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의 뜨락/문학계 소식

제4회 포은시조문학상 시상

채현병 2020. 12. 12. 13:29

제4회 포은시조문학상 시상

 

<대상 수상작>

 

그랜드 캐니언 / 유준호


살 한 점도 으스러져 앙상히 남은 뼈들
고뇌로 포개져 세월 앓는 저 협곡에
서러워 설움 못 이긴 피눈물이 흘러 있다


억년 침묵 너무 깊어 전설이 된 그림자들
시시포스 어깨에 진 짐보다 무거워서
대낮도 벌건 대낮에 붉은 한숨 깔고 있다


맨 처음 이 땅 열 제 속을 끓인 응어리들
화석으로 남아서 태초를 내보이고
함몰된 숱한 밀어는 벼랑 끝에 엉겨 있다.

 

 

<본상 수상작>

 

실타래 / 임병웅


살다 보면 꼬이는 날
왜 아니 없겠는가


헝클어진 실타래를
한 올 한 올 풀다 보면


그 안에
우주가 있다
그 속에서 나를 본다.

 

 

 <포은시조문학상 심사평>


              [현대시조를 선도하는 견인차가 되어주시길]


 포은 정몽주 선생은 고려왕조는 물론이거니와 조선왕조 전반(全般)에 걸
쳐 ‘충절의 표상’이요, ‘동방 성리학의 조종(祖宗)’으로 추종된 분입니다.
이분의 시조 〈단심가〉 역시 충절과 신의를 주제로 한 시가 중 동서고금의
절조(絶調)로 평가되는바, 6백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되는 고
시조의 전범(典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시조협회가 ‘포은시조문학상’
을 제정한 취지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본상의 비중을 감안하여 작품의 응
모 범위를 전국 단위로 확산시킨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올해는 많은 응모 작품 가운데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45편을 대상으
로, 김흥열 명예 이사장님과 박헌오 이사장님을 모시고 저와 함께 심사했
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시조의 세계화와 현대화를 추구하고 있는 한국시조
협회는 일찍이 ‘시조의 명칭과 형식 통일안’, 그리고 ‘시조헌장’에서 천명
한바 첫째, 3장 6구 12소절이라는 형식적 틀을 심사의 기본 원칙으로 삼았
습니다. 이는 시조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기 위한 필수 요인이기 때문입니
다. 둘째, 시조는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으로 엮은 절제와 완결의 미학입니
다. 우리는 지금 인간과 비인간인 로봇이 공존하는 인공지능(AI)시대에 살
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조의 ‘현대화’라는 시대정신을 염두에 두
지 않을 수 없습니다. 셋째, 시조는 고도의 전문성과 문학성을 갖춰야 할 독
특한 문학 장르인바, 시적 변용에 대한 작자의 역량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
습니다. 이는 시조의 수준과 품격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될 수 있기 때문
입니다. 응모 작품은 전체적으로 수준급의 훌륭한 작품이 많았지만, 깊은
고뇌와 숙고 끝에 포은시조문학상 대상은 유준호 시인님의 〈그랜드 캐니
언(Grand Canyon)〉을, 본상은 임병웅 시인님의 〈실타래〉를 선정하는데 심
사위원들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유준호 시인님의 작품 〈그랜드 캐니언〉은 세 수의 연시조로 구성된 기행
시조로서 수십억 년 지구의 연륜을 실감할 수 있는 그랜드 캐니언의 웅장
하면서도 환상적인 모양과 빛깔에 압도된 나머지, 자칫 서경적 묘사에 치
우치는 우를 범하지 않을까 염려했으나, 이는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첫째
수에서는 협곡의 기상천외한 모습과 상상적 고뇌, 둘째 수에서는 협곡의
역사와 완성되기까지의 상상적 고통, 셋째 수에서는 첫째 수와 둘째 수의
과정을 거쳐 창조된 그랜드캐니언의 역사적 가치와 의의를 형상화함으로
써 각 수가 완벽한 단수이면서도 이들 세 수의 시조가 ‘그랜드 캐니언’이라
는 제목과 밀착된 구조를 이루는, 연시조의 전범이라 할 수 있는 수작입니
다. 첫째 수의 ‘피눈물’이나 둘째 수의 ‘붉은 한숨’은 협곡의 빛깔을 비유한
메타포(metaphor)이며, 둘째 수에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시포스
(Sisypos, Siysiphos) 신화를 전고(典故)로 인용한 사례, 최대 폭 29Km, 길이
443Km나 되는 방대한 경관을 세 수의 연시조에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시인
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역사성, 시대성, 문학성을 골고루 갖췄기
에 독자로 하여금 시조의 신선미와 위력을 느낄 수 있는 절창임이 분명합
니다.


 임병웅 시인님의 〈실타래〉는 시인의 삶과 자세를 ‘실타래’라는 소재로
형상화한, 무게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 심사위원의 의견 일치를 보았습니
다. 이 시조에서 시사하고 있는바, 살다보면 예고 없이 찾아오는 복잡하고
도 많은 난제가 앞을 가로막을 때가 있습니다. 시인은 얽히고 설켜 헝클어
진 실타래를 한 올 한 올 차분하게 풀어 나아가는 지혜와 인내가 인생의 당
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해법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종장에서 시인은 놀랍
게도 이러한 해법을 찾는 과정에서 우주에 엄존하고 있는 순리를 발견하46
고, 자신은 우주 안에 보잘것없는 미미한 존재임을 깨닫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시인들이 갖추어야 할 첫째 덕목인 ‘겸손’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릅
니다. 시작에 임하는 시인의 겸손한 자세와 문학과 인생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이처럼 철학적이고 무게 있는 시조를 창조했다는 점은 당연한 귀결
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현대시조는 바로 이렇게 쓰는 거야’라고 전범을 보여주신 유준호 시인
님과 임병웅 시인님께 경의를 표하며, 앞으로 현대시조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선도자로서 한국시조협회의 시조 발전에 견인차의 구실을 담당
해 주시길 당부드리며, 영예로운 포은시조문학상을 받으시는 두 분께 축하
의 인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심사위원: 김흥열, 박헌오, 구충회(심사평)

 

 

<수상소감>

 

                                            제4회 포은시조문학상 대상 수상 유준호

 

 나이가 들어도 상(賞)을 받는다는 건 기쁜 일인가 봅니다. 기대하지도 않았
는데 뜻밖에도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전갈을 듣고 괜스레설렜습니다. 하지만
금방 가슴이 무거워지기도 하였습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이 시조문학 창작의 길에 들어선 지도 꽤 되었지만 늘 좋은

작품은 어떤 것인가를 가늠해보느라 반세기 세월만 그냥흘려보내고 있었습니다.

늘 써놓은 작품은 만족감이 들지 않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별로

특출하지도 빼어나지도 않는 제 작품에 고려 말 지절(志節)의 충신(忠臣)이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님의 뜻을 기리는 포은시조문학상 대상을 안겨

주시니 얼떨떨하기만 합니다.

 다 저녁 때 황홀한 저녁놀을 만난 것 같은 감회에 젖습니다. 이 노을빛이 사라

지지 않도록 보다 분발하여 좋은 작품을 쓰는 길목에 들어서라고 채찍질해 주시

는 것이라 여겨 앞으로 쉼 없이 마음과 정신을 갈고닦아 신선하고 알찬 작품을

쓰는 데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나보다 몇 배나 훌륭한 작품들이 즐비(櫛比)할 텐데 내 작품에 후한 눈길을
주시어 상을 주신 심사위원분들의 깊은 뜻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며 무한한 감
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협회 운영에 심혈을 쏟으시는 박헌오 이사장님께도 고
마운 말씀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수상자 프로필 / 시조시인 유준호

 

아호 청사(靑沙), 시조문학 3회 천료(1971).
한국시조문학작가협회 부회장, 가람문학회장,
대전시조시인협회회장 역임.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겸
대전지부장, 한밭시조문학상, 한국시조작가협회장상,
대전광역시문화상(문학), 세계문학상 대상, 대전펜문학상,
한국시조협회문학상,
시집: 산중신곡, 가슴 속에 키운 장미, 바람과 그리움과
사랑, 꽃의 숨소리, 그리움 너울진 산천, 바람 한 필, 사월 꽃나무들 등
평설집: 운율의 미학을 찾아. 수필집: 설화를 품은 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