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대신화를 찾아서 (9)
- 이승 신화 -
蔡 賢 秉
시조시인, 서예가
(사)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1.농경신의 사랑이야기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 것일까? 저승이든 이승이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은 비극적일수록 위대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사랑과 관련된 많은 신화는 우리에게 교훈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지만, 현대에 살아가는 우리들은 그 메시지에 상관없이 불같은 사랑에 뛰어들기도 한다. 어찌 보면 그것은 신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축복일 수도 있다. 이에 제주도 무가를 통해 전승된 세경본풀이 속 ‘농경신들의 사랑이야기’를 소개한다.
1.1. 상세경 문도령
“내 비록 세경신 중 맏이라 하나 힘도 재주도 내 아내 자청비에게 미치지 못하노라. 세상 사람들아, 농사일을 물으려거든 나에게 묻기보다 자청비에게 물어 보라.”
이렇게 말하는 문도령은 세경신 중 으뜸인 상세경이다. 세경신은 농사를 주관하는 신으로서, 사람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주고 온갖 씨앗을 마련해주는 일을 하는데, 상세경∙중세경∙하세경이 있다. 이들은 한 날, 한 시에 똑같은 사주를 가지고 태어났다.
하늘나라 칠성신 중 하나인 문곡성의 외아들로 태어난 문도령은, 일찍이 지상의 거무선생에게 글을 배우러 지상으로 내려왔다가 오로대감의 외동딸 자청비를 만나 함께 공부하러 갔다. 하지만 문도령은 함께 글공부하는 자청비가 여자인 줄 모르다가 나중에 자청비 자신이 여자라고 밝히고 나서야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는 그간에 자신의 가슴속에 쌓인 애틋한 정이 자청비에 대한 사랑임을 깨닫고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먼저 하늘나라로 올라간 문도령은 소식을 끊고 자청비의 애를 태우다가. 나중에는 자청비를 찾아와서도 반겨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며 돌아가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자청비와 문도령의 사랑투정은 아닐까?
문도령을 어찌 보면 고지식하고 속 좁은 샌님 같이 보이지만, 속내는 심지가 굳고 의리도 깊은 편이다. 문도령은 부모가 정해 준 혼처를 끝내 마다하고 자청비와 결혼을 한다.
1.2. 중세경 자청비
“무릇 농사라는 것은 욕심으로 지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고,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주는 마음으로 농사를 지어라. 그러면 자갈밭에 맨손으로 지은 농사도 마소로 바리바리 실어 낼 만큼 풍년이 들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중세경 자청비는 하는 일로 보면 상세경 문도령보다 큰 신이다. 온 세상에 씨앗을 퍼뜨리고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며, 사람들의 마음씨를 보아 풍년이 들거나 흉년이 들게 하는 신력(神力)을 보여준다.
자청비는 여자로 태어났지만 늠름하고 씩씩하게 자라나 어떤 불행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어떤 어려움에도 물러서지 않고 이를 극복해 나갔다. 처음 문도령을 만났을 때도, 글동무가 되어 함께 공부할 때도, 문도령에게 마음을 전달할 때도, 문곡성에 올라가 시험을 볼 때에도 주저함이 없이 망설이지 않고 이를 잘 풀어 나갔다. 이 모두가 문도령을 향한 깊은 사랑 때문이었으리라.
문도령에 대한 사랑의 힘은 마침내 자청비를 신의 세계로 이끌었다. 문곡성에 서역 백귀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남편 대신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말을 몰아 전쟁터에 나가 대승을 거둔다. 이로 말미암아 세경신이 된 자청비는 인간으로써 신의 반열에 올랐다.
자청비가 세경신이 되어 지상으로 내려올 때, 옥황상제에게 부탁하여 갖가지 씨앗을 얻어 인간세상에 퍼뜨렸다. 그 덕분에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며 살게 되었다.
1.3. 하세경 정수남
“마소는 제 몸을 부려 농사를 도우니 신성한 짐승이다. 닭과 돼지 또한 알과 고기로써 사람의 배를 불리지 않느냐? 집짐승을 함부로 다루지 말고 한 식구처럼 소중히 여길지어다.”
정수남은 농사를 주관하는 세 신 중에 막내뻘인 하세경이다. 주로 목축에 관한 일을 맡아 보았다. 집에서 기르는 짐승이 병에 걸리거나 잘 자라지 않으면 하세경에게 빌어야 한다.
정수남은 오로대감의 머슴 정수덕의 아들로 태어났다. 오로대감이 동개남상주절 신령님께 아기를 점지해달라고 빌면서 시주를 약속해놓고서 지키지 않는 바람에, 신령님이 화가 나서 대감댁에 태어날 아들을 머슴에게 줘 버림으로써 아들딸이 뒤바뀌었다. 그리하여 정수남은 오로대감의 딸 자청비와 똑같은 사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
자신이 남의 집 종으로 태어나 죽도록 일만해야 하는 것에 몹시 불만이었던 정수남은 일은 안하고 맨 날 양지쪽에 누워서 낮잠만 잤다. 그런 가운데 자청비에 대한 연모의 정이 싹트고, 그것이 짝사랑으로 변해 엉뚱한 일을 벌이게 된다. 끝내는 정수남이 자청비를 강제로 취하려 하였으나 이로 인해 목숨마저 잃는다.
그 뒤, 자청비가 구해온 환생꽃 덕분에 다시 살아난 정수남은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자청비와 문도령이 하늘나라에서 세경신이 되어 돌아올 때까지 의롭게 집을 지켜준 후, 세경신 중 막내인 하세경이 되었다.
2. 집지킴이신 이야기
“위대한 가정은 일 년 열두 달, 과년 열석 달이 지나가도 삼재팔난 수다액운을 천 리 밖에 소멸하고, 만사순통 대통운하여 맘먹었던 일일랑은 뜻과 같이 되게 점지하고, 성주님이 불안하면 지신님이 안존하고, 지신님이 불안하면 성주님이 안위 안정하시어 두 가왕(家王)이 합이 되고, 한 나무 끝이 늘 낙일낙일하여 칠비동산에 만만수 노적을 내리어 주소서.”
이는 가신(家神) 성주신과 터주신의 내력을 전하는 ‘성주풀이의 축원문’이다. 황우양씨 부부는 꽤나 위태로웠던 상황을 훌륭히 해결함으로서 가신의 권능을 얻어 신직(神職)을 수행해 왔다. 신성(神性)이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 속에 있는 것이다. 스스로 일어나 자신을 바꾸어 놓을 수 있어야 신성이다. 황우양씨 부부는 그 일을 참으로 능청스럽게 잘도 했다.
2.1. 성주신 황우양
“집 안에 내가 있으니 아무 걱정 하지 말라. 헐어진 집은 고쳐 짓고 무너진 집은 다시 지을 것이다. 연장을 마련하되 큰 도끼 작은 도끼, 큰 자귀 작은 자귀, 큰 톱 작은 톱, 큰 집게 작은 집게에 대패, 끌, 줄, 먹통, 물푸레나무로 만든 먹자를 대령하라.”
이는 집안 대들보에서 집을 지키는 성주신의 호령소리이다. 성주신은 본디 황우양이라 불리는 솜씨 좋은 목수였다.
아주 오랜 옛날에 하늘나라 옥황궁이 회오리바람에 무너지자, 황우양은 옥황상제의 명을 받고 하늘에 올라가 궁궐을 짓고 있었다. 이때 땅 세상에서는 소진들 건달 소진랑이 황우양이 없는 틈을 타서 재물을 다 빼앗고 그 부인까지 잡아갔다. 이 소식을 듣고 위기를 느낀 황우양은 삼 년 걸려 할 일을 석 달 만에 해치우고 땅으로 내려와 소진랑을 물리치고 재산과 아내를 되찾았다.
이 인연으로 황우양은 집을 지키는 성주신이 되고 부인은 집터를 지키는 지신이 되었으며, 다섯 아들들은 다섯 방향의 땅을 지키는 오토지신(五土地神)이 되고 다섯 딸들은 다섯 방향의 길흉을 점치는 오방부인이 되었다.
성주신은 대청마루 높은 곳이나 대들보에 성주단지로 모시는데, 집안에 나쁜 일이 생기거나 식구들이 화목하지 못하면 집을 나가기 때문에 옛날 사람들은 성주신 모시기를 조상 모시듯 하였다. 이리하여 명절이나 집안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성주상을 차려놓고 집안의 평안을 비는 풍습이 생겨났다고 한다.
2.2. 터주신 막막부인
“내 일찍이 개똥밭에 땅굴을 파고 구메밥을 먹고 지내면서, 누에 키워 명주실 뽑아 옷감 짜는 일을 밤낮으로 하였더니 한나절에 속명주 겉명주를 마흔 자씩 짜는 재주를 익혔도다. 이 재주로 집터를 지켜 줄 것이니, 식구마다 삼가면 저절로 복을 받으리라.”
이는 집터를 지켜주는 터주신 막막부인의 말씀이다. 터주신은 성주신 황우양의 부인이다. 천하궁 천사랑씨와 지하궁 지탈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황우양씨는 계룡산 작은 마을의 아름다운 처녀를 만나 황산뜰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다.
어느 날 남편 황우양씨가 옥황상제의 명을 받고 하늘로 올라간 뒤에, 소진랑의 집에 끌려간 막막부인은 스스로 개똥밭에 땅굴을 파고 들어가 구메밥을 먹으면서 길쌈하는 법을 익혔다. 워낙 심지가 곧고 슬기로워 어려움을 잘 헤쳐나간 덕분에 남편을 다시 만나 복을 누리다가 옥황상제의 명으로 지신(地神)이 되었다.
지신은 집터를 지키면서 집안을 일으키는 일을 맡아보는데, 집안에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땅을 기름지게 하여 농사가 잘되게 해 준다. 식구들이 매사에 조심하여 삼가 덕을 쌓으면 재물을 불러들여 집안을 융성하게 해 준다.
옛 사람들은 짚으로 만든 오쟁이에 베 석 자와 짚신 한 켤레를 넣은 다음 나뭇가지에 걸어두기도 하며, 앞마당에 구덩이를 파고 쌀을 백지나 베에 싸서 묻어놓고 새해가 되면 온 마을 사람들이 지신을 위로하려고 집집마다 들려 풍물을 치며 지신밟기를 한다.
2.3. 그 밖의 집지킴이신
우리가 사는 집안에는 성주신을 비롯하여 앞마당에는 터주신이, 큰방에는 삼신이, 부엌에는 조왕신이. 장독간에는 철융신이, 곳간에는 업왕신이, 대청마루에는 안당신이, 문간에는 문왕신이, 외양간에는 마부왕이, 뒷간에는 측신이 자리잡고 있다고 믿었다. 이 집지킴이신들은 집안을 지키며 복과 재물을 가져다주었지만, 만약 식구들이 그릇된 일을 하면 경계하는 뜻으로 화를 불러 오기도 하였다.
3. “한국고대신화를 찾아서“ 연재를 마치며
지난 해 9월호부터 이번 6월호까지 9회에 걸쳐 한국고대신화를 소개하였다. 그 내용은 ‘한국고대신화의 바탕’을 시작으로 하여 창세신화 4종류와 생명신화, 홍수신화, 저승신화, 이승신화 등이다.
이번에 소개해 올린 여러 신화 이외에도 아주 많은 양의 우리 신화가 존재한다. 예를 들면 이공본풀이, 삼공본풀이, 해와 달 오누이, 일식과 월식, 북두칠성, 삼태성 삼형제, 선문대 할망, 백두산 압록강 두만강의 탄생, 원천강 오늘이, 바리공주, 서천꽃밭과 한락궁이, 아기장수, 장자못, 천하장사 오뉘, 일곱 쌍둥이, 감은장 애기, 궁상이 아내 등등......
지구상에 한반도가 생성되어 약 30억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지형변화, 기후변화를 통해 무수한 생명체가 태어나서 자라나고 소멸되는 과정이 수없이 반복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끝없는 이야기가 쌓여졌다가 펼쳐지고, 또 쌓여졌다가 흩어지며, 또 새로 탄생했을 터이다.
또한 우리 한민족은 수십만 년에 걸쳐 이 땅에 정착하면서 눈앞에 펼쳐진 우주와 자연 속에서 무한한 상상력과 함께 경외심을 키워왔다. 빛과 어둠은 비∙바람∙구름을 대동했으며, 대자연은 지상의 수많은 동∙식물들을 끌어안아 그들에게 신성(神性)을 부여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신화는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로 무수히 쌓여져 갔다.
신화는 신성한 역사를 이야기 한다. 그것은 단순히 이야기되어지는 설화가 아니다. 신화는 원초의 시간, 태초의 신화적 시대에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어떤 사건이 어떻게 존재하기 시작했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신화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왜 필요할까? 그것은 신화가 갖는 원형적 보편성의 원리 때문일 것이다. 인류가 가진 신화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르지만 그 심층에 들어가 보면 보편적이고 영원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신화는 해당 문화권에 따른 개별적 상징도 함께 가진다. 민족단위로 전승되는 신화는 그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기억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의 신화를 우리 민족이 경험했던 문화사적 변화로 수용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끝으로, ‘한국고대신화를 찾아서’를 마치며 그 소감을 묻는다면 한마디로 ‘나는 행복하다’라고 말하고 싶다. 지난 10개월 동안 많은 독자들께 우리들만이 갖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나름대로 열심히 이만큼 길게 전개해 드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귀중한 “헌정지” 지면을 할애해 주신 편집실 여러분께 깊이깊이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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