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모재(景慕齋)에서
海月 채현병
두 눈을 꼭 감아도 누리꾼 다 보이며
한 말씀 안하셔도 그리움 다 압니다
돌마저 내치신대도 그 높은 뜻 잊을까
(2008.12.7)
경모재 : 경기도 광주시 실촌읍 삼합리
음촌공을 모신 재실
음촌공(陰村公) 김약시(金若時)
광산김씨. 신라왕자 김흥광의 19세손
부친 김정(金鼎;光城君)과 모친 연안이씨(李昉의 딸) 사이에 충숙왕 복위 4년에
태어남. 여흥왕 9년 대과급제후 여러 관직을 거쳐 진현관직제학에 이름.
임신변역(壬申變易)으로 부인과 걸어서 경기도 광주(廣州) 금광리(金光里) 산곡
간(山谷間)에 내려가 긴나무를 가로지른 허술한 초막을 짓고 은둔함. 마을 사람
들이 여러 말을 물어도 못들은척 대답하지 않고, 술과 음식을 대접해도 받지 않
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으므로 公이 살던 동네를 부전어동(不傳語洞)이라 함.
신조(新朝)에서 그를 찾아 원래의 관직을 주었으나 병을 핑게로 나아가지 않으
시고, 성명방(誠明坊)의 집 한채를 내주었으나 살지 않음.
公은 집안의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종묘사직의 망함을 직접 보고도 죽지 못하고
조상의 무덤 근처에 와 머무르니, 내가 죽거든 여기에 평장으로 장사지내고 비석
도 세우지 말고 다만, 둥근 돌 2개를 좌우에 두어 망국의 천부(賤浮)라고 표하라'
이르시고, 신조 15년에 72세로 돌아가심. 후에 公의 10,11대 후손들이 의논하여
묘표로 둥근 비석에 도암(陶菴)이 지어 칭송한 글 "한 줄기 붉은 마음은 족히 쇠
와 돌을 뚫고서 하늘과 땅을 통하게 한다"을 새겨 충절을 표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