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의 시조마루/시조학

현대시조 이대로 좋은가? / 문학박사 김준

채현병 2012. 7. 27. 19:12

 

오늘의 현대시조 이대로 좋은가

                                                                          문학박사 김준

오늘날 시조문단에는 시조라는 이름으로 발표되고 있는 많은 작품들이 시조의 기본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어 진정 우려의 목소리가 드세지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은 무엇보다도 시조의 형식적 변용(한때 양장시조니 절장시조니 하는 시도)이나 운율의 파괴에서만이 보다 시조의 문학성과 현대시 정신이 모색되어진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고 생각 한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시조의 저변확대를 위한 나머지 시조형식에 대한 시인의 올바른 숙련도를 고려하지 않고 등단시키는 추세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많은 시조시인들은 자유시에 접근하려는 자기 비하적 경향과 자기 나름대로의 시험적인 변형의 의도가 강하기 때문에 시조아닌 시조로 포장된 자유시가 판을 치고 있는 게 시조문단의 현실이다. 

현대에 와서 다른 모든 분야가 매우 빠른 속도로 변화하면서 발전되고 있듯이 우리 시조문학도 여기에서 예외일 수 없이 다양한 변모를 띤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모양상은 형식과 운율의 파괴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주제의 심화. 소재의 광법성, 시어의 참신성과 함축성 경이적인 이미지 묘사 등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창작 되었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이 중 무엇보다도 두드러진 현상은 표기법의 시각적 효과를 위한 다양화를 들 수가 있다. 과거 대부분 표기 형태인 장을 구별하여 표기하고 있는 장별배행 시조의 표기를 따르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구를 구분하여 표기하는 구별배행의 표기방식. 음보를 구분하여 표기하는 절별배행 표기방식, 그리고 종장의 첫 구를 독립시켜 표기 한다던가 시어나 운율에다 초점을 맞추어 시행을 잡는 경우가 있다. 또한 장과 장 사이를 무시하고 연속해서 표기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수(首)의 구별까지도 의식하지 않고 이어서 쓰는 사람도 있다.

오늘날 시조라는 이름으로 발표되는 많은 작품들이 어떻게 보면 종장 첫구 3자만은 고수하고 있다. 어떤 시조시인은 그 3 음절마저도 띄어쓰기도 3 음절만 되면 종장 첫 구가 되는 것처럼 생각 하고 있다. 예컨데<마당 한 가운데 앉아><섬도 한 십년을 살다보면>등의 작품이다. 이러한 파격의 작품을 들어 고루하다는 빈축을 일삼고 그들이 오히려 2000년대를 이끌어 갈 시조시인이라 추켜세우는 형세다. 

이와 같은 잘못된 풍토가 하루 빨리 바꿔지지 않는 한 시조의 존립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여겨진다. 이런 뜻에서 시조 전문지에 특집으로 전재되고 있는 작품 중에서 많은 작품들이 오류를 법하고 있어 여기에서 논의하기로 한다. 이는 질책이라는 의미에서 보다는 올바른 발전적 모색이라는 큰 뜻에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다룬다는 솔직한 심정이다.

1>시조의 율격에 문제가 있은 작품의 예

금비늘 은비늘 빛살 좋은 봄날 어물전
좌판에 나앉아 호객하는 생선들 틈에서야 비릿한 냄새가 판치는 세상에서야...

...(생략)...

어렁성저렁성 살아간들 또 어떠하랴
한물간 눈알 초점없는 세상에 어물쩍 눈빛 맞추는 시절에서야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xxx의 가자미)

  이작품은 신춘문예 당선작품으로서의 수준선상에 많은 의문점이 제기될 수 있는 사설시조다, 작품의 문학성이나 완성도에 관한 논의는 접어두고라도. 율격 면에서 사설시조라 하더라도. 그 특성은 차지하고 종장의 첫 구 3음절로 고정되는 것이 규칙인데 이 작품에서는 그 첫 구를<한물간>으로 볼 경우 둘째 구는<눈알 초점 없는 세상에>가 되어 율격적 호흡이 맞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의 율격적 호흡은<한물간 눈알/초점 없는 세상에>로 된 것이기 때문에 종장 첫째 구가 5음절이 되어 형식을 파괴 하고 있다, 또 억지를 부려<한물간>을 종장 첫 구로 볼 경우 둘째 구는<눈알>로 2음절이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둘째 구를<눈 알 초점 없는 세상에>로 보더라도 운율의 격이 맞지 않고 도 종장 셋째 구 <어물쩍 눈빛 맞추는>의 운율도 크게 문제시 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사설시조라는 이름으로 지은 것이기 때문에 종장 처리에 있어서도 율격에 맞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마구 늘어 날 수 있다고 주장 한다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아직 사설시조의 장르적 위치와 그 형식에ㅐ 대한 올바른 정체성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제 갓 시인으로 등단하는 가장 화려한 무대에 이러한 파격 일변도의 작품을 내 보인다는 것은 자칫 앞으로 자라나는 시조의 새싹들을 오도하고 시조의 전통성을 오염시킬까 적이 염려 되기도 한다.


 가난한 시인의 마음에 눈 내린다

 이상하게 따뜻한 하얀눈이 내린다

 추위를 녹이던 어린 소녀는 얼어 죽었다.

 오늘 이 가난한 시인의 마음에

 내리는 눈송이는 하염없이 하염없이

 이리도 따스한 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xx시조 2000년 봄호 xxx시인의 “시인의 마음)




  이 시조는<xxxx> 문학지 200년 봄호 140인 대표시인 에 특집으로 게제된 작품인데 내용상 시조라기보다는 자유시에 가깝다. 자유시에 가깝다는 것은 반드시 이런식으로 시조가 변형이 되어야 시로서의 시조가 발전한다는 논리를 거부 하면서 자유시로 보기도 어렵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물론 시인의 구체적인 멧시지가 무엇인지조차 어렵게 하는 내용으로 서술한 말이다. 이인은  첫째 수 종장을<추위를/ 녹이던 어린/소녀는/얼어 죽었다>로 하여 3,5,3.5음절로 서술 하였다. 그런데 이 작품의 의미상으로 볼 때 <추위를 녹이던 /어린 소녀는/얼어 죽었다>이루어지기 때문에 율격에 맞지 않고 도<추위를 /녹이던/어린소녀는/얼어 죽었다>로 본다 하더라도 율격에 맞지 않는다. 그리고 이 작품 둘째 수 종장의 둘째 구인<따스한 지>의 표기나<따스한지 그>의 표기도 파격이거나 정격에 맞추기 위하여 억지로 꿰맞추는 형식이 되었다. 이렇듯 정형 시인의 시조의 기본형식이나 율격을 모르는 시인들을 가르켜 새 천년을 여는 오늘의 대표시조시인 으로 추앙하고 있으니 시조문단의 앞날이 걱정스러워 답답할 뿐이다. 이 외에도 종장의 율격에 문제가 있는 부분을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빗금은 편의상 호흡 마디에 따라 갈음한 것임)

종장 첫 구가 기준음율(3음절)보다 많은 예

-기인 목은/ 새 고장찾아/ 목마르는 / 모습 일래

-썩지도 못하는/ 영혼의 참을 수 없이 가벼운.

-남 생각 할/ 겨를 없는 / 급하디 급한 볼 일

-가고 또 온/ 새 천년 품에/ 덥석 안긴 이 몸이여

-가늠 키 힘든/ 수심을 / 거울처럼/ 밝혀 놓았네

-잘려야 마땅한 / 병든 가지는 / 버젓하게 큰 소리친다.

-드라이 앵글을/ 치며/길 떠나고/ 있구나

-마음 뿐 아닌/ 발길마다/ 덩두럿이 새기리


시인은 물론이고 상당한 시작 경력을 가진 시조시인들조차 시조의 율격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시작을 하고 있는 현실은 진정 우리 모두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2>종장 첫수가 기준 음율(3음절)보다 적은 예

-그래./ 너/사람을 움직이는/신이라 불러주마
 
-아. 찔러 / 아픈 나날의/ 피흘리던 / 흰 손이여

 쉼표의 사용은 작자의 의도를 가장 잘 표현하기 위함인데 기준음절 내에서 함부로 쉼표를 사용함으로써 작자 스스로 시조의 약속된 율격을 깨고 있다.


3>종장 둘째구가 5음절보다 적을 예


-친구여 / 쓰려거든 / 정말 잡설대신 시를 쓰자

-흘러간 / 그 나날이/ 춘궁처럼 / 아려온다

-우리는 / 살과 살/ 뼈와 뼈/ 남김없이/사루어도

-거 누구./ 교외지도/ 한번/ 같이 안 갈라욧!

-무수히 / 끓는 극점./ 사는 건/ 퍼득거림 이라구요


이 둘째 구는 한 단어로 단숨에 읽어지거나 의미상 휴지 없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야 하는데 위의 예는 그러하지 못하다.


4>기타 시어나 제목을 외국어 그대로 표기 한 사례

-“allero로 흐르네” “dolce 선율 타고” “forte로 치솟다가

-제목을 영어로 표기한 사례 “Interism”


이 “Interism”이 무슨 뜻인지 사전에도 나와 있지 작자가 밝히고 있지를 않아 독자를 혼란시킨다.

제목이나 시어를 시대의 흐름에 따라 외국어로 할 수도 있겠으나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국문학의 정신에 비추어 볼 때 이미 관습화된 외래어 든 아직 생소한 외국어든 원어를 쓰데 표기는 우리 글로 해야 할 것이다. 이런 것은 변화의 시조라기보다도 우리 시조를 어지럽히는 한 요인이 될 것이다.

오늘의 현대시조 이대로 좋은가 라는 제목으로 시조 전문지의 특집으로 게재된 작품에서 뽑아 논의하였지만. 기타 다른 시조전문지나 개인 시조집에 발표된 작품에서 많이 보아 오는 현상이다. 시조의 기본 형식은 서슴없이 파괴하면서 창작하는 일이 시조의 현대화라고 고집 한다면 할 말이 없다. 게다가 이러한 파격 시도 행위가 우리 시조문단의 장래를 흐리게 한다는 징후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정형시조로서 시조는 운율적 형식이 올바르고 시로서의 정제미가 소흘히 되어서는 발전은 고사하고 존재 가치가 소멸된다는 사실만은 분명한 것이다. 시조는 시어이어야 하지만 시는 시조이어야 한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 이유를 우리는 깊이 음미해야 할 일이다.

        3.현대시조의 창작 방향

누가 뭐라고 해도 시조는 시조이기 때문에 형식적 제한이 아니라 형식 자체가 자연스럽고 여유로운 것이며, 형식과 내용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이 내용이고 내용이 곧 형식이라 말 할 수 있다.  현대시조의 창작 방향을 논할 때 다음과 같은 면에서 논의 하고자 한다.

1>시적인 경이로움과 소재의 일상성.

시조가 시이어야 한다는 말은 금후 현대시조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창작 방향을 단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 말은 시조의 율격이나 3장이라는 형태적 정제미속에 시상이 압축되어 그 단아함을 보여주어야 함은 물론 현대시정신을 표방 할 수 있는 주제의 심화를 뜻하는 것이다. 이처럼 시조는 주제라는 의미적 요소와 율격이라는 형태적 요소가 적절히 융합되어 시적 정의로움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그 나름대로의 노력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시조의 창작 방향을 논의 할 때

(1)소재의 관념성, 페쇄성에서 탈피하여 일상적. 생활적 소재로 그 취재 범위를 확대 하는 일

(2)무의미 한 3행의 구조나 잣수 맞추기 식의 3.4조의 율격이 아닌. 기복을 통한 효과적인 시상을

  위한 3장 구조와 의미의 율격으로 배열하는 일

(3)소재 자체를 주제로 묘사하지 않고 예민한 감수성과 풍부한 상상력을 통해 주제를 심화 시키는 것이다.


2)읽히는 시로서의 변모 

읽히는 시로서의 즐거움은 어디에서 연유되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곡 이것이어야 한다고 말 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야음과 같은 몇 가지의 측면에서 생각 해 볼 수 가 있다.

(1)자유시 쪽에서도 항상 거론되고 있는 일이지만. 정형시인 시조의 경우 시상전개에 있어 전체적인 짜임새 있는 조화가 이루어져 있는가 하는 문제다. 어떤 시상이 포착 되었을 때 이를 초,중.종 장의 3장 형식 속에 어떻게 도입 전개되고 효과적으로 마무리되는가 하는 제2차적 공정이 요구 되는 단계에 이르는 어려움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2)종래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즉흥물 적이고 즉흥적인 안일한 시작 태도에서 벗어나. 사변의 세계 에 접근하려는 내용의 심화를 통한 선명한 주제의식의 예술적 탐구 정신을 보여 주는 데 있다. 

(3)시어 선택에 있어서 상징적이고 함축성 있는 언어로서 단순히 전달의 수단으로 시가 아니라 무엇을 느끼게 하는 생명체로서의 내적 가치를 부각시킬 수 있는 정서적 기능의 역할을 염두에 두고

적절히 구사 하여야 한다.

(4)표기 문제에 있어서 장별 배행이나 구별 배행의 획일성을 피하고. 구나 절이 지니는 의미나. 운율. 이미지의 기능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 할 수 있도록 시각적. 기복적 표기방식을 생각해야 한다.

3>시인의 성실성과 감동

시에 있어서 성실성이란 두말 할 것도 없이 시인 자신의 자기다운 글을 진지하고 정성스럽게 쓰는 일을 뜻한다. 대상에 대한 깊은 인식과 새로운 해석, 의미 부여를 통한 주제의 심화. 적절한 시어의 구사. 상황이나 본질에 따른 정확한 비유. 음수율이나 음성을 통한 운율의 효과적 배치 등에 있어서 남다른 고심과 노력이 돋보일 때 성실성은 평가 되는 것이다. 시조를 짓는 행위에 있어서 이 성실성은 꼭 써야 할 것에 대한 내면세계의 인식에 접근하여 시인이 실제로 생각하는 것을 형상화 하는 것이다.  반대로 성실성이 소흘히 된 시조에서는 대상에 대한 속성이나 사물이 갖는 이반적인 상태를 즉물적이고 직감적 관점에서 글자 수나 맞추는 식의 시작 태도에 머물고 있다. 즉 성실성이 결여될 때 자기가 실제로 생각 하는 것을 형상화하기 보다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한다고 보는 것을 형상화 하는 것이다.

시조에 있어서 성실성은 무엇보다도 시를 대하는 우리에게 큰 감동을 통해 시적 즐거움을 선사 해 주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시인은 즐거운 감동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단순히 읽는 시조가 아니라. 마땅히 읽어야 하는 작품의 형상화를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요사이 그 어느 때보다도 작품 발표 무대가 넓혀 ?고 .시조시인의 인구도 많아 소외되고 외롭지 않지만 이제야 말로 작품의 양보다 질을 택할 때가 되었다. 월간지나 계간지를 통해 많이 발표되고 있는 작품 가운데서 우리의 눈을 끌고 있는 성실 한 의상으로 단장한 옷차림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하는데 관심이 모아져야 한다.


        4.사실 접근에 머무는 시조에서 탈피

시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확언하게 단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영국의 시인이자 평론가인 매슈 아놀드(1822-1888)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어느 정도 해명이 되어지고 있다고 본다.

“위대한 시인의 우수한 특질은 시적 미와 시적 진실의 법칙에 의하여 정해진 조건하에 자연 및 인간 생활에 대하여 시인이 자기 힘으로 얻은 관념을 취재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 말에서 우리는 삶의 진실이 곧 시의 내용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다음으로는 왜 시를 쓰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시란 눈으로는 볼 수가 없는 세계에 대해 시인의 감수성과 상상력을 통해 접근하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대체로 생명의 근원적인 것에 대한 탐구 정신과 사회적 상황이나 인간의 삶의 진실을 반영하려는 시대정신이 시로서 형상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를 쓰는 동기 또한 이러한 두가지 측면. 즉 순수심미적 경향과 현실적 참여 경향 중 시인 나름대로 대상을 포착하여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려고 하는 구체적 욕구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얻어진 한 편의 시를 놓고 감상할 때. 시인이던 일반 독자든 간에 그 시속에 담겨져 있는 주제에 경의로움을 느끼기도 하고 또 시 한 구절이 마음에 들어 즐거움을 갖기도 하며. 이미지. 리듬. 은유와 같은 시적 기법에 감탄하기도 한다. 이와는 반대로 어떤 시에서는 전혀 새로운 것을 느끼지 못하고 사실적 접근에 머물고 마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할 때. 시인의 시작 태도는 필연적으로 진지성이 요구되며, 자시의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시적 진실의 탐구에 전력 투구해야만 한다. 

현대 시조도 여기에서 예외 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작품 중에는 3장 6구의 형식에다 그저 잣수맞추기에 연연한 나모지. 시적 심리상태인 시정신의 주제가 선명하게 승화되지 못한 것들이 있다. 그래서 시조시인들을 위한 시조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유시쪽의 평을 받기도 한다. 다행한 일은 많은 시조시인들 중에는 이에 대한 자성에 의해 기성복에 자기 몸을 맞추는 식을 지양하고, 시정신이 시조의 형식을 결정하는 입장에서 시조를 창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5.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착상

우리가 좋은 작품의 여부를 논 할 때 시조도 예외 없이 무엇을 어떻게 쓰느냐를 따져 말한다. 항용 무엇이 강조되면서 어떻게가 소흘이 되는 경우도 있고. 또는 이와 반대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도 시조 창작에 있어서 필요하고 좋은 조건일수는 없다.  결국 무엇이라는 내용의 충실과 어떻게 라는 표현기교가 하나가 되어 조화를 이룰 때 좋은 작품이라 말 할 수 있다. 

요사이 많은 시인들에 의해 작품의 양상이 새롭게 변모되면서 시조에 대한 세인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것은 종래와는 달리 무엇에 대해 쓸 것인가 하는 정신의 새로움과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기법의 새로움을 부단히 모색하는 데서 기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우리 시조는 과거의 시작 태도에서 용감하게 벗어나야 한다. 시조시인 스스로가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새로움의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을 때. 시조는 현대시조로서의 중후한 멋을 지니면서 독자들의 마음에 감동되는 것이다.
(시조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