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의 강좌 (2)/한국고대신화 찾아가기

한국고대신화를 찾아서 (7) / 2019 국회 헌정지 4월호 게재

채현병 2019. 4. 6. 22:04

             한국고대신화를 찾아서 (7)
                   - 홍수 신화 -
                                                                                                                                    蔡 賢 秉
                                                                                                                        시조시인, 서예가
                                                                                                           (사)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인류가 농경을 시작한 기원전 2,000년경에 지구 곳곳에서 엄청난 양의 비가 내렸으며, 그로 인해 인간은 홍수의 무서움을 경험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홍수신화는 단순히 인간의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인류가 직접 경험한 사실에 바탕을 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각각의 민족은 선조들이 당했던 대홍수의 전설 위에 자신들의 상상을 보태어 서로 조금씩 다른 홍수신화를 만들어 왔다고 추정된다.


  세계의 홍수신화는 일련의 공통된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들이 타락하여 죄악을 저지르게 되자 신이 노하여 큰 비를 내리고, 이로 인하여 대홍수가 일어나 온 세상이 물에 잠기게 되어 모든 인간이 죽게 되었는데, 이 때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들에 의해 인류가 다시 번성하게 되었다는 골격을 갖추고 있다. 이런 대홍수 이야기는 ‘노아의 홍수’를 비롯하여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도 널리 퍼져 있었으며 수메르 시대의 기록에도, 이집트 신화에도, 중국의 신화에도 등장한다.

  그러나 한국형 홍수신화는 신의(神意)에 의해 징벌을 내리고 구원해 주는 서구의 홍수담(洪水談)과는 달리, 자연과 인간의 대결 및 대화와 조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나라에 전해 내려오는 홍수신화는 함흥지방의 <홍수 남매혼>, 부산지방의 <나무도령과 홍수>, 중국 조선족의 <천지를 기운 돌바늘> 등이 있다.
  이 중 ‘홍수 남매혼’은 성윤리(근친상간)와 종족보존본능 간의 갈등을 하늘의 뜻으로 풀어나가고, ‘나무도령과 홍수’에서는 선(善)한 사람은 하늘이 돕는다는 인과응보 사상으로 풀어나가며, ‘천지를 기운 돌바늘’에선 여와씨의 증손녀에 의해 인위적인 방법으로 풀어나간다.
  
  1. 홍수 남매혼(男妹婚)
                                                                           *1923년 8월, 함흥부 하속리 김호영 씨 구연담 채록


  옛날, 아주 오랜 옛날에 이 세상에는 큰물이 져서 세계는 모두 바다로 화(化)하고 생존한 자가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 때에 어떤 남매가 겨우 살아나 백두산 같이 높은 산의 상상봉에 표착하였다.
  물이 다 걷힌 뒤에 남매는 세상에 나와 보았으나 인적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었다. 만일 그대로 있다가는 사람의 씨가 끊어질 수밖에 없었으나 그렇다고 형매(兄妹) 간에 결혼할 수도 없었다.


  얼마 동안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못해, 남매가 각각 마주 서 있는 두 산봉우리 위로 올라가서 계집아이는 맷돌의 암망을 굴려 내리고, 사나이는 맷돌의 수망을 굴려 내렸다. 그리고 그들은 각각 하느님께 기도를 하였다.
  각기 다른 산봉우리에서 굴러 내려간 암망과 수망은 이상하게도 산골 밑에서 마치 사람이 일부러 포개 놓은 것 같이 서로 만나 합해졌다. 이를 본 형매는 여기서 하느님의 의사를 짐작하고 서로 결혼하기로 결심하였다.


  이 남매의 결혼으로 인하여 사람의 씨는 계속 번성하게 되었다. 지금 많은 인류의 선조는 실로 그 옛날의 두 남매라고 한다.
 

  2. 나무도령과 홍수
                                                                                     *1923년 9월, 부산진 김승태 씨 구연담 채록


  옛날 어떤 곳에 한 그루의 교목(橋木)이 있었다. 그 그늘에는 천상의 선녀 한 사람이 항상 내려와 있었다. 선녀는 목신(木神)의 정기를 느끼고 잉태하여 한 미남자를 출산하였다. 그 아이가 7,8세가 되었을 때 선녀는 천상으로 돌아가 버렸고, 갑자기 큰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연일연월(連日連月)의 큰비는 결국 이 세계를 바다로 변하게 하였다.


  그리고 크나큰 그 교목도 강풍으로 인하여 넘어지게 되었다. 넘어지면서 교목은 나무도령을 향하여
  “어서 내 등에 타거라.”
하였다. 나무도령은 그 나무를 타고 정처 없이 물결을 따라 표류하게 되었다. 어디로 얼마를 갔는지 수식경(數食頃) 후에 뒤에서
  “살려 주오!”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다보니 그것은 홍수에 떠내려 오는 무수한 개미들이었다. 나무도령은 그 불쌍한 모양을 보고 아버지인 고목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고목은 구해주라고 대답하였다.
  “이 나무에 올라타라.”
는 말과 함께 무수한 개미떼는 고목의 가지며 잎에 올라붙었다. 또 얼마를 가노라니까 역시 전과 같이 처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일군(一群)의 모기들이 살려 달라고 부르짖는 소리였다. 나무도령은 다시 고목에게 물었다. 고목은 떠내려가면서 살려 주라고 대답하였다. 모기떼는 고목의 나뭇잎 사이에 붙어살게 되었다.
  개미떼와 모기떼를 싣고 방향 없이 가는 고목을 향하여 또 처절하고 슬프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나무도령과 동년배로 돼 보이는 남자아이였다. 곤충들을 살려 준 나무도령이 이 사람을 구해주고자 했음은 물론이었다. 그러나 고목은 나무도령의 요구를 거절하여
  “그것은 구하지 말라.”
고 하였다 그 아이는 다시
  “사람 살려 주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나무도령의 두 번째 요구도 고목은 듣지 않았다. 그리고 급류를 따라 아래로 떠내려가기만 했다. 세 번째로 아이의 살려 달라는 소리가 들렸을 때 나무도령은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버지인 고목에게 애원하여 겨우 그 아이를 고목의 배 위로 구해 주었다. 그 때 고목은 나무도령을 향하여
  “네가 그렇게까지 말을 하니 할 수는 없다마는 다음에 반드시 후회할 날이 있으리라.”
고 하였다.


  고목은 마침내 어떤 조그마한 섬에 표착하게 되었다. 그 섬이란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였다. 대홍수로 인하여 평지는 물론 세상의 산이란 산도 모두 수중에 잠기게 되었고, 오직 그 최고봉만이 겨우 머리를 내밀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두 아이는 그 섬에 내리게 되었다. 개미떼와 모기떼는 나무도령에게 백배치사하면서 각각 저 갈 곳으로 가 버렸다.


  두 아이는 그 섬 중에서 단 하나 있는 단칸의 초가집을 발견하였다. 주위는 어두웠으나 초가집의 조그마한 등불을 쫓아 그 집에 이르렀다. 그 집에는 한 사람의 노파와 두 처녀가 있었다. 두 처녀는 또한 두 아이와 동년배의 소녀였다. 한 처녀는 노파의 친딸이었으며, 다른 처녀는 그 집의 수양딸이었다.


  비가 그치고 홍수가 물러갔으므로 산 아래에 내려와 보았으나 세상에는 사람의 흔적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인류가 홍수로 인하여 전멸된 까닭이었다. 두 아이는 노파의 집에서 노역하게 되었다.
  어느덧 두 쌍의 소년 소녀는 성년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노파는 두 쌍의 부부를 만들어 세상의 인종을 이어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친딸을 어느 청년과 맺어주어야 하는지가 어려운 문제였다. 청년들도 서로 수양딸을 취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하루는 나무도령이 없는 틈을 타서 구조된 청년은 노파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무도령은 세상에 없는 재주를 가졌습니다. 한 섬의 좁쌀을 사장(砂場)에 흘려 놓고서도 불과 수식경에 그 한 섬의 좁쌀을 모래 한 알 섞지 않고 도로 원래의 섬에 주어 넣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재주는 좀처럼 친한 사람이 아니면 보이지 아니합니다.”
  노파는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그 재주를 시험하고자 나무도령에게 청했다. 그러나 나무도령은 생각해 보지도 못한 일이므로 그런 재주는 가지지 못했다고 거절했다. 그러자 노파는 다른 청년의 말을 믿고 있었으므로 나무도령이 자신을 멸시하기 때문이라고 크게 화를 냈다. 그래서 만일 그것을 시험하지 않으면 딸을 주지 않겠다고 하였다. 나무도령은 할 수 없이 한 섬의 좁쌀을 사장(砂場)에 쏟아 놓고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 때 난데없이 한 마리의 개미가 와서 나무도령의 발뒤축을 깨물었다. 그리고 돌아다보는 나무도령을 향하여 무슨 일로 근심을 하느냐고 물었다. 나무도령에게 그 이유를 듣고 난 개미는
  “그까짓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우리들을 살려주신 은혜를 이제야 갚게 되었습니다.”
하면서 어디로 급하게 가더니 조금 있다가 수많은 개미떼를 거느리고 와서 개미마다 하나씩 좁쌀을 입에 물고 와서 원래의 섬에 넣었다. 순식간에 좁쌀은 원래의 한 섬이 되었으며 거기에는 모래 한 알이라도 섞였을 리 없었다. 개미들은 다시 인사를 하고 저희 갈 곳으로 가고난 후, 나무도령은 좁쌀알을 지키고 있었다.


  이윽고 저녁때가 되자 노파는 딸과 다른 청년을 데리고 사장에 나타났다. 두 사람은 감탄하였으나 한 사람의 청년이 얼굴색이 변한 것은 물론이다. 노파는 나무도령에게 친딸을 주려고 했으나 다른 청년이 그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으므로 노파는 한 가지 꾀를 내어 어떤 어두운 밤에 두 청년을 밖으로 내보내고, 두 처녀를 동서(東西) 두 방에 각각 넣어 두었다. 그리고는 두 청년에게 서로 들어가고 싶은 방에 들어가서 복지복(福之福)대로 배필을 취하라고 했다.


  두 청년은 서로 어느 방에 들어갈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는 마침 여름이었다. 한 떼의 모기가 나무도령의 귀 옆으로 지나가면서
  “나무도령 동쪽 방으로 앵당당글.”
했다. 그리하여 나무도령은 동쪽 방으로 가서 노파의 친딸을 얻게 되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모두 이 두 쌍 부부의 자손이라고 한다.


  3. 천지(天池)를 기운 돌바늘
                                                                                  *1979년 2월, 안도현 영경 박삼룡 씨 구술 채록

 

  먼 옛날 옛적, 어느 한 해에 백두산에 비가 석 달 열흘이나 내렸다. 산골짜기마다에 산홍수가 터졌다. 산홍수는 검은 용처럼 꿈틀거리면서 푸른 숲을 냉큼냉큼 삼켰다. 엎친 데 덮치기로 백두산 천지의 물도 벌창하였다. 하늘을 메우며 그냥 쏟아지는 폭우는 홍수를 거느리고 사람과 짐승들을 삼켜서 고기밥으로 만들었다. 살기 좋던 백두산 천리수림(千里樹林)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다가 되었다. 어디를 가나 물 천지여서 사람의 그림자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아주 높은 산마루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산꼭대기에선 어머니와 유복자가 살고 있었다. 앞을 보아도 뒤를 보아도 온통 물 천지라 식량이 떨어져가도 쌀 한 톨 얻어올 곳이라곤 없었다.

 

  어머니는 아들을 하루라도 더 살리기 위하여 멀건 죽을 쑤어서는 아들만 먹이고 자기는 먹는 둥 마는 둥 하였다. 어머니는 생각다 못하여 옛날에 하늘을 기웠다는 여와씨에게 빌고 빌었다.  "하늘을 기워 인간의 운명을 구해주신 거룩한 여와씨여! 지금 천지물이 벌창하여 백두산일대의 인종이 멸종되고 있사옵니다. 천만다행으로 우리 모자만 남았으나 살아갈 길이 없사옵니다. 나 같은 것이 죽는 것은 한이 없사오나 귀한 유복자가 죽을 것을 생각하니 죽은들 어찌 눈을 감으오리까? 전지전능한 여와씨여! 백두산에 남아있는 이 유일한 유복자를 가긍히 여기시고 구하여 주신다면 구천에 가서라도 그 은혜를 꼭 갚겠사옵니다."


  그 후 며칠이 지나지 않아 어머니마저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이 소식은 마침내 구중천(九重天)에 계시는 여와씨에게 전해졌다. 여와씨는 일가식솔(一家食率)들을 모아놓고 한탄하였다.  "지금 백두산에 홍수가 터져서 짐승들은 물론 사람들까지 몰살되었다 한다. 한 산마루에 철부지 유복자만이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참혹한 일이 생긴 줄 어찌하여 인제야 알았던고!"  여와씨가 한참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한 어린 소녀가 앞으로 나서며 말하였다.  "할머니, 염려하지 마옵소서. 이 소녀가 한번 다녀오겠나이다."   여와씨가 눈물을 씻고 보니 귀여운 증손녀였다.
  “할머니께선 지상에 계실 때 하늘도 기우셔서 인간세상의 재앙을 물리쳤사온데 이 손녀가 백두산의 홍수쯤이야 다스리지 못하겠나이까?"


  여와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당장 떠나라고 분부하였다.  증손녀는 곧 백두산으로 내려왔다. 천지가 사면팔방으로 넘쳐 망망한 바다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먼저 유복자를 구하러 갔다. 팔다리가 마른나무처럼 앙상해진 유복자는 숨이 거의 지고 있었다.   증손녀는 궁궐에서 가져온 감로수를 유복자의 입에다 떨구었다. 유복자는 천천히 눈을 떴다. 증손녀는 또 죽는 사람을 구하는 약병을 유복자에게 주었다. 굶주림에 지칠 대로 지친 유복자는 병 속의 약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그는 인자 정신을 차렸다.   증손녀가 두 손을 맞비비니 입쌀이 주르르 떨어졌고 두 손등을 맞비비니 기장쌀이 주르르 떨어졌다. 먹을 것을 장만해놓은 증손녀는 백두산의 바위돌을 쑥 뽑아내어 3일 동안 밤낮으로 갈고 갈아서 바늘을 만들었다. 그는 산더미 같은 바위돌을 날라다가 바느질로 한데 기워 물이 넘쳐나는 곳을 한 곳 한 곳 막아놓고 한 곬으로만 물이 빠져나갈 수 있게 하였다. 그러자 백두산의 홍수는 점차 가라앉기 시작하였다. 


  그때 여와씨의 증손녀가 기워놓은 바위돌이 16개였는지 지금의 천지주변의 16기봉으로 되었다고 한다. 그때 틔워놓은 물길은 지금의 폭포가 되었다. 그가 쓰던 돌바늘이 폭포가 흘러나오는 어귀에 휘우듬하게 널려있는 바위무지라고 한다.  천지를 기워서 홍수를 제거한 여와씨의 증손녀는 구중천으로 돌아가서 희소식을 전하였다. 여와씨는 증손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칭찬해주고, 그를 인간으로 만들어 주며 ‘가서 유복자를 잘 길러라. 그가 크거들랑 그와 배필을 맺고 백두산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거라’ 했다. 증손녀는 할머니 말씀을 한마디도 거역하지 않고 그대로 하겠노라고 하였다.  그 후 유복자는 씩씩한 젊은이로 자라나서 여와씨의 증손녀와 예를 올렸다. 그리하여 백두산 일대에는 또다시 그들의 후손들에 의해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한다.
                                                * 出典 : 심지열 박정혜. 「신화의 세계」. 성신여자대학교 출판부.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