새로운 왕조. ‘한씨조선(韓氏朝鮮)’, 대개 단군의 후대, 아사달조의 문물제도를 혁신하여 중흥 개화함. 문화가 발달하여 고도의 수준에 달하였으며, 8조(八條)의 금법을 행하여 아름다운 풍속을 이루고 사회가 안정되었음.)시대였다는 데에 있다.
시조의 기원에 대해서 학자에 따라 설이 구구하다. 이를 크게 양분하면 한시(漢詩)의 영향을 입었다고 보는 외래연원설(外來淵源說)과 우리 고유의 창조시형(創造詩形)으로 보는 재래연원설(在來淵源說)이 있는데, 몇몇 학설(전규태, ?韓國古典文學全集⑨?, 1983)로 요약해본다.
1) 신라시대의 향가 중에서 시조형식과 비슷한 것이 있었을 것이다.(이병기 등)
2) 명나라에서 들어온 불가(佛歌)의 조자(調字)로 된 것이다.(안확 등)
3) 려조(麗調) 한문(漢文) 악장(樂章)에 대립해서 생긴 별곡(別曲)이 파괴되어 장가(長歌)와 단가(短歌), 두 가지로 분리될 때 단가가 시조로 분화되었다.(天台山人)
4) 무녀(巫女)들의 입으로 전해오는 종교적 신가(神歌) 즉 노랫가락에서 탈화(脫化)했다.(이희승 등)
5) 고려의 별곡이 그 기능과 형태를 잃은 반면에, 하나는 파격적인 경기체가로, 하나는 변격적인 고속가(古俗歌)로 변하였다. 그 후자가 시조이다.(전규태)
고시조는 여러 시인 묵객의 문집이나 시가집에 두루 실려 있다. 이를 집성한 시조집은 다음과 같다.
?청구영언?
조선 후기의 가객(歌客) 김천택(金天澤)이 엮은 시조집 : 현존하는 시조집 가운데 가장 오래된 대표적 시조집으로 후대의 가집편찬에 영향을 끼쳤다. 1728년(영조4)에 편찬했다. 우리의 가사(歌詞)들이 구두송영(口頭誦詠)에 그치다가 없어져버리는 것을 애석해하고 개탄한 나머지 전해오는 작품들을 수집하고 틀린 점은 고쳐서 편찬했다. 정윤경은 서(序)에서 가(歌)와 시(詩)가 우열을 나눌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문학을 숭상하고 음악을 소홀히 하는 것을 우려했다. 그리고 김천택은 당대 탁월한 가객으로 성율문예(聲律文藝)에 능하여 시조집을 편찬할 능력이 있음을 인정했다.
?해동가요?
조선 영조 때의 가객(歌客) 김수장(金壽長 : 1690~?)이 편찬한 시조집: 박씨본(朴氏本)·일석본(一石本)·주씨본(周氏本 : 또는 六堂本) 3종의 이본이 전한다. 박씨본은 김수장 자신의 서문과 발문(1754), 그리고 장복소의 발문(1755)에 따르면 1755년(영조 31)에 편찬되었다. 일석본은 표제(表題)가 원래는 ?해동풍아海東風雅?라고 되어 있고, 내제(內題)가 「해동가요」로 되어 있었다. 일석본은 1755년 당시에 이미 죽은 작가만을 수록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1755년 이후에 쓴 서문·발문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박씨본과의 선후관계에 대한 논란이 있으나 현재는 박씨본이 일석본보다 앞선 것이라고 추정한다.
?가곡원류?
1876년(고종 13) 박효관(朴孝寬)과 안민영(安玟英)이 편찬한 가집(歌集): ?청구영언?·?해동가요?와 더불어 시조를 전하는 3대 가집의 하나이다. 조선말기에 들어와 문란해진 가곡의 체재를 바로 잡는 한편 ?청구영언?·?해동가요?를 보완하고 시조를 집대성하려는 의도에서 고구려 때 을파소의 작품에서부터 19세기 가객인 안민영의 작품까지 약 1,000년 동안의 시조작품을 수록했다. 가집의 첫머리에 송나라 오증(吳曾)의 ?능가재만록 能歌齋漫錄?에서 인용한 ?가곡원류?라는 제목이 실려 있는 것으로 인해 이 계열의 가집을 가곡원류계 가집이라고 통칭하게 되었다. 특히 시조작품을 남창(男唱:29곡조 665수)과 여창(20곡조 191수)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은 다른 가곡집에서는 볼 수 없는 점으로 가창 위주의 편찬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
?고금가곡?
편자·편찬연대 미상의 가집(歌集): 편자에 대해 책 끝에 ‘갑신춘 송계연월옹’(甲申春松桂煙月翁)이라는 기록이 있으나 송계연월옹의 이름이나 경력은 알 수 없고 갑신은 영조 갑신년(1764)으로 추정된다. 원본의 표지가 없으므로 손진태가 송계연월옹의 작품 중에 ‘고금가곡’이란 문구를 따서 책이름으로 삼았다. 도남본은 302수, 가람본은 305수가 실려 있다. 다른 가집과 달리 내용에 따라 나눈 점이 특이하고, ?고금가곡?과 ?근화악부 槿花樂府?에만 나오는 작품이 43수나 되어 두 가집이 특별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 같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남훈태평가?
편자·편찬연대 미상의 가집(歌集):시조창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책으로, 순한글로 표기되어 있다. 1책. 목판본. 책 끝의 ‘계해석동신간(癸亥石洞新刊)’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1863년(철종 14)에 판각된 듯하다. 그렇다면 이 책은 1876년에 편찬된 ?가곡원류?보다 10여 년 앞선 셈이 된다. 본문은 총 28장이다. 본문의 제목을 ‘남훈태평가 권지단’이라고 적고, 낙시됴·롱(弄)·편·송(頌)·소용·우됴·후정화·계면(界面)·만수엽·원사청·잡가·가사 등 12가지 곡목을 실었다. 224수의 시조를 ‘낙시됴’ 항목 아래에만 모두 싣고, 이어 잡가 3편과 가사 4편을 실었다. 작가를 밝히지 않고 있으나 영조 이전 작가들의 작품이 꽤 보인다. 대부분의 가집이 필사본으로 전하는 데 비해 이 책은 방각본(坊刻本)으로 되어 있어 특이하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 : daum백과사전
?동가선?
조선 때의 시조 235수를 수록한 시조집. 지은이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으로 각각 갈라 따로 실었고, 끝에는 잡가라 하여 ‘국문학사에서 최초의 사설시조라 불리는’ 송강 정철의 ?장진주사?(將進酒辭-동양의 시인 묵객들의 생사관은 내세의존형이 아닌 현실안주형에 가까웠다. 조선시대를 살았던 선비들은 극락이니 천당이니 하는 종교가 표방하는 사후 내세에 기대지는 않았다. 그들은 생명의 한계에 순종하고 육신도 자연의 일부라는 사상을 받아들여 ‘죽음’을 흙으로 돌아가 자연과 합일하는 것으로 이해했는데 정철의 이 사설시조가 대표적이다. “한 잔 먹세 그려./또 한 잔 먹세 그려./꽃 꺾어 산(算) 놓고/무진 무진 먹세 그려.//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여 주리어 매여 가나,/유소보장(流蘇寶帳)에 만인(萬人)이 울어 예나,/어욱새 속새 떡깔나무백양(白楊)속에 가기 곧 가면,/누른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소소리 바람 불제 뉘 한 잔 먹자 할꼬,//하물며/무덤 위에 잔나비/휘파람 불제야/뉘우친들 어쩌리//” 외에 2수의 시조를 덧붙여 실었음.
이러한 시가집에는 한글 창제 이전의 고구려, 백제 시대의 작품까지 수록되어 있다. 이 문헌들로 미루어 유추되는 사항은 조선시대 이전의 시조는 ‘원가(原歌) 그대로 정착된 것이 아니다’로써 조선시대 초기의 것은 더욱 확연해진다. 훈민정음(조선 4대 세종 25년, 1443년)창제 이전의 작품은 당초에 구전(口傳)으로 가창되어 오다가 영조(英祖) 이후에야 청구영언을 필두로 하여 가집(歌集)에 수록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원가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변모되어 왔다는 증명이다. 또한 가집마다 그 표기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보는데, 이는 한글의 형성이 성장발전 과정에 있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구전해오던 시조 중에서 그 뜻이 한역(漢譯)되어 전해왔다는 것은 우리 고전의 계승을 위해 다행한 일이다. 거기에 해당하는 시조 작가를 문헌에서 찾아보면 고구려의 을파소(乙巴素 ?~203), 백제의 성충(成忠 ?~656), 신라의 설총(薛聰;원효의 아들)등이 있다. 또 고려조(高麗朝)에는 강감찬, 최충, 곽여, 정지상, 이규보, 우탁, 이조년, 성여완, 최영, 이색, 이지란, 정몽주 모친, 정몽주, 정도전, 성석린, 이존오, 조준, 길제, 맹사성, 이직, 황희, 변계량, 이방원, 최덕지, 권제, 원천석 등 모두 30명의 작가에 의해 61수의 시조가 나타나는데, 여기서 이들 작가를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은가 하는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작가를 알 수 없는 구전의 노래를 가집 편찬자들이 아무런 고증도 없이 노래의 내용과 부합되는 인물을 생각해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의 시조작가는 신빙성이 거의 없고, 고려시대의 시조작가도 말기를 젖혀놓고는 믿을만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이씨조선 혁창(革創)기엔 이씨왕조의 창업을 송축(頌祝)하는 작품이 주를 이루었다. 그런가하면 건국후의 안정을 대표하는 강호의 노래, 이에 처지는 사문은거(私門隱居)의 노래 등이 나왔다. 이 무렵의 작가들을 보면 앞에 든 길제, 원천석, 변계량, 맹사성, 황희, 조준 외에 성삼문, 김종서, 유응부, 이개, 왕방연 등이 있다. 그런데 이들 시조를 살펴보면,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 제작된 작품은 당초 한문(漢文)으로 표기하였던 것을 후인(後人)이 한글로 고쳐서 쓴 것이 분명하다는 짐작을 하게 되는데, 사육신(死六臣)의 시조도 그러하다. 반정(反正) 거사(擧事)를 꾀했을 그 때의 작품이라 보기 어렵다. 거사가 만료되어 사형이 집행되기까지가 매우 짧은 기간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다.
유세기는 ?시조창법?(문화당, 단기4290, 4면)에 고려말 「하여가」와 「단심가」의 예를 들어 ‘시조창’의 연원을 잡고 있다. 「하여가」는 이방원(李芳遠 : 뒷날의 태종(太宗). 태조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이 지은 단가(短歌)이다. 그런데 이방원의 시조는 ?국어대사전?에 그저 단가로 기록(해동악부에는 한시로 수록)되어있고, 「하여가」의 답이라는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단심가」는 시조(時調)라고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청구영언?에는 둘 다 시조로서 수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고려 말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 드러눕게 되자 정몽주를 비롯한 고려왕조 수호측에서는 그 기회에 이성계를 밀어내려 하였으나 이방원이 이를 눈치 챘다. 방원이 집안에 연회를 벌이고, 그 자리에서 포은을 향해, 고려왕조를 저버리고 이성계를 따를 것인지의 여부를 두고 마지막으로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았다고 하는 ①「하여가」와 그에 대한 정몽주의 답변 ②「단심가」. 이 둘을 자수(字數) 중시의 정형시, 즉 평시조 형식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초)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4, 4, 3, 4)
(중)만수산 드렁츩이 얽어진들 긔 어떠리(3, 4, 4, 4)
(종)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3, 6, 4, 4)
②
(초)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3, 4, 3, 4)
(중)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3, 4, 4, 4)
(종)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3, 6, 4, 3)
훈민정음창제(1443년) 후 처음 나온 책이 ?용비어천가?로서 시기가 1445년이다. 그런데, 가히 정전(正典)으로 연구대상이 될 만한 위 「하여가」와 「단심가」의 창조는 그 시조가 문자로 표기될 시점에 반드시 한글로 씌어졌다고 보기에는 작시(作詩)시기가 어긋난다. 포은 정몽주가 「단심가」를 읊고 나서 선죽교에서 방원의 문객(門客)등에게 격살된 1392년은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51년 전으로서, 한글이 만들어지기 반세기 전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하여가」와 「단심가」를 수록한 ?청구영언?은 훈민정음 창제 285년만인 1728년(영조4)에야 편찬되었고, 또한 이 논문 작성시점은 ?청구영언?이 편찬된 지 280년 경과된 것에 불과하다. 그 시기의 포착은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시조’형식, 즉 위 단심가에서 보는 (초 3‧4, 3‧4) (중 3‧4, 4‧4) (종 3‧6, 4‧3) 식의 정형시가 우리 민족의 호흡법을 십분 참조하여 창조되었다는 것. 그러나 일정한 방식의 가락을 동반한 소리는 있었으나 소리(말)에 맞는 글은 없었다는 것. 그런데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것만으로는 우리 정형시가 제대로 정립될 수가 없었을 것이고, 말에 맞는 글이 없었어도 한자는 있었고, 그래서 그것은 한자 ․ 한시로 표기될 수밖에 없었다는 가정을 할 수 있다.
①이런들 어떠하료 저런들 어떠하료/ 만수산 두렁츩이 얽어진들 어떠하료/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년까지 누리랴.//②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담심이야 가실 줄이 있시랴.//… 전자는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이방원의 <하여가>이고, 후자는 정몽주의 <답가=단심가>이다. 이방원은 이씨조선을 세우기 위하여, 기울어진 고려의 추종세력을 회유하거나 듣지 않으면 추방시키거나 절도안치 시켰다. 그 과정에서 정몽주와도 최종담판을 지으려고 자리를 같이 하고 넌지시 <하여가>를 읊조린다. 초장에서 중장까지는 회유조인데 반하여 종장 후단에 가서는 말 듣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였다. <불사역구여不死亦佝如> 라고 맺은 하여가는 여(如)자를 운(韻)자로 율시형식을 취했다. 그러나 시공(詩攻)을 받은 정몽주는 당황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죽임을 당한다는 각박한 상황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불굴의 충절과 배짱으로 대응한다. 그것은 체념일지도 모르나 <답가>를 보면 운(韻)자도 없고 평인(平仄)도 맞지 않을 뿐 아니라 5언시도 아니고 7언시도 아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3장6구 또는 3장 12구 시조의 골격에 맞추어 지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므로 하여가는 기起 ‧ 승承 ‧ 전轉 ‧ 결結 중 승구承句를 제외시켜 시조로 정립되었음을 알 수 있고, 답가는 시조로 표현된 문장으로 보아야 한다.
(오석필, ?시조문학?여름호, 시조문학사, 1994, 127~128면)
이러고 보면 몇 가지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하여가」만이 해동악부(海東樂府)에 한시(漢詩)로 수록되어 있다고 명시할 게 아니라 「단심가」도 마찬가지의 한시로 보아야 마땅하지 않는가? 우리 호흡에 입각한 자수 중시의 평시조로 볼 때 그 자수가 거의 일치하는 두 시를 왜 하나는 한시로 수록하였고 하나는 명백히 시조라고 하였나? 한시와 시조의 구분은 과연 사전 편집자가 정하기대로인가? 하는 문제이다.
하여가나 단심가 보다 훨씬 이전에 지어졌을 우탁(禹倬1263~1342)의 시조 2수(①春山에 눈 녹인 바람 건 듯 불고 간데없다. 져근 듯 비러다가 마리 우희 불니고져 귀밑에 해묵은 서리를 녹여볼까 하노라. ②한손에 막대 잡고 한손에 가싀 쥐고 늙는 길 가싀로 막고 오는 白髮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맹사성(孟思誠1306~1438)의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도 물론이지만, 말과 글이 서로 달랐던 그 당시 상황이나 문헌(용비어천가 등)으로 미루어보면 이러한 가정을 할 수 있다. 이방원은 저 시조를 뒤에 한시, 즉 글자로 옮길 시간(여유)이 있었지만, 정몽주(1337~1392)의 시조는 이방원의 시조에 답한 즉흥시조일 뿐이라는 거다. 여러 문헌(인명사전, 용비어천가)에서 종합해보건대 정몽주는 바로 그날 죽었다. “시문(詩文)에 능하여 시조 「단심가」 외에 많은 한시(漢詩)가 전하며……(인명대사전)”라는 문헌상 기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몽주는 「단심가」를 한시로 옮길 틈이 없었다. 그리하여 고려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그의 시조 「단심가」는 명실 공히 시조로 구전해 내려오게 되었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하여가」와 같이 단가로 분류되는 한시는 어떤 형식일까? 우리는 여기서 또 다른 연구 과제 ‘그것(漢詩)들은 모두 단순한 한시가 아닌, 구전(口傳)되고 될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시조를 문자화시킨 모양이 아닐까?’라는 자문자답의 질문에 부딪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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